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39화 (39/288)

악마의 성검(12)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찰박.

루시아의 부츠가 피웅덩이를 밟았다.

“그 병신 같은 악마새끼가, 너를 놓칠 만큼이나 충분히 무능했다는 게.”

스르릉.

그녀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새하얀 검신이 별빛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으, 으으······.”

민머리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뒤로 기었다. 루시아는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그를 천천히 따라갔다.

찰박. 찰박.

민머리가 기어가며 질질 끌린 흔적이 남은 땅.

피 묻은 루시아의 부츠가 그 위에 붉은 자취를 남긴다.

그건 마치 죽을 때가 다 되어 도망가는 죄인과, 그걸 잡으러 가는 사신의 발자국 같았다.

“그 덕분에 적어도 지켜주지는 못했을지언정······.”

사아아아―

검신이 새하얀 빛으로 덮인다.

검 위에 유형의 기운으로 일렁이는 신성력은, 마치 타오르는 하얀 불꽃처럼 보였다.

몸을 부르르 떨며 바지를 노랗게 적시는 민머리 앞.

루시아는 검을 두 손으로 잡고, 그 끝이 땅을 향하게 거꾸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사형선고와 같은 마지막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존경하던 동료의 핏값 정도는, 직접 받아낼 수 있게 됐으니까.”

푸욱.

검끝이 민머리의 발등을 꿰뚫는다.

순간 하얀 불꽃이 화륵 타오르며, 발과 발목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 아아아아악!”

민머리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불꽃은 멈추지 않았다.

종아리와 허벅지를 타고 올라가, 골반과 허리를 천천히 집어삼킨다. 반대쪽 다리는 이미 새하얀 화염에 뒤덮인 채였다.

“아아아아악! 끄아아아!”

댈런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이를 지켜봤다.

낼름거리며 희생자의 피부를 집어삼키는 하얀 불꽃. 진짜 불과는 다르게 탄 냄새가 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저 불꽃은 신성력으로 빚어진 바.

피부를 삼키면 근육을.

근육을 먹어치우고선 뼈를.

그렇게 다른 모든 것은 태워 없애면서도, 희생자의 신경만큼은 마지막까지 재생시켜 끝없는 고통을 주는 특수한 불꽃이었으니까.

‘단마(斷魔)의 백염.’

그 잔혹함 때문에, 성기사단 내에서도 거의 금기시되는 비의.

극히 일부의 선택된 성기사들만이 전수받을 수 있으며, 그마저도 사특한 악마의 추종자를 심문할 때나 간혹 사용되는 기술이었다.

“끄아악! 흐아아악!”

다리가 다 타서 뼈가 검게 녹아간다. 백색 불꽃은 복부와 가슴, 그리고 팔까지 옮겨붙었다.

피부와 근육이 녹아내리다 한 줌 재가 되어 흩날리는 모습은, 공터에 펼쳐진 피와 내장의 향연과는 다른 의미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루시아는 그 모든 광경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묵묵히 지켜봤다.

“흐억! 커어어―”

이내 폐와 기도에 불이 옮겨붙었다.

눈코입에서 검은 재와 흰 불꽃이 날름거리며 새어나왔다.

안과 밖에서 동시에 희생자를 태우는 불길.

안팎을 가리지 않는 그 끔찍한 고통에, 허리 아래가 전소된 민머리는 검게 타버린 상반신만을 휘적여댄다.

그 온몸으로 지르는 소리 없는 비명은.

꾸드드―퍽!

결국 열기를 견디지 못한 심장이 퍽 하고 터지고서야, 끝을 맺었다.

“······.”

화르륵. 화륵.

남은 머리뼈와 그 안의 뇌수까지 남김없이 훑고 사라지는 백색의 화염.

민머리가 이 자리에 존재했다는 증거는 멀쩡하게 남은 그의 옷가지와 무기, 그리고 용병패뿐이었다.

스윽.

댈런은 옷가지 사이에서 은패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루시아를 바라봤다.

루시아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빛의 검을 든 채, 길게 풀어헤친 금발을 축 떨구고 있었다.

“······.”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몸.

갑옷 위로 어두운 로브를 뒤집어쓴 그녀는, 금발과 푸른 눈을 제외하면 밤의 어둠과 거의 완전히 일치된 듯했다.

댈런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가만히 은패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가 말했다.

“후회하시오?”

“아니요.”

성기사는 즉답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적어도···적어도 복수에 대해서만큼은.”

그녀의 얼굴은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하얗게 질린 얼굴. 꽉 깨문 입술에서는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나온다.

죄책감과 혼란이 짙게 녹아나는 표정 앞에서, 댈런은 무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인간은 후회의 동물이라지.”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럼 자책하오?”

