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마녀(3)
“성검 말입니까?”
루시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이 천에 싸인 성검 위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떨림이 사라졌다.
“잘못 느끼신 것 아닙니까?”
루시아가 말했다. 댈런은 코를 긁적거렸다.
뭐야 이거. 분명 느껴졌는데?
“···귀신같군.”
루시아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앞서가는 흑마법사가 듣기 힘든 크기로 작게 속삭였다.
“알버스 삼촌께 들어서 아시겠지만, 댈런이 운반하고 계신 성검은 신성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통통.
그녀의 손이 천에 싸인 성검을 두드렸다. 아까 전의 기이한 진동과는 다른 투박한 울림이었다.
“보십시오. 저나 댈런처럼 주인 아닌 자가 건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잖습니까? 가까스로 타락하지는 않았지만, 악마의 마기 때문에 신성력도 완전히 잃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더이상 제대로 된 성검이라 부르기도 애매합니다만.”
댈런도 알고 있었다.
힘을 잃은 성검, 혹은 타락을 씻어낸 성검은 단단한 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막대한 신성력을 담아내던 그릇인만큼 어지간해서는 부서지지 않지만, 내재된 능력은 모두 날아가버린 뒤다.
게임 아이템으로 치면 내구도는 무한인데 특별한 옵션은 없는 무기인 셈.
물론 오랜 시간 성기사단의 비처에서 신성력을 공급받으면, 그 능력을 회복할 수 있기는 했다.
아니면 아주 간혹 있는 특별한 이벤트를 거치며, 신이 다시금 성검에 힘을 불어넣어주기도 했고.
그러나 전자는 백 년쯤 걸리는 일이고, 후자는 전설적인 성기사가 그 성검을 소지하고 있는 게 전제되어야 하는 이벤트.
둘 다 지금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상황이었다.
“흠.”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미심쩍긴 하지만, 재의 마녀를 코앞에 둔 이 순간에 신경쓸 일은 아니었다.
일행은 계속해서 숲속으로 들어갔다. 주변의 풍경은 갈수록 이질적으로 변해갔다.
이상하게 뒤틀린 나무들과, 누렇게 죽은 풀들. 마치 숲 전체가 생기를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유일하게 생기를 머금은 건, 그 사이사이 가끔씩 보이는 붉은 꽃뿐이었다.
죽은 잎사귀 사이에서 홀로 영롱한 꽃을 보며, 루시아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만드레이크······.”
“마녀는 사람을 바쳐서 만드레이크를 키워내고 있소. 악신과 모종의 계약을 맺고, 인신제사의 대가로 만드레이크를 인위적으로 증식시키고 있지. 저 숲은 그 때문에 죽어가는 거요.”
뻐드렁니 흑마법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루시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나도 모르겠소. 이제 와서 양심이라도 찔리나. 그냥 혼란스러운 것 같소.”
댈런은 뒤에서 뻐드렁니의 어깨를 툭툭 쳤다. 개소리 말고 잘 가기나 하라는 뜻이었다.
뻐드렁니는 말없이 발걸음을 빨리했다. 댈런은 그 뒤를 넓은 보폭으로 따라가며 말했다.
“수백 뿌리나 되는 만드레이크가 몇 주만에 자라났소. 아무리 마녀라고 해도, 혈통의 능력이 식물을 키우는 게 아닌 이상 이런 짓은 혼자 힘으로 못하지. 그러니 악신의 도움을 받은 걸 거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이 많은 만드레이크를 키워서 대체 뭘 하겠다고?”
“여관 주점에서 이야기했었지 않소? 이 도시에 살던 마녀는 인간에게 유독 독기를 가득 품은 마녀라고.”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댈런은 바쁘게 발을 놀리는 흑마법사의 뒤를 느긋하게 밟으며 이야기했다.
“이대로 몇 달이 더 지나서, 대략 천 뿌리가 넘는 만드레이크가 자라난다고 가정해 보시오. 그리고 만약 그 만드레이크가 동시에 뽑혀나와 비명을 지른다면?”
“···그 비명의 합창은 르비바흐에 닿고도 남겠군요.”
루시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르비바흐는 그 날로 죽음의 도시가 되는 거요.”
“마녀라 해도 그 뿌리는 같은 인간이라 배웠는데, 인간을 향한 복수심이 그 정도인 겁니까? 대체 왜···?”
루시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까진 모른다는 의미였다.
이번에는 둘러대는 게 아니었다.
재의 마녀가 언제부터 사람을 향해 칼을 갈았는지는 게임에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설령 누가 알려준대도 굳이 들을 생각은 없었고.
애당초 마녀라고 다 사악한 게 아니다.
