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2)
찌익―
부드럽게 찢어지는 살결. 육즙이 주르르 흘러내리며 고기와 양념의 풍성한 향취를 토해냈다.
큼직하게 뜯어낸 고깃덩이를 한 입에 넣고 씹는 순간, 입 안에서 부드럽게 터지는 풍미.
어린아이도 나이프 없이 뜯을 정도로 부드러운 육질은, 그러면서도 미묘한 쫀득함이 베여있어 씹는 재미를 놓치지 않았다.
“음.”
댈런은 눈을 감았다. 진정한 진미를 먹었을 때는 별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은 법이다.
“맛있군.”
어느새 입안에서 녹듯이 사라져버린 고기를 삼키고, 그는 테이블 위에 큼직하게 잘려 올라온 용 꼬리에 다시 손을 뻗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반면 정작 찬사를 받아 마땅할 요리사 본인은, 고기를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며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루시아는 못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며칠 만에 드시는 음식인데, 죽이나 스튜부터 드셔야 하지 않을지···.”
“고기가 마치 죽처럼 부드럽군. 그러면 된 거 아니겠소.”
댈런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기를 큼직하게 잘라 본인의 접시로 가져갔다.
그는 이미 앉은 자리에서 용 꼬리 고기 10인분 이상을 먹어치운 상태였다. 곁들인 포도주 두 병 반은 덤이었고.
“내 고향에는 이런 말이 있지.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
“그것 참···사령술사들이나 할 법한 소리군요.”
“숙성 중이라던 뒷다리는 언제 개시하실 생각이오?”
뜬금없는 소리로 화제를 돌린 댈런은, 주먹만 하게 뜯어낸 고기를 다시 입에 넣었다.
좍 터지는 육즙 사이로 은은하게 감도는 향신료와 포도주의 향미. 부드럽게 혀와 입천장에서 녹아내리는 육질.
난 이걸 먹기 위해 이 땅에 떨어진 거야. 투쁠 한우 저리 가라지.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맛이었다.
고기를 깨작이던 루시아의 눈빛이 미묘하게 싸늘해졌다.
“···이 정도면 눈앞의 고기가 에버로크의 행방보다 더 중요하다 해도 믿겠군요.”
“음, 큼큼. 그건 아니지.”
입안에 남은 걸 씹어 삼킨 댈런은 포도주로 입을 헹궜다. 진미를 계속 먹고자 한다면 요리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정리해보자면, 에버로크 글라스덴이 반란을 도모하면서 기사단의 중요한 보물을 훔쳐갔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그 보물이라는 게 대체 뭐기에 그러시오?”
댈런은 손수건으로 입을 슥슥 닦고 물었다.
에버로크의 행방 자체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놈은 옥시키루스의 권능으로 공간을 뛰어넘었으니까.
보나마나 목 잘린 아룡의 주군이자, 균열 깊은 곳에 도사리는 늙은 진룡인 청린의 굴로 향했으리라.
다만 놈이 가져간 기사단의 보물이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게임에서 에버로크가 반란을 일으키고 나면, 주인 없는 성검을 죄다 훔쳐가곤 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놈이 일으킨 반란은 성검을 강탈할 틈도 없이 제압되었으니까.
댈런과 싸우면서 사용한 성검 한 자루야 같이 사라졌을 테지만, 그 정도로 루시아가 이렇게 호들갑을 떨 리는 없고.
‘아니, 성검 한 자루만 해도 큰 일이기는 한 건가?’
생각해보면 자신이 본단까지 온 것도 결국 성검을 운반하는 의뢰를 받아서였다. 그것도 원래는 악마의 손아귀에서 힘을 죄다 잃어버린 성검.
고민을 이어가려던 찰나 루시아가 정답을 말해주었다.
“일단 기사단 내에서도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비밀에 부쳐진 사안입니다만, 에버로크와 함께 균열의 방벽 열쇠가 사라진 걸 확인했습니다.”
그건 큰일인데. 댈런은 입으로 가져가던 고기 한 점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성기사단이 지키는 균열은, 미궁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계곡이었다.
그리고 보통 계곡이라 하면 두 절벽을 옆에 두고, 머리 위 하늘이 뚫려있는 지형.
기사단이 몇 개의 요새로 균열의 입구를 막고 있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것뿐이라면 마물들이 지상으로 나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날개 달린 마물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날개가 없는 마물들도 절벽에 발톱을 박고 올라오면 될 테니까.
‘그걸 막아주는 게 균열의 방벽.’
천 년도 더 전, 성기사단이 탄생했을 무렵.
악마들을 균열로 몰아넣은 대전쟁 이후, 초월자들은 균열을 틀어막기 위한 몇 가지 대책을 세웠다.
성기사단의 탄생과 본단 일대를 두른 장벽 산맥 역시 그 대책들 중 하나.
그리고 균열의 방벽은, 마물들이 머리 위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계곡 위쪽을 덮어놓은 보이지 않는 마력의 벽이었다.
