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45화 (45/288)

정산(3)

대륙에는 네 명의 마녀가 있다.

불의 마녀, 재의 마녀, 뼈의 마녀, 그리고 깃털의 마녀.

겉모습은 평범한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게 없지만, 이들이 마녀라고 불리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혈통으로 계승되어, 날 때부터 타고나는 특별한 이능.’

그 어떠한 수련이나 노력 없이도, 이들이 타고나는 이능의 크기는 어지간한 대마법사 수준에 맞먹거나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재능만으로 큰 힘을 얻은 이들은, 어느 세계에서나 모난 돌로 취급되는 법.

동시에 모난 돌이 정을 맞는 것 역시, 어느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법칙이다.

때문에 자그마치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마녀들은 수많은 억압과 사냥을 당해왔다.

오직 마녀라는 사실 하나만이, 그들이 핍박받는 유일한 이유.

그 핍박이 얼마나 심했는지, 처음 열네 혈통이었던 마녀는 당대에 와서 네 혈통밖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역사 이래 마녀들의 악행도 끊이지 않았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게 당연하다.

하물며 홀로 도시를 불태울 힘을 지닌 마녀들이, 억울한 핍박 속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수백 년 전, 핍박을 견디지 못한 마녀들은 끝내 사람을 향한 복수의 칼을 뽑아들고 말았다.

그 강대한 힘에 불타 사라진 도시만 수십 개.

마녀를 향한 사람들의 증오는, 그 사건을 계기로 마침내 이유를 찾게 되었다.

그 뒤는 불 보듯 뻔했다.

사람들은 마녀를 위험한 존재라며 사냥하고, 마녀들은 더한 증오를 불태우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마녀와 인류 사이의 수백 년 역사는,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언제나 증오와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끝없는 악순환의 굴레 속.

유독 악명 높은 마녀의 혈통이 둘 있었다.

’뼈의 마녀, 그리고 재의 마녀.’

그중에도 당대의 재의 마녀는, 가장 간교한 방식을 동원해 대륙을 멸망으로 몰아가는 존재 중 하나였다.

그리고 만드레이크의 증식으로 새로운 마경이 탄생하는 이 사건은, 그녀가 본격적으로 악신 에낙사구스와의 계약을 맺고 활동하기 시작한다는 의미.

‘원래라면 몇 년은 더 있어야 일어나야 하는 일이다. 정상적인 흐름은 결코 아냐.’

댈런은 술잔을 톡톡 두드렸다.

어떤 변수가 생긴 것일까. 무엇이 그 마녀의 칩거를 이리도 일찍 깨뜨리게 만든 것일까.

볼크마의 술주정을 배경음악 삼아 그 이유를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아니,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니지.’

어째서 몇 년이나 앞당겨 일어난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변수가 무엇인지만큼은,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수백 회차의 플레이 동안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모니터 너머에서는 겪어보지 못했던 변수.

그 변수는 다른 무엇도 아닌, 비정상적인 성장과 행보를 거듭하는 댈런 자신이었으니까.

“나도 같이 가겠소.”

댈런은 빈 잔을 앞으로 밀어놓으며 말했다. 버번은 자연스레 한 잔을 더 따랐다.

갈색 액체가 든 술병은 벌써 반쯤 비어 찰랑이고 있었다.

“어어? 같이?”

“한몫 잡으러 르비바흐로 간다는 거 아니었소?”

“맞지, 맞아! 이 도시의 상단 지부는 이제 안정화되었으니, 새 사업을 찾아 떠날 참이었지!”

“그러니까 같이 가겠다고.”

“······?”

취기에 알딸딸해진 볼크마는, 한 발 늦게 댈런의 말을 알아듣고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럴 수가! 설마 자네가 내 상행에 동행해주겠다는 건가? 나야 더없는 영광이지! 맨손으로 고블린을 찢어 죽인 대전사, 청동 구역을 구해낸 영웅 댈런!”