모진 일을 당했음에도 인간에게 우호적인 마녀 역시 존재했다. 깃털의 마녀가 그 대표적인 예시.
결국 복수의 범위를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인류 전체로 확장시킨 건, 재의 마녀 본인이 선택한 길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녀가 인류의 멸망을 소원으로 택한 이상, 댈런이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마녀가 꾸미는 계획을 저지하고.
나아가 더이상 사특한 술수를 부리지 못하도록 처단하는 것.
‘그 계획의 첫 단추가 만드레이크를 비정상적으로 증식시키는 거지.’
수십 명을 인신공양해 얻은 힘으로 천이 넘는 만드레이크를 꽃피우는 것.
그건 마녀와 악마 사이의 계약에서 다음 단계를 위한 교두보였다.
그 만드레이크가 내지르는 비명의 합창을 이용해, 르비바흐를 포함한 근방 일대의 모든 인간을 제물로 바쳐버리는 게 이 계약의 진짜 핵심.
악신에게 수천 명에 달하는 제물을 바친 재의 마녀는, 계약에 따라 홀로 군대도 너끈히 상대할 힘을 얻게 된다.
그렇게 탄생하는 게, 게임 중반부 최악의 보스몹 중 하나로 손꼽히는 ‘타락한 재의 마녀’.
인간을 향한 증오가 흘러넘치는 마녀가, 혈통의 능력에 더해 악신의 힘까지 얻게 된 결과였다.
‘그말인즉, 적어도 아직까지 최악의 보스몹이 아니라는 소리다.’
이건 기회였다.
최악의 보스몹 중 하나를 사전에 처리할 기회.
지금의 마녀는 혈통의 능력만을 깨우쳤을 뿐, 아직 악신에게 힘을 하사받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그마저도 악마에 버금가게 위험한 적이긴 했으나, 아예 상대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완전한 힘을 얻은 재의 마녀는 성검의 악마나 대사도를 뛰어넘는 종말의 주역이 된다. 더 성장하기 전에 여기서 끝을 봐야 해.’
변한 건 없었다.
청동 구역의 낮은 거리에서, 거대 괴인이 될 존재를 미리 처리했을 때부터.
대계가 온전히 준비되기 전에 대사도를 처치하고, 아직 채 성검을 타락시키지 못한 악마를 쓰러뜨린 것까지.
그 중간중간 역행의 사도들과 놀 전사장, 프로그맨 부족을 처리한 것까지도 모두 같은 맥락이었다.
다가올 종말을 미리 저지한다.
그리고 그 종말에 삼켜졌던 시체들을 회수한다.
비록 그라는 변수에 대응해, 종말 역시 빠르게 패를 내보이기 시작했지만.
‘종말의 손아귀들이 빠르게 다가온다면, 그보다 한 발 앞서서 그 손목 째로 잘라버리면 될 일.’
허리춤의 도끼머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댈런은 걷는 속도를 조금 더 빠르게 했다.
***
뒤틀린 나무들과 죽은 풀의 숲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댈런은 문득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비릿한 혈향과 정체 모를 역겨운 향취. 얼핏 보글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사악한 마력이 가까이 있습니다.”
뒤에서 루시아가 중얼거렸다. 댈런은 뒤를 돌아봤다.
검을 쥔 성기사의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는 감각을 한 번 흩뿌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다 온 것 같군.”
그 말대로였다.
우거진 나무들은 얼마 걷지 않아 사라졌다.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숲 한가운데 있는 넓은 공터였다.
가운데의 제단을 중심으로, 나무 한 그루 없이 탁 트이게 다져진 공간.
악신을 위해 만들어진 널찍한 돌제단 곁에는 커다란 철제 우리가 산 제물들을 가둬두고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큼직한 가마솥 안에서 무언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중이었다.
“파른?”
루시아가 놀라서 소리쳤다. 그녀는 곧장 우리를 향해 달려갔다.
철제 우리 안에는 스물에 달하는 사람들이 갇혀 신음하고 있었다.
사지 중 한두 개를 잃은 채 어떤 약에 취한 듯, 반쯤 이성을 잃고 멍하게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들.
댈런은 루시아의 외침을 듣고서야, 뒤늦게 그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파른! 파른! 괜찮니? 정신 차려봐!”
쇠창살을 흔드는 성기사의 손길에 가까스로 눈을 뜨는 소년.
갈리오스 상단을 호위하던 소년 용병 파른은, 한쪽 눈이 파이고 왼팔이 잘려나간 몰골로 다른 제물들과 함께 우리 안에 처박혀 있었다.
“으···으에······. 기사···님?”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아니, 잠시만 있어봐. 금방 구해줄게!”
끼기기긱!