“다행히 제 3성소에 보관되어있던 열쇠는 하나뿐이었습니다. 방벽을 약화시킬 순 있어도, 아예 해제하는 건 불가능하죠.”
“그거 다행이군.”
“그마저도 원래는 단장의 권한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물건이니,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적잖이 걸릴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게 변절자의 손에 남아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루시아는 말끝을 흐리며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그는 반 남은 포도주 병을 슬슬 흔들며 말했다.
“도와주겠소.”
“···예?”
“도와달라 말하려던 거 아니었소?”
“아닙니다. 아니 맞긴 합니다만. 그게···이미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번번히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입니다.”
루시아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댈런은 낮게 웃고서 포도주를 병째 들이켰다.
달짝지근하면서도 풍부한 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도수보다는 상큼달달한 맛과 향이 부각된 술이었다.
성기사단의 본단이 있는 이 지역은 포도와 포도주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정작 주조공 본인들이 기사단의 일원이거나 그 친척들이기에, 술을 그렇게까지 즐기지 않는다는 게 아이러니한 점이었지만.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용병이오.”
빈 병을 내려놓은 댈런이 입을 열었다.
“충분한 대가가 있다면 어디든 가는 사람이지.”
“하지만 용살자가 용병으로 고용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루시아가 곤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그러니까 고용하고는 싶은데, 단가를 얼마로 매겨야 할 지를 도통 모르겠다는 이 소리지?
사실 댈런의 입장에서도 애매한 문제이긴 했다.
말로는 대가를 받고 움직인다고 했지만, 사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대가는 의뢰주가 내거는 금화가 아니었으니까.
언제부터인가 그의 초점은 돈보다는 여정에서 회수할 시체의 능력들, 그리고 종말의 술수에 훼방을 놓는 여정 그 자체에 맞춰져 있었다.
물론 그건 궤짝 단위의 금화가 아공간에 있으니 할 수 있는 배부른 소리인 것도 맞았다.
‘그렇다고 신성 문신이나 금화를 몇 줌 더 달라고 하기에는, 내 쪽이 수지가 안 맞는 장사고.’
자고로 몸값은 올릴 수 있을 때 올려두는 게 좋았다.
거기다 에버로크를 추적하려면 균열 안쪽, 그것도 성기사단의 방어선 너머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할 상황.
마물들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꼴이니, 이 정도 난이도의 의뢰라면 성물을 뜯어내도 할 말이 없으리라.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그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보상은 세 가지를 요구하겠소.”
***
의뢰는 수락했지만, 바로 출발하지는 않았다.
옥시키루스는 에버로크를 균열 안, 진룡 청린의 굴로 피신시켰을 게 분명했다.
탐색자의 좌안 파편으로 놈을 추적해본 결과, 과연 그 방향은 균열 안쪽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균열 안, 그것도 기사단의 방어선 너머로 들어가는 건 미궁의 깊은 곳에 발을 디디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들어가고자 하는 건 댈런이나 기사단 측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루를 푹 쉬고 일어난 뒤, 댈런은 가장 먼저 기사단장 에드거를 찾아갔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신성 문신을 받기 위해서.
그가 받을 신성 문신은 총 셋이었다.
의뢰 보수로 두 개. 그리고 새로이 맡은 의뢰의 보수 겸 선수금이 하나.
한 번 문신을 새기면 사흘은 다른 문신을 새길 수 없었기에, 댈런은 대략 열흘에 걸쳐 시술을 받았다.
그 결과 그의 왼팔에는 총 세 개의 신성 문신이 새겨지게 되었다.
개중 둘은 어깨의 저주막이의 인장 바로 아래에 위치했고, 나머지 하나는 왼쪽 손등 위에 자리잡았다.
“다 끝났습니다. 앞서 어깨에 새겨드린 두 신성 문신과 마찬가지로, 며칠 안 가서 피부와 동화될 겁니다.”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시술로 손등에 마지막 문신을 새겨낸 뒤, 에드거가 말했다.
“아시겠지만 신성 문신을 다루기 위해서는 상당량의 신성력만이 아니라 오랜 수련 역시 필요합니다. 신이 내리시는 힘을 가볍게 보지 마시길.”
“알겠소.”
에드거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통증이 있으면 먹으라며, 새끼손톱만 한 환약 몇 개를 챙겨주고 방을 나섰다.
에버로크의 반란이 진압된 지 벌써 보름 가까이 지났지만, 성기사단 곳곳에는 내전으로 인한 혼란이 잔재해 있었다.
때문에 이렇게 신성 문신을 새길 때가 아니면, 이번 내전의 최대 공로자인 댈런조차 그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저나 신성력이라.’
댈런은 침대에 걸터앉아 턱을 긁적였다. 사실 기사단의 본단에 온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균열 안의 시체를 회수해 신성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신성력 없이는 신성 문신을 사용할 수 없을 뿐더러, 성검의 능력 역시 일부만 다룰 수 있었다.
