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66화 (66/288)

침투작전(1)

“흐하하! 이 머나먼 땅에서 아는 얼굴을 만날 줄이야. 어서 들어오게나! 어쩐지 마탑을 떠날 때 원두를 넉넉하게 챙겨오고 싶더라니, 다 이 때를 위해서였구만!”

환하게 웃으며 회의실 구석의 탁자에서 커피를 내리기 시작하는 펠버.

금세 퍼지기 시작하는 구수한 향기를 맡으며 댈런은 미소 지었다.

‘원래 저 정도로 유쾌함을 뿜어대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집에서 먼 타지에 가면 사람의 성격이 바뀐다고 하던가.

마탑에 틀어박혀서 연구만 하다가 머나먼 성기사단의 본단까지 왔으니, 나이가 지긋한 마탑의 원로 마법사라도 그럴 법했다.

“안녕하십니까, 댈런 님.”

스승이 커피를 타는 동안, 과자와 과일을 그릇에 담아 가져온 금발의 청년 마법사가 인사를 건넸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고갯짓으로 인사를 받았다.

토미 발렌티노.

하수도에서 은가면 사도에게 사로잡혔던 걸, 프로그맨 무리를 뚫고 구해냈던 원로 마법사의 제자.

어수룩함이 남아있던 모습은 이제 다 옛말인 듯, 그는 어느새 어엿한 마법사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댈런은 갑옷 끈을 넉넉하게 풀어놓고, 성검과 강철검도 테이블에 기대놓았다. 그리고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딱딱하지만 등을 잘 받쳐주는 의자였다.

“노인장은 여기 무슨 일로 오셨소? 마탑은 어쩌고.”

“나? 나야 연구를 좀 할까 해서 여행을 떠났지. 내가 탑주도 아니고, 마탑은 나 하나 없이도 잘 돌아간다네. 내가 맡고 있던 강의만 몇 개 떠넘기면 그만이니까.”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연구? 성기사단이 자리잡은 이 땅에 마법사가 연구할 구석이 있나?

사실 신성력과 마력은 전혀 연관이 없는 영역이었다.

신성력과 마법이 뚜렷하게 실존하는 세상.

흔한 판타지 소설에서처럼 성직자들과 마법사들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세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서로 친해질 구석이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닐 텐데?

“허허, 몰랐나 보구만? 성기사단이 천혜의 요새로 사용하는 이 ‘장벽 산맥’은, 사실 주문으로 빚어낸 장벽이라네. 천이백 년 전, 작금의 대지술사들의 선조격 되는 젠글라 엘가이아께서 세우신 걸작이지.”

댈런은 포도 몇 알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또 처음 듣는 설정이군.

영토의 주인인 기사단이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아, 이 땅을 두른 산지를 흔히들 장벽 산맥이라고 부르는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산맥이 주문으로 만들어진 지형이라는 사실은 금시초문.

오랜 게임 플레이로 미래에 대한 지식은 빠삭하지만, 멸망과 전혀 연관이 없는 역사나 상식 쪽에서는 취약한 탓이었다.

약간 멀뚱해진 표정의 댈런 앞으로, 펠버는 끌끌 웃으며 커피 두 잔을 내어왔다.

“짐작하시겠지만, 그분은 우리 엘가이아 마탑의 초대 탑주이기도 하시다네.”

“그렇군. 잘 마시겠소.”

“그나저나 주문이 더 늘었구만. 저번에 미궁에 다녀왔을 때도 그렇더니. 대체 어디서 스승을 구해오는 겐가?”

시체를 주워서 얻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댈런은 그저 커피만 홀짝였다.

펠버 역시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니었는지, 곧장 말을 이어갔다.

“자네가 이러니 내가 어찌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있겠나. 사실 이번 여행을 떠난 건 자네의 영향이 컸다네. 무섭도록 성장하는 자네를 보면서, 내 지난 세월의 안일함을 돌아보게 되었거든.”

오랜만에 봤더니 말이 배는 많아진 펠버를 앞에 두고, 댈런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커피와 함께 내어온 과자를 우물거렸다.

밀가루에 꿀을 섞어 구운 과자. 간만에 먹어보는 단 음식이었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더니 기사단장 에드거가 들어왔다.

그의 곁에는 처음 보는 두 수염쟁이 성기사, 그리고 루시아도 함께였다.

“죄송합니다. 새 단원을 안내하느라 좀 늦었군요.”

에드거는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루시아의 약속대로 파른은 성기사단에 정식으로 입단이 확정되었다.

다만 내전 중인 지금, 기사단의 영토는 곳곳에서 산발적인 습격과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훈련생 하나를 본단으로 데려가겠다고 온갖 호위를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파른은 당분간 관문 요새에서 머물게 되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막 합류한 분들도 있으니 현재 상황을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드거는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았다.

“제 3성소를 점거한 부단장과 휘하의 특임대원들은, 지금도 곳곳에서 기사단의 물자 이송과 훈련을 방해하기 위해 끊임없는 습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빼앗긴 곳은 제 3성소 하나뿐이나, 다방면에서 발생하고 있는 피해는 그 이상이죠.”

