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63화 (63/288)

내분(3)

테른은 손을 들어올렸다. 그는 검지와 중지를 세워 붙이고, 전방을 향해 세 번 흔들었다.

‘전진.’

나아가라는 수신호였다.

자박.

신호를 받은 소대원들이 조심스레 풀숲을 헤치고 전진했다. 테른도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그들은 특임대였다.

성기사단에서도 뛰어난 인재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특수한 임무를 전담하는 부대.

최상급의 무구와 특수한 장비들로 무장하고, 그에 맞는 훈련을 받은 전투원들이었다.

스으―

검은 가죽과 무광 처리된 판금이 소리 없이 수풀을 스친다.

목까지 덮는 얇은 가죽옷과 얼굴에 쓴 가면은, 신성 문신의 빛마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막아주었다.

테른은 목 뒤쪽의 문신을 활성화했다. 시력을 강화해주고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게 해주는 신성 문신이었다.

‘저기 있군.’

백 걸음쯤 떨어진 나무들 사이. 목표물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이 오후부터 추격해온 성기사의 호위 의뢰를 맡은 용병.

놈은 북쪽 서리고원에서 내려온 듯한 덩치의 전사였다.

이 미터쯤 되는 키에 갑옷 위로도 선명하게 드러난 근육들. 검고 긴 머리와 마찬가지로 검은 눈동자.

검과 방패를 쓴다는 정보와 달리 놈은 방패 없이 검 하나만 달랑 차고 있었다.

그밖에 장비한 건 허리 뒤쪽의 단검, 오른 허리춤의 손도끼, 그리고 등 뒤에 사슬과 천으로 묶어둔 길고 넓적한 물건이었다.

길고 넓적한 물건.

‘성검.’

부단장이 말한 대로라면, 저건 여섯 번째 성검 토르타니스였다.

원래라면 본단의 비처에 잠들어있어야 할 기사단의 보물.

그러나 몇 달 전, 바렛이라는 성기사가 미궁도시로 수행을 떠나며 멋대로 들고 나가버렸다고 들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한 건지······.’

사실 테른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바렛의 이름은 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뛰어난 실력과 존경받을 만한 인품으로, 수습기사 시절부터 돋보였던 인재.

그런 이가 어쩌다가 성검을 도둑질한다는 생각을 한 건지.

아니, 그 전에 성검이 보관된 본단의 비처에 대체 무슨 수로 들어간 건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비처는 기사단장의 승인이 있어야지만 출입 가능한 공간.

설령 기사단장이 부재했을 경우라도, 부단장의 승인 없이는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었으니까.

‘···으음.’

그 순간, 머릿속에 어떤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테른은 방금까지 하던 생각이 어째선지 흐릿하게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작전 중에 쓸데없는 생각은 금물.

지금 중요한 건 눈앞의 목표였다.

‘놈이 가진 성검. 저건 어쩌면 이번 내전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는 물건이다.’

비록 악마의 손아귀에서 사실상 힘을 잃었다고 하지만, 어쨌든 성검은 기사단 최고의 보물이었다.

성검이 가진 정치적, 상징적 의미를 생각하면 분명 열세인 전황을 극복할 카드로 쓸 수 있을 테였다.

차르르르···.

그때였다.

야만인이 꿈지럭거리더니 성검을 뽑아들었다.

천과 사슬이 풀려나며 드러나는 푸른 검신.

은은하게 푸른빛을 머금은 검신을 보며 테른은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힘을 회복한 건가···?’

테른은 나아가던 걸음을 멈췄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수신호도 잊어버렸다.

분명 성검은 힘을 잃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빛을 내고 있지?

만약 성검이 처음부터 힘을 잃지 않은 것이라면, 저 야만인 전사는 성검의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성검의 인정을 받은, 신이 간택한 전사를 습격하려 한다는 의미.

성검이 진짜 힘을 잃었었다면 그게 더 큰 문제였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힘이 저 전사의 손에서 되찾아졌다는 소리니까.

단순히 인정을 받은 수준을 넘어섰다는 의미다.

‘크윽!’

복잡해지는 머릿속. 또다시 아까의 그 기분 나쁜 찌릿함이 머리를 파고든다.

‘임무에 집중하자. 임무에······.’

곧 혼란은 사라지고 목적만이 뚜렷해졌다. 테른은 찌푸렸던 눈을 부릅떴다.

