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46화 (46/288)

상행(1)

파르르 떨리는 행정관의 손끝. 그리고 그걸 쳐다보는 댈런의 무감정한 눈.

두 사람이 입을 다물자, 테이블 위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불편함이라기에는 과하게 팽팽하고, 긴장감이라기에는 조금 느슨한 정도의 정적.

“어휴.”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건, 행정관이나 댈런 어느 쪽도 아니었다.

“알버스 삼촌, 제가 말했잖습니까. 댈런은 그런 식으로 구슬리는 게 통할 사람이 아니라고요.”

한숨을 푹 내쉰 루시아가 알버스를 나무란다.

그녀는 손끝으로 함을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댈런, 이건 그냥 제 선물로 받아주십시오. 미궁에서 제 목숨을 숱하게 구해주셨으니, 그 보답이라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선물?”

댈런은 약간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답이랍시고 성물을 그냥 던져준다고? 그래도 되나?

“악마나 마물에게 빼앗긴 성물은, 그걸 탈취한 기사에게 소유권이 돌아가는 게 기사단의 법도입니다. 이건 제 손으로 타락기사를 죽이고 얻은 전리품이니, 제 뜻대로 댈런에게 넘기겠습니다.”

함을 이쪽으로 밀어내는 루시아의 하얀 손을 보며, 댈런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성기사단에 그런 설정도 있긴 했지.

워낙에 잠깐 언급되고 넘어간 설정이기도 하고, 외부인에게 성물을 넘기는 경우 자체가 드물다 보니 잊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타락기사 이야기. 그거 마음대로 말해도 되는 거였소?”

“알버스 삼촌은 저를 업어 키우다시피 하신 분이니 괜찮습니다. 입도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 무겁고요.”

댈런은 알버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늦은 중년의 행정관은 여전히 눈가를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댈런이 계속 바라보고만 있자,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였다.

“실례했습니다. 서리고원을 넘어온 북부인들 대할 때를 생각하다 보니, 귀하께 큰 결례를 저지르고 말았군요.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뭐, 괜찮소. 그렇게 기분 상할 일도 아니고.”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자 알버스는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되물었다.

“···진짜 이런 사과 하나로 괜찮으신 겁니까?”

“그러면 내가 그쪽 귀라도 잘라서 받아가리?”

“아니, 아닙니다. 그저···루시아 경이 했던 말들이 과장이라 여겼는데, 정말인가 보군요. 영웅의 무력과 성자의 성푸―윽.”

쿡쿡.

옆구리를 찌르는 하얗고 긴 손가락.

“······.”

부릅뜨고 째려보는 루시아의 푸른 눈동자에, 알버스는 하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뭔데. 무슨 뒷담을 하고 다녔길래?

루시아는 가벼운 한숨을 한 번 더 내쉬고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댈런. 기사단은 당신께 의뢰를 하나 더 맡기고자 합니다.”

의뢰라. 성기사단의 의뢰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기사단이야말로 돈 많은 고객들 중 하나인 데다, 그가 원하는 물건까지 가지고 있었으니까.

댈런은 테이블 위의 금화 주머니를 은실로 잘 묶어 허리띠로 가져갔다. 그러면서 가볍게 되물었다.

“무슨 의뢰요?”

“댈런이 본단까지 성검을 운반해주셨으면 합니다.”

성검을?

돈주머니를 허리띠에 묶던 손이 멈칫했다.

그리고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루시아는 낮게 말을 이었다.

“···기사단 내부의 누군가가 성검을 노리고 있습니다.”

뭐 시발?

***

“며칠 전, 본단에서 보낸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루시아는 천천히 운을 뗐다.

“만약 성검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면, 안전에 유의하며 그 성검을 본단으로 가져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특별한 내용은 아니다.

성기사단이 가진 수많은 성물들 사이에서도, 열두 자루의 성검은 단언컨대 가장 높은 지고의 보물.

기사단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 하루 속히 제 자리를 찾길 바라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편지를 자세히 읽어보니, 심문관들만이 볼 수 있는 암호가 숨겨져 있더군요.”

루시아가 말했다. 그녀의 안색이 어두웠다.

그도 그럴 게, 심문관들의 역할은 기사단의 타락한 부분을 잘라내는 것이었다.

그들만이 알 수 있는 암호라면, 보통 기사단의 내부에서 불거지는 어떤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암호는 도둑질, 습격, 배신이었습니다. 즉···.”

“기사단 안에 배신자가 있다는 소리군.”

끼이익.

