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69화 (69/288)

침투 작전(4)

‘우연이었지.’

묘실 저 안쪽의 제단과 영혼 단지, 그리고 그 아래의 잿빛 시체.

댈런은 그것들을 보며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십수 마리의 악마가 동시에 균열을 침공하고, 그 어마어마한 군세에 성기사단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던 회차.

성기사단에 고용된 용병이었던 댈런은, 십여 명의 생존자들과 함께 지하의 유적으로 대피했다.

악마의 추적은 집요했다. 놈은 유적의 온갖 함정을 기어이 뚫어내여 그들을 쫓아왔다.

마치 최후의 한 명까지 고통스럽게 죽여야만, 폭력과 살심으로 점철된 제 본성이 충족된다는 듯이.

끝이 보이지 않는 추격전 속.

하나씩 줄어가는 생존자들.

악마의 발톱과 이빨에 찢긴 성기사. 그 악마를 공격하는 함정에 휘말려 몸의 하반신이 으깨진 용병.

비명과 악다구니로 점철된 여정의 끝은, 유적 밑바닥에 있는 왕의 묘실이었다.

그리고 열 남짓 되던 생존자들 중, 그곳에 도착한 건 단 한 명.

댈런의 캐릭터뿐이었고.

‘더 이상 도망칠 구석도 없어, 마지막으로 승부를 걸었던 곳이 바로 여기였지.’

왕의 묘실.

그곳에서 댈런의 캐릭터는 악마와 다시 한 번 붙었다.

일방적으로 쫓기던 것과는 달리, 치열한 공방이 둘 사이를 오갔다. 그건 그만큼 악마가 쇠약해졌기 때문이었다.

놈은 유적의 함정을 정면으로 부수며 내려왔고, 끝내 왕의 묘실을 지키던 수호자까지 상대했으니까.

제물로 얻은 힘을 죄다 잃고, 수호자가 죽어가며 남긴 저주까지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상태의 악마.

반면 댈런의 캐릭터는 본격적인 종말의 초입까지 버텨낸 만큼, 나름 영웅의 반열에 접어든 용사였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이어간 보스전. 말 그대로 손에 땀을 쥐는 전투 끝에, 모니터 너머의 댈런은 마침내 승기를 잡았다.

그런데.

‘이겼다 생각했던 찰나, 놈이 영혼 단지를 흡수했지.’

그건 우연의 일치였다.

댈런의 검에 맞고 넝마가 된 악마가, 우연히 제단 쪽으로 넘어지며 영혼 단지를 몸으로 뭉게버린 것.

악마는 단지 안의 영혼을 흡수하자마자 모든 상처를 회복해냈다.

힘을 되찾은 악마 앞에서, 댈런의 캐릭터는 도망칠 틈도 없이 죽어버리고 말았다.

[침입자여―]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묘실을 쩌렁쩌렁 울린다. 댈런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감각의 끄트머리를 간질이는 불길한 느낌.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묘실 중앙을 바라봤다.

스으으으.

묘실의 한가운데.

단촐한 석관으로 어두운 기운이 몰려드는 모습.

검은 기운은 관 안의 해골을 일으켜 세웠다. 곧이어 팔다리를 휘감으며 어떤 연기의 로브 같은 걸 만들어냈다.

관 안에서 지팡이가 둥실 떠오르고, 빨려들어가듯 해골의 손아귀에 잡히는 순간.

구우웅―

이질적인 마력의 울림과 함께 텅 빈 눈구멍 속에서 불꽃이 희번뜩 타올랐다.

해골 마법사는 댈런을 노려보며 턱뼈를 딱 벌렸다.

[나는 왕의 수호자 카샨 호르아하크!]

쿵―

바닥을 찍는 지팡이. 그 아래에서 불똥이 튀기며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돌풍이 수천 년 동안 쌓인 먼지를 죄다 몰아내는 가운데, 그 중심에서 수호자가 외쳤다.

[지고의 왕을 모신 무덤에 침입한 자여! 내 수호자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는 즉시 본디 있던 곳으로 돌아가···.]

“쿨럭! 시발 미세먼지 좀, 새꺄.”

[······?]

“너만 폐 안 달려있으면 다냐? 이기적인 새끼.”

댈런은 악마를 부채 삼아 먼지를 휘휘 몰아냈다.

해골 마법사는 그걸 보고 약간 멍한 얼굴이 됐다. 악마는 ‘내 인생···.’하는 푸념을 표정으로 자아냈고.

그때 빛이 번쩍였다.

패래래랙―캉!

빛의 원반이 되어 날아간 손도끼가 튕겨나갔다. 댈런은 한쪽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막아? 이걸? 나름 블러핑까지 하고, 심지어 먹혔는데?