우악스레 쇠창살을 벌린 루시아가, 용병 소년을 필두로 갇혀있던 제물들을 한 명씩 꺼내어 풀밭에 눕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뻐드렁니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마녀께선 안 계신 건가?”
당황한 목소리. 하지만 동시에 안도한 기색도 엿보인다.
댈런은 무시하고 가마솥 안을 들여다봤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쭉한 내용물.
둥둥 떠다니는 기름기와 거품 안쪽으로 푹 익은 뼈와 살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뭘 넣고 끓인 스튜인지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뼛조각들의 크기와 모양부터가 명백한 증거였으니까.
“시발 식인종 새끼.”
댈런은 솥을 쾅 걷어찼다. 내용물이 왈칵 쏟아지며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것들도 함께 바닥을 굴렀다.
덜 녹은 사람의 팔다리와 머리통, 토막난 몸뚱이의 조각들이었다.
그때 어떤 목소리가 공터를 울렸다.
“쯧쯧쯧. 우리 성기사와 야만인에게는 밥상머리 예절부터 다시 가르쳐야겠구나.”
스르르르.
뿌연 하늘에서 무언가 흘러내린다.
마치 밤새 숱을 태운 통을 기울여, 그 안의 재를 쏟아내는 듯했다.
하늘에서 쏟아진 잿더미는 공터 외곽에서 꾸물거리더니, 이내 인간의 형상으로 서서히 일어섰다.
“남이 차려놓은 밥상을 엎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돌아가신 부모님이라도 가르쳐주지 않으시던?”
***
음습한 바람이 재를 흩날린다.
그 잿바람 가운데 선 존재는 두건을 쓰고 등이 굽은 노파였다.
두건 아래로 빛나는 노란 눈.
그 눈을 마주한 뻐드렁니 흑마법사가, 단박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마, 마녀님!”
“이런, 쯧쯧. 한스. 오늘 제물을 상납하는 게 자네 차례였지?”
마녀는 뻐드렁니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녀는 굽은 허리를 두드리며 흑마법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한스야, 한스야. 이 노친네가 뭐라 말하던?”
“마녀님. 제 뜻이 아니었습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마녀님 앞으로 이끌라고 해서···!”
“고르고 골라서, 적당한 제물을 가져오라지 않던?”
마녀가 히죽거렸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웃음이었다.
그러나 입꼬리와 함께 말려올라간 자글자글한 주름은, 그 웃음을 악마의 미소 정도로 보이게 만들었다.
“이 노친네는 마귀할멈이라, 말 안 듣는 아이는 잡아먹어야 성에 차거든.”
“아, 아아······!”
마녀가 손가락을 슬쩍 움직였다.
그러자 뻐드렁니의 머리가 펑 하고 뽑혀나갔다.
코르크 마개를 따듯이, 숲 저편으로 날아가버린 뻐드렁니의 머리통.
쓰러진 시체의 목에서는 피 대신 잿가루가 슬슬 흘러나온다.
“끌끌. 그러게 노친네가 말을 하면 들어먹어야지. 그게 예의 아니겠니.”
흑마법사의 시체를 발로 꾹꾹 밟아대며 클클거리는 마녀.
“···재의 마녀.”
그때 제물로 붙잡혔던 포로를 전부 구출해낸 루시아가, 포로들의 앞을 막아선 채 검을 뽑아들었다.
“아직 살아있는 마녀의 네 혈통 중에서도, 재의 혈통만큼은 기사단의 서고에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그녀의 신성문신이 빛을 뿜었다.
동시에 검을 뒤덮은 채 타오르는 단마의 백염.
“개과천선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악인으로, 악마와 동일하게 취급하라고.”
“···호오. 심문관이셨나.”
입꼬리를 꿈틀거리는 마녀를 향해, 루시아는 방패와 검을 앞세우고 선언했다.
“대륙의 균열을 수호하는 성기사단의 심문관 루시아 카스타챌드는, 지금 이 시간부로 재의 마녀를 처단하겠―.”
패래래랙―!
선언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날아든 빛의 원반이, 여유롭게 웃고 있던 마녀의 미간에 정확하게 틀어박힌 것.
어벙해진 얼굴로 댈런을 쳐다보는 루시아를 향해, 댈런은 머리에 도끼 꽂은 마녀를 고갯짓했다.
“쓸데없이 힘 뺄 거 없소. 저건 가짜요.”
루시아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쓰러진 마녀를 다시 돌아봤다.
그러자 넘어갔던 시체가, 마치 시간을 되돌리듯 스르르 일어섰다.
“···어머, 야만인치고는 눈치가 빠르신걸?”
머리에 도끼를 꽂은 채로, 마녀가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