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천화우滿天火雨(1)
“궁수 1조, 발리스타 1조! 사격 개시! 기타 인원 대기!”
펄럭―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기수들이 큰 소리로 외치며 깃발을 흔들었다.
반짝이는 도료를 발라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잘 보이는 깃발.
성벽 위에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기수들은, 미리 약속된 움직임으로 깃발을 흔들어 기나긴 성벽 끝까지 신속하게 명령을 전달했다.
기기긱―
곧장 다시 조준되는 발리스타의 사선.
그리고 그보다 빠르게 정렬을 마친 궁수들의 활에서, 은박을 입힌 화살이 쏘아졌다.
피피피핑―
어둠 속.
쏘아진 화살들이 은색 선이 되어 어둠 속을 수놓는다.
시위가 놓아진 순간 날카롭게 감각이 돋아나고, 길게 늘어진 시간 속에서 댈런은 볼 수 있었다.
횃불과 화로의 불그스름한 빛만이 주변을 밝히는 가운데, 사선의 교차점에 선 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는 것을.
그 일그러짐은 당혹감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명백한 비웃음에서 말미암은 표정이었다.
까가가가강!
놀의 팔이 순간 흐릿해졌다. 동시에 화살들이 튕겨나간다.
어둠 속을 수놓았던 은빛 선들은, 투박한 창대와 창날에 막혀 그 끝이 굴절되거나 꺾여 떨어졌다.
한낱 놀의 손아귀에서 펼쳐졌다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기예.
기리릭― 철컹!
그리고 때마침 조준선 정렬을 마친 발리스타에서, 대형 화살이 쏘아졌다.
놀 대장은 이번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휘둘러진 창끝이 제 머리통만 한 화살촉에 닿는 순간, 놈의 이마에서 어떤 기이한 문자가 빛을 발했다.
우웅―
순식간에 놀 대장을 감싸는 푸른 방어막.
궤도가 비틀어진 거대 화살은, 그 반투명한 푸른 방어막에 막혀 놀의 털끝조차 스치지 못하고 빗겨나갔다.
콰가가각!
거대 화살이 지면을 긁고 지나간다.
단신으로 공성 병기를 막아내는 모습에, 성벽 위의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놀 대장은 낮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피부에 소름이 오도독 돋게 하고, 온몸에 힘이 빠지게 만드는 울음소리였다.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의 그르렁거림에, 신성력이 거의 없는 성전사들이 주춤거리기 시작한다.
“궁수들은 뭘 하나! 적은 놀이다! 적장만 쓰러뜨리면 그만이다! 전원 조준!”
지휘관이 다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활을 든 성전사들이 화살을 시위에 메겼다.
작게 떨리는 손아귀. 가까스로 당겨내는 활시위.
몇몇은 긴장한 나머지 화살을 떨어뜨리고, 멋모르고 시위를 놓쳐 힘없이 성벽 아래로 화살을 날리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놀 대장은 얼굴을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놈의 입장에서는 지금이 적의 사기를 꺾을 기회이리라.
놈은 길쭉한 주둥이를 벌려 다시금 외쳤다.
“으릉! 항복! 산다! 저항! 죽는···”
패래랙― 쨍그랑!
그 순간이었다.
빛의 원반이 어둠을 갈랐다.
좀 전에 쏘아진 발리스타의 배는 되는 속도로 날아간 원반은, 허무하리만치 가볍게 보호막을 깨뜨리고 놀 대장의 미간에 틀어박혔다.
“컹···!”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몸을 부르르 떨며 뒤로 넘어가는 놀 대장.
힘 없이 갑각늑대 위에서 미끄러지는 놈을 보며 댈런은 픽 웃었다.
경험치도 별로 안 주는 새끼가 말만 많았군.
“······.”
“······.”
도끼질 한 번에 방금까지의 압박감이 한순간에 씻겨나가고, 기묘한 침묵이 성벽 위와 놀 기병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지휘관을 돌아봤다. 그가 말했다.
“안 쏘시오?”
***
“···전원 발사!”
지휘관이 소리치쳤다. 깃발이 어둠을 가른다.
그 즉시 화살이 쏘아졌다. 활에서, 쇠뇌에서, 그리고 발리스타에서도.
쐐애애애―!