대답은 없었다.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수염이 조금 까끌하게 자라있었다. 그는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후회하고 자책하는 과거가 있다는 건, 그 과거가 지금의 나를 빚어내는 데 일조했다는 이야기요. 바꿔 말하면, 그때 이렇게 했으면 뭔가 달라졌을까? 하는 의문은 아무 의미 없는 망상에 불과하다는 거지.”

상상도 못 한 큰 힘을 얻고 나자 문득문득 떠올랐다.

남부럽지 않은 번듯한 회사를 다니면서도, 집에서는 무기력한 게임 폐인처럼 지내던 과거의 자신이.

과거에는 엄두도 못 냈을 업적들을 이뤄가며 자문하기도 했다.

과연 예전의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여전히 무능한 게임 폐인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의미 없는 질문이었지.’

과거의 선택을 꺼내어 곱씹는 건, 이미 그 시절을 밟고 지나왔기에 가능한 일.

지구에서의 삼십사 년.

그리고 대륙에서의 이 년.

지금의 댈런이라는 사람은, 그 세월을 벽돌처럼 차례로 쌓아올린 끝에 만들어진 존재였다.

반성과 후회는 다르다.

개선과 자책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댈런이 내린 결론은, 전자는 취하되 후자는 그저 흘려보내는 것.

애당초 그 시절의 게임 폐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계를 멸망에서 구해가는 지금의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 자체도 불가능했을 테니까.

“후회하는 시절의 내가 있기에, 지금의 더 나은 내가 있는 거요. 지금의 내가 후회된다면, 미래의 나는 지금보다 더 나아져 있겠지.”

툭툭.

크고 두툼한 손이 루시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그 손길에 악문 이에서 힘이 풀어지고, 푸른 눈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루시아는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문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댈런.”

그 한 마디가 벅찬지 잠시 숨을 몰아쉰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쉬며 말을 이었다.

“···바렛의 명예를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지킨 게 아니오.”

루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의뢰를 내건 것도 당신이고, 끝까지 동료의 충성심을 피력한 것도 당신이지. 난 지나가다 의뢰를 받게 된 용병에 불과하오.”

그리고 충분한 대가를 받아낼 거니, 부채감 따위는 필요 없소. 댈런은 미소지으며 덧붙였다.

“좋습니다. 예상보다 더 잘해주셨으니, 여기서 나가면 의뢰비를 재협상해보도록 하죠.”

“돈 많이 주는 의뢰주는 언제나 환영이지.”

댈런이 소리내어 웃었다. 루시아의 입꼬리도 살짝 올라갔다.

슬픈 미소. 그러나 더이상 복잡해 보이지 않는 웃음이었다.

다시 한 번 천천히 심호흡을 한 그녀가 말했다.

“바로 출발하시죠. 밤이 깊었지만, 이대로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알겠소.”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야영지로 걸음을 옮겼다.

댈런은 잠시 생각하다가, 품속에서 은색 용병패를 꺼내들었다.

검은 재를 툭툭 털어내니 이번에도 이름이 보였다.

‘스킨헤드.’

민머리. 용병으로서 사용하는 이명일 테다.

피식 웃은 댈런은 은패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까마귀 둥지에 의뢰할 게 생겼군.’

본명은 알 수 없었지만, 이명만으로도 그간의 행적 정도를 추적하는 건 어렵지 않다.

놈의 증언에 따르면, 성기사의 등을 찌른 탐험가는 한 명이 아니었다.

복수를 하게 된다면,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때때로 그런 냉혹한 태도도 필요했다.

아직 어린 수습기사가 거기까지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터.

그렇다면 이름을 찾아주는 수고 정도는, 충분히 대신해줄 의향이 있었다.

은패에 새겨진 이름을 몇 번 중얼거리며 머릿속에 새긴 댈런은, 루시아의 뒤를 따라 공터를 벗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향기로운 피냄새를 맡은 놀들이 공터로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

그날 이후 일행은 속도를 높였다.

다만 경로는 이전과 조금 달라졌다.

이전까지 최대한 빠르고 안전한 길을 골라서 다녔다면, 탐험가들과의 전투 이후 댈런은 보다 험난하고 위험한 곳들을 거쳤다.

‘죽은 민머리 탐험가의 말이 맞다면, 생각보다 악마가 큰 부상을 입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악마는 교활한 족속이다.

아마도 놈은 탐험가들의 눈에 번들거리는 탐욕을 미리 읽어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 큰 부상이 아니었음에도 마치 곧 죽을 것처럼 연기를 해서, 탐험가들이 성기사를 배반하도록 유도한 것이겠지.

놈의 입장에서도 정면승부는 버거웠을 테니, 나름대로 머리를 썼을 터였다.

‘그리고 악마가 부상을 완전히 회복했다면, 이쪽도 좀 더 준비를 해야겠지.’

준비라고 해서 거창할 건 없었다.

경로를 크게 비틀지 않는 선 안에서, 얻어낼 수 있는 최대한을 얻어내는 게 골자였으니까.

