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47화 (47/288)

상행(2)

휘이이―

열린 창문으로 파고드는 한겨울의 찬바람.

창밖에는 소년 용병이 마차 곁을 따라 걷고 있었다.

“뭐지?”

“부, 불편하신 점은 없는지 상단주님께서 여쭤보라 하셨습니다.”

소년은 힘이 바짝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댈런의 덩치와 낮고 굵은 목소리에 약간 겁을 먹은 듯했다.

아직까지 미등록 용병인 소년의 입장에서는, 한참 아득해 보이는 금패 용병의 신분 역시도 한몫했을 테고.

“없다고 전해드려라.”

“···앗, 그, 하나 더 있습니다!”

“말해 봐라.”

“상단주님께서 이걸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소년은 달달 떨리는 손으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수수한 술 장식이 달린 작은 나무 상자였다.

댈런이 상자를 받아들자, 소년 용병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상인도시 베닐, 아니 베닝헴에서 유행하는 간식거리라고 하셨습니다. 꿀 대신 사탕수수 당액을 사용한 과자인데, 무료하실 때 드시라고···.”

“알겠다. 고맙군.”

슥슥.

창밖으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는 두터운 손. 얼어붙은 머리칼이 곰 앞발 같은 손아귀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이름이 뭐랬지?”

“파른입니다.”

“나이는?”

“이번 생일에 열넷이 됩니다.”

소년은 이제 막 변성기가 오기 시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굴에서도 아직 앳된 티가 다분했다.

댈런은 상행이 출발하기 전, 서로를 잠깐씩 소개한 기억을 되짚어보며 말했다.

“음, 기억났다. 미등록 용병 파른. 이번이 세 번째 의뢰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럼 이 일만 끝나면 동패를 달겠군. 축하한다.”

소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부끄러움과 기쁨, 예상치 못한 축하에 대한 당황함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댈런은 그걸 보고 낮게 웃었다.

거친 일이 일상인 용병임에도 불구하고, 나이대에 따라오는 순수함이 바래지 않은 모습.

이제는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고향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 모습에, 댈런은 빈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는 상자 속 과자를 큼직하게 한 움큼 집어 주머니에 넣고는, 입구를 잘 묶어 소년에게 건넸다.

“이건 몰래 먹어라. 상단주께는 내가 잘 먹겠다 했다고 전해드리고.”

“가, 감사합니다!”

“쉿. 몰래 먹어야 한다. 얼른 가 봐라.”

댈런은 소년의 머리를 한 번 더 헝클어주었다.

열린 창문으로 달려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루시아가 말을 걸어왔다.

“의외입니다.”

“뭐가?”

“미궁의 악마나 성기사단의 행정관 앞에서는 그토록 강력하고 사납기까지 한 댈런이, 소년 앞에서는 갈대처럼 부드럽다는 점이요.”

댈런은 피식 웃었다. 루시아는 따라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워낙 대식가시기에, 누가 뭐래도 먹을 건 양보하지 않는 성격인 줄 알았습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요?”

“성기사 앞에서 불경한 말은 삼가주시죠, 댈런.”

첫만남에서 쌍욕부터 들려주던 사람이 뭐 어째?

댈런은 황당한 표정으로 루시아를 쳐다봤다. 그녀는 쿡쿡 웃으며 창문을 열고 딴청을 피웠다.

댈런도 이내 창밖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는 긴 행렬이 펼쳐져 있었다.

말과 노새, 짐마차, 수레, 그리고 사람의 행렬.

갈리오스 상단의 상행 규모는 도시로 올 때보다 두 배 이상 커져 있었다.

‘용병도 예순 명쯤이나 고용했지.’

육십 명이나 되는 칼잡이. 거의 작은 군대나 다름없는 숫자다.

용병들 대부분은 행렬의 외곽을 빙 둘러서 호위하고 있었다.

동패 용병, 혹은 아까 소년처럼 아직 미등록 신분으로 활동하는 용병들이었다.

동패는 외곽을 둘러싼 채 걷고, 은패는 말이나 짐마차 위에서 교대로 경계를 선다.

댈런 같은 금패 용병이 만약 끼어있다면, 아예 상단 측에서 따로 마차를 마련해 모셨다.

실력과 실적에 따라 명확하게 차등을 두는, 이쪽 업계의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평화롭군요.”

문득 루시아가 중얼거렸다. 댈런은 말없이 과자를 입에 넣었다.

그는 입을 우물거리면서, 다리를 움직여 천에 싸서 놓아둔 성검을 의식적으로 확인했다.

과자는 빵집에서 파는 곰돌이 쿠키 같은 맛이었다.

***

상단은 일주일 정도 별 탈 없이 남하했다.

