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성검(2)
치이이······.
증기가 눈앞을 가득 메운다. 목구멍에서 비릿한 냄새가 올라온다.
입에 모인 피를 퉤 뱉으며, 댈런은 낮게 웃었다.
“푸흐.”
살짝 벌어진 입에서 증기가 뿜어진다.
팔은 이상하게 뒤틀린데다 입가에서 피를 흘리는 신세였지만, 댈런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쌓아온 체력수치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기 때문.
치이이―
진탕된 내장과 오른팔을 재생하느라, 용혈의 여파가 스멀스멀 몰려오기 시작하는 상황.
그럼에도 지금 겪는 피로감 정도면, 그냥 몇 시간만 자도 순식간에 회복될 수준이다.
미궁에서 나갈 때까지 버티는 걸 감안해도, 영역을 한 번쯤은 더 사용할 수 있을 정도.
지금보다 근력 수치가 낮았던 대사도와의 싸움에서 며칠씩 알아누웠던 걸 생각하면, 가히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상승한 근력의 영향인지 위력 역시 눈에 띄게 강해졌다.
지금 이 일격을 대사도에게 날렸다면, 놈은 마지막 말을 남기지도 못하고 증발했을 것이다.
“크으윽! 우욱······.”
물론 기껏해야 악마의 일부분을 소환했던 대사도와는 달리,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아무리 하찮더라도 악마 그 자체.
격 자체가 다른 존재다보니, 한 방으로는 죽지 않았다.
치이이이······.
전신에서 뿜어지는 연기 너머.
신음을 토하며 버둥거리는 악마의 몸뚱이가 보인다.
놈은 대충 몸의 왼쪽 절반이 사라진 상태였다.
삼분의 일 정도가 뜯겨나간 상반신에서 내장이 주르륵 쏟아진다. 왼다리도 무릎 아래로는 날아가버린 상태였다.
반쯤 잘려나간 뿔을 달고서, 뭉게진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는 악마.
놈은 둘 남은 팔을 놀려 뒤로 기어가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재생이, 재생이 되질 않는다. 서, 설마 영역을 이룬 것인가! 이제 막 미궁에 들어온 용병 따위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놈의 거대한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웅덩이를 이룬다. 뜯겨나간 상반신에서는 내장이 왈칵이며 흘러나왔다.
잃어버린 피와 내장 자체는 몸 안에서 순식간에 재생되는 듯했으나, 댈런에게 잘려나간 몸의 반쪽은 상황이 달랐다.
사라진 어깨가 다시 자라나려는 찰나.
우르릉―
미세한 천둥소리와 함께, 어깨뼈가 파삭 하고 부서진다.
절반 가까이 날아간 갈비뼈가 재생되려는 순간에도.
타닥! 타다닥!
번쩍이는 작은 섬광이 자라난 뼈와 내장을 두드리며 가루로 만들었다.
영역으로 빚어진 의념 그 자체가 악마의 재생력을 가로막는 광경.
댈런은 사나운 미소를 머금은 채, 검과 방패를 뽑아들고는 터벅터벅 공동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루시아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바렛.”
뭐? 그 성기사?
댈런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루시아는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공동의 한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는 동시에, 악마와 스스로에만 집중되던 감각을 순식간에 넓혀낸다.
공동 끝까지 뻗어나가는 초인적인 감각의 영역.
그 끝에 흐릿한 존재감이 포착된다.
어둠 속, 눈을 감고 석상처럼 선 갑주 입은 기사.
치열한 전투를 겪었는지 갑주는 온통 긁히고 구멍이 나 너덜거렸고, 목에 감긴 사슬에서는 불길한 기운이 새어나온다.
그때 악마가 외쳤다.
“나의 충실한 타락기사야! 놈들을 막아라!”
그 말에 기사가 눈을 떴다.
동시에 목에 감긴 사슬이 보랏빛 광채를 뿜어대기 시작했다.
흐리멍텅한 눈동자에서 형형하게 안광이 흘러나오고, 정적이었던 그 몸의 뼈마디와 근육들이 꿈틀거리며 튀어나갈 준비를 마친다.
철컹.
갑주가 마찰하며 쇳소리를 내고.
스릉―
검을 뽑아든 기사의 신형이, 한순간 댈런의 감각에서 벗어났다.
“······!”
동시에 온몸을 울리는 육감의 경종.
댈런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엉!
철과 철이 부딪혔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굉음.
검격이 맞부딪히는 순간 거대한 불꽃이 비산하고, 달려들던 타락기사의 몸이 공동 저 안쪽으로 튕겨나간다.
꽈광― 쿠르르.
놈이 처박힌 벽에 금이 쩍쩍 가면서, 천장의 석재가 우르르 무너져내린다.
댈런은 발 아래를 슬쩍 내려다봤다. 그의 발밑 돌바닥이 밭고랑처럼 길게 파여있었다.
고작 한 번의 격돌로 만들어진, 발목까지 잠길 정도로 깊은 흔적.