초점 없는, 그러나 선명한 의지를 띈 눈동자가 방 안에 자리한 여섯 명을 차례차례 짚어간다.

“그런 고로 시간이 많지 않다보니, 서로를 소개하는 순서는 잠시 뒤로 미루겠습니다. 울스턴 경, 헤스턴 경.”

에드거의 부름에 성기사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각자의 주머니에서 두루마리 몇 장을 꺼내더니, 테이블 위에 펼쳐 이리저리 퍼즐처럼 끼워맞췄다.

머지않아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지도 한 장이 완성되었다.

수많은 방과 복도, 벽과 기둥들이 빼곡히 그려져 있는 복잡한 지도.

펠버는 두 눈에서 마법사 특유의 마력광을 번뜩이며 지도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이건···고대 모래바람 왕조의 유적 지도군. 기사단의 지하에 거대한 유적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그저 음유시인들의 과장된 서사라고 생각했건만.”

“기사단 내부에도 아는 이가 거의 없는 기밀입니다. 대대로 단장과 소수의 유적 관리자만에게 비밀리에 전승되어 왔지요.”

에드거는 잔잔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흐릿한 눈동자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웃음이지만, 묘한 압박감이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내가 좀 흥분했소이다. 미안하오.”

펠버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번뜩이던 눈빛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테이블을 내리누르던 분위기가 즉시 걷혀나갔다.

에드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젯밤 보급대를 습격한 특임대원 중 하나를 운 좋게 생포할 수 있었습니다. 특임대의 간부격 되는 기사였죠. 그에게서 들은 증언으로, 특임대와 일부 성기사들을 여전히 세뇌하고 있는 저주의 근원지를 파악했습니다.”

루시아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도착한 그녀로서는, 기사단의 주요 전력 중 하나가 그런 술수에 당했다는 걸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에드거는 지도의 한 부분을 짚었다.

“그 근원은 제 3성소에서도 가장 깊은 창고, 이곳입니다. 지하 유적을 통하면 외부의 수비 병력과 충돌하지 않고도 접근할 수 있죠.”

이어지는 작전의 골자는 간단했다.

투입되는 인원은 이 자리에서 단장을 제외한 여섯 명.

이들은 관문 근처의 숨겨진 유적 입구로 들어가, 지하 유적을 통해 제 3성소로 향한다.

그리고 단장의 역할은 그동안 병력을 모아, 마치 전격적인 공성전을 할 것처럼 성소로 진군하며 시선을 끄는 것이었다.

단장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선 만큼, 대부분의 병력이 수비를 위해 성소의 외곽 성벽 쪽으로 집결할 터.

그렇게 내부 경비가 소홀해진 틈을 타.

“우리가 놈들의 뒤에 있는 저주의 근원지를 파괴한다는 거군.”

“맞습니다.”

댈런의 말에 에드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의 근원을 파괴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의 불필요한 희생자를 내지 않아도 됩니다.”

“정비만 마치고 바로 출발하겠소.”

댈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지하 유적을 통해 걸어가는 이상, 아무리 서둘러도 나흘길 이상은 걸릴 거리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성기사단의 피해는 심해질 터.

머지않은 종말을 대비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한 명의 성기사라도 더 살아남아 균열을 지켜내는 편이 좋았다.

***

그날 저녁.

마법사 둘과 성기사 셋, 그리고 용병 하나는 관문 요새의 깊은 지하로 내려갔다.

굳게 잠긴 문과 숨겨진 통로를 몇 번이나 지나, 그들은 마침내 지하 유적의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옛날 생각 나는데.’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한 통로 안.

빛 한 점 없는 어둠을 횃불로 밝혀 나아가면서, 댈런은 이곳을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수백 번의 플레이 중에서도 고작 두 번 정도였나.

그마저도 둘 다 정상적인 플레이는 아니었기에, 기억 저편에 묻어뒀던 회차들이었다.

‘시체를 회수할 겸 거기도 들러야겠군.’

이곳 지하 유적에는 불사의 악마의 힘을 크게 늘려줄 만한 장소가 있었다.

기껏 잡은 악마를 지금처럼 아공간 주머니 겸 휴대용 버너로만 사용하기에는 아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사령술사들이 했던 것처럼 산 제물을 잡아다 먹이로 던져줄 수도 없는 노릇.

이런 기회가 있을 때 힘을 키워둬야 했다.

‘중간에 잠시 빠질 수 있는 기회를 노려봐야겠어.’

댈런은 속으로 계획을 조금 수정했다.

일행은 그렇게 지하 유적을 나아갔다.

뻣뻣한 수염을 길게 기른 두 성기사, 울스턴과 헤스턴이 앞장서서 이끌었다.

두 사람은 기사단에서 대대로 유적 관리자를 맡은 가문 태생이었다.

그리고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둘은 친형제였다.

“흐음. 여기는 저 통로랑 연결된 방 아닌가?”

