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3)
“미궁에 내려가신 경험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중년 성기사가 말했다. 댈런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명목상으로나마 일행의 리더인 그가 다가오기에 뭔가 중요한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그냥 말 붙이러 온 모양이었다.
“아, 혹시 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실 수 있으시겠군요. 고위 기사 마우그입니다.”
“댈런이오.”
“용살자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루시아 경이 그러더군요. 댈런 경께서 미궁에 내려가자마자, 홀로 수천에 달하는 놀 거주지를 초토화시키셨다고.”
“혼자는 아니었소. 루시아 본인도 함께했으니.”
댈런은 육포를 질겅거리며 말을 받았다. 루시아가 숙성시킨 용 뒷다리살로 만든 육포였다.
오랜 시간 댈런과 함께해온 그녀는, 이번 의뢰에는 동참하지 않고 본단에 남기로 했다.
자신의 역량 부족이 댈런의 발목을 자꾸 잡는다나. 지난 몇 달간 충분히 실전을 경험했으니, 한동안은 본단에 남아 수련에 집중하겠다는 선택이었다.
거기에는 갓 성기사단에 훈련생으로 입단한 파른의 지도를 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성검을 회수하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헌도를 인정받아, 루시아는 얼마 전 정식 성기사로 승급한 바.
그리고 정식 기사부터는 훈련생을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시기가 적절하게 맞물린 셈이었다.
“물론 루시아 경도 미래가 기대되는 후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전략은 댈런 경의 깊은 통찰에서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정찰대를 궤멸시킨 후, 갑각늑대의 귀소본능을 이용해 거주지를 기습하셨다더군요.”
마우그가 들뜬 얼굴로 말했다.
댈런은 말없이 턱을 긁적였다. 이런 안면 없는 사이의 아부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그였다.
마우그는 그러고도 한동안 댈런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악마 골라캅을 소멸시키고 성검을 회수한 것이며, 재의 마녀를 쓰러뜨린 후 숲의 만드레이크를 불태워버린 일까지.
아마 새로이 탄생한 성검의 주인과 친분을 다지고 싶어, 지난 보름 사이에 열심히 알아보고 다녔으리라.
어째서인지 이 중년 성기사의 질문 공세에 시달리는 루시아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크흠.”
다만 어느 상인을 떠올리게 하는 마우그의 수다에도 한계는 있었다.
두어 시간 떠들고 나자 얼굴에 금칠할 소재가 다 떨어지기도 했고, 정작 당사자의 반응이 시큰둥했던 이유도 컸다.
그리고 그가 입을 다물고 나자 일행 사이에 별 말이 오가지 않았다.
제 3성소에서의 전투 이후 펠버는 어째서인지 극도로 말이 없어졌다. 토미 역시 제 스승이 침묵하니 비슷한 태도를 보일 따름이었고.
심문관이나 고위 기사들이 이따금씩 나누는 잡담을 제외하면, 미묘한 어색함이 옅게나마 깔린 침묵.
한동안 동일한 일행과 여행해온 댈런의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분위기였다.
다그닥. 다그닥.
일행은 적당한 속도로 말을 몰았다.
계곡의 깊이가 깊어지면서 양쪽 절벽 사이의 거리도 점점 멀어져갔다.
처음에는 마차 대여섯 대가 나란히 지나가기도 아슬아슬하던 너비는, 어느새 백여 미터에 가까워져 있었다.
‘에스트라 강까지는 별다른 변화 없이 이렇게 계속 넓어지지.’
댈런은 모니터 너머에서 봤던 균열 깊은 곳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수 킬로미터의 간격을 두고 떨어진, 십수 킬로미터 높이의 까마득한 절벽.
깊어질수록 절벽에 뚫린 수많은 동굴에서는 용암과 유독한 연기가 흘러나오고, 미궁에서나 볼 법한 기이한 지형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리고 심부에 다다르면 수 킬로미터 너비의 내리막길은 결국 수많은 갈래로 나뉘어 미로처럼 얽혀들며, 미궁으로 내려가는 통로이자 미궁 그 자체의 일부로 변하게 된다.
