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56화 (56/288)

소문(3)

“어, 어떻게 아신 거요?”

두 피난민 중 남자 쪽이 입을 열었다. 수염이 조금 지저분하게 자란, 서른쯤 되어보이는 인상의 사내였다.

댈런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보통 소문이 사람보다 빠르지.”

꼬르륵.

그때 수염 남자의 배가 우렁차게 꼬르륵거렸다.

뭐라 더 말하려던 남자는 배에서 난 소리가 민망한 듯 입을 닫았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그는 모포 곁에 놓인 배낭에서 육포와 마른 빵을 꺼냈다.

“먼 길 오느라 배고프시겠군. 좀 드시오.”

두 피난민은 잠깐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육포와 빵을 받아든 그들은, 이내 걸신들린 듯 음식을 입에 쑤셔넣기 시작했다.

사실 마른 빵과 질긴 육포가 급하게 먹기 좋은 음식은 아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마치 며칠을 굶은 것처럼 허겁지겁 먹어댔다.

댈런은 그걸 가만히 보다가, 배낭에서 가죽 수통을 끌러 건네며 말했다.

“이 길로 나흘쯤 가면 르비바흐라는 도시가 나올 거요. 일거리가 필요하면 거기서 찾으시오. 근래 돈 많은 상인들이 죄다 몰려왔으니, 당장 먹고 살기 어렵지는 않을 것 같군.”

“고맙소. 정말, 쿨럭! 고맙소이다.”

수염 남자가 두 볼에 빵조각을 잔뜩 쑤셔넣은 채 말했다. 그는 완전히 감격에 젖은 눈이었다.

그때 수통으로 목을 축인 피난민 여자가 입을 열었다.

“혹시 어떻게 사례하면 될까요? 저희가 당장 대가로 드릴 만한 게 별로 없어서······.”

“대가를 바란 게 아니니, 부담 갖지 마시오.”

댈런은 긴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헤집으며 덧붙였다.

“정 뭣하면 무덤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는 그 소문이나 더 말해주시오. 타지에서 온 여행객에게 듣는 이야기만큼 밤을 지새우기 좋은 것도 없거든.”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여자는 육포 조각을 뜯어 입에서 천천히 굴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동네에 소문이 돌았습니다. 오래된 악마가 봉인에서 풀려나, 제국 북부에 강림한다는 소문이었죠.”

“악마 말이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사교도들이었어요. 어디선가 나타난 사교도들이 마을 광장에서 외치기 시작했죠. 종말이 다가온다느니, 악마께서 강림하실 제단을 준비하라느니······. 마을 청년들이 아무리 쫓아내도, 다음 날만 되면 다시 나타나더군요.”

“진짜로 극성인 놈들이었소. 으으!”

배를 좀 채웠는지, 빵과 육포를 내려놓은 수염 남자가 치를 떨었다. 여자 역시 눈살을 찌푸린 채였다.

사실 사교도라 해서 다들 역행의 사도들처럼 거대한 조직을 이루는 건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이 사교도라 부르는 작자들은, 본인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마을 광장이나 성문 앞에서 난동을 부려대는 걸인들을 의미했으니까.

그들은 대부분은 남루한 옷차림에 떡진 머리를 한 미치광이들이었고, 간혹 사기꾼들 한둘 끼어있었다.

몇 대 두들겨 쫓아내도 어느새 다시 돌아와 이름 모를 신의 계시를 소리쳐대니, 주민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바퀴벌레 같은 존재인 셈.

‘그나저나 악마에 대한 소문이라. 조금 이른 감이 없지는 않군. 게임 중반부쯤 되면 흔한 이벤트이긴 한데.’

댈런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중반부에 본격적으로 접어들면서, 마물들은 더욱 활개를 치고 대륙 곳곳에는 전운이 감돌게 된다.

지난 세월 댈런의 활약이 없었다면, 당장 미궁도시만 해도 몇 년 뒤쯤 개판이 되는 걸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역행의 사도들이 청동 구역을 뒤엎고, 성검 든 악마와 거대한 놀 무리는 미궁 1층을 휘젓고 다녔겠지.