“아니라니까. 이쪽이랑 이쪽이 이어지는 게 맞아.”

수십 조각으로 쪼개진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끊임없이 이 길이 맞는지 토론하는 두 사람.

그럼에도 그 발걸음은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어, 마치 잘 아는 동네에 산책 나온 사람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사실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울 지경의 도면에, 적힌 글자마저 고대어인 이상 지도를 볼 수 있는 건 두 사람뿐.

태도가 약간 못미덥긴 해도 그냥 믿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쪽은 무너진 길이군.”

“그럼 여기 이 통로를 타고 광장을 지나는 게 낫겠어. 중요 물자를 수송하던 통로라니, 그만큼 단단하게 지어져 있겠지.”

경로는 중간중간 몇 번씩 수정되었다.

이 유적은 수천 년 전, 모래 황제가 전 대륙의 절반 가까이를 통치할 적에 만들어진 장소.

곳곳이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해 막혀버린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설령 아직 무너지지는 않았더라도 불안하게 흔들리는 경우 역시, 괜한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돌아가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하루쯤 이동하면서 일행은 점점 더 유적 깊은 곳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댈런은 지도를 볼 줄 몰랐지만, 감각만으로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경이로운 감각과 지능 수치는 발 아래의 복도가 어떤 각도인지, 출발한 이후 지금이 어느 정도 깊이까지 내려왔는지 항상 자동으로 계산하고 있었으니까.

“무너진 구간이 훨씬 줄어들었군. 유적 깊은 곳이 저층부보다 튼튼하게 지어서,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상태가 훨씬 좋다는 말이 맞았던 거야.”

“삼촌도 그러셨지. 그 이야기를 꺼내시고 나서, 유적 심층부를 조사하겠다고 내려가셨다가 돌아오지 못하셨지만.”

“맞아. 그래서 당연히 심층부의 상태가 더 안 좋을 거라고 여겼었어.”

작은 소리로 두런거리는 형제 성기사의 대화를 들으며, 댈런은 뒷목을 슬슬 긁었다.

무너진 통로나 방이 없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다른 것들도 멀쩡할 확률이 높다는 뜻도 되었다.

‘굳이 좋은 예시로 들자면, 환기 시설 따위의 마법 장치라던가.’

댈런은 코를 킁킁거렸다.

저층부에서도 텁텁하던 공기가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오면서 오히려 맑아져 있었다.

나쁜 예시는 그보다 훨씬 많았지만, 댈런은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말이 씨가 된다는데, 생각이라 해도 괜히 머릿속에 담아뒀다가 일이 터지게 되면······.

[이해가 안 되는군. 명색이 사망 왕조의 유적인데, 왜 함정이 하나도 없는 거지?]

“······.”

[이 정도 규모의 유적이라면 저층부는 생활 공간으로, 심층부는 군사 시설이자 왕들의 묘지로 사용되었을 게 당연한데···아, 그, 그저 혼잣말이었을 뿐입니다! 살려주십쇼 주인님···!]

‘닥치고 있어.’

댈런의 싸늘하게 식은 표정을 인식했는지, 불사의 악마가 싹싹 빌어대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아무래도 악마 교육을 한 번쯤 더 해야할 것 같았다.

그때처럼 하룻밤 정도 시간을 비워놓고 신을 찾을 때까지 두들기면 입을 닫을 때를 아는 눈치도 좀 생기겠지.

댈런은 뒷목을 긁적이던 손을 옮겨 그대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때였다.

끼이익― 철컹.

귓가를 간질이는 아주 미세한 소음.

관자놀이쯤의 손짓이 멈칫했다.

철컹. 드르륵. 그그그그―

톱니와 톱니가 맞물리는 소리. 무언가의 궤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진동.

어떤 복잡한 기계장치가 작동하며 발생하는 소음의 총아 속, 댈런은 본능적으로 감각을 확장시켰다.

오감이 공기와 땅의 떨림을 느끼고, 그걸 넘어선 육감으로 벽 너머에 빽뺵하게 들어찬 장치들의 작동을 읽어낸다.

번뜩이는 눈동자가 마력의 흐름과 그 속에 감춰진 오래된 신비의 흔적마저 포착해내며.

벽 너머, 통로와 통로 사이를 가득 메운 어떤 장치가 그의 감각에 명확하게 인식되었다.

그 움직임과 작동 방식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동시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장치의 목적.

‘썩을.’

그건 바로 허가되지 않은 침입자를 말살하는 것.

그것도 아주 뼛조각마저 온전히 남기지 않겠다는 의도로 가득했다.

“어, 어어······.”

뒤늦게 앞서가던 형제 성기사 중 하나, 울스턴이 천천히 발을 들어올렸다.

기리릭―

그의 발밑, 움푹 들어갔던 바닥이 서서히 올라온다.

그걸 본 나머지 일행은 그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

“······.”

갑작스레 찾아온 침묵.

댈런이 말했다.

“좆 됐군. 다들 뛰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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