굵고 얇은 은빛 선들이 허공을 수놓는 가운데, 놀 대장과 함께 왔던 기병들은 황급히 늑대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깨갱! 깨개갱!
등판에 활대를 꽂고 하나둘씩 쓰러지는 놀 기병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갑각늑대의 가죽은 쇠뇌 화살 정도는 되어야 뚫을 수 있는 단단한 갑주였고, 놀 기병들 역시 무겁지만 튼튼한 갑옷을 걸치고 있었으니까.
서른 남짓 되던 호위 기병들 중, 화살비에 쓰러진 건 반 남짓뿐이었다.
나머지 놀 기병들은 순식간에 화살의 사정거리를 벗어나 도망쳤다.
그때였다.
콰직!
놀 대장의 미간에 박혔던 도끼가, 스스로 두개골을 쪼개고 뽑혀나온 것은.
우웅···.
파르르 떨며 허공에서 멈춰선 도끼.
군데군데 깔린 화롯불 사이, 불그스름하게 번쩍이는 도끼날의 물결 무늬를 응시하며.
“레니아― 바사크.”
댈런은 나직하게 주문을 외었다.
파직!
주문과 함께 들어올린 손.
그 펼친 손바닥 안쪽에서, 새파란 전격의 가닥들이 손가락을 타고 형형이 일어난다.
전격의 가닥들은 이내 저 멀리 떨어진 도끼날에도 동일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날을 따라 음각된 물결 무늬에서부터 시작되어, 순식간에 도끼날 표면을 덮어버리는 푸른 스파크들.
‘레레도나라의 비검이 가진 진가는, 단순히 손을 대지 않고 날붙이를 움직일 수 있는 게 끝이 아니지.’
단순한 비검술이라면 B등급을 받지 못했을 테다.
레레도나라의 비검은 천 년도 더 전, 이름난 엘프 검사가 창시해낸 검술.
검사인 동시에 뛰어난 마법사였던 그녀는, 어느 날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고 한다.
자신의 손끝에서 쏟아내는 화염과 번개를, 검에 덧입혀 휘두를 방법은 없을지.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주문을 입힌 병기로 원거리에서 적을 격살할 수는 없을지.
‘그리고 그녀가 수십 년에 달하는 연구와 정진 끝에 개발해낸 검술이, 바로 레레도나라의 비검.’
의지만으로 날붙이를 제어하고 움직여낼 수 있는 비검임과 더불어.
그렇게 날아다니는 무기에, 스스로의 주문을 덧입힐 수 있는 마검사에게 특화된 스킬.
처음으로 얻어낸 B등급 스킬에 대해 짧은 소고를 마친 댈런은, 번뜩이는 전격을 향해 좀 더 의지를 불어넣었다.
마침 의뢰 보수로 그가 고른 손도끼의 능력은, 레레도나라의 비검이 가진 힘과 딱 어울렸다.
성검만큼은 아니라도 어지간한 성유물 수준으로 단단한 내구도.
그리고 외부에서 들어온 힘을 거의 배 가까이 증폭시키는 능력까지.
파지지지직―
쏘아지는 번개 주문이 새파란 전격의 그물이 되어, 도끼 전체를 집어삼키며 하나의 전격 덩어리로 만들어갈 즈음.
댈런은 손끝을 까딱 움직였다.
콰지지지―
손도끼가 쏘아졌다.
마치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시위에 걸렸다 발사된 듯한 모양새였다.
그 속도와 회전력에 의해 마치 푸른 빛을 두른 원반처럼 보이게 된 손도끼는, 화살비에서 살아남은 놀 기병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쇠뇌에서 쏘아낸 화살 이상.
도주하는 행렬의 후미까지 닿는 건 한순간이었다.
츠각!
한 놈의 머리가 떨어진다.
댈런은 손을 다시 까딱였다.
촤악!
다른 놈의 옆구리를 길게 갈라낸 도끼가, 뿜어지는 전격으로 그 안의 내장을 다 태워버리며 다음 희생자를 물색했다.
스각! 콰직! 지지직!
살아있는 것처럼 기병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는 새파란 원반.
형형하게 뿜어지는 전격과 희생자들이 쏟아내는 핏줄기가, 손도끼가 스치고 지나간 궤적을 따라 길게 뒤섞였다.