‘그 마경의 경계를 가르는 게 에스트라 강 하류.’
제국과 노리아 왕국의 국경선을 나타내는 에스트라 강의 끝자락은 균열에 닿아 있었다.
십수 킬로미터 높이에서 폭포로 떨어져 균열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며, 마물과 인간의 영역을 가르는 자연적인 경계선이 되는 에스트라 강 하류.
일행의 일차 목적지는 그 드넓은 강 이쪽에 지어진, 본단 다음으로 거대한 기사단의 방어 거점.
‘에스트라 요새’였다.
***
닷새 동안 일행은 두 개의 요새를 거쳤다.
기사단이 균열 안에 지어올린 요새는 총 네 개.
최전방 방어선인 에스트라 요새를 제외하고는, 일종의 중간 거점이자 보급고 역할이었다.
그렇게 닷새째 저녁.
세 번째 요새에 도착한 일행은 짐을 풀고 회의실에 모였다.
“이틀 뒤면 제 1 방어선, 에스트라 요새에 도착합니다.”
마우그가 운을 띄웠다.
“아무래도 에스트라 요새에 도착한 뒤부터는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할 테니, 미리 이번 임무의 세부 전략을 되짚도록 하겠습니다.”
촤륵.
마우그는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쳤다. 기사단의 본단과 균열의 대략적인 모양새가 그려진 지도였다.
“배반자 에버로크가 숨었으리라 추정되는 곳은 이쪽입니다. 아직 기사단의 손길이 닿지 않은 마물의 영역이죠.”
가죽장갑 낀 손가락이 지도의 한 지점을 짚었다.
에스트라 강 건너편, 악마의 계곡이라 불리는 기사단의 영역 밖 마경이었다.
“입구에서부터 한 줄기로 쭉 이어져온 강 이쪽과는 달리, 악마의 계곡은 크고 작은 계곡 수십 갈래가 배배 꼬이고 뒤섞인 지형입니다. 누굴 추적하기는커녕 길이라도 잃지 않으면 다행인 곳이죠.”
다행스럽게도, 이번에 용병으로 참가하신 분들께서 저희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실 겁니다. 마우그는 덧붙였다.
“먼저 엘가이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이신 펠버 경께서는 땅의 기억을 읽는 능력을 가지셨다 들었습니다.”
“···인간과 달리 대지는 망각하지 않지. 에버로크가 발을 디뎠던 곳의 기억을 들여다보면, 놈이 거기서부터 어디로 향했는지 알아낼 수 있네.”
펠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정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지라, 간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확답을 들은 마우그는 이번에는 눈길을 돌려 댈런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댈런 경께서는 대상을 추적할 수 있는 유물을 가지고 계시다죠.”
“여기 있소.”
댈런은 품속에 넣어두었던 유리 구체를 꺼내들었다.
유리 구체 안의 푸른색 금속 화살표는, 이미 보름 전부터 미동도 없이 한 방향을 꼿꼿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탐색자의 좌안 파편이로군. 이젠 몇 남지 않았다 들었는데.”
펠버가 흥미로운 눈길로 유리 구체를 바라봤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유물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마우그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계속했다.
“그럼 추적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해결책을 다시 확인했으니, 세부 작전을 논의하겠습니다.”
회의는 길게 이어졌다.
마물의 계곡에 진입한 이후 기본적인 진형은 어떻게 할 것인지. 필요할 경우 조는 어떻게 나눌 것인지.
그밖에도 퇴각로를 확보할 방안이나, 최악의 상황에서 현지 보급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자잘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이런 자리는 오랜만이군.’
댈런은 테이블 한쪽에서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오가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미궁도시에서 역행의 사도들과 싸울 적, 비슷한 모습의 지휘관 회의에 참가한 적이 있더랬다.