“···내가 못 살아.”

느닷없이 술집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고함을 치는 볼크마.

그 무지막지한 성량에 화들짝 놀란 시에나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이 양반 취하더니 호들갑이 더 심해졌네.

그는 입꼬리를 말아올린 채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식도를 따라 알싸한 향을 품은 뜨거운 기운이 내려가며, 복잡해지는 머리를 번쩍 깨워낸다.

‘그래.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이곳은 살아있는 세계다.

0과 1로 구성된 컴퓨터 게임이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들이 살아 숨 쉬는 세계.

댈런이라는 거대한 변수에 의해, 그 세상은 지금도 끊임없이 복잡한 과정과 결과를 도출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댈런 자신이 그 복잡함에 발을 맞춰줄 필요는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간단한 일이었지.’

댈런은 가만히 떠올렸다.

이 도시에 처음 도착하고 난 뒤, 여관방 안에서 끄적였던 수많은 종이 더미를.

시체를 회수하고 돈을 벌어 일신의 무력을 끌어올리며, 종말의 가능성들을 앞서 차단하고자 했던 그때의 계획을.

지난 몇 주간 그의 파격적인 행보는, 모두 그 여관방의 계획과 결단에서 출발한 걸음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 다해낸 최선에, 이미 수많은 열매들이 맺힌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의 손에 부서져나간 종말의 초석들이, 지나온 발자취 위에 군데군데 흩뿌려져 있는 건 누가 봐도 명백했으니까.

‘달라진 건 없다.’

이미 수없는 변곡점이 발생했음에도, 처음의 결심 자체에서 바꿔야 할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시체를 회수해 본신의 능력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 능력을 기반으로 종말의 가능성들을 하나씩 처단한다.

그 과정에서 그가 알던 미래가 끊임없이 뒤틀린다 해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애당초 이 많은 변곡점들은 모두 그 자신이 빚어낸 것이었으니까.

변해가는 미래에 주저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놈들이 이렇게 움직여주는 게 오히려 반가운 일이지.’

댈런은 이미 종말을 향해 가는 갈림길을 몇 개나 막아낸 바.

이 상황에 종말의 주동자들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일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놈들의 반응이 격해진다는 건, 곧 댈런이 종말에게 명백한 위협이라는 증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달라진 건 없다.’

댈런은 다짐하듯 속으로 거듭 되뇌었다.

‘만약 종말이 한 발 앞서 다가오려 한다면.’

그때는 그 앞서 다가온 다리째로 찍어, 똑같이 불구덩이에 던져버리면 될 일.

저도 모르게 사나운 미소를 머금으며, 댈런은 볼크마에게 재차 물었다.

“출발일은 언제요?”

“나흘. 나흘 뒤일세.”

“나흘이라.”

그 정도면 새 장비를 장만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미궁에서의 수많은 싸움을 통과하며, 르베론에게 받았던 갑옷과 무기들은 대부분 손상된 상태였다.

도끼는 마지막 일격 이후로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고, 갑옷은 군데군데 찢겨나간 채 피와 내장 범벅이 되어 잔뜩 녹이 슨 상황.

가벼운 천옷 차림인 그가 당장 들고 있는 건, 부러지기 거의 직전인 검 하나뿐이었다.

미스릴 제련소에 주문을 넣어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댈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흘 뒤에 상단 건물 앞에서 만나는 걸로 하지.”

다시 바쁘게 움직일 시간이었다.

댈런은 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고 술집을 나섰다.

그러더니 잠시 후, 갑자기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 놓고 간 거라도 있어?”

만취한 상인을 어떻게 쫓아낼지 궁리하던 시에나는, 그의 갑작스런 재방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그녀의 기울어졌던 고개는, 댈런이 등에 짊어진 커다란 물건을 보고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부탁 하나 하지.”

“···뭔데?”

“전문가를 시켜서 이것 좀 열어달라고 해 주시오.”

쿠웅!

