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61화 (61/288)

내분(1)

“우와.”

소년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물렁―

손끝에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촉.

첫 감촉은 어린 짐승의 살갗처럼 말랑했다가, 조금 더 힘을 주자 손가락 반 마디 깊이까지는 스르르 묻혀버린다.

그러면서도 그 안쪽은 탄력이 있어서, 손을 떼는 순간 탱글거리며 곧장 형태를 회복했다.

“오오. 신기해.”

악마의 피부에 손을 문질거리면서, 소년의 눈빛이 점차 흥미로 물들어갔다.

소년은 하늘의 구름을 조금 뜯어 가져오면 이런 느낌일까 하고 상상했다.

물론 푸르른 하늘에 떠다니는 흰 구름은 아니고, 밤하늘의 어두컴컴한 먹구름이긴 하겠지만.

“재밌나?”

“어, 음······예. 헤헤.”

소년은 해맑게 웃으며 악마의 머리를 통통 두드렸다. 댈런은 그 모습을 보며 낮게 웃었다.

유일하게 불편한 이는 악마 본인뿐이었다.

하긴, 명색이 악마인데 십대 소년의 장난감이 됐으니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그러나 댈런이 보고 있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그저 불편한 침음을 흘릴 따름이었다.

“눈이 좀 무서운 거만 빼면 괜찮은 친구 같아요.”

“음. 눈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지.”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밧줄을 휙 당겨 악마를 들어올렸다.

“케엑―!”

수박만 한 크기의 악마가 눈앞에서 대롱거렸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놈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비록 수박 크기로 줄어들긴 헀지만, 겉모습 자체는 수 미터짜리 거체일 때와 비슷한 형태였다.

거무튀튀한 찰흙덩이 같은 몸체.

짧지만 고무줄처럼 죽죽 늘어나는 팔다리.

그리고 몸통 한가운데 갈라진 틈처럼 보이는 입과 검붉게 박힌 두 개의 눈.

그중에서도 두 눈이야말로 가장 악마답다고 할 만한 부위였다.

흰자위 없는 검붉은 눈은, 깊이 들여다보면 어떤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어 충분히 소름돋을 법했으니까.

“야.”

“아, 예. 주인···님······.”

거듭 시선을 피하던 악마가 안절부절 못하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댈런은 씩 웃었다. 그가 말했다.

“너 눈깔 색도 바꿀 수 있냐?”

“···가능은 합지요.”

“바꿔봐. 좀 봐줄 만한 눈깔로.”

악마는 살짝 불만인 표정이 되었다. 물론 오래 가지는 않았다.

놈은 조막만 한 두 손을 눈으로 가져가더니 몇 번쯤 비벼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붉던 두 눈은 흰자위에 검은 동공이 있는 평범한 눈이 되었다.

“음, 훨씬 낫군.”

댈런은 밧줄을 내려 악마를 소년의 곁에 놓아주었다.

파른은 변한 악마의 눈을 보더니, 손을 뻗어 악마의 머리를 도담거리기 시작했다.

“헤헤, 귀여워졌네.”

“···댈런, 대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한 겁니까?”

루시아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였다. 죽일 수 없으면 두들겨 패서라도 굴복시켜야지. 달리 방법이 있나?

“성기사단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입니다. 그래서 결국 외딴 동굴에 봉인했던 것이고요.”

“생각은 했을 거요.”

댈런이 말했다. 루시아가 의문어린 표정을 지었다.

“기사단이 불사의 악마를 봉인한 건, 기사단의 전성기였던 삼백 년 전 악마 토벌기 시절 아니오? 할만의 사슬은 그보다도 백 년 전에 혈귀전쟁에서 잃어버린 물건이지. 기사단도 생각은 했을 거요. 실행할 성물이 없었을 뿐.”

“댈런은 가끔 이상할 정도로 박식하십니다. 평소랑은 전혀 다르게요.”