이건 힘에서 그가 명확한 우위를 가져가긴 했으나, 저 타락기사의 육체능력 역시 평범을 한참이나 넘어섬을 보여주었다.
쿠르르르!
과연 몸의 내구성 역시 범상치 않은지, 타락기사가 돌무더기를 헤치고 일어선다.
“······.”
악마와 다르게 미사여구는 없었다.
놈은 그대로 댈런에게 돌진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
쉭―
어두운 빛을 머금은 검이 찔러온다. 댈런은 방패로 걷어내고 검을 내질렀다.
터엉!
칼막이 부분으로 그 찌르기를 빗겨낸 기사는, 몸을 빙글 회전시키며 현란하게 댈런의 허벅지를 베어들어갔다.
댈런은 단순하게 대처했다. 베는 동작이 시작되는 어깨를 걷어차버린 것이다.
콰앙!
강력한 발길질에 어깨의 판금 부분이 박살난다. 단번에 어깨뼈가 탈구된 타락기사가 황급히 물러섰다.
댈런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따라가서 검을 내리그었다.
까앙!
그러나 그 사이에 빠진 어깨가 도로 붙으며, 타락기사는 능숙하게 댈런의 검을 흘려냈다.
그리고.
까가가강!
찰나의 순간에 십수 번에 달하는 공방이 오갔다.
과연 루시아의 말대로 모두가 존경할 만한 기사였던 걸까.
타락기사의 능란한 발놀림과 검술은, 댈런의 감각마저 현혹시킬 정도였다.
그럼에도 공세는 댈런이 쥐고 있었다.
기술적인 측면은 타락기사의 검술이 한참 우위였으나, 기본적인 힘과 빠르기에서 댈런이 압도했기 때문.
콰지직! 으직!
파괴적인 검끝에 기사의 갑옷이 몇 번이나 찢어지고 깨져나갔다.
하지만 싸움은 좀처럼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기사의 타락한 신성문신이 음울한 빛을 뿜어내는 순간, 그 상처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회복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악마의 재생력이 부럽지 않은 수준의, 어마어마한 자가수복력. 댈런은 짧게 혀를 찼다.
‘곤란한데.’
타락한 신성문신의 힘을 덧입은 기사는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상대였다.
노련한 검술에 초인적인 육체능력, 거기다 악마에 버금가는 재생능력까지.
물론 신성문신의 힘은 영원하지 않으니, 시간이 주어진다면 천천히 압도할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지금의 전투가 시간싸움이라는 점이었다.
“크으윽, 영혼에게 버려진 육신들이여! 나의 일부가 되어라!”
공동 가운데에 그려진 마법진 안쪽.
악마는 널브러진 탐험가의 시체들로 몸을 수복하기 시작했다.
자석에 이끌리는 철가루처럼, 찢기고 으깨진 시체들이 모여들어 순식간에 거대한 팔다리를 만들어낸다.
본래의 육신에는 비할 바가 아니겠으나, 어찌됐건 놈이 몸을 수복하는 순간 댈런은 악마와 타락기사를 함께 상대하게 될 터.
그렇게 되면 아무리 그라 해도 승산을 백 퍼센트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타락기사 하나 잡자고 영역을 사용하는 건 바보짓이다.’
영역은 강력한 카드이지만, 남발할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 그의 체력 수치는 근력에 비해 많이 뒤떨어지는 바.
지금의 몸 상태를 생각했을 때, 앞으로 영역이라는 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한 번뿐이었다.
악마 특유의 끝없는 재생력을 생각해서라도, 그 한 번은 악마 놈을 마무리하는 데 써야만 했다.
까가가가강!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와중에도, 서로의 급소를 노리는 예리한 검격은 끝도 없이 오고간다.
사방으로 불티가 튀고, 주변의 바닥이 수많은 검흔으로 난도질당한다.
까아앙!
그 검격의 파도 끝, 서로에게 날린 강력한 일격이 맞부딪히고.
타락기사가 몇 걸음을, 야만전사가 한 걸음을 물러난 순간이었다.
화악―
주변이 갑자기 밝아진다. 타락기사가 주춤하며 물러났다.
신성문신에서 뿜어지는 순수하고 밝은 빛.
그 빛을 전신에 머금고 걸어온 루시아가 댈런의 곁에 자리했다. 그녀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댈런. 예상 밖의 상황에···제가 잠시 정신을 놓았습니다.”
댈런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낮게 웃었다.
“이제는 좀 정신이 들었소?”
“예.”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스르릉.
빛을 머금은 손이 검을 뽑아든다. 새하얀 검신의 첨단은 타락기사를 가리켰다.
“대륙의 균열을 수호하는 성기사단의 수습기사이자, 기사단 내부의 악을 척결하는 심문관 루시아 카스타챌드는, 지금 이 시간부로 마에 물들어 타락한 성기사 바렛을 처단합니다.”
화륵.
그녀의 검이 신성력을 머금고 타오르기 시작한다.
평범한 신성력의 일렁임이 아닌, 불꽃처럼 넘실거리는 강렬한 백색의 광채.