다만 워낙 개판 오 분 전이어서 그가 직접 작전을 이끌어야 했던 당시와는 다르게, 베테랑 성기사들은 그의 개입 없이도 알아서 작전의 골자와 세부적인 사항들을 척척 결정해나갔다.
이 게임의 고인물이라 자부하는 댈런마저도 감탄할 정도로 탄탄한 계획.
그 어떤 변수가 터진다 해도, 작전에 참가한 이들의 목숨 하나만큼은 살려서 돌아올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회의에서 한 발짝 물러난 채, 조언을 구하는 질문에만 대답해주기를 얼마나 했을까.
댈런은 불현듯 느껴지는 어떤 경각심에 고개를 돌렸다.
‘···흠.’
아주 미세한, 그러나 쉬이 무시하기는 꺼림칙한 직감의 경고.
댈런은 잠시 눈을 감고 감각을 넓혀냈다.
발밑의 진동과 벽 사이의 수도관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물소리.
돌틈 사이로 스며드는 복잡하고 다양한 냄새들.
마력의 바람에서 느껴지는 세밀한 변화들이 신경을 타고 뇌리를 파고들었다.
그 자극들을 버무리고 뒤섞은 두뇌가 내놓은 결과는, 이전보다 좀 더 또렷해진 경고였다.
이제는 정말로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감각과 지능, 마력 수치의 연합은 이미 단순한 오감의 혼합이라는 틀을 넘어서고 있었으니까.
톡. 톡.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끝만으로 떠들썩하던 회의장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 자리에 모인 전원은, 한평생 스스로를 갉고닦아온 전사이거나 마법사.
그 작은 손짓으로부터 시작된 미세한 공기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한 이는 없었다.
댈런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머지 계획은 조금 있다가 짜야 할 것 같소.”
쾅!
그 말이 끝나자마자 회의실로 들이닥친 성기사.
요새에 주둔하는 성기사들 중에도 꽤 직급이 높은 그는, 다급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더니 말했다.
“회의를 방해해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성벽 위로 올라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가?”
명목적으로 일행의 책임자인 마우그가 물었다. 성기사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수천에 달하는 놀 대군이 이리로 향하고 있습니다.”
***
성벽 위.
제 2 방어선이라 불리는 이곳 성벽의 길이는, 말 그대로 방어선인만큼 계곡의 너비 그 자체와 일치했다.
어림잡아 삼 킬로미터 남짓 되는 드넓은 길이의 성벽.
허나 이곳을 지키는 병력은 기껏해야 일천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다.
그마저도 대다수는 신성 문신의 힘을 다루는 성기사가 아닌 평범한 성전사들.
‘주 방어선이 아닌, 보급고 역할의 요새니까 어쩔 수 없지. 성기사단이라고 병력이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니고.’
성벽을 따라 듬성듬성 늘어선 병력을 바라보며 댈런은 생각했다.
기사단의 방어선 중 하나인만큼, 요새의 시설 자체는 설령 악마가 이끄는 군세가 쳐들어온다 해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단단히 방비된 시설만으로 부족한 병력의 공백을 메꿀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발리스타의 화살과 신성력 덧입힌 투석구가 풍족하다 해도, 정작 그걸 운용할 병력이 충분하지 않으면 큰 의미는 없었으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마우그가 물었다. 그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놀 군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댈런은 짧게 답해주었다.
“감이오.”
“대단하시오. 감으로 이천이나 되는 놀 군대를 예견하시다니. 아니, 삼천쯤 되려나.”
“오천이 좀 넘는군.”
댈런의 정정에 마우그는 한껏 눈을 찌푸리며 신성 문신의 힘을 끌어올렸다.
“···저 어둠을 뚫고 그게 다 보이시오?”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균열 안쪽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해는 빠르게 저물었다. 이곳 제 2 방어선쯤 되면 이른 저녁만 되어도 어두컴컴해질 정도.