그는 손을 들어 공격 신호를······.

“···어?”

눈앞의 전사가 사라지고 없었다.

강화된 테른의 시선이 포착한 건, 전사가 있던 자리에서 튀어오른 흙더미뿐.

순간적으로 끌어올려진 감각에, 나뭇가지가 연달아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끄아아아악!”

숲 저편에서 비명이 들렸다.

***

‘이걸로 다섯.’

댈런은 성검을 휘둘러 핏방울을 털어냈다.

그의 발밑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시체가 두 동강 난 채 식어가고 있었다.

그는 감각을 흩뿌려 다음 목표를 정했다. 그리고 다리에 다시 힘을 주었다.

퍼억!

발밑의 부드러운 흙이 터져나가며 그의 몸이 쏘아진다.

댈런은 땅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나무로 이동하며 도약 스킬로 가속을 거듭했다.

달빛조차 가려진 어둠 속.

그의 신형은 흐릿한 음영이 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흔들리는 풀숲의 그림자와 차이점을 느끼지 못할 정도.

신성 문신으로 안력을 강화한 특임대의 성기사들이라 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서걱―!

또 한 명. 잘려나간 상반신이 허공을 빙글 돌았다.

자리를 박차려던 댈런은 검을 휘둘렀다. 어둠 속에서 쏘아진 무언가가 그의 검에 부딪혔다.

꽈아앙!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며 불똥이 튀었다. 그 순간적인 섬광으로 쏘아진 물건의 형태가 드러났다.

‘사슬추?’

그건 끝에 작은 추가 달린 사슬이었다.

보통의 사슬추와 다른 점이라면, 풀숲 너머로 빠져나온 길이만 수 미터 이상이라는 것.

차르르르―!

사슬추는 공격이 막히자마자 쏘아졌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댈런은 수풀 사이로 모습을 감추는 흐릿한 궤적을 쫓아 달렸다.

얼마 가지 않아 사슬추를 수습하는 특임대원이 보였다.

“어, 어떻게···!”

당황하는 검은 가면. 댈런은 검을 내리그었다.

그 순간.

옆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콰앙―!

순간 시간이 느려진 듯 느껴졌다. 인간의 영역을 한참이나 초월한 그의 감각 수치가 만든 현상이었다.

느려진 시간. 가속된 감각. 그 사이로 비산하며 날아드는 납구슬들이 포착됐다. 시발. 산탄총이냐?

댈런은 내리긋던 검을 회수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날아드는 납탄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대신 그는 검 손잡이에 왼손을 더했다. 그리고 짧게 숨을 들이켰다.

스으으―

어깨로부터 마력의 소용돌이가 시작된다.

그 소용돌이는 성검이 사슬추를 든 특임대원의 머리와 가슴을 쪼개고 옆으로 빠져나올 즈음 손끝에 닿았다.

그리고 검끝에서 폭풍이 시작되었다.

쩌저저저정―!

크게 한 바퀴 휘둘러낸 검이, 그 휘둘러진 궤적 그대로 어떤 바람의 벽을 만들어낸다.

날아들던 수십 개의 납탄은 검면에 부딪히거나, 분쇄검의 여파에 휘말려 힘을 잃거나, 운 좋게 댈런의 갑옷과 피부를 찢어냈다.

그렇게 피부를 찢어낸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댈런은 납탄을 막아낸 즉시 손도끼를 내던졌다.

손도끼가 수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이내 퍽 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비명은 없었다.

댈런은 곧장 땅을 박찼다.

‘놈들이 도망치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

성기사단의 특임대.

기사들 중에서도 특별히 위험한 임무들을 수행하는 특수부대이자, 기사단의 무기고에 잠든 온갖 기이한 병기들을 다루도록 훈련받은 이들.

놈들은 성기사의 능력을 가졌다뿐, 실상 싸우는 방식은 암살자에 가까웠다.

사교도나 타락한 이단, 혹은 악마 자체를 처리하는 심문관들과는 다르게.

특임대는 어떤 정치적인 의도로 인해 불가피하게 기사단의 ‘비공식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이었기 때문.

그런 만큼 한 명이라도 살아서 돌아가는 순간, 다음 습격은 더욱 치밀하고 교묘해질 게 뻔했다.

본단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수백 회차 동안 이 세상을 구해보려 노력한 그의 경험상, 이곳에서 방심은 곧 죽음으로 이어지니까.