루시아의 말대로 나흘간은 정말 평화로웠다. 미궁도시의 순찰권 안에서는 흔한 도적마저도 드물기 때문이었다.

순찰권을 벗어나자 도적이나 고블린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행에 큰 지장은 없을 정도였다.

애당초 이 상행은 평범한 도적이 노리기에는 지나치게 큰 먹이였기 때문이다.

용병만 육십에, 상단 측 일꾼들까지 칼을 들면 백수십에 달하는 병력.

멋모르는 도적들의 습격이 두어 번 있긴 했지만, 용병들이 무기를 뽑고 달려들자 놈들은 곧장 꽁지를 말고 달아났다.

댈런이나 루시아가 나설 것도 없었다.

그렇게 팔시온을 떠난 지 여드레째가 되었다.

“흐아암.”

루시아는 하품을 쩍 했다. 그녀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댈런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마차의 진동에 따라 몸을 흔들거리고 있었다.

‘심심하지도 않으신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풀었다.

처음 상행에 합류할 때까지만 해도, 무려 마차를 제공해준다는 말에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하지만 막상 그 마차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자, 그녀의 생각은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비좁은 마차 안에 하루종일 있는 건 생각 이상으로 고역이었다.

끊임없이 덜컹거리고, 온도도 바깥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추운 마차 안.

마차 여행이라기에 편하게 내심 편하게 누워서 가는 걸 기대했는데, 눕기는커녕 허리를 펴고 일어서는 것조차도 불가능했다.

반평생 육체를 연단해온 성기사인 그녀의 입장에서는, 마치 좁은 창살 안에 갇힌 새가 된 느낌.

설령 그 모든 걸 참아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녀에게 마차 여행이 고역인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심심해.’

바로 너무 무료하다는 것.

‘걸어서 여행할 때는 그나마 여기저기 둘러보고, 작은 일이라도 직접 하는 맛이 있었는데.’

도보 여행은 말이 여행이지, 또 하나의 수행이나 다름없었다.

멈추지 않고 걸어나가야 하고, 주변을 끊임없이 경계하며, 해가 떨어지기 전에 노숙할 곳을 찾아 천막과 불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상행에 동참한 지금, 그 모든 일은 상단의 일꾼이나 용병들이 대신해주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좋아하던 요리까지 상단 소속의 일꾼들이 뚝딱 만들어서 가져다줘버리니, 뭔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하루 열여섯 시간을 기도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에게는 본단에서 늘 하던 아침과 저녁 기도만 해도 버거웠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밖에 나가서, 상행을 따라 걷기라도 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히히힝―!

말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덜컹 하고 멈췄다.

순간적으로 몸이 앞으로 쏠리는 느낌.

정신이 번쩍 들며, 루시아는 본능적으로 마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동패는 전원 앞으로! 은패는 특기에 따라 자리를 잡아라!”

“무, 무슨 일이오!”

“수레에 실린 무기를 내려라! 일꾼들을 무장시켜! 상단주께선 어디 계신가!”

아수라장이 된 상단의 행렬.

용병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당황한 상인들은 그들 중 아무나를 붙잡고 무슨 상황인지 물어보았다.

루시아는 빠르게 신성문신을 활성화시켰다.

오감이 한껏 예민해지고, 손발에 청명한 기운과 함께 힘이 솟았다.

그리고 칼잡이들이 흔히들 육감이라고 부르는 감각이 깨어나는 순간,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렸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사람과 짐마차들 너머를 응시하고.

양옆의 숲 사이로 난 대로 저 끝에, 녹색의 물결을 포착하는 순간.

“습격! 습격이다! 전방에 오크 팩!”

짐마차 위에서 경계를 서던 은패 용병이, 상행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외치는 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

댈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심상 너머, 환상세계의 영역을 들여다보는 건 어느새 습관이 되어있었다.

현실에서 멀어져 무방비해지는 상태이지만, 기습을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초인적인 감각과 지능 수치로 무장한 몸뚱이는, 그의 의식이 먼 우주를 여행하는 와중에도 착실하게 현실의 자극과 정보들을 수집할 수 있었으니까.

“흠.”

그리고 지금, 그가 눈을 뜬 것도 정확히 같은 이유였다.

“댈런! 댈런!”

루시아의 외침이 귀를 찌른다. 댈런은 순식간에 감각을 확장시켰다.

내면으로 쏠리던 감각이 날개 돋친 듯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행렬 전체를 넘어 숲과 그 사이에 난 대로까지 손바닥 안을 들여다보듯 그의 감각권에 사로잡혔다.

화살 한 바탕 거리보다 좀 더 먼 지점.

가볍고 무거운 발구름을 위시한, 우글거리는 생명체의 기척들.

