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의 악마(1)
굴러다니는 밧줄로 흑마법사 루카챌라를 묶어놓고 돌아오니, 주점은 거진 다 정리된 상태였다.
눈을 희번뜩대던 언데드들은 죄다 가슴팍이며 머리통이 함몰된 채였다. 루시아와 파른은 그 시체를 주점 밖으로 옮기고 있었다.
“금방 끝냈군.”
“사령술사가 죽은 이상, 망자들은 실 끊어진 인형일 뿐입니다.”
망치에 얻어맞은 듯 머리가 으깨진 시체를 주점 밖에 던져놓으며 루시아가 말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대부분의 언데드들은 사령술사를 주체로 삼아 힘을 얻는 존재.
죽음의 기사나 리치처럼 고위 언데드가 아니라면, 사령술사가 사망한 순간 본래 내던 힘의 반의 반도 채 내지 못한다.
물론 손톱과 이빨에 묻은 시독은 여전히 위험하지만, 루시아 정도 되는 성기사에게 문제될 건 아니겠지.
피부와 근육의 내구도를 강화시키고, 각종 저항력을 올리는 신성 문신만 사용하더라도 저런 맨몸뚱이 언데드의 공격은 하루 온종일도 맞아줄 수 있을 테니까.
결론적으로 갑옷과 무기를 두고 왔음에도, 그녀가 서른에 달하는 언데드들을 전부 정리하는 데는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루시아 기사님! 막 온몸에서 빛이 번쩍이고, 주먹이 여러 개가 되고 하는 것도 기사단에서 배우는 건가요?”
파른이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하나뿐인 팔로 시체를 옮기느라 낑낑대면서도, 소년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 하나 묻어나지 않는다.
예전 갈리오스 상단이 오크 무리의 습격을 받았을 때도 저랬더랬지.
많이 회복된 소년의 모습에, 댈런은 무심코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주먹이 여러 개라. 나도 배워보고 싶군.”
“그냥 빠르게 내지른 겁니다. 파른, 기사단에서 열심히 수련하면 너도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거야.”
“정말요? 우와! 열심히 하겠습니다!”
소년이 입을 딱 벌리고 소리쳤다. 루시아는 소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오늘 아침 피난민 부부를 떠나보낸 뒤 그녀는 말했다.
본단에 도착해 의뢰가 끝나면, 소년을 성기사단에 입단시키겠다고 말이다.
지난 며칠간 파른을 가르쳐온 결과, 소년의 재능이 생각 이상으로 뛰어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성실함이나 영특함 역시, 그 나이대의 아이들에 비하면 월등하다는 말로도 부족했고.
댈런까지 합세해 주점을 정리한 일행은 곧장 지하실로 내려가 사람들을 구출했다.
여관을 점거한 패거리가 모든 사람을 죽인 건 아니었다.
놈들이 죽인 건 원래 여관을 운영하던 사람들과, 쉬어가기 위해 방문한 상인 일행들뿐.
스무 명이 조금 안 되는 피난민들은, 지하에 갇혀 꽁꽁 묶인 채 딱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음식과 물을 배급받고 있었다.
구출해낸 피난민들을 루시아에게 맡긴 댈런은, 밧줄과 주문살해자로 포박된 흑마법사를 4층의 구석진 방으로 끌고 갔다.
‘사령술사들이 불사의 악마를 봉인에서 풀어내려 한다고 했지. 그리고 여관을 조심하라는 말도 남겼다.’
댈런은 어젯밤 만났던 피난민 부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하실에 갇혀있던 피난민들에게 물어보니, 피난민 부부는 가까스로 여관에서 탈출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흑마법사 루카챌라의 패거리 역시 불사의 악마와 분명 어떤 연관이 있을 터.
그리고 루카챌라 정도 되는 실력자라면, 피난민 부부에게서 듣지 못한 전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
사실 식인 마법사를 이 시점에 여기서 만났다는 것부터가, 댈런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기는 했다.
게임에서 루카챌라는 재의 마녀를 따라다녔지, 불사의 악마와 엮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재의 마녀는 악신과의 첫 계약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죽었지. 반면 불사의 악마는 예정보다 훨씬 일찍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고.’
결국 종말이 그 움직임을 서두르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미래 역시 원래의 역사와는 다르게 꼬인 것이다.
얼마 전 갈리오스 상단을 습격한 두 오크 지휘관의 경우와 비슷했다.
“으, 으으······.”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들렸다. 댈런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여관 꼭대기 층의 제일 구석진 방 안.
식인 마법사 루카챌라는, 팔다리가 묶이고 팔뚝에 주문살해자까지 꽂힌 채로 바닥에 무릎 꿇려져 있었다.
댈런은 무심한 얼굴로 탁자에 턱을 괴었다. 그가 말했다.
“언제쯤 입을 열 생각이냐.”
“나, 난 몰라.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루카챌라는 고개를 저어댔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저 대답만 벌써 몇 번을 들은 건지.
그나마 다행인 건 저 식인 마법사가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표정과 말투에서부터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티를 팍팍 내는 중이었으니까.
