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분(4)
루시아와 파른이 있던 야영지 역시 습격을 받았다.
댈런이 성검까지 뽑아가며 최대한 많은 숫자를 유인했음에도 한계는 있었던 것이다.
다만 기습은 실패했다. 야영지를 떠나 숲으로 들어가는 길. 댈런이 고의적으로 루시아의 모포를 툭 건드리고 갔던 것이다.
‘······.’
눈치 빠른 성기사는 가만히 자는 척하다가, 습격자들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벌떡 일어나 한 명의 목을 베어버렸다.
남은 숫자는 하나. 놈은 당황하지 않고 곧장 루시아와 검을 맞댔다.
고도의 훈련과 특수한 장비로 무장한 특임대는, 혼자서 평범한 성기사 두셋까지도 상대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다만 루시아 역시 평범한 성기사의 수준은 이미 한참 전에 넘어선 바.
미궁에서 댈런의 뒤를 따라 백 마리가 넘는 놀 병사를 갈아버리고, 타락기사의 목을 잘라버린 경험 역시 그녀의 잠재력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다 죽어가는 와중에 투명한 단검으로 빈틈을 노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요.”
루시아는 옆구리 갑옷 부분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투명 단검에 갑옷은 찢겨나갔고, 그 안쪽으로 희미한 흉터가 보였다.
신성력으로 치유했음에도 통증 자체는 약하게나마 잔류하는 모양이었다.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루시아 너는 열세인 상황을 뒤집는 잠재력이 있다. 다만 네가 우세할 때는 방심하는 경향이 있지. 주의하도록 해라.”
“···예.”
기사단장 에드거의 말에 루시아가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저 여자가 저러는 모습은 또 처음 보네.
평소 플레이대로라면 루시아와 기사단장은 도통 마주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궁에서 악마 골라캅과 한 판 붙은 뒤, 끝내 악마를 죽이지 못하고 도망쳤을 루시아.
그녀는 도시와 야생을 떠돌며 수련을 거듭한 끝에 게임 중반부에 접어들어서야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성기사단은 균열에서 범람하는 마물로 인해 반쯤 무너진 상태고, 기사단장 역시 최전선에서 싸우다 죽거나 치명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백 번에 한 번 나올까 한 플레이로 둘 모두 살아서 재회했다 하더라도, 그때의 루시아는 수습기사가 아닌 완성된 영웅.
지금 같은 대화를 주고받을 리 없었다.
‘이번 회차가 정말 많이 변하긴 했군.’
댈런은 새삼 느껴지는 감상에 한 번 더 소리 없이 웃었다.
“왜 자꾸 웃으십니까?”
“신기해서. 불만이시오?”
“···불만이라고는 안 했거든요.”
루시아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는 가만히 말의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네 사람은 관문을 향해 말을 천천히 몰아가는 중이었다. 말은 세 필뿐이었기에 기사단장은 파른의 말에 함께 탔다.
소년 용병은 이따금씩 슬며시 고개를 돌려, 단장의 나풀거리는 소매를 힐끔거렸다.
일종의 호기심과 동질감, 어쩌면 기대감도 묻어나는 시선이었다.
“이제 말도 잘 타는구나. 어지럽다고 항상 도중에 포기하더니. 승마를 따로 훈련했느냐?”
“훈련은 아니었습니다만, 더한 것도 겪다보니 버틸만 합니다.”
“형태가 어떠했건 약점을 극복했다면 그게 곧 훈련이지. 잘했구나.”
단장은 낮게 웃었다.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저거 설마 그때 갑각늑대 등 위에 올라탔던 걸 말하는 건가?
“그런데 단장님께서는 어째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저희가 오실 걸 아신 겁니까?”
“네가 노리아 왕국 국경을 넘은 걸 신께서 보여주셨다. 너와 함께 온 세 손님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지.”
기사단장 에드거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숲길 사이로 내리쬐는 달빛에 반짝거렸다.
고개를 꺾어 그걸 올려다보던 파른이 말했다.
“맞아! 예지안! 성기사단의 단장님은 미래를 내다보실 수 있어서, ‘인도자’라고도 불린다고 들었어요!”
소년의 외침에 기사단장은 미소를 좀 더 진하게 머금었다. 인자한 할아버지가 손자를 보는 듯한 미소였다.
“맞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미래를 전부 꿰뚫어보는 능력은 아니란다. 그저 신께서 간혹 어떤 장면들을 보여주실 뿐이야.”
글쎄. 그 말보다는 더 대단한 능력이 맞을 텐데. 댈런은 생각했다.
성기사단의 단장, 에드거 라인하르트.