자세히 보니 완전히 막은 건 아니었다. 몇 걸음쯤 비틀거리며 물러난 수호자는 쇄골 언저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후드득. 실금이 거미줄처럼 뻗어난 가운데, 깊게 패인 빗장뼈에서 떨어지는 뼛가루.

놈이 신음을 흘렸다.

[크으. 역시 말로 해서는 안 될 놈이었구나.]

눈구멍 안쪽의 불꽃이 이채로 번뜩인다. 놈이 지팡이를 쳐들었다.

[왕의 안식을 범한 대가. 죽음의 저주가 그대를 고통스런 영면으로 이끌리라!]

묘실에 메아리치는 이질적인 힘이 단긴 목소리. 불길한 기운이 사방에서 몰아친다.

피부에 소름이 오도독 돋는다. 위기를 감지한 댈런의 검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밤의 어둠을 꿰뚫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신비와 비밀마저 내다보는 시야.

그 시선이 놈의 목소리에 녹아난 주문의 본질을 관통했다.

‘저주.’

그것도 영창마저 생략한, 언령술에 한 발 걸쳤다 할 수 있는 경지의 주문.

댈런은 놓았던 성검을 발끝으로 차올려 다시 잡았다. 즉시 저주의 파도가 그를 덮쳤다.

치이이이―!

저주막이의 인장이 강렬하게 빛을 뿜는다. 용혈이 온몸을 내돌며 근육을 뜨끈하게 덥혔다.

폐 속에 모래가 가득 차게 만드는 저주. 딱정벌레가 눈알을 유리체에서부터 파먹게 만드는 저주. 내장에서 구더기가 자라고, 아무런 이유 없이 심장이 정지하는 저주까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수십 번도 넘게 죽어나갈 저주를 앞에 두고, 댈런의 머리가 후끈 달아올랐다.

판단을 빨랐다.

이건 재의 마녀와 싸울 때와 같았다.

저주의 파도에 그가 먼저 쓰러지느냐, 아니면 그 전에 저 해골을 두 쪽 내느냐의 싸움.

‘속전속결이다.’

감각과 지능 수치가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한다.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난 시간 속에서, 댈런은 방패를 놓았다.

고기 방패는 더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의 존재를 겨냥한 저주는, 방패로 진로를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공격이 아니었기에.

콰득!

돌바닥을 파고드는 발끝. 그 초인적인 근력에 요동치는 발밑의 땅.

습―

어깨에서부터 폭발하듯 터져나온 기운이 그의 팔과 손끝을 덮어가고.

히죽.

순식간에 여러 겹의 거무튀튀한 방어벽을 구축해내며, 턱뼈를 달그락거려 웃는 해골 마법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였다.

“흡! 흐읍! 후르릅, 쩝쩝!”

느닷없이 발밑에서 뭔가를 처먹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격돌 직전, 한껏 집중된 감각마저 일순 흐트러질 정도로 게걸스러운 소리.

[······.]

“······.”

댈런은 시선을 내렸다. 그가 방금 놓아버린 고기 방패가 뭔가를 미친 듯이 흡입하고 있었다.

눈이 반쯤 돌아간 채, 침을 질질 흘리는 놈의 몰골.

그리고 댈런은 순간 몸이 가벼워진 걸 느꼈다. 뭐?

“으음, 쩝쩝쩝!”

악마가 게걸스럽게 뭔가를 씹어삼킬 때마다, 몸을 뒤덮은 저주가 하나씩 녹아나간다.

근육이 원래의 힘을 되찾고, 내장을 파고들던 구더기가 용혈에 타죽기도 전에 사라져버린다.

댈런은 그제서야 볼 수 있었다.

놈의 핵을 칭칭 휘감고, 그 끄트머리로 놈의 몸통을 한 바퀴 둘러낸 할만의 사슬.

그 타락한 성물이 은은하게 보랏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을.

“아, 아니. 먹을 생각이 아니었습···!”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악마가 댈런의 시선을 의식했다. 놈은 황급히 흘러내린 침을 닦아내며 무릎을 꿇었다.

전투 중에 혼자 뭘 처먹은 죄. 싸움에 미친 주인놈이라면 이틀을 두들겨 패고도 남을 죄목이었다.

하지만 불가항력이었는데 어떡하라고? 영혼의 핵을 감아버린 빌어먹을 성물이 갑자기 뭔가 하더니, 입에 간만에 맛있는 걸 쳐넣었는걸? 그걸 어떻게 참아?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 몸에 베인 대로 두 손을 싹싹 모아 비는 악마였다.

