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68화 (68/288)

침투 작전(3)

얼굴 한가운데 도끼를 꽂은 파라오 가면이 부르르 떨렸다. 노랗게 빛나던 보석눈의 광채가 사라져갔다.

기기긱― 쿵.

가면이 핵심 장치였던 건지, 그 밑에 있던 거대한 풍뎅이도 작동을 멈추고 주저앉았다.

댈런은 떨떠름하게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괜히 던졌나?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었다. 침입자라고 대뜸 주문부터 날렸으면 어떡하려고?

모래바람 왕조는 영혼 제단술을 위시로 어마어마하게 발전된 마법학 위에 세워진 문명이었다.

석상에 영혼을 불어넣어서 움직이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석상이 주문을 외우게도 할 수 있는 이들.

개중에는 상대를 모래 조각상으로 바꿔버리는 주문마저 존재했다.

이건 몇 번 안 되는 회차에서 그들과 함께 싸워본 터라 확언할 수 있었다.

티디딕.

그때 풍뎅이 하나가 또 걸어나왔다.

놈은 작동을 멈춘 풍뎅이 곁에 서더니, 똑같이 등딱지를 열고 파라오 가면 쓴 흉상을 드러냈다.

파라오 가면은 도끼가 물린 먼젓번의 가면을 슬쩍 쳐다봤다. 그리고 놀란 어조로 이야기했다.

“이런. 도끼였다니. 거의 주문이라 해도 믿겠군.”

풍뎅이가 집게 달린 앞다리를 슬쩍 들어 도끼를 뽑아냈다.

파라오 가면은 도끼를 잠시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고 이쪽으로 밀어 보냈다.

유적 바닥을 미끄러져 돌아온 도끼. 댈런은 그걸 주워들었다.

무기를 돌려준다는 건, 대충 방금 공격으로 꼬투리 잡지 않겠다는 의미 같았다.

그 추측이 맞았는지 파라오 가면이 재차 인사를 건넸다.

“다시 인사하겠소. 안녕하시오?”

“···다짜고짜 도끼 던진 건 미안하지만, 별로 안녕하진 않군.”

도끼를 허리띠에 꽂은 댈런이 말했다. 안녕하지 않은 게 맞았다.

벽이며 천장이 그를 산 채로 젤리 만들려고 덮쳐오고, 황동 탄환이 무슨 크레모아 터지듯이 밀려오는데 안녕하겠는가?

“···하긴. 대충 돌아가는 꼴을 보니 그럴 것 같긴 하구려. 우선 소개하지. 나는 위대한 모래바람 왕조의 14대왕, 크헤프 네하카라 아하셉수트라고 하오. 그대의 이름은?”

“댈런.”

“반갑소, 댈런. 잠시만 기다려주겠소? 아무래도 수호자의 기억 단말을 좀 읽어봐야 상황을 정확하게 알 것 같으니.”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곤 검을 아래로 내렸다. 동의를 얻어낸 파라오 가면의 보석 눈알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푸후······.”

치이이······.

내쉬는 한숨에서 뿜어지는 하얀 김. 온몸에서 서서히 피어오르는 증기.

파라오의 제안을 받아들여 시간을 벌고, 긴장을 살짝 풀자마자 용혈의 재생 인자가 몸을 급속도로 회복시키기 시작한다.

사실 아무리 댈런이라도 유적의 벽이며 천장, 온갖 함정들이 쏟아지는 와중에 멀쩡하기란 힘들었다.

그나마 전투에 필요한 기능들을 바로바로 회복해낸 건, 그의 체력 수치와 용혈 숙련도가 예전에 비해 극적으로 높아진 덕분.

바꿔 말하면, 당장 전투에 필요 없는 소화기관이나 일부 골격 등은 피해가 상당히 누적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치이이이―

뒤틀렸던 혈관과 신경이 위치를 바로 하고, 부러진 뼛조각들과 내장 곳곳에 난 상처들이 순식간에 붙어 아물었다.