외팔의 검성으로도 유명한 그는, 앞이 안 보이는 대신 전쟁의 신이 내려주는 계시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균열을 통해 미궁과 직접 맞닿아있는 성기사단이, 범람하는 마물에 맞서 단번에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
그 이유의 절반쯤이 성기사들의 공로였다면, 나머지 절반은 침공의 날과 시까지 정확하게 내다보고 대비해낸 단장의 공이었다.
물론 그의 말대로 만능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부단장이 지금과 같은 반란을 벌일 리도 없었을 테니.
“세 손님···혹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루시아가 슬며시 물었다. 에드거는 초점 없는 동공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성기사의 곁에는 어린 검성과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자, 그리고 그에게 잡힌 작은 나무가 있다고 하셨지.”
“검성······.”
파른이 작게 중얼거렸다. 소년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스르르 피어올랐다.
댈런은 그걸 보고 피식 웃었다.
외팔 외눈의 검성이라.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을 듯했다.
***
날이 밝아올 무렵.
네 사람은 관문이 있는 계곡에 접어들었다.
성기사단이 위치한 균열 입구 주변은 굉장히 독특한 지형의 땅이었다.
균열 입구를 틀어막은 본단과, 그 본단을 중심으로 십여 개의 크고 작은 성소가 점점이 흩어진 모양.
그리고 그 본단과 성소가 펼쳐진 넓은 평원을,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맥이 둥글게 둘러싼 일종의 분지 지대였다.
그건 마치 신성한 땅을 보호하기 위해, 신이 만들어낸 거대한 자연 성벽과 같은 형태.
혹은 반대로 균열에서 언제 터져나올지 모르는 마물의 군세로부터 대륙을 지켜내기 위해, 그 입구를 넓게 둘러싼 우리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관문은 그 우리의 유일한 출구지. 아니면 성벽의 유일한 입구이거나.’
산맥은 말 그대로 절벽과 낭떠러지 같은 지형으로 가득했다.
어지간한 고산지대도 제 집으로 삼는 산짐승조차, 도저히 넘나들 수 없을 정도의 험지.
그런 산맥에 신기하게도 단 한 군데, 누구나 지나다닐 수 있는 깊은 계곡이 있었다.
기사단의 관문은 바로 그 계곡의 중간을 틀어막은 요새였다.
계곡에 다다르기까지 루시아는 댈런과 함께 겪어온 여정을 풀어놓았다.
팔시온의 순은 구역에서 만나게 된 것과, 미궁에 내려가 악마를 처치하고 타락기사가 된 바렛의 눈을 감겨준 것.
그리고 성검을 운반하기 위한 여정을 떠나 만드레이크가 가득한 숲에서 마녀를 죽이고, 흑마법사와 사령술사들이 가득한 동굴을 쓸어버린 일까지.
아공간에 짱박혀있는 악마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에드거도 예지안을 통해 대충 뭔가 있다는 건 아는 것 같았지만, 그게 악마라는 사실을 이실직고하는 건 별개였으니까.
그것도 그냥 악마도 아닌, 삼백 년 전 성기사단조차 죽이는 걸 포기하고 봉인했던 악마라면 더더욱.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죠. 신께서 어째서 그대를 주목하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에드거가 웃으며 말했다. 댈런은 무심하게 턱을 긁적였다.
용병이나 뒷골목 정보상도 아니고, 저렇게 신실한 사람 입에서 나오는 칭찬은 조금 낯간지러웠다.
“그래서 전황은 크게 변한 게 없이, 여전히 고착 상태라는 거군. 맞소?”
“맞습니다.”
기사단의 내전은 오면서 마주친 전령들에게 들었던 소식 그대로였다.
부단장과 특임대는 여전히 제 3성소를 빼앗아 점거하고 있었고, 본단은 큰 타격 없이 균열과 제 3성소를 동시에 견제중이었다.
사실 특임대의 규모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기에, 공격한다면 당장에라도 제 3성소를 함락시키는 게 가능했다.
그럼에도 이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건 단장의 의지였다.
“대부분의 특임대원들은 자의로 기사단에 반기를 든 게 아닙니다. 저주 때문이죠.”
“저주 말입니까?”
루시아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성기사가 저주에 걸리다니?
성기사의 신성력은 저주와 상극. 어지간히 강력한 저주가 아닌 이상 성기사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다.
만약 진짜 그런 저주에 당한 거라면, 여전히 신성력을 사용하던 특임대원들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 정확히는 저주의 형태를 띤 세뇌, 그 사이의 어중간한 경계에 위치한 술수다.”