아직 영업시간 전이라 손님이 없이 한적한 홀에, 거대한 금고 하나가 놓였다.

그 무식한 질량에 나무판자로 된 마룻바닥이 출렁였다. 왠지 작게 우지직 하는 소리도 들린 듯했다.

점점 표정이 굳어가는 시에나를 향해, 댈런은 슬슬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안에 나온 것들은 팔아서 나흘 뒤까지 현금으로 부탁하지.”

“나흘 뒤? 진심이야?”

“그럼.”

댈런은 장난기 다분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당신의 능력을 믿겠소. 대신 이번 일의 수수료는 충분히 받아가도록 하고.”

“······.”

이마를 탁 짚는 그녀를 뒤로 하고, 댈런은 빠르게 술집을 빠져나왔다.

둥지의 마녀라고 소문난 그녀의 분노를 견디게 될, 운 없는 만취한 상인에게 내심 애도를 표하면서.

***

까마귀 둥지를 나온 댈런은 곧장 미스릴 제련소에 들렀다.

아무리 이제 막 활동을 시작했다 해도, 마녀는 단신으로 족히 군대를 상대할 존재.

천옷에 다 부러져가는 칼 한 자루 들고 그런 존재와 싸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기왕 장비를 장만할 거면, 신뢰할 수 있는 대장장이에게 맡기는 게 옳았고.

“댈런! 이게 얼마 만인가!”

두 팔을 벌리고 뛰어나오는 르베론을 보며 댈런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거 왠지 몇 주 전에 본 광경 같은데.

르베론은 잠시 쉬는 중이었는지 샌드위치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댈런은 그에게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 건넸다.

“미안하게 됐소. 영감이 만들어준 물건들, 그 사이에 전부 부숴먹었소.”

“으하하! 그럴 줄 알았네!”

검을 건네던 댈런의 손이 멈칫했다. 그럴 줄 알았다고?

그의 반응에 르베론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네는 항상 올 때마다 그 전에 줬던 물건을 죄다 못 쓰게 만들어놓지 않나? 그래서 자네가 오기 전에 미리 다 만들어뒀지! 들어오게나!”

대장장이는 샌드위치를 입에 밀어넣으며 댈런을 이끌었다. 그는 가게 한쪽 구석을 헤집더니 이내 저번처럼 큼직한 상자 하나를 꺼내왔다.

상자 안에는 튼튼해 보이는 갑옷과 방패, 검 한 자루, 그리고 손도끼가 들어있었다. 르베론은 갑옷을 먼저 꺼내들었다.

“갑옷은 튼튼한 천옷 위에 은철 사슬과 갑각늑대의 가죽을 덧대 만들었네. 가슴과 등, 어깨와 팔은 흑철을 얇게 펴서 보강했다네.”

갑옷의 각 부위를 가리키며 열정적으로 토해내는 설명. 댈런은 상의를 벗고 바로 입어보았다.

전보다도 더 편안한 착용감과 조금 더 묵직해진 무게감.

아무래도 그의 초인적인 근력을 고려해서 무게에 신경을 덜 쓰고 만든 듯했다.

“저번 검을 거의 걸레짝으로 만들었으니, 이번 검도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것 같네. 그래도 겉을 은철로 감싸고 심지를 흑철로 잡아두어, 이전보다는 훨씬 오래 버틸 걸세.”

댈런은 턱을 쓰다듬었다. 은철과 흑철은 귀하기도 귀하지만, 다루기 어렵기로 유명한 금속.

게임 상에서 르베론이 저런 고급 금속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건, 못해도 튜토리얼이 끝나고 2년 이상 흐른 시점이었다.

“놀랍군. 어떻게 실력이 이리 날로 좋아지시오?”

“그야 다 자네 덕 아닌가! 이렇게 좋은 터에 완벽한 설비를 갖춘 대장간을 내어주고, 믿을 수 있는 재료 수급처까지 주선해줬는데. 이 정도도 못하면 내 자존심이 안 서지.”