몸이 고쳐지는 동안 댈런은 잠시 딴 생각을 했다. 왕이라. 사막의 왕이니 파라오라는 소리지. 거기에 14대라면 왠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

“······.”

가물가물한 모니터 너머의 기억들 속, 몇 번 없었던 모래바람 왕조와의 협력을 되새긴다.

모래바람 왕조는 왕들이 한둘도 아닌 데다 이름까지 더럽게 어려웠다. 그나마 근래 높아진 지능 수치 덕분에, 가까스로 원하는 정보를 건져낼 수 있었다.

‘모래바람 왕조의 14대왕. 크헤프.’

맨 앞 이름만 따서 그냥 크헤프라 불렀던 것 같았다. 이백 몇십 회차였나에 공동 전선을 이뤘던 파라오였다.

독특했던 건, 파라오들 중에서는 인간에게 굉장히 온건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지.

“음. 기다려줘서 고맙소.”

그때 무슨 컴퓨터의 로딩 커서처럼 빙글거리던 보석 눈알이 멈췄다.

파라오 크헤프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듯 하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묘지의 수호자가 그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있구려. 악의 없이 묻는 건데, 혹시 무덤 도굴을 시도했소?”

“아니.”

파라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다시 물었다.

“정말로 악의 없이 묻는 거요. 정말로. 어차피 이 무덤의 주인은 네하카라 강을 건넜소. 부활할 수 없지. 거기다 그대들 종족에게 우리 문명의 옛 흔적들은 꽤 가치가 높다고 알고 있소.”

주인 없는 무덤 좀 판다고 뭐 잘못된 일이겠소? 마치 도굴을 정당화하기라도 하는 듯한 어조로 그가 덧붙였다.

파라오가 저렇게 말한다니 꽤 웃긴 일이었지만, 댈런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아닌 걸 아니라고 하지 뭐라 그래?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군사 시설 겸 무덤인데,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는 건······.”

“삼천 년도 전에 버려졌으면 군사 시설이고 나발이고 그냥 동굴이지.”

“흠, 그것도 맞는 말이구려.”

파라오 가면이 위아래로 끄덕였다. 댈런은 어깨를 슬슬 풀었다.

잠깐 사이에 금이 갔던 뼈나 찢긴 혈관이 모두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높은 체력 수치 덕분에 용혈로 재생했음에도 피로감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면 그 수호자인지 뭔지한테 나와 내 일행을 내버려두라고 말해주면 좋겠는데.”

“미안하게 됐군. 그건 힘들 것 같소.”

파라오 크헤프가 고개를 저었다. 댈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왕이라며? 무덤 수호자 하나 어떻게 못해?

그 표정을 읽었는지 크헤프는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내가 이 묘지의 주인이 아니라 그렇소. 내게는 명령권이 없지. 지금의 난 이곳의 건설 때 심어두었던 의식 매개로 이곳과 잠시 연결되었을 뿐, 본신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나만의 안식처에 뉘여 있소. 아마 이 연결도 곧 끊길 거요.”

“묘지의 주인만이 수호자를 멈출 권한이 있는 건가?”

“보통은 그렇소.”

시발. 댈런은 얼굴을 좀 더 일그러뜨렸다. 아까 묘지 주인 뒈졌다며. 부활 못 한다며. 그러면 이 유적의 마지막 벽돌 하나까지 부숴야 멈춘다는 건가?

잠시 숨을 돌려서 컨디션이 돌아왔다지만, 그건 답이 없는 짓거리였다.

지금도 사방에서 살기가 조여오는 걸 보니 그 수호자라는 놈은 단단히 벼르는 중이었다.

파라오는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더니 뜬금없는 말을 뱉었다.

“···오히려 그대가 모시고 있는 귀인이 답이 될 것 같소만.”

“귀인?”

“모시고 있다기보다는, 사로잡은 쪽에 가까운 것 같긴 하구려.”