“나는 몰라. 정말이야······.”
문제가 있다면, 그렇게 티를 내면서도 끝끝내 제대로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
심문을 시작한 지 벌써 10분째였다.
흑마법사를 대하는 댈런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기에, 심문이 좀 더 길어지면 루카챌라는 그냥 죽을지도 몰랐다.
“지랄 말아라. 렝클턴 마을 근처에서 사령술사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
“무슨 일? 난 진짜 모른다니까. 난 그저 사람 고기가 먹고 싶었을 뿐이라고! 네가 원하는 답과는 전혀 연관이 없어!”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금껏 했던 말을 또 한 번 반복하는 루카챌라.
눈물 콧물에 침까지 줄줄 흘리는 모습은, 얼핏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가 수십 명의 사람을 잡아먹은 살인귀라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분명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끼익.
댈런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흑마법사에게 다가가 팔뚝에 꽂힌 단검을 잡아 뽑았다.
찌지직!
서로 얽힌 두 개의 검날이, 뽑혀나오는 과정에서 살점을 죄다 찢고 뜯어낸다.
흑마법사는 눈이 뒤집힌 채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이렇게 나오면 성기사를 부르는 수밖에 없다. 단마의 백염에 타죽고 싶지는 않겠지.”
푸욱!
재차 단검을 꽂은 부위는 허벅지.
“끄으으윽!”
단검이 품은 힘이 마법사의 감각을 뒤흔들며, 단순한 육체의 통증 이상의 고통을 가한다.
“흐, 흐흐흐···알았어. 알았다고······.”
단마의 백염까지 언급하자, 끝끝내 버티던 정신력이 마침내 무너진다.
육체의 고통과 성기사의 흰 불꽃을 향한 두려움에, 그녀의 동공은 아예 반쯤 풀린 채였다.
댈런은 단검 손잡이를 놓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불사의 악마. 놈의 봉인을 풀기 위해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던 게 아닌가?”
“아니···야. 불사의 악마는······.”
마침내 그 입에서 기다렸던 단어가 흘러나온다.
그 순간이었다.
“악마···는···끄르륵, 끄아아악!”
흑마법사의 턱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입에서는 부글거리며 녹색 거품이 솟아올랐다.
곧 얼굴과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고름이 왈칵 쏟아지더니, 흑마법사는 그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철퍽 엎어졌다.
“끄윽, 끄으윽······.”
고통 속에서 부들거리는 몸뚱이.
그것마저도 오래지 않아 잦아들었다.
댈런은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엎어진 시체를 뒤집어보았다.
“···흠.”
흑마법사의 몰골은 처참했다.
온몸은 피고름으로 범벅이었고, 입이나 눈 같은 연조직에는 푸르딩딩한 곰팡이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 순간 어깨에 새겨진 저주막이의 인장이, 잠깐 빛을 발했다가 잠잠해졌다.
“···이런.”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댈런은 모르지 않았다.
‘저주.’
그것도 발동될 때의 여파만으로도, 인장이 잠시나마 반응할 정도로 강력한 저주였다.
‘이건 예상 밖이군.’
댈런은 손을 뻗어 시체를 회수하며 생각했다.
[스튜가 된 현자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지능 +3]
‘루카챌라 정도 되는 흑마법사를, 특정 단어를 내뱉자마자 죽일 수준의 저주라.’
이건 결코 일반적인 저주술사의 실력이 아니었다.
상당한 수준의 지능 수치를 얻어, 고양감에 한껏 달아오른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저주술에 능한 존재의 목록을 나열하고, 지금쯤 이 근방에서 활동할 수 있을 만한 이들을 순식간에 추려냈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이번 사태에 엮여있을 만한 존재.
그 중에서도 이 정도로 저주에 능한 존재라면, 사실상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곤란하게 됐군.’
댈런은 시체에서 뽑아낸 주문살해자를 잘 닦아, 허리춤에 꽂아 넣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불사의 악마는 이미···.’
똑똑똑.
그때 루시아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댈런. 지하에 갇혀 있던 피난민들 중 한 명이 이 사건의 전말을 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군.”
댈런은 흑마법사의 시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루시아는 그제야 처참한 몰골이 된 시체를 발견하고는, 한층 심각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예. 불사의 악마가 이미 봉인에서 풀려났답니다.”
***
다음날 아침, 세 사람은 새벽같이 여관을 나섰다.
악마가 봉인에서 풀려났다는 사실을 접한 이상, 한 순간도 지체할 수 없었다.
동틀녘부터 말을 타고 달린 끝에, 그들은 하루 만에 국경을 넘어 렝클턴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늦게 여관을 잡은 그들은, 이후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 한 방에 모였다.
탁자 위에 놓인 건 큼직한 맥주잔 하나와 꿀물을 담은 잔 두 개.
맥주잔은 진작에 비었고, 루시아는 꿀물을 천천히 홀짝이고 있었다.
“크어. 으음,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파른은 꿀물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탁자 위에 꾸벅꾸벅 머리를 들이박는 중이었다.