르베론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과연 미스릴의 제련자인가.’

인생의 가장 깊은 계곡을 슬쩍 메꿔놨더니, 본디 그 계곡을 딛고 일어섰을 힘으로 산꼭대기까지 단숨에 올라버릴 줄이야.

전설적인 인물이 될 사람은, 역시 그 떡잎부터가 남다른 모양이었다.

텅텅!

흡족한 얼굴로 자신이 만든 무구를 두드려보는 대장장이의 모습을 보며, 댈런은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지금껏 걸어온, 수많은 갈림길을 꺾어 선택한 이 길이 옳았다는 것을.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암울한 세상.

사람들의 운명이 뒤바뀌고, 예정되었던 미래가 흔들리는 건 오히려 반가운 일이다.

댈런 자신도 인간인 이상, 격변하는 미래에 순간 당황하는 일은 언제든 있을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할은, 이 변화를 더욱더 가속하는 것.

이로써 지금 이 순간에도 다가오는 종말을 유예시키고, 끝내 세계의 운명이라는 걸 뒤엎어버릴 수 있다면.

스릉―

“좋은 검이군. 도끼와 방패도 그렇고. 잘 쓰겠소.”

“그러게! 아직 자네에게 빚진 금화가 반은 남았으니, 대금은 다다음 번에나 내도록 하게나!”

“고맙소. 오늘은 일이 바빠서 바로 가보도록 하지.”

“그러게나. 나도 오늘은 밀린 잔업이 많아서! 으랏챠!”

얼마든지 지금보다도 더 공격적으로 멸망의 사냥개들을 추적해, 그 숨통을 끊어놓으리라.

‘그리고 그 끝에서야,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할 수 있겠지.’

댈런은 그리 생각하며, 기지개를 켜는 대장장이를 등지고 가게를 나섰다.

해가 어느새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

성기사단 지부에 도착한 건 밤이 다 되어서였다.

직선과 곡선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은장식이 특징인, 성기사단 건물만의 독자적인 양식.

직접 보는 건 처음인 그 화려한 양식을 응접실에서 감상하고 있자니, 방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한쪽은 노년과 중년의 경계에 걸친, 주름이 자글자글한 인상의 남자.

그리고 다른 한쪽은 지난 보름 동안 미궁을 함께 돌파한, 미래에 악마 살해자로 명성을 떨치게 될 성기사 루시아 카스타챌드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댈런.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니오.”

루시아의 사과에 댈런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건물 양식이 멋지더군. 감상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소.”

“심미안이 깊으시군요. 은장식은 악마를 가르는 신의 빛을 뜻하고, 곡선과 직선은 그 빛의 부드러움과 뼈를 쪼개는 날카로움을 의미하지요.”

남자는 주름이 부드럽게 잡히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댈런의 앞에 마주 앉았다.

“대륙의 균열을 수호하는 성기사단의 행정관, 알버스라고 합니다.”

“댈런이오.”

댈런은 남자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검을 오래 잡아오신 모양이오? 성기사단의 행정관들 중에는 한때 기사로서 의무를 다하던 이들이 있다 들었는데.”

“허허, 기사직에서 은퇴한 지는 좀 되었답니다.”

마물과의 전투에서 다리 하나를 잃었거든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품이 넓은 바지를 슬쩍 걷어보였다.

거기에는 중년 남자의 털이 수북한 다리 대신, 매끈한 금속 재질의 의족이 달려있었다.

댈런은 그걸 보며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상당한 실력자군. 이 정도면 지부의 총책임자쯤 되겠어.’

저런 의족을 쓰면서도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다는 건 한 가지 사실을 나타냈다.

이 알버스라는 남자가, 한때나마 굉장한 실력의 기사였다는 것.

‘성기사단은 실력과 경험을 무엇보다 중시하니까, 이 정도면 미궁도시의 지부를 총괄하기에 충분하지.’