[뭐? 나?]

머릿속에서 악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파라오 크헤프는 작게 웃었다.

“그렇소. 환상세계의 작은 처소에 몸을 뉘인 나무여. 우리가 어찌 그대를 알아보지 못하겠소? 비록 무성한 잎과 가지는 다 꺾여 뿌리와 밑동밖에 남지 않았고, 그마저도 대부분 썩어버린 듯하지만.”

[뭐, 뭔 소리냐. 난 너 같은 놈 모르는데? 우리 초면이거든요?]

“에낙사구스의 솥구덩이 안에서 그대는 과거의 영광을 망각했다지. 헛소문이라 치부하고 싶었건만, 한 치의 거짓 없는 사실이었구려.”

착잡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파라오 가면. 댈런도 고개를 기울였다.

불사의 악마가 무슨 나무라고? 기사단장도 그렇고 이 파라오도 그렇고 자꾸 이 악마에 대해 그가 모르는 이야기를 해댔다.

‘어쩔 수 없지. 한 번 걸리면 그 회차 조지는 새끼라, 게임에서는 그냥 최대한 무시하고 피해 다녀야 했는데.’

어쨌든 이 악마 노예에게는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게 분명했다. 정작 본인도 잘 모르는 것 같긴 했지만.

“모래바람 왕조의 모든 영혼들이 그대를 기억하고 있을 거외다. 귀인이여.”

[으엥···?]

파라오 가면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악마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이었고.

노랗게 빛나던 보석눈이 다시 광채를 잃기 시작했다. 댈런이 도끼로 머리를 쪼갰을 때와 비슷한 반응. 연결이 끊겨가는 모양이었다.

크헤프는 댈런을 돌아보며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수호자를 멈추고자 한다면, 영혼 단지를 파괴하면 될 거요.”

“···고맙군.”

그 말을 끝으로 파라오 가면의 눈이 빛을 잃었다. 댈런은 씩 웃었다. 그래. 진작에 그런 이야기를 했어야지.

영혼 단지는 그도 아는 물건이었다. 아니, 사실 어떻게든 틈을 봐서 찾아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유적의 영혼 단지는 악마의 힘을 회복시키는 좋은 공급원이니까.’

그건 목숨을 대가로 우연히 알아낸 사실.

악마 노예를 얻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당시에는 쓸데없는 정보라 생각했던 사실이었다.

기기기긱―

파라오의 의식이 떠나자 유적이 다시 움직인다.

번뜩이는 살의. 덜컥이며 움직이는 벽과 천장들.

댈런은 검을 고쳐쥐었다. 풍뎅이들까지 눈을 붉게 물들인 게, 아주 한 판 제대로 붙어볼 생각인 듯했다.

그르릉! 쿠르르르.

그리고 천장이 회전했다. 몇 바퀴 돌아가며 뭔가 맞춰내더니, 거대한 돌기둥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곧장 천장에서 바닥으로 쇄도하는 돌기둥. 이건 숫제 바위 거인의 주먹을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댈런은 검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짧게 들이쉰 호흡에 다시금 두 팔을 회오리 같은 기운이 휘감는다.

아직까지도 이 하나 나가지 않은 성검.

우렛소리와 섬광으로 악마의 육신마저 찢어발기는 뇌격.

둘의 조합이라면 저 기둥마저도 부숴버릴 수 있다. 그렇게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그대가 모시고 있는 귀인이 답이 될 것 같소만.’

문득 파라오의 말이 떠올랐다. 헛소리를 할 양반은 아니었다. 댈런은 속으로 악마를 불렀다.

‘야.’

[네, 넵?]

‘튀어나와.’

‘?!’

악마가 대답을 못했다. 댈런은 의지를 담아 명령했다.

“당장 튀어나오라고.”

촤르르르!