댈런은 손을 머리 뒤로 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맞습니다.”

루시아는 착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선 댈런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도와주십시오, 댈런.”

댈런은 기지개를 켜다 말고,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성검을 되찾아달라는 의뢰도 모자라, 이런 부탁까지 하는 게 염치없다는 건 압니다. 허나 저 혼자서는 성검의 무게를 감당하기 버겁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루시아는 허리를 깊이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축 늘어뜨려진 금발이 위태롭게 찰랑거렸다.

마치 그녀의 절박함을 나타내는 듯.

어쩌면 성기사단의 상황을 보여주는 듯.

끼익.

댈런은 뒤로 젖혔던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말했다.

“일어나시오. 성기사가 허리를 굽히는 건 부담스럽소.”

자리에서 일어선 그의 두툼한 손이, 성기사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일으킨다.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

입술을 꽉 깨문 새하얀 치아. 푸른 눈동자 아래 물기가 살짝 맺혀있었다.

여기서 눈물은 반칙이지. 댈런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자리에 다시 털썩 앉으며 알버스를 쳐다봤다. 그가 말했다.

“나는 용병이오.”

톡. 톡.

의자의 팔걸이를 천천히 두들기는 손가락. 알버스는 조금 굳은 얼굴로 그 손끝을 응시했다.

“그리고 용병은 공짜로 일하지 않지.”

“신성문신을 하나 더 받으실 수 있도록 추천장을 추가로 써드리겠습니다. 혹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선수금으로 금화 한 궤짝이라도 내어드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아까보다 좀 더 담백해진 어조. 댈런은 낮게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화는 됐소. 선수금은 이미 받았거든.”

그는 함 안에서 사슬을 꺼내들었다. 투박한 사슬은 그의 손이 닿자마자 불길한 보랏빛을 은은하게 뿜어댔다.

휘감은 대상을 주인의 의지에 복종시키고, 동시에 마기에 물들이는 할만의 사슬.

그 타락한 성물이, 댈런의 손길에 닿는 순간 그를 곧장 주인으로 인정한 것이다.

“어찌 이리도 곧바로······?”

놀란 눈으로 그 현상을 쳐다보는 행정관 앞에서, 댈런은 사슬을 천으로 잘 말아 허리띠에 걸쳐두었다. 그가 말했다.

“다만 가는 경로는 내가 결정하겠소. 성기사단에 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거든.”

성기사단이 위치한 균열의 입구는 대륙의 남서쪽에 있다.

그리고 만드레이크 군락이 발견됐다는 르비바흐 역시, 공교롭게도 여기서 남서쪽으로 꽤 가야 나오는 도시.

성검을 운반하는 길에 재의 마녀를 처리할 수 있다면, 한 번의 여정으로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는 일.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었다.

댈런은 사슬 걸린 허리띠를 슬쩍 추스르며 걸음을 옮겼다.

응접실을 나서기 전, 그가 잠시 고개를 돌렸다.

“나흘 뒤에 출발할 거요. 그때까지 떠날 준비를 해두시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것도.”

휙.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은빛 물체.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물건을 잡았다. 용병패였다.

“이게 뭡니까?”

“바렛의 뒤통수를 친 그놈의 용병패요. 그걸 들고 까마귀 둥지로 가 내 이름을 대면, 그놈과 함께 바렛의 뒤통수를 친 이들이 누군지 찾아줄 거요.”

루시아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댈런은 그걸 무덤덤하게 바라보다 문을 열고 나갔다.

끼이익.

천천히 닫혀가는 응접실의 문 사이.

“···고맙습니다.”

작은 중얼거림이 닫히기 직전의 문틈으로 흘러나와, 댈런의 귓가를 간질이고 지나갔다.

***

나흘이 지났다.

댈런은 불필요한 짐을 죄다 처분한 뒤, 가벼운 차림으로 상행의 마차에 올랐다.

놀랍게도 그 짐의 반 가까이는 금화가 담긴 궤짝과 주머니였다.

악마의 정수를 넘기고 받은 백팔십 닢과, 성기사단에게 받은 서른 닢의 금화.

도합 이백 닢이 넘어가는 거금은, 출발 직전에 시에나가 물건 대금이라며 전달한 금화로 인해 거의 두 배 가까이 부풀어버렸으니까.

이로써 평범한 장정이면 아예 드는 것조차 힘들어져버린 그의 배낭.

그 속에는 금화뿐 아니라, 그 금화의 가치에 상응하는 계약서 두 장도 곱게 접혀 들어있었다.