루시아는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던 손을 멈칫했다.

···내 평소 이미지는 뭔데 그럼?

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성기사는, 말 고삐를 빙글빙글 꼬아대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일정이 늦어지는군요. 기사단 쪽에서 며칠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국 영토 안에서 말을 못 타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여간 적응할 수 없는 문화라니까요.”

렝클턴 마을을 떠난 지 이틀째.

일행은 제국 가도를 따라 걸어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대륙의 삼분의 일을 홀로 지배하는 제국은, 그 크기만큼이나 잘 닦인 길로도 유명했다.

매끈한 판석을 고르게 깔고, 양 옆에는 배수로까지 파서 주기적으로 관리하는 제국의 가도.

그러나 의외로 불편한 것이, 바로 제국 가도에서는 아무나 말을 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귀족의 가문 구성원이나 기사, 아니면 전령만 말을 탈 수 있다니. 대체 무슨 법이 이렇답니까?”

“그만큼 제국은 귀족 계급이 중심축이라는 소리 아니겠소.”

“신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합니다. 제국의 황제든 영지에 묶인 농노든 간에, 신이 보시기에는 똑같은 필멸자일 뿐입니다.”

댈런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거 지나가던 제국 병사가 들으면 바로 포승줄로 묶어버릴 발언인데.

“그 와중에 말 이외의 짐승이나 마차를 타는 건 괜찮다고 하더군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루시아가 툴툴거렸다.

댈런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이야기이긴 했다. 제국에는 생각보다 이런 뭣 같은 법이 많기 때문이었다.

길 맞은편에서 귀족이 다가오면 가도를 잠시 벗어나서 가야 한다던지.

귀족이 여관에서 묵게 되면 양 옆의 방은 무조건 비워야 하는 등등.

이건 제국이 귀족 중심의 문화이기도 하거니와, 그 귀족과 기사의 숫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남작만 백수십에, 그 윗줄의 귀족들까지 하면 수백.

거기다 그 가문 구성원까지 하면 수천이 훌쩍 넘어가는 숫자였다.

준귀족이나 다름없는 기사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십만 이상까지 올라가겠지.

더 놀라운 건 이것도 예전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줄어든 결과라는 점이었다.

전대 황제는 중앙집권을 이룩하는 데 열심이어서, 쓸데없는 관직을 싸그리 정리하고 수많은 귀족 핏줄들의 대를 끊어버린 인물이었으니까.

그 손에 숙청된 귀족들만 기백에 달한다는 풍문이 돌 정도였다.

‘결과론적으로 황제의 권력이 몇 배나 강해지긴 했지. 그리고 중후반부의 재앙들 중 절반 가까이가, 그 비대해진 황권과 전쟁광 황제의 충동적인 행동 때문이었어.’

다행히 아직까지 전쟁에 대한 소문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종말이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오는 것 역시 사실.

어쩌면 이 땅에 평화로이 발을 들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댈런은 제국의 가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

세 사람과 악마 하나는 계속해서 남서쪽으로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일행은 하루에도 몇 번씩 기사와 병사들의 무리를 마주쳤다.

이유는 뻔했다.

종말이 다가오며, 전 대륙에 마물이 준동하는 상황.

제국이라고 사정이 다를 리는 없으니, 제국군은 마물이나 오크, 혹은 그들에게 밀려난 도적들을 토벌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었다.

종종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부상병들이 끼어있는 걸로 봐서,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제국 역시 토벌이 마냥 쉽지만은 않은 모양.

다만 그들의 노력 덕분인지, 가도 근처는 며칠 동안 평온했다.

중간에 상단 하나를 만나 옷가지와 식료품 조금을 산 것 이외에, 댈런과 일행은 별다른 일 없이 계속 나아갔다.

그렇게 렝클턴 마을에서 출발한 지 닷새째.

세 사람과 악마 하나는 마침내 국경 근처에 도착했다.