그 정도 상황이면 악마에 대한 소문 정도야 그닥 중요한 이벤트도 아니게 된다.

기껏해야 변방 도시나 시골 마을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이드 퀘스트 정도일까.

‘물론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지.’

아무리 곳곳에서 크고 작은 이변이 일어난다지만, 대륙의 정세는 아직 중반부에 접어들기까지 한참 떨어져 있었다.

때문에 지금 시점에서 악마에 대한 소문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단순한 소문에서 그치면 모를까.

사령술사에 언데드까지 나타나는 상황이었으니까.

“처음에는 다들 헛소문이라 여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달라졌죠. 밤만 되면 무덤에서 죽었던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니까요.”

여자는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곁에 있던 수염 남자가 그녀를 토닥이며 대신 말을 이었다.

“떠나기 전에는 이런 소문까지 들었소. 산 속의 어느 동굴에 악마가 봉인되어 있고, 사령술사들이 그 봉인을 푸는 의식을 벌이는 중이라더군. 악마라니.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아내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소.”

“고생이 많으셨군.”

수염 남자는 작게 웃었다. 약간 허탈한 웃음이었다.

댈런은 모닥불에 장작을 몇 개 더 올려놓으며 물었다.

“그 봉인되었다는 악마. 그게 무슨 악마인지는 모르시오?”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불사의 악마라 했던 것 같소.”

***

‘불사의 악마라.’

다음날.

일행과 함께 말을 타고 남쪽으로 향하며, 댈런은 머릿속으로 어제 나눴던 대화를 끊임없이 복기했다.

‘불사의 악마. 그렇지. 제국 북부의 렝클턴 마을. 사교도들과 언데드의 등장. 모두 불사의 악마를 가리키는 증거였어.’

어째서 진작에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렇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사실 기억 속 수천 개에 달하는 이벤트와 퀘스트들 사이에서 정답만을 골라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어느 순간 제일 낮은 능력치가 되어버린 지능 수치를 좀 더 올려야겠다고 다짐하며, 댈런은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어쨌든 이렇게 되면 이 게임에서 가장 짜증나는 놈이랑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건데.’

불사의 악마.

놈은 말 그대로 죽지 않는 악마였다.

물론 악마라 하면 다들 필멸자의 궤를 벗어난 놈들이긴 했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과는 달리, 그들에게는 병들거나 늙어서 죽는다는 개념이 없었으니까.

다만 불사의 악마 같은 경우는 그 개념이 조금 달랐다.

놈의 ‘불사’는 문자 그대로 절대 죽지 않다는 의미였다.

‘검신이 오의 중 하나를 써서 걸레짝을 만들고, 거기에 마녀의 주문과 기사단장의 신성력을 함께 쏟아부어도 안 뒈졌지.’

어느 회차에 벌였던 기행을 떠올려보며, 댈런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불사의 악마가 가진 무력 자체는 그리 막강하지 않았다.

악마의 기준이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마물의 기준으로도.

불사의 능력을 제외하고 따져보면, 일전에 죽였던 놀 전사장 바르구프 정도 될까.

그럼에도 죽지 않는다는 그 능력 하나 때문에, 놈에게 잘못 걸리면 그 회차는 망했다고 봐야 했다.

대륙 끝까지 쫓아다니며 온갖 저주를 걸어대는 악마를 곁에 두고, 제대로 된 싸움이라는 게 가능할 리 없었으니까.

‘놈이 활동하는 영역을 피해가려면, 정말 한참을 돌아가야 할 텐데······. 잠깐. 어쩌면···?’

그때 문득 어떤 아이디어 하나가 댈런의 뇌리를 스쳤다.

댈런은 곧장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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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댈런

레벨 : 13

[근력 : 32] [기량 : 21] [체력 : 28]

[감각 : 20] [지능 : 19] [마력 : 20]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용혈의 재생 인자(C), 도약(E), 불꽃 화살(D), 급속 빙결(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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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글자들이 주르르 떠오른다.

처음 미궁도시에 발을 들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빼곡해진 상태창.

뒷골목의 허름한 여관에서 첫 스킬을 얻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 개나 되는 스킬들이 그의 상태창에 들어차 있었다.