첫째 날, 댈런과 루시아는 커다란 늪지에 발을 들였다.

그날 밤 댈런은 야생 프로그맨 부족 하나를 쓸어버리고, 놈들의 둥지 한가운데에 있는 시체를 회수했다.

[마궁사를 꿈꾸던 활잡이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마력 +1]

둘째 날, 안개 낀 구릉지를 넘어가던 두 사람은 버려진 오두막을 발견해 하루를 묵었다.

루시아가 잠든 사이, 댈런은 오두막 안방의 마룻바닥을 뜯어내고 내려갔다.

오두막의 지하에는 숨겨진 마약 재배지가 있었다.

주인이 모종의 사고를 당했는지, 오랜 기간 방치되어 잡초로 뒤덮인 재배지.

그곳에는 오랜 기간 미궁이 마력에 변질되어, 반쯤 영약이나 다름없게 된 약초가 하나 있었다.

‘체력을 1 올려주는 대신, 지능을 1 낮춰버리지.’

과연 먹자마자 머리가 깨질 듯 두통이 몰려왔다.

실시간으로 지능이 떨어지는 느낌은 상상 이상으로 불쾌한 감각이었다.

“우욱···시발.”

다행히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두통은 싹 가셔서, 다음날 일정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셋째 날, 일행은 탐험가들 사이에서 ‘귀신의 숲’이라 불리는 곳을 통과했다.

나무들이 소리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길을 잃게 만들거나 막다른 절벽으로 여행자를 내모는 음침한 숲.

우지직―쿵!

댈런은 가로막는 나무들을 죄다 꺾어넘기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나무 몇 그루 움직이는 것 가지고 혼란을 빚기에, 그의 감각 수치는 지나칠 정도로 예민했다.

[길을 잃은 길잡이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감각 +1]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길을 잃고 굶어죽었던 시체를 회수하며, 댈런은 어렴풋이 짐작하던 현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작은 영역을 이룬 뒤부터, 시체 회수로 얻어내는 보상이 확실히 줄어들었군.’

투사의 시체에서 분쇄검을 얻어낸 걸로 볼 때, 모든 보상이 줄어든 건 아니었다.

다만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흔히들 망한 캐릭터라 부르는 시체들의 보상은 능력치 하나가 끝이었다.

더이상 허접한 시체로는 예전처럼 스탯과 스킬을 한가득 받아갈 수 없다는 뜻.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앞으로의 중장기적인 전략을 조금 수정할 필요는 있었다.

‘다수의 시체를 찾아다니기보단, 더 강력했던 캐릭터의 시체 위주로 찾아다녀야겠군.’

그렇게 넷째 날이 되었다.

예상보다 먼 거리를 돌아간 강행군이었음에도, 루시아는 힘든 티 하나 내지 않고 잘 따라왔다.

그 결과, 넷째 날 해가 저물어갈 무렵.

댈런과 루시아는 악마가 숨어있다는 동굴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여기가···맞는 것 같군요.”

루시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말했다. 댈런도 그 옆에서 가만히 턱을 긁적였다.

“악마가 숨어있는 곳이니 평범한 모습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건 예상 밖입니다.”

“그러게 말이오.”

댈런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악마의 거처가 된 동굴 입구.

그 앞에는 백여 구에 달하는 탐험가들의 시체가, 보란 듯이 무더기로 쌓여 전시되어 있었으니까.

시체의 무더기는 갈기갈기 찢기고 조각이 난 채, 어두운 사기를 잔뜩 풍기고 있었다.

동굴 앞을 가로막은 모양새가, 마치 이 안으로 들어가면 이런 몰골이 될 거라는 경고처럼 보였다.

그우우······.

그리고 그 시체 무더기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팔다리와 몸통, 머리와 내장이 긴 혈관 다발과 창자 따위로 한데 묶인 몸뚱이.

백여 구에 달하는 시체 무더기는 그렇게 팔이 네 개인 거인의 모습을 취하더니, 온몸에 달린 입에서 음울한 신음을 흘려댔다.

우어어어―

“전쟁의 신이시여······.”

루시아가 침음을 흘리며 검을 뽑았다.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댈런은 눈썹을 까딱이고는, 도끼머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시체거인을 쳐다봤다.

대충 건물 3층 높이쯤 되는 시체거인.

척 봐도 경험치를 꽤 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미궁도적 무리를 처리하고, 프로그맨 부족을 몰살하며 그의 경험치 막대가 슬슬 레벨업에 가까워진 상태.

‘저거 하나면 딱 되겠군.’

“댈런. 제가 놈의 시선을 끌 테니···.”

루시아가 천천히 자세를 잡으며 그렇게 운을 띄우는 찰나.

콰아앙!

그녀의 곁에서 흙더미가 폭발하며, 댈런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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