“저기 보이는군.”

댈런은 저 멀리 사람들이 줄을 선 검문소를 보며 말했다.

검문소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앞에 있었다.

북에서 남으로 흘러, 균열을 만나며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에스트라 강.

노리아 왕국으로 넘어가는 제국의 서쪽 경계는 강을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우와, 사람이 되게 많네요.”

파른이 말했다.

시력 좋은 아이는 저 멀리 깨알만 한 다리 위의 검문소도 잘 보이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건 댈런도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검문이 강화되었다 하더니 정말이군. 아무래도 짐 검사까지 다 하는 모양이오.”

“저희가 고기랑 채소를 산 그 수염쟁이 상인 아저씨 말이죠?”

“그래. 그 수염쟁이 상인.”

댈런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어깨를 움직여 배낭을 슬슬 흔들어보았다.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

그동안 따로 쓸 일이 없었기에, 가방에 든 금화는 이백 닢이 넘어갔다.

‘이거 잘못하면 통행세를 금화 단위로 뜯길 것 같은데.’

댈런은 턱을 쓰다듬으며 악마를 내려다봤다. 그가 말했다.

“야.”

“···예, 주인님.”

어느새 주인님 호칭도 익숙해진 악마가, 넋을 반쯤 놓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댈런은 밧줄을 툭툭 당기며 말을 이었다.

“너 아공간 있지 않냐.”

“···그렇습니다만.”

“좀 빌려야겠다. 어떻게 열지?”

댈런의 말에 악마가 머뭇거렸다.

놈은 땅딸막한 팔로 눈가를 긁적이며 말했다.

“주인님께 두들겨 맞으면서 마력을 바닥까지 털린 탓에···정해진 통로 외에 추가로 여는 건 안됩니다.”

“정해진 통로는 어딘데?”

악마가 손을 들었다. 놈이 가리킨 건 자기 입이었다.

“여기······.”

“됐군. 아가리 벌려라.”

“으으븝···!”

댈런은 곧장 가방을 벗어서 악마의 입에 밀어넣었다. 별달리 고민할 건 없었다.

불사의 악마는 원래 부정형의 존재. 사람처럼 식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내장기관도 존재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놈의 입은 그냥 아공간 주머니의 입구인 셈이었다.

“우욱···컥! 콜록! 콜록!”

가방을 삼킨 악마가 연신 기침을 해댔다.

놈은 자기 몸보다 몇 배는 큰 배낭을 집어삼키느라, 몸뚱이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돌아온 상태였다.

“······.”

“······.”

그리고 파른과 루시아는 곁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걸 바라봤다.

파른은 저 작은 몸뚱이에 큼직한 배낭이 들어간 걸 신기해했고.

루시아는 악마를 무슨 진짜 노예 부리듯 하는 댈런의 태도에 식겁한 것이었다.

물론 댈런은 그런 시선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악마의 아공간에 품속의 금화 주머니까지 집어넣은 뒤, 놈의 본체를 아공간에 숨어있도록 명령했다.

아쉽게도 성검은 아공간에 넣지 못했다.

한때마나 강력한 신성력을 품었던 물건이라, 악마의 아공간에 넣었다가 무슨 사태가 벌어질 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들리지? 금화 한 닢이라도 잃어버리면 서커스단에서 갚아야 할 거다.’

[······예.]

아공간 속의 악마를 속으로 윽박지르면서, 댈런은 자연스럽게 파른의 짐을 대신 짊어졌다.

저 멀리 보이던 검문소에 도착한 건 해가 뉘엿뉘엿 떨어질 무렵이었다.

늦은 손님을 맞게 된 경비가 피곤한 얼굴로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정지. 잠시 검문이 있겠다.”

하품을 쩍쩍 하며 손바닥을 펴는 수염 덥수룩한 경비. 갑옷에 독수리 문양이 양각되어 있었다. 기사였다.

“그대가 대표인가?”