그리고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알버스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곧장 작은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가 말했다.

“본디 귀하의 공로는 단장님께서 직접 치하하셔야 할 일이지만, 불가피하게도 부족하나마 이 지부를 대표하는 제가 대신 감사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근래 성기사단의 사정이 여의치 않은 점 양해해주시기를.”

긴 감사의 말과 함께 내미는 주머니.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알버스에게, 댈런은 마주 고개를 숙여 답했다.

성기사들은 신 앞이 아니고서는 결코 무릎을 꿇지 않는다. 설령 제국의 황제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렇기에 성기사가 고개를 숙인다는 건, 그 자체로 상당한 의미를 가지는 행동이었다.

그것도 성기사의 길에서 은퇴한 뒤 미궁도시의 지부를 총괄하는 행정관의 목례라면, 어마어마한 의미가 담겨있을 터.

‘그만큼 성기사단의 입장에서 이번 사건이 큰 의미를 가진다는 이야기겠지.’

고개를 든 댈런은 받아든 주머니를 슬쩍 열어봤다.

은실로 묶인 입구 안쪽, 반짝이는 금빛이 엿보였다.

금화였다.

“약소하게나마 금화 서른 닢입니다. 그리고 귀하께서 요청하신 신성문신은, 제가 직접 추천장을 적어서 본단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든 원하실 때 본단에 가시면 받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감사하오.”

댈런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사실 신성문신의 값어치만 해도 금화로 환산하면 수백 닢은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런데 잔금으로 금화를 더 얹어준다는 건, 분명 굉장한 호의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성기사단의 정산은 끝나지 않았다.

덜컥.

테이블 위에 작은 함을 올리며, 알버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것 역시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이게 뭐요?”

“저희가 드리고자 하는 성의입니다.”

성의라.

그런 말 들으면 보통 불안해지는데.

상자를 열어보니 보랏빛 사슬이 은색 천에 잘 싸인 채 들어있었다. 댈런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이건 타락한 성물 아니오?”

“맞습니다. 사백 년 전 기사단이 잃어버린 할만의 사슬이죠. 악마의 마굴에서 귀하와 루시아 경이 가져오셨다 들었습니다.”

알버스는 사슬이 담긴 함을 댈런 쪽으로 슬며시 밀며 말했다.

“비록 여전히 마기가 깃들어있는 상태이지만, 검증한 결과 사용자의 정신은 전혀 침범하지 않으니 상당한 수준의 보물이라 할 수 있죠.”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게임에서도 할만의 사슬은 강력한 아이템이었다.

사슬로 묶은 대상을 강제로 굴복시키고, 무조건적으로 명령에 따르도록 만드는 물건.

타락한 상태이건, 모종의 방법으로 그 타락을 씻어냈건 간에 그 기능 자체는 그대로였다.

유일한 차이점은 마기로 대상을 물들이느냐, 아니면 오히려 신성력으로 정화시키냐의 차이일 뿐.

“성기사단이 타락한 성물을 쓰는 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 오히려 귀하와 같은 영웅이시라면, 그런 제약에 구애받지 않고도 이 보물을 세상을 구하는 데 사용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알버스가 테이블 위에 차분히 두 손을 올려둔 채 말했다. 그 곁의 루시아는 왠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었다.

댈런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듣는 이가 소름돋게 만드는 웃음.

테이블 위에 놓인 행정관의 손이 저도 모르게 긴장으로 움츠러드는 걸 보며, 그는 천천히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말했다.

“행정관 양반.”

탁.

함 뚜껑을 소리나게 덮인다. 알버스의 손이 움찔한 건 동시였다.

“나한테 바라는 게 있으면 말로 하시오. 이런 되도 않는 수작을 부릴 게 아니라.”

천천히 미소를 머금어가며, 댈런은 말을 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빚을 지우는 일은 잘해도, 빚을 지는 일은 잘 못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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