그건 마치 검푸른 뱀이 어둠 속을 훑고 지나가며, 날카로운 이빨로 기병들의 숨통을 끊어놓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독사가 열 남짓 되는 놀들을 죽이는 데까지는, 채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깨갱―!
마지막 먹잇감이 날카로운 이빨에서 뿜어지는 전격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댈런은 아직까지도 푸른 전격이 남아 파직거리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방금까지 피에 취한 듯 적들의 숨통을 끊어놓던 도끼가, 그 자리에서 멈칫하더니 그대로 반전해 돌아왔다.
패래래래랙― 착!
주인의 손아귀에 빨려들어가듯 안착하는 손도끼.
“······.”
성벽 위의 병사들은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댈런을 돌아봤다.
그건 성전사들뿐 아니라 성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도끼에 붙은 살점과 피를 툭툭 털어낸 댈런은, 그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 무심하게 적진을 바라봤다.
그는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지휘관과 그 호위들마저 죽었으니, 놀의 습성대로라면 당연히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야 할 터.
그러나 놈들은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그때 댈런의 눈에 전열 앞으로 나온 놀 몇 마리가, 큼직한 뿔나팔을 꺼내 입에 가져다대는 게 보였다.
뿌우우―
균열 전체를 메아리치는 나팔 소리.
그 기나긴 신호가 끝나자마자.
크어어어어!
원래라면 물러나야 마땅할 놀 군세가 울부짖으며, 전력을 다해 성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전원 대기!”
기리릭― 구그그긍.
재장전된 발리스타가 천천히 움직였다. 거대한 돌덩이를 쏘아낼 준비를 마친 투석기도 대기중이었다.
궁수들이 다시금 시위를 당기고, 쇠뇌수들은 어깨받이에 상체를 밀착시키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으르릉! 그아아아!
긴장된 호흡들과 미세하게 요동하는 시선들.
그 시선이 바라보는 건, 거대한 계곡을 가득 메우고 달려오는 놀의 군세였다.
오천이 넘어서는 놀 군세는 말 그대로 개미떼처럼 보였다.
그것도 진룡의 힘을 받아 순수한 근력만으로 성인 남성의 허리를 꺾어버리고, 평범한 경비병 몇 명을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체고 이 미터짜리 개미떼.
심지어 놈들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들고 있는 무기들에서부터 공성전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횃불 든 놈, 톱날 같은 칼을 뽑아든 놈, 긴 사다리나 갈고리 밧줄을 어깨에 걸친 놈, 갑각늑대에 올라타거나 큼직한 활을 꼬나쥔 놈, 등등.
가지각색의 무기와 공성 도구를 가지고, 마찬가지로 다양한 품질의 갑옷을 걸친 놀 전사들.
그들에게는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살기와 식탐으로 번뜩이는 눈빛.
그건 성벽 뒤에 숨은 먹잇감들을 바라보는, 맹수의 눈동자였다.
‘역시 가짜였군.’
물론 댈런은 그 살기등등한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며 턱을 긁적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 그의 도끼에 단명한 놀 대장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다.
‘비록 한 방에 가긴 했어도 놈은 충분히 강했다. 무력만 따지자면 미궁에서 붙었던 놀 전사장 바르구프 이상이야.’
놈이 도끼질 한 번에 죽은 건, 그만큼 근 몇 달 동안 댈런의 무력과 무장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졌기 때문.
결코 놈의 실력이나, 진룡에게 하사받은 힘이 미약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놈이 진짜 대장이 아니라는 거지.’
그리고 이토록 일사불란한 군세의 움직임을 보면, 진짜 놀 대장은 저 무리 안쪽 어딘가에 있을 테였다.
댈런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가짜 대장, 혹은 무리의 부 지휘관 정도 되는 놈이 발리스타를 어려움 없이 막아낼 정도다.
그렇다면 이 무리를 이끄는 진짜 지휘관은, 과연 얼마나 강력한 무력의 소유자일까.
댈런은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리는 듯했다.
그건 놈이 줄 경험치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어쩌면 싸움 자체를 향한 기대감일지도 몰랐다.
“···이 와중에 웃고 계시다니. 댈런 경께서는 정말 타고난 전사시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