“그렇소.”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 있나?”

댈런은 용병패를 꺼내주었다. 금패를 본 기사는 약간 놀란 얼굴이 되었다.

기사는 댈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말투가 바뀐 건 덤이었다.

“일행은 이렇게 세 명이오?”

“그렇소.”

댈런이 끄덕였다.

사실 하나가 더 있긴 하지만, 그건 사람으로 안 치니 세 명이라고 해도 거짓말은 아니겠지.

“어디서 오시는 길이오?”

“르비바흐. 성기사단의 본단으로 가고 있소.”

“본단 말이오?”

기사가 고개를 기울였다. 댈런은 손을 뻗어 파른을 앞으로 데려오며 말했다.

“이쪽은 내 이복동생이오. 성기사님께서 얘한테 성기사로서의 재능이 있다고 하셨소. 그래서 데려가는 길이지.”

기사가 졸린 눈을 큼직하게 떴다.

어린 소년과 덩치 큰 댈런이 형제라는 점에서 한 번, 그리고 그 곁의 로브를 두른 미인이 성기사라는 점에서 한 번 더 놀란 것이다.

루시아는 로브를 살짝 젖혀 성기사단의 문양이 새겨진 갑주를 보여주었다.

기사는 헛기침을 큼큼 하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소이다. 요즘 사령술사에 대한 소문이 팽배하다보니, 검문을 철저하게 하고 있소.”

“괜찮습니다. 악을 처단하는 일에는 모두가 협력해야 하는 법이죠. 귀하의 노고에 감사를 표합니다.”

기사는 쑥쓰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는 눈 둘 곳을 못 찾다가, 괜히 파른을 향해 칭찬을 쏟아냈다.

“허허, 꼬마 손님이 어린 나이에 험한 일을 좀 당한 모양이군. 그러고도 성기사님의 눈에 들었다니, 굉장한 무재겠소.”

“신의 은총을 입은 아이지요. 기사단에서 그 은총은 한 자루 검으로 연단될 겁니다.”

“허허허, 파웰이 그대들을 굽어보시기를.”

“전쟁의 신께서 함께하시길.”

성기사와 기사가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았다. 댈런은 그 와중에 손으로 덮은 작은 어깨가 으쓱해지는 걸 느꼈다.

기사는 일행에게서 기본적인 통행세만 받았다. 따로 짐 검사도 하지 않았다.

대륙을 지키는 성기사께 무례를 범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행이 별 탈 없이 검문을 통과하려던 찰나였다.

다그닥! 다그닥!

다리 건너에서 웅성임이 일었다. 곧이어 말발굽 소리가 다리 위로 이어졌다.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한 사내가 급하게 말을 몰아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정지! 여기서부터는 제국의 영토다! 말에서 내려서···”

“전령이오! 전령!”

사내가 소리쳤다.

그는 경비병의 코앞에서 말을 멈춰세우더니, 큼직한 패 하나와 문서를 들이밀었다.

기사는 미간을 팍 좁힌 채 그걸 낚아채서 살펴봤다.

그때 루시아가 사내를 보고 외쳤다.

“오클란?”

“루, 루시아 경!”

사내는 놀라서 마주 외쳤다. 그는 곧장 말에서 뛰어내려 다가왔다.

‘성전사?’

댈런은 빠르게 사내의 옷차림을 훑었다.

어두운 색의 로브. 가죽 갑옷에 새겨진 성기사단의 문양. 그 위에 튄 얼마 안 된 핏자국. 손과 목에 자잘한 상처들.

그는 성전사였다.

그것도 전투를 겪은 지 오래지 않은 성전사.

뭔가 불길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동안 지체 없이 루시아에게 다가간 사내는, 다급한 목소리로 루시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루시아 경. 단장님께서 경과 일행에게 피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루시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소리냐는 의미였다.

성전사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한층 심각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성기사단이 둘로 분열됐습니다. 내전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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