“댈런! 일어나십시오! 습격이···.”

“오크들이군. 길 앞뒤로 막아섰어. 숲 사이로 난 길이라는 이점을 이용할 생각인 듯하오.”

루시아가 약간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댈런은 능숙하게 갑옷 끈을 조이고 무기를 허리에 차며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군. 용병들이 앞으로 쏠리고 있소.”

마지막으로 천에 싸인 성검을 가죽끈으로 등에 멘 그는, 우악스런 손아귀로 마차 지붕을 잡았다.

그리고 한 번 힘을 주는 것만으로 몸을 튕겨 지붕 위에 올라섰다.

“우아악!”

지붕 위에서 활을 들고 자리 잡은 용병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댈런은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상행은 숲 사이로 뻗은 도시연합의 대로를 가던 중이었다. 대로는 잘 정비되었지만 좌우로 넓지는 않았다.

상행의 앞길을 가로막은 오크는 대략 백 마리. 고블린은 그 두 배쯤 되었다.

놈들은 거친 몸짓으로 몰려오며 땅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상단의 용병들은 죄다 그리 몰려가서 방어선을 구축하는 중이었다.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전방과는 다르게, 상행의 뒤쪽은 언뜻 잠잠해 보였다.

그러나 댈런의 예민한 감각은, 나무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는 오크들의 거친 숨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상행의 용병들과 칼 든 일꾼들이 행렬의 앞쪽으로 우르르 몰려가자, 놈들은 그제야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그 숫자는 대략 삼백.

고블린 하나 없이, 순수하게 오크로만 구성된 무리였다.

‘머리를 잘 썼군.’

댈런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영악한 지휘관을 둔 게 틀림없었다.

루시아는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뒤쪽에서 나타나는 오크들을 보고 사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댈런은 그녀에게 말했다.

“상행의 전방 방어선에 합류해주시오. 상단의 전력으로는 백에 달하는 오크를 상대하기 버거울 거요. 그리고 앞으로 갈 길이 머니 피해를 최대한 줄여야 하오.”

“하지만 그러면 뒤쪽이 비지 않습니까?”

“뒤는 내가 맡겠소.”

루시아는 미간을 좁힌 채 그를 쳐다봤다. 댈런은 그냥 씩 웃어주었다.

젊은 성기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검을 꽉 잡으며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말했듯이 아군 피해가 최소화되어야 하오. 믿겠소.”

루시아는 대답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녀는 팔다리에서 은은한 빛을 뿜어내며 행렬의 앞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댈런은 그녀를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상행의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숨어있던 오크들은 이제 전부가 대로 위에 올라서 있었다.

전방에서 온갖 소란을 다 일으키며 달려오는 동족들과는 달리, 놈들은 조용하게 속보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앞으로 시선을 끌고 소리 없이 뒤를 친다는, 간단하지만 놀랍도록 효과적인 작전.

그리고 지능이 떨어지는 오크들이 이런 작전을 효과적으로 쓰고 있다는 건, 곧 놈들의 두령이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증거였다.

‘누가 지휘관일까.’

댈런은 도끼를 뽑았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오크 무리를 훑기 시작했다.

투쟁심 강한 오크 종족의 특성상, 지휘관은 반드시 부하들과 함께 돌격하는 법.

비록 놈은 삼백에 달하는 초록색 파도 속에 묻혀 있을 터이나, 그 정도로 댈런의 감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저기 있군.’

그리고 댈런은 머지않아 발견할 수 있었다.

거대한 근육질의 초록색 덩치들 사이, 유독 특별한 외양이 눈에 띄는 두 개체를.

한 쪽은 뼛조각과 이빨을 엮어 만든 목걸이를 걸치고, 커다란 나무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는 오크 주술사.

그리고 다른 한 쪽은, 거의 삼 미터에 달하는 키에 성인 장정만큼이나 커다란 대검을 든 오크 전사였다.

[어리숙한 용병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벼락을 부르는 마법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두 오크의 머리 위에 각각 뜬 알림창을 보며, 댈런은 사납게 웃었다.

그는 손도끼를 어깨 너머로 들어올렸다.

지휘관은 둘. 도끼는 하나.

찰나의 시간 동안, 그의 두뇌가 두 놈 중에서 우선순위를 결정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패래래랙―!

빛의 원반이 쏜살같이 대로 위를 날아가고.

“루크샤······어억!”

뭔가 주문을 외던 오크 주술사의 고개가 뒤로 팍 꺾였다.

쿵.

그대로 뒤로 넘어가는 오크의 거대한 몸뚱이.

놈의 이마 위에는 나무 손잡이가 그 날을 단단하게 뿌리박은 채 자라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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