부단장은 특임대가 주로 사용하는 특수한 장비들에 그 씨앗을 퍼뜨려두었다.
물건에 깃들어 그 물건을 사용할 때마다 조금씩 사용자에게 침투하는 저주는, 저주술을 통한 암살에 흔히 사용하는 방식.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신체나 정신에 어떠한 직접적인 위해도 미치지 않았다.
그랬다면 사용자의 영혼에 직결된 신성력이 당장에 반발했을 테니까.
“이 저주는 교묘하게, 그리고 점진적으로 피해자의 의식을 전환시키는 방식입니다. 수백 년 전에 비해 약소해진 성기사단의 위세에 불만을 가지게 만들고, 그래서 부단장이 외치는 기사단의 부흥을 옳다고 여기게 만들게끔 말이죠.”
“부단장은 대체 어떻게 그런 저주술에 조예를 가진 겁니까?”
“그가 직접 만든 건 아닌 것 같구나. 기껏해야 신성력의 반발을 중화시키도록 약간의 조치를 취한 게 전부고, 나머지는 외부의 도움을 받았겠지.”
마녀와 용의 도움을 받았다고 여기고 있단다. 에드거는 덧붙였다.
댈런은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들으며 생각했다.
용. 용이라.
그거 균열 안에 있는 그 용을 말하는 것 같은데.
‘신성력을 얻음직한 시체가···아마 그 용의 영역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지.’
댈런은 성기사단의 본단까지 온 목적 중 하나를 다시금 되새겼다. 그때 에드거가 말했다.
“아, 벌써 도착했군. 기사단에 온 걸 환영합니다.”
대화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관문이 코앞이었다.
***
관문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성벽이었다.
30미터에 달하는 까마득한 높이의 성벽. 그 양끝은 깎아지는 절벽과 맞닿아 있었다.
산맥 사이로 푹 꺼진 계곡을 완전히 틀어막은 관문은, 악마의 침공이라도 버틸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멈추시오!”
관문의 성벽 위. 경계를 서는 성전사들 사이에서 성기사 한 명이 소리쳤다.
안력을 강화해 일행을 살피던 성기사는, 기사단장을 발견하고는 흠칫 굳었다. 그가 다시 소리쳤다.
“혹시 단장님이십니까?”
에드거는 말 고삐를 놓고 검을 뽑아들었다. 흰 검신이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의 하늘 아래에서 빛났다.
첫 번째 성검, 백검(白劍) 루와흐.
기사단장을 상징하는 증표를 본 성기사는 다급히 외쳤다.
“개문하라!”
육중한 기계장치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십 미터 가까운 높이의 거대한 성문이 활짝 열렸다.
일행은 말을 몰아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관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요새였다.
고립되어 보급이 끊기더라도 족히 몇 달은 내부에서 버틸 수 있도록, 충분한 물자와 무기가 확충된 거대한 요새.
“신성 문신은 본단에서 새겨드릴 수 있습니다. 기사단을 위해 여러 의뢰를 완수하시고, 성검까지 되찾아오신 만큼 제가 직접 새겨드리도록 하죠.”
기사단장을 맞아 경례하는 성전사와 성기사들을 지나치며, 에드거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성검의 인정을 받으셨다지요.”
“그렇게 되었소.”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성검의 소유권을 가지고 담판을 짓긴 해야 했다.
성검의 인정이 절대적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성검은 기사단의 소유물이었으니까.
때문에 댈런은 내전의 해결을 도와주고, 그 보수로 성검을 정식으로 양도받고자 했다.
“원래라면 본단으로 모셔서 여독을 풀 시간을 드리는 게 맞겠지만, 만약 이 내전을 도와주실 거라면 바로 작전에 투입되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에드거가 말했다. 작전이라는 걸 보니, 정공법으로 승부를 볼 생각은 아닌가 보군.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상관 없소. 나 혼자 가는 거요?”
“아닙니다. 성기사 루시아가 동행할 것이고, 저희를 도와주고 계시는 마법사도 함께 작전에 투입될 겁니다.”
“마법사라.”
댈런은 턱을 쓰다듬었다. 주문쟁이랑 같은 편에서 싸운 건 역행의 사도들을 처리할 때 이후로 처음인데.
그리고 잠시 후, 작전의 설명을 위해 회의실로 들어간 댈런은 너털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댈런! 여긴 어쩐 일인가!”
반색하며 그를 맞이한 갈색 수염의 노인.
그는 팔시온에서 사교도들에 맞서 함께 싸웠던 대지술사이자, 댈런이 신뢰할 수 있다 생각하는 몇 안 되는 주문쟁이중 하나.
엘가이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 펠버 발렌티노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