할만의 사슬이 제 역할을 해냈다. 허공에 사슬이 죽 늘어나고, 그 끝에서 악마가 대롱거리며 딸려 나왔다.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아공간에서 방출된 악마가 댈런의 손에 붙잡혔다.

“자, 잠시만! 저거···나 죽네!”

들이닥치는 거대한 돌기둥을 본 악마가 소리쳤다. 댈런은 그러거나 말거나 악마의 뒷덜미를 잡은 채 기둥을 향해 내밀었다.

성벽이라도 부술 기세로 짓쳐드는 돌기둥.

실체화된 악마를 피떡으로 만들고, 당장에라도 그 뒤의 댈런을 으깨버릴 기세의 기둥은―

우뚝.

“호오.”

악마와 부딪히기 직전.

그 코앞에서 멈췄다.

쿠르르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정지.

그 감속의 반동을 견디지 못한 기둥이, 푸스스 먼지를 흘리더니 그대로 조각나 떨어졌다.

댈런은 악마 든 손을 천천히 주변으로 돌려봤다. 뒷덜미를 탈탈 털어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뒤틀리던 천장과 벽이 움찔거리고, 언제라도 달려들 기세이던 황동 풍뎅이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아···?”

뭔가 멍한 눈이 된 악마. 댈런은 낮게 웃으며 이번에는 악마를 고쳐쥐었다.

오른손에는 성검. 왼손에는 고기, 아니 악마 방패.

유적 공략에 안성맞춤으로 장비를 갖췄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레이드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

티디디딕!

풍뎅이가 달려든다. 날카로운 집게발과 주둥이 안의 길쭉한 침이 위협적이었다.

슥―

댈런은 그 면전에 방패를 들이댔다. 방패는 좀 허접해 보였다.

거무튀튀한 찰흙덩이 같이 생긴 게, 화살도 제대로 못 막아줄 것 같은 모양새.

움찔!

그러나 그 방패를 본 풍뎅이는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댈런은 곧장 검을 내리그었다.

콰지직!

풍뎅이가 반격할 생각도 못 한 채 두 쪽으로 쪼개졌다.

댈런은 상태창을 슬쩍 열어보았다. 들어온 경험치가 쏠쏠했다.

벌써 족친 풍뎅이 숫자만 백을 훌쩍 넘어갔다. 하나하나가 프로그맨이나 놀 같은 마물 한 다스는 잡아야 될 경험치를 선물해 주는 놈들이었다.

쿠구구궁!

뭔가 형태를 바꾸려던 벽과 천장도, 살아서 꿈틀대는 방패를 들이대니 그 하던 걸 멈추고 잠잠해진다.

댈런은 미동도 없는 통로를 뚜벅뚜벅 걸었다. 그의 입가에는 만족스런 웃음이 맺혀있었다.

“에휴, 내 시발 인생······.”

방패, 아니 악마가 푸념했다.

배낭에 휴대용 화로로 쓰이더니, 이제는 말 그대로 고기 방패가 됐다.

물론 저 모래바람 왕조가 자신과 뭔지 모를 관계가 있고, 그래서 실질적으로 공격을 맞는 일이 없기는 했다.

그래도 고기 방패가 되는 건 그 자체로 기분 나쁜 일이다.

자신은 악마였다.

인간을 제물로 잡아 씹고 뜯으며, 흑마법사와 사령술사를 호령해야 할 악마. 이 세상을 저주해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야 마땅한 고귀한 존재.

오랜 봉인에서 풀려나 이제 그 염원을 다시 이뤄 보나 했는데, 웬 깡패 새끼 하나가 쳐들어와서는···.

“야.”

악마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주인놈이었다.

듣기만 해도 울분에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이 뿌예지는 것 같은 목소리.

“야, 대답 안 하냐.”

“아닙니다, 주인님!”

“다 왔다.”

“예?”

“다 왔다고.”

악마는 눈을 비비고 앞을 바라봤다. 그의 주인놈은 거대한 돌문 앞에 서 있었다.