기사단의 심문관만이 전수받을 수 있는 ‘단마의 백염’.
간악한 사교도나 악마를 상대로만 사용되는 그 불꽃이, 그녀의 검신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크으으으.”
그 눈부신 광채 때문일까.
지금껏 무표정하던 타락기사의 얼굴이, 루시아를 바라보며 잔뜩 일그러진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등을 맡기겠소.”
“예.”
그는 두 기사를 뒤로하고 천천히 공동의 중앙으로 다가갔다.
악마는 어느새 잘려나간 신체를 대부분 수복해, 반쯤 시체거인에 가까운 몰골을 하고 있었다.
놈이 말했다.
“흐흐흐. 저런 애송이 성기사에게 등을 맡겨도 괜찮겠느냐?”
입꼬리를 히죽거리는 웃음. 놈은 댈런의 뒤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두 기사가 격돌하기 시작했는지, 연이은 굉음과 충격이 지면을 얕게 울리고 있었다.
원한다면 감각을 뻗어내어, 그 전황을 살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악마 살해자를 믿는다.”
댈런은 그러지 않았다.
“악마 살해자라니? 저 애송이가 말이냐?”
의문스런 어조로 되묻는 악마. 댈런은 말없이 방패를 툭 내려놓았다.
악마는 얼굴에 어린 의문을 지워내고는, 자랑스러운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
“흐하하하! 네 간절한 마음은 알겠다만, 허탄한 이명에 매달리는 건 우매한 일이다. 자고로 무력은 드러나는 이름에 묶이지 않음이니, 반면 나의 타락기사는 원래라면 나마저도 이길 강자였지.”
악마는 흰자위 없는 검은 눈을 번들거리며 말을 이었다.
“첨예한 싸움 끝에 그의 동료들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혹은 내 오랜 비보인 할만의 사슬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나였어도 그를 사로잡을 수 없었을 터. 하지만 타락한 성물의 힘은 이제 그의 온몸을 잠식했다. 한때 신 앞에서 완전했던 성기사는, 이제 온전하게 타락한 나의 종자가 됐음이야.”
댈런은 말없이 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오른발은 살짝 뒤로. 왼발은 바닥에 끌듯이 약간 앞으로.
자세를 잡아가는 그를 보며, 악마는 히죽 웃었다.
“내 별의 시선을 읽어 너에 대해서도 잘 알지. 한평생 방패와 검을 사용해온 용병이며, 제국의 격투술로 에낙사구스의 하수인을 처치한 전사야. 영역을 이룬 건 예상 밖이었다만, 네 본질은 검술에 있지 아니하잖느냐?”
키이잉―
악마가 손을 들었다.
불길한 울림이 그 손바닥에서 토해지더니, 그 위에서 어둠이 넘실거리며 커다란 검의 형상으로 빚어졌다.
“나, 찢긴 육신과 톱날검의 악마 골라캅이 네게 죽음으로 한 수를 가르쳐주도록 하마.”
“야.”
“흐흐, 유언이라도 있느냐?”
악마가 물었다. 댈런은 짜증 서린 얼굴로 대꾸했다.
“보스전 컷신 볼 때부터 생각한 건데, 너 쓸데없이 말 존나 많은 거 아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습―
그가 숨을 들이쉬었다.
평소의 깊은 호흡과는 달리, 짧게 그러모으는 호흡법.
동시에 양 어깨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오른다.
스으으―
팔 위를 내달려 검에 닿는 기운.
그 순간, 기묘한 감각이 손끝에서부터 팔을 타고 올라왔다.
두 손으로 거머쥔 한 자루의 검.
평소에는 그렇게도 가볍게 휘두르던 검이, 천하의 그 무엇보다 무거워진 듯한 감각.
휘이―!
댈런은 그 무게감을 온전히 느껴내며, 검을 들어올렸다가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압도적인 중량이 그려내는 선은, 당연하게도 단순하기 그지없었고.
“응? 무슨―”
댈런의 몸이 그려내는 기이한 마력의 흐름에, 악마가 고개를 갸웃하며 검을 들어올린 순간.
쩌저저저정―!
놈이 쳐들었던 어둠의 검이, 요란하게 굉음을 뿜어대더니 그대로 터져버렸다.
산산조각난 어둠의 검이, 마력의 폭풍이 되어 악마의 상반신을 덮쳐든다.
수백 구의 시체로 간신히 수복해낸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건 말 그대로 순식간.
몸의 절반이 걸레짝이 된 채, 악마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커헉···이, 이게 무슨.”
악마가 더듬거렸다. 장황하게 늘어놓던 말이 쏙 들어간 모습이었다.
댈런은 팔 전체에 아지랑이 같은 기운을 두른 채, 두 손으로 잡은 검을 어깨 너머로 눕혀서 들어올렸다.
그가 말했다.
“다시 붙어보자고, 수다쟁이 악마 새꺄.”
꽈아앙!
그리고 바닥의 판석이 박살나며,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