그리고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잘했다. 계속 먹어라.”

“다시는 전투 중에 무단취식을···어? 예?”

“계속 먹으라고.”

악마는 멍해졌다. 주인놈 돌았나? 아니, 저주를 뒤집어쓰더니 맛이 간 건가?

하지만 악마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땐 닥치고 끄덕이면 되는 거다. 오랫동안 처맞으면서 배운 진리였다.

그렇게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여대는 악마를 두고, 댈런은 시선을 다시 수호자에게로 향했다.

[···어찌 이런 일이.]

해골 마법사 역시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댈런은 픽 웃고는 악마 뒷덜미를 왼손으로 잡아들었다.

고기방패를 다시 앞세운 채, 해골 마법사에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발걸음.

해골 마법사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귀인을 방패로 삼아대기에 저주라는 차선책을 택했는데, 그것마저 안 통한다면 어찌하란 말인가?

턱을 딱딱 부딪히는 수호자를 몇 걸음 앞에 두고, 댈런은 씩 미소를 지었다.

그가 말했다.

“어디 다시 해 봐.”

[이, 이······!]

놈이 지팡이를 다시 치켜들었다. 댈런도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한동안 뼈마디 꺾는 소리가 묘실에 울려퍼졌다.

***

“꺼윽. 끄흐으······.”

우렁찬 트림소리와 함께 늘어지는 불사의 악마.

“더, 더 이상은 못 먹어······.”

악마는 볼록 튀어나온 작은 배를 슬슬 쓰다듬으며 눈꺼풀을 스르르 떨궜다.

그 뒷덜미를 잡고 있던 댈런은 피식 웃었다. 그는 박살난 뼛조각들을 발로 툭툭 차봤다.

수호자의 육신은 강력했다. 뼈의 강도만 해도 어지간한 강철보다 단단할 정도.

거기다 댈런의 일검에 머리뼈가 두 쪽이 나고도, 놈은 죽지 않은 채 끝없이 움직이며 저주를 쏘아댔다.

결국 뼈 마디를 토막치다시피 하고서야 수호자의 움직임은 가까스로 멎었다.

‘물론 영역의 힘을 사용했다면 더 금방 끝났겠지만.’

유적 깊은 곳의 묘실은 그리 넓지 않았다.

이런 좁은 곳에서 뇌격을 사용했다가는, 자칫 그 여파로 영혼 단지가 파괴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갑주격투에서 비롯한 화염 갑주를 사용하자니, 저주술사를 상대하는데 성검을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위장이, 위장이 터질 것 같아······.”

“엄살 그만 부려라.”

댈런은 악마를 든 채 제단으로 다가갔다.

제단에는 신비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마력의 일종이지만, 순수한 상태의 마력 바람과는 다른 종류의 기운.

빛나는 흰 구름처럼 보이는 기운은 제단에서 올라와 영혼 단지의 입구로 빨려들어가고선, 다시 단지의 밑동을 타고 제단으로 스며들며 순환했다.

‘영혼을 어떻게 가공한 거군.’

영역의 힘을 빌리자 대충 어떤 기운인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제단과 단지를 순환하는 기운은, 수백 명분의 영혼을 어찌저찌 조합해 만든 하나의 영혼이자 마력.

다만 어떻게 그걸 했는지는 미지수였다. 아마 영혼 제단술의 결과물이겠지. 그 정도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댈런은 악마를 제단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단지에 처박았다.

“이, 이게 뭐―으커업!”

단지가 박살나며 제단 위에서 희뿌연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나온다.

댈런은 몇 발짝 물러났다. 흰 구름이 수백 조각으로 흩어지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흩어져가던 구름 조각들이 덜컥 멈췄다.

마치 악마를 지그시 바라보는 듯한 흰 기운. 이내 수백 조각의 흰 기운들이 악마를 덮쳤다.

“으어, 이게 뭐야! 으어어어!”

악마는 제단 위에서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그런다고 흰 구름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놈은 흰 구름에 둘러싸인 채, 온몸으로 그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댈런은 몰랐지만, 이건 조각난 영혼들이 안식처 삼을 그릇을 갈망하며 스스로를 내던지는 현상이었다.

물론 할만의 사슬로 영혼이 연결되어 있기에, 그도 악마의 힘이 점점 커져감은 느낄 수 있었다.

댈런은 악마가 발광하게 내버려두고 시체를 회수했다.

[악마와 술래잡기를 한 용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1, 기량 +2, 감각 +1, 레레도나라의 비검(B), 탐색자의 좌안 파편]

빛무리를 흡수하던 손이 움찔 떨렸다.

“···B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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