“끄으윽···!”

목이 반쯤 갈라진 성기사가 단말마의 신음과 함께 쓰러진다.

십여 분에 걸친 사냥 끝에, 남은 건 한 놈이었다.

그리고 진형의 변화를 지켜본 결과, 놈은 이들의 지휘관이었다.

부스럭.

댈런은 풀숲을 헤치며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갔다.

특임대 지휘관 역시 피할 수 없음을 눈치챘는지, 움직임 없이 제 자리를 지켰다.

두 사람은 이내 서로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댈런이 물었다.

“이름이 뭐냐?”

“테른.”

검은 가면이 들썩였다. 긴장한 호흡이었다.

“성검을 노린 건가?”

“그렇다.”

“부단장이 시켰나?”

“···네가 그렇게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이거 성기사가 아니라 사이비 신도가 다 됐네.

그는 성검을 가볍게 고쳐 쥐었다. 그리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 순간 특임대원이 어떤 막대를 내밀었다. 그리고 막대 끝이 빛났다.

뻐어어엉―!

고막을 뒤흔드는 굉음. 눈앞을 가득 메우는 하얀 빛.

어지러운 시야 사이로 어떤 가루가 흩뿌려지고, 그 가루에 불똥이 마구 튀더니 저절로 불이 붙는 게 보였다.

타다다다닥!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가루에서 촉발된 화염이 전신을 뒤덮어버렸다. 도시에서 산 갑주는 순식간에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댈런은 어지러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검을 놓아버렸다.

화륵!

굳게 말아쥔 주먹.

두 손에서부터 불꽃이 일렁이며 피부 위를 내달린다.

불꽃은 주먹과 팔, 어깨를 집어삼키며 반쯤 불탄 갑옷 위로 화염의 갑주를 뒤덮었다.

이내 전신을 갑옷처럼 둘러싼 화염이, 막대에서 뿜어진 불을 집어삼켜 꺼뜨려버린다.

댈런은 눈을 떴다.

특임대원은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사였나?”

댈런은 주먹으로 대답해주었다.

콰득!

뻗어진 주먹이 검은 가면을 부수고 두개골을 으깨버린다.

금속과 가죽, 천을 겹친 단단한 재질의 가면은 유리처럼 와장창 박살나버렸다.

걸쭉하게 흘러나온 뇌수와 피, 부서진 가면의 조각들이 주먹에 엉겨 붙었다.

댈런은 손을 휘휘 털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성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문득 어떤 기척을 느꼈다. 그의 손이 흐릿해졌다.

쐐애애애―!

뒷허리춤에 꽂혀 있던 단검이 날았다.

주문을 부수고 마법사의 마력 감응력을 꼬아버리는 마법 단검, 주문살해자였다.

상대는 단검을 맞아주지 않았다. 놀랍게도 피한 것 역시 아니었다.

스르르릉―

날아든 단검의 첨단이 새하얀 검면과 부드럽게 얽혀든다. 곧게 뻗은 검신은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유연하게 단검을 인도했다.

미간을 노리고 날아간 단검은 그 흐름 속에서 힘을 잃었다.

스르르 떨어지는 주문살해자. 그 종착지는 부드러운 흙바닥이었다.

“놀라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만, 미안하게 됐습니다.”

자박.

백색 검을 검집에 꽂아 넣고, 단검을 주워든 인영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검날 부분을 잡고 내밀었다.

“부단장이 성검을 노리고 특임대 한 소대를 파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곧바로 달려왔음에도 좀 늦었군요.”

남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푸른 눈의 초점은 흐릿했다. 분명 댈런을 향해 있음에도, 허공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시선이었다.

소매가 나풀거리는 왼팔. 그에 반해 근육이 올올이 느껴지는 굳건한 오른팔과 손아귀.

천옷 위에 걸친 가벼운 가죽 갑옷에는 성기사단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댈런은 주문살해자를 받아들었다. 그는 단검을 허리띠에 대충 꽂아두고 손을 내밀었다.

“딱 맞게 오신 듯하군. 처음 뵙겠소, 기사단장.”

“처음 뵙겠습니다. 신께서 주목하시는 자, 댈런.”

흐릿한 눈의 눈썹을 살짝 들어올리며, 좀 더 유쾌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남자.

댈런의 손을 맞잡은 외팔의 검객은, 바로 성기사단의 기사단장.

에드거 라인하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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