능력치 역시 도합 50이 넘게 상승했다.

거기다 지능 수치를 제외하면 이제 모두 20대였다.

숲에서 캐낸 만드레이크 두 뿌리 중 하나를 먹어, 체력과 마력이 추가적으로 하나씩 오른 결과.

안타깝게도 이런 종류의 영약들은, 종류별로 한 번밖에 능력치를 올려주지 않는다는 제한이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댈런은 마녀를 쓰러뜨린 날, 용혈의 여파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르비바흐 숲을 이 잡듯이 뒤졌으리라.

‘어쨌건 이 정도면 충분히 가능성 있겠군. 마녀를 죽이고 얻은 것들이 마침 부족한 부분을 메꿔줬어.’

문득 떠오른 발상이 계획으로 구체화되기까지는 한순간이었다. 댈런은 상태창을 바라보며 가만히 가능성을 점쳐보았다.

그런 그에게 루시아가 말을 걸어왔다.

“피난민들이 남긴 말에 대해 생각하십니까?”

느닷없이 정곡을 찌르는 말. 댈런은 말없이 코를 긁적였다.

루시아는 먼 지평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관을 조심하라 했던가요. 돌아가는 게 나으렵니까?”

아, 그 말을 얘기한 거였나.

아침에 헤어지며 피난민 부부가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길목에 있는 여관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고. 다만 이상하게도 그 이상의 언급은 피하는 눈치였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여관이 있는 곳은 작은 숲을 가로지르는 길목이오. 돌아가면 시간이 배는 더 걸릴 테지. 반대로 그만큼 피난민들이 많이 거쳐갔을 테니, 언데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도 좋을 거요. 더불어···.”

파른이 꽤나 지쳐 보이기도 하고. 그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루시아는 살짝 시선을 돌려 뒤를 보았다. 파른은 말 안장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닷새째 이어지는 노숙과, 익숙하지 않은 승마의 피로가 소년의 체력을 착실하게 깎아먹고 있었던 것.

결단코 내색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가상했지만, 이런 종류의 피로는 방치하면 더 큰 사고를 부르는 법이다.

“하루는 푹 쉬었다 가야겠군요.”

루시아는 그렇게 말하고선 말의 속도를 살짝 늦췄다. 그녀의 말이 소년의 말 근처로 붙어갔다.

“···으음!”

뭔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자마자 번쩍 눈을 뜨는 소년.

파른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빠르게 사방을 돌아보며 주위를 경계했다.

루시아가 지난 며칠 승마와 검술 등을 교육하며 조언한 것들을, 착실하게 따르는 모습이었다.

‘뭘 해도 될 녀석이군.’

댈런은 낮게 웃었다.

***

일행은 그날 저녁 늦게 여관에 도착했다.

상행로는 이름 모를 작은 숲 한가운데를 관통했고, 여관은 그 숲길 오른편에 붙어있었다.

“우와. 진짜 크다······.”

파른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오랜만에 보는 아이다운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외딴 숲 한가운데 있는 저택 같은 외형이, 소년의 마음을 동하게 한 듯했다.

“국경선 근처라 오가는 상인들이 많아서 그래. 국경만 넘으면 바로 마을이니까, 재료 수급도 원활할 거고.”

루시아가 소년의 곁에서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여관은 4층 규모였다. 1층은 주점 겸 여행물품을 파는 잡화점을 겸했고, 그 위로는 전부 객실이었다.

상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걸 생각했는지, 건물 옆에는 큼직한 마굿간도 하나 있었다. 마굿간에는 이미 짐수레와 말들이 여럿 묶여있었다.

다만 어째서인지 안내하는 직원은 따로 없어보였다.

곧장 마굿간으로 말을 몰아가는데, 루시아가 다가오더니 작게 속삭였다.

“댈런.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왜 그러시오?”

“미약하게나마 사악한 마력이 느껴집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느꼈소.”

어째서인지 스산한 공기. 그 속에 옅게 스며든 향취는 전사의 코가 쉽게 놓칠 수 없는 종류였다.

“피 냄새가 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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