거기다 양쪽으로 까마득하게 솟은 절벽은 달과 별의 빛마저도 대부분 가로막았기에, 같은 밤이라도 지상보다 더 깊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물론 댈런에게는 의미 없는 어둠이었지만.
“갑각늑대 기병 몇이 먼저 달려오는군. 푸른 깃발을 들고 있소.”
“푸른 깃발? 청린의 군세요. 놈들이 사절을 보낸다!”
마우그가 소리쳤다.
그러자 요새의 지휘관이 뭐라뭐라 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에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선 기수들이 깃발을 흔들었다.
구르릉. 기기기긱.
도르래 달린 장치로 사선을 조정하는 몇몇 발리스타. 이미 장전된 대형 화살이 어둠 속에서 받아 섬뜩하게 빛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네발짐승의 거친 발소리와 함께 놀 기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은 자신만만하게 성벽 밖에 피워놓은 화로들의 범위 안쪽까지 들어왔다.
끼익.
자연스럽게 시위를 당기는 궁수들. 쇠뇌를 든 사수들 역시 놀 기수들과 갑각늑대의 머리를 겨눴다.
팽팽한 긴장감 속.
기병들 사이에서 거대한 체구의 놀 한 마리가 앞으로 나섰다. 놈이 주둥이를 열었다.
“으르릉! 성벽! 버리고 가라!”
오, 이놈도 말 할 줄 아는군.
미궁 속에서 한 판 붙었던 놀 전사장을 떠올리며, 댈런은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저 개대가리들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건, 백이면 백 초월적인 존재에게 힘을 하사받았다는 이야기였다.
‘보통은 고위 악마나 악신들 중 하나. 지금 같은 경우에는 진룡에게 힘을 받았겠군.’
진룡쯤 되면 악신만큼은 아니더라도 악마에게는 충분히 비벼볼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균열 심부의 지배자 중 하나인 청린이 옛 상처로 힘을 많이 잃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중급 악마 정도의 급은 될 터.
어쨌든 저 놀이 청린에게 직접 힘을 하사받았다는 건, 진룡이 이 대대적인 침공을 주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거 귀찮게 됐는데.’
사실 부단장 에버로크가 때 아닌 반란을 일으키고, 청린의 둥지로 도피하게 되면서 혹시나 모를 상황을 염두에 두긴 했었다.
그 상황이라는 게 바로 어미용, 청린이 직접 기사단을 침공하는 것.
문제라면 일반적인 보스몹들과는 달리, 수백 번의 플레이 중에서도 댈런이 청린을 직접 본 건 단 한 차례도 없다는 것이었다.
‘게임에서는 죽을 때까지 기사단을 침공한 적이 없었는데.’
사실 청린의 존재는 일종의 배경 설정과도 같았다.
성기사단과 오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해왔고, 그러면서도 후대에 있을 침공을 위해 강력한 세력을 키워왔다는 식의 설정.
청린은 게임이 중반부에 치닫기도 전에 오랜 부상의 여파로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어미의 힘과 세력을 이어받은 유일한 자식이, 후반부의 강력한 보스몹들 중 하나로 등장하게 되고.
‘놈한테 잡아먹힌 시체들 중에···그 캐릭터도 있었지.’
최후반부의 초입까지 버틴, 댈런의 수백 회차 중에도 그리 많지 않은 결실들 중 하나.
“항복! 그러면 팔다리만 먹겠다! 으르르! 몸통이랑 머리는! 살려주겠다!”
한편 그가 청린의 자식에게 먹힌 캐릭터를 떠올리는 사이, 놀 대장은 온갖 모욕적인 언사로 기사단을 협박하고 있었다.
물론 기사단이 그런 협박에 굴할 이들은 아니었다. 지휘관이 나직하게 말했다.
“궁수. 저 놈을 죽여라. 마물과의 협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