한 장은 성기사단과 작성한 성검의 운반 의뢰 계약서.

그리고 다른 한 장은 갈리오스 상단과 맺은 호위 의뢰 계약서였다.

‘금패 용병으로 상단 호위를 맡은 건 처음이군.’

팔시온에 도착한 뒤로는 도시에서 나간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도시에 들어올 때도 갈리오스 상단과 함께였었지.

어느새 그때로부터 벌써 한 달하고도 보름이 지나있었다.

원체 수많은 사건들이 정신없이 터지고 해결되다 보니, 약간은 현실감이 없게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

마차의 창문덮개 틈 사이로 들어오는 냉기가, 그 지나간 시간들을 스르르 설명해주는 듯했다.

도시 남쪽으로 뻗은 이 대로를 반대로 따라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아직 겨울이 막 시작될 무렵.

완연한 한겨울인 지금처럼 춥지는 않았으니까.

“댈런은 춥지도 않으십니까?”

루시아가 입에서 김을 후후 뱉으며 말했다.

당연하겠지만 마차 안에는 난방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차의 벽과 지붕이 눈이나 칼바람 정도는 막아주겠지만, 이런 한겨울의 추위까지는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오히려 마차 안이 더 추울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걸어가며 몸을 움직여 체온을 덥히는 바깥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가만히 앉아,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는 게 움직임의 전부였으니까.

물론, 애당초 추위라는 것 자체가 댈런 자신과는 상관없는 단어였지만.

“추위를 잘 안 타서.”

“이 날씨에도 추위를 안 탄다니, 북부인들은 다 그렇습니까?”

“글쎄. 그건 모르겠군.”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애당초 그가 추위를 안 타는 건, 북부인의 피 따위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이유였다.

‘용들은 보통의 더위와 추위 정도는 아예 느끼지 못한다네. 자네가 말한 부작용을 들어보니, 그게 용의 피에서 비롯된 체질이라는 학계의 이론이 사실이었나 보군.’

미궁에서 돌아와 엘가이아 마탑에서 신세를 지고 있을 때, 그의 방을 방문한 펠버 발렌티노가 했던 말이었다.

‘책을 몇 권 가져왔으니, 가져가서 한 번 읽어보게나. 자네 같은 전사라면 자기 몸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지.’

그렇게 덧붙이며, 두꺼운 전공서적 같은 장서들을 건네주기도 했고.

‘그 사람도 참 재미있는 양반이야.’

금화를 제외하고, 그의 짐 무게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책들을 떠올리며 댈런은 슬슬 웃었다.

땅의 기억에서 그의 옛적 모습을 읽어내지 못해, 당황하던 그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지레 겁을 집어먹거나, 좀 영악하다면 그걸 약점으로 이용하려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

그러나 펠버는 그 이후로 오히려 그에게 도움이 되고자 힘썼다.

‘자네 같은 영웅의 앞길에, 이런 늙은이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는 법이야.’

그가 남겼던 말이 떠올라, 댈런은 무심코 피식 웃었다.

요새 종종 생각하는 일이지만, 정말로 많은 이들의 운명이 바뀌고 있었다.

르베론이나 시에나, 루시아처럼 그가 의도적으로 끌어들인 이들이 있었다면.

펠버 발렌티노나 토미 발렌티노, 아니면 페니처럼 의도되지 않은 비틀림 역시 존재했다.

‘볼크마 갈리오스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지.’

사실 댈런은 게임을 플레이하며 갈리오스 상단의 이름조차도 들어본 적 없었다.

아마 갈리오스 상단의 예정된 미래가, 텔리아 상회에 잡아먹히는 운명이었기 때문이겠지.

텔리아가 갈리오스에게 이빨을 드러내는 건 튜토리얼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

그리고 기본 캐릭터로 플레이했을 경우, 그 시기는 잡다한 용병 의뢰나 하며 레벨업을 하고 돈을 모을 때였으니까.

그 시점에 팔시온에서 텔리아에 맞서 상권을 경쟁하던 볼크마의 운명 역시, 직접 보지 않아도 뻔했다.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괴인이 되거나, 아니면 그냥 죽었겠지.’

수백 번의 회차 속에서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운명.

그저 한 사람일 뿐인 그의 손에, 그런 운명들이 벌써 몇이나 바뀌고 있는 것인가.

괜히 어깨가 무거워지는 듯한 기분에, 댈런은 절레절레 고개를 털어냈다.

똑똑똑.

그때 누군가 창문덮개를 가볍게 두드렸다. 댈런은 느릿하게 창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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