어찌됐건 이번 의뢰 때문에라도 균열에 들어가게 됐으니, 겸사겸사 시체를 회수할 기회로 삼으면 되겠지.
치이이······.
댈런은 손등을 덮은 천을 걷어내고 거울 앞에 섰다. 왼쪽 손등은 끊임없이 증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상처를 회복하려는 용의 재생력과, 신성 문신을 유지하고자 하는 신성력이 서로 반발하는 것.
다행히 에드거는 역사적으로 용의 피를 품은 인간들 중에도, 신성 문신을 성공적으로 받은 사례가 있다고 했었다.
그리고 어깨에 새긴 두 문신이 잘 자리잡은 걸 보면 맞는 말인 듯했다.
하나는 완전히 피부와 동화되고 하나는 이제 흐릿한 흔적만 남았으나, 댈런의 내면은 어깨에서부터 연결된 미묘한 힘의 고리를 감지해내고 있었으니까.
‘혹시나 해서 받기는 했지만, 이번 의뢰에서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이번에 받은 신성 문신은 능력치를 올려주는 종류가 아니었다.
깊게 고민해본 결과 굳이 신성 문신이 아니더라도, 능력치를 올릴 방법은 많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댈런은 레벨업이나 시체 회수로 얻기는 힘든 종류의 능력을 택했다.
‘먼 미래를 생각하긴 했지만, 균열에서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하는 의미도 있긴 했으니까.’
댈런은 왼팔 소매를 걷어내리며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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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댈런
레벨 : 15
[근력 : 34] [기량 : 25] [체력 : 30]
[감각 : 21] [지능 : 22] [마력 : 21]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용혈의 재생 인자(C), 도약(E), 불꽃 화살(D), 급속 빙결(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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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15에 도달한 레벨.
체력 수치는 용을 잡고 레벨업을 하며 올려, 마침내 두 번째로 30을 달성한 상태였다.
혹시나 저번처럼 몸이 터질 뻔하거나 하는 걸 대비해서, 댈런은 푹 쉰 다음 컨디션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에서 능력치를 배분했다.
다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큰 변화는 없었다.
그저 숨이 좀 더 맑아진 것과, 몸이 눈에 띄게 가벼워진 느낌 정도.
‘그리고 심장 박동이···뭔가 더 깊어진 느낌이다.’
곧바로 어떤 능력이 나타나지 않은 건, 아직 뚜렷한 심상이 댈런의 내면에 존재하지 않아서일지도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용혈의 인자를 품고 맥동하는 심장은, 그 심상의 단초를 제공해줄 수 있을 여지가 분명히 있었고.
[용혈의 재생 인자(C)]
- 용족의 피가 품은 수많은 특수 인자들 중, 재생 인자를 뽑아 인간에게 적용시킨 결과물. 불가해한 재생력은 용혈의 특성 중에도 가장 저급한 부류이지만, 필멸자들의 입장에서는 그 무엇보다 소망하는 이능이기도 하다.
- 숙련도 90%
용혈의 재생 인자는 벌써 숙련도 90퍼센트에 육박해 있었다.
처음 획득한 C등급 스킬인 만큼, 동급의 다른 스킬들에 비해 압도적인 숙련도였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처음 백 퍼센트에 도달할 예정인 C등급 스킬.
영역의 힘이 가능성을 실체화하는 것이라면, 굳이 스킬이나 능력치의 분류에 얽메일 필요가 없지 않을까.
경계에 다다른 두 힘을 놓고 깊은 상념에 빠진 댈런은, 여느 떄와 같이 자연스럽게 심상 너머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
일주일이 더 지났다. 단장과 성기사들의 노력 덕분에, 기사단은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댈런은 마침내 균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혼자는 아니었다. 에버로크를 추적해 사로잡고, 그에게서 성검과 균열의 방벽 열쇠를 되찾는 건 기사단 입장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
그 임무를 성공시키기 위해 기사단은 특별한 팀을 꾸렸다.
심문관들과 고위 성기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댈런과 원로 마법사 펠버 발렌티노, 그리고 그의 제자가 함께하는 파티.
말 위에 앉아 균열 안으로 떠나며, 댈런은 허리춤의 도끼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이 역시 이번에 의뢰를 맡으며 요구한 보상들 중 하나.
도끼날을 따라 흐릿하게 파형 무늬가 새겨진 이 손도끼는, 기사단의 무기고에 보관되어있던 성물 중 하나였다.
도끼머리에 올렸던 손을 자연스레 뒤로 빼, 가죽 주머니에 담긴 육포를 꺼내 질겅이는 댈런에게 고위 성기사 중 하나가 다가왔다.
반쯤 새서 회색 빛깔을 띄는 수염과, 부드러우면서도 굳건한 기세가 느껴지는 눈빛.
명목상으로나마 일행의 리더이기도 한 중년의 사내는, 반백 년간 신의 검으로 살아왔다는 고위 성기사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