본격적으로 승마를 시작한 지 며칠밖에 안 된 소년이다.
전속력이 아니라지만 열 시간이 훌쩍 넘도록 말을 달렸는데, 피곤하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겠지.
댈런은 허리띠에 손을 꽂은 채 창가 벽에 등을 기댔다. 그는 머릿속으로 증인을 자처한 피난민 여자의 말을 되새겼다.
‘마을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런 사람들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겔트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함께 자라온 상인이었고, 그 여자는 겔트가 신원을 보증한 약초꾼이었거든요.’
겔트는 댈런이 머리에 도끼를 꽂아버린 사령술사의 이름이었다. 그 여자라는 건 다름 아닌 식인 마법사 루카챌라를 의미했고.
루시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겔트와 피난민 여자는 ‘부적절하게 몸을 섞은 관계’였다.
그 때문에 그녀는 잠자리에서 겔트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그중에는 악마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었고.
“정리하자면 불사의 악마가 이미 봉인에서 풀려났고,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흑마법사와 사령술사들을 시켜 은금 패물과 비보, 그리고 희생물들을 모아오라 했다는 거군.”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말을 안 듣는 몇몇에게는, 본보기로 끔찍한 저주를 내렸고요.”
따뜻한 꿀물을 한 모금 마시며 루시아가 덧붙였다.
아무래도 식인 마법사 루카챌라는 그 본보기에 속했던 모양이었다.
피난민 여자에게 잠자리에서 온갖 정보를 털어놓고도 살아남은 사령술사와는 달리, 그녀는 악마의 이름만 입에 담고도 그 자리에서 저주로 죽었으니까.
“이제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루시아가 물었다.
댈런은 벽에 몸을 기대선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슬쩍 내다보았다.
렝클턴은 작은 마을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여관은 하나뿐이었다.
그나마도 상행로 곁에 위치한 마을이라, 그 하나뿐인 여관이 3층짜리나 되는 건물을 사용하는 것일 테였다.
다른 변방 마을이었다면, 여관은커녕 마을에 하나 있는 주점에서 모포를 깔고 잤겠지.
댈런은 여관 3층에서 마을의 정경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 오래 머무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것 같소.”
마을의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웠고, 외지인에게 노골적으로 적대적이었다.
종말을 외치는 사교도들이 극성을 부린 지 벌써 몇 주나 되었다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거기다 얼마 전부터는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돌아다니고, 악마에 대한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으니 더더욱 그렇겠지.
이런 상황에 마을 분위기가 정상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까 주점에서 대화를 엿들어보니, 사건의 해결을 위해 제국군이 곧 마을에 들이닥칠 거라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괜히 외지인으로 머물다가 휘말리면 성검을 운반하는 데도 차질을 빚겠군.”
댈런은 등 뒤, 천으로 꼼꼼하게 둘러싸놓은 성검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는 여관에 들어와서도 성검은 물론, 갑옷을 포함한 일체의 무장을 풀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도 그럴 듯합니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검만 풀어뒀을 뿐 갑옷 차림 그대로였다.
흉흉한 소문이 도는 와중인 만큼, 주민들이 언제 돌변해 외부인인 그들을 적대시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앉은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파른을, 편하게 탁자 위에 엎드리게 하며 물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바로 떠나면 되겠습니까?”
“내 짐과 말도 챙겨서 출발해주시오. 상행로에서 마을 쪽으로 빠지는 삼거리. 동틀녘에 그곳에서 보도록 하지.”
루시아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댈런은 함께 안 가십니까?”
“나는 밤새 할 일이 있소. 악마를 잡아올 것이오.”
“풉―콜록, 콜록, 예?”
댈런의 선언에 루시아가 꿀물을 들이키다 말고 뿜어버렸다. 그녀는 얼굴이 꿀물 범벅이 된 채 연신 기침을 해대며 되물었다.
“기, 기사님! 손수건···.”
곁에서 졸던 파른이 그 소란에 놀라 허둥지둥 손수건을 찾았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흑마법사가 당한 저주를 봤잖소. 그쪽은 성기사니 저항할 수 있고, 나 역시 나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소. 하지만 파른은 아니지.”
그 말에 루시아에게 손수건을 건네던 파른이 약간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댈런은 벽에서 등을 떼고 걸어가, 소년의 머리를 부드럽게 헝클었다.
“파른을 데리고 동틀녘까지 삼거리로 나와주시오. 나는 오늘 밤 악마를 잡아 올 테니.”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댈런의 무력을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만,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불사의 악마가 위험한 이유는 저주 때문만이 아닙니다.”
루시아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검으로도, 신성력으로도 죽지 않았기에,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지극히 평범한 동굴에 봉인하였다.」 오래 전에 본 기사단의 문헌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 난 악마를 죽이겠다고 말한 적 없소.”
댈런이 웃었다. 그는 소년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한 번 헝클어뜨린 다음 방문으로 향했다.
“잡아 오겠다고 했지.”
우웅······.
방문을 나서며 남긴 말에, 허리띠에 매달린 주머니 하나가 은은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