말 그대로 거대한, 얼마 전에 봤던 관문 요새의 성문만큼이나 거대한 석문.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악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눈을 들어 주인을 쳐다봤다. 주인은 무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열어.”

“하오나 어떻게···?”

“못 하냐?”

이거 고기 방패 이상은 못 되는군. 댈런은 코를 흥 풀었다.

황동 가루가 코며 입에 조금씩 들어간 것 같아 찝찝했다. 갑옷 안쪽에도 돌부스러기에 황동 조각이 꺼끌거렸다.

얼른 작전을 끝내고 씻어야지. 그러려면 이 유적부터 어떻게 해야 했다.

길을 찾는 건 쉬웠다. 지도는 없었지만, 복도의 바닥에 군데군데 남아있는 표식은 주요 장소로 향하는 일종의 이정표였다.

댈런이 찾아가려는 곳은 묘지의 심부인 왕의 묘실.

고고학 놀이를 안 했더라도, 그 표식을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악마에게 쫓길 때 저걸 따라갔었으니까.’

댈런이 유적을 방문한 두 회차 중 하나의 말미.

균열에서 십수 마리의 악마와 그 군세가 침공을 가했고, 성기사단은 그에 맞서 싸우다 붕괴하고 말았다.

후반부에 다다른 게임이었기에 그의 캐릭터는 나름 초인의 반열에 들었던 용병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물을 한껏 취해 평소보다도 강력해진 악마와 홀로 드잡이질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몇몇 생존자들과 함께 악마에게 쫓겨 도망쳐온 곳이 이 유적이었다.

그때 일행의 퇴로를 이끌던 웬 고고학자 NPC가 남겼던 유언이, 바로 저 표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라는 것.

그 종착지에서 댈런은 왕의 묘실 앞에 도착했고, 유적에게 주요한 침입자로 낙인 찍혀 함정을 뚫고 오며 쇄약해진 악마와 마지막 혈투를 벌였다.

그나저나 못 연다는 거지. 댈런은 어깨를 슬쩍 풀었다.

악마를 내려놓으면 유적이 바로 태세를 전환할 테니 그럴 순 없었다.

그는 성검을 잠시 바닥에 꽂아놓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화염의 갑주가 순식간에 손과 팔 전체를 감싸 안았다.

‘갑주는 방어의 수단이자, 동시에 공격의 수단.’

데하만의 갑주격투가 품은 묘리를 떠올리자, 화염 갑옷의 주먹 부분이 폭발할 듯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구체화된 심상과, 그에 맞게 약간 개조된 가능성. 영역에서 이뤄낸 가능성을 현실에까지 뻗어낸다.

스으―

호흡을 들이쉬고.

휙.

댈런은 주먹을 내뻗었다.

콰아아아아―!

그건 마치 용이 내뿜는 숨결과도 같았다.

온갖 방어 주문으로 점철된 석문.

그 모든 주문과 수 미터 두께의 석재는, 몰아치는 화염의 파도 앞에 단숨에 헤집어지고 녹아버렸다.

직경 이 미터쯤 되는 구멍이 뻥 뚫린 석문.

스각.

댈런은 돌바닥에서 성검을 뽑아내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휘이이······.

묘실 안쪽에서부터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퀴퀴한 공기는 그 자체로 어떤 불길함을 머금고 있었다.

우웅

저주막이의 인장이 빛을 발했다. 댈런은 무시했다. 이 정도 저주는 견딜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의 눈이 번뜩이며 주문으로 가득한 어둠을 뚫어냈다. 댈런은 찾던 걸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 있군.’

묘실 저 깊은 안쪽.

거대한 석관 앞. 딱 봐도 기이한 기운이 일렁이는 제단과 그 위에 놓인 항아리.

그리고.

[악마와 술래잡기를 한 용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그 제단 곁에 팽개쳐진, 전신이 갈기갈기 찢긴 잿빛의 시체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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