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78화 (78/288)

만천화우滿天火雨(2)

말아올려진 입꼬리를 본 마우그가 말했다. 댈런은 말없이 낮게 웃었다.

이 육체를 입게 된 이후로, 그의 호승심이 남들과 같지 않다는 건 이미 오래 전부터 인지하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뭐 어떠랴.

댈런은 이 감정, 혹은 이 감각이 그리 싫지 않았다.

싸움을 앞두고 듫끓는 피와 흥분감은, 그가 이 세계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것도 흔한 말로 그저 숨만 쉬는,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끌려가는 인생이 아닌 스스로 개척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

그리고 그건 무기력한 배불뚝이 아저씨였던 시절의 과거를 뇌리에서 지워버릴 만큼 강력한 자극이었다.

‘더군다나 어차피 물러날 길 없는 신세인걸.’

모니터 너머에서 이 세계를 수백 번이나 경험해온 그는, 대륙의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종말은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수백 번에 가까운 삶에서, 이 정도면 종말을 극복해낼 수 있으리라 희망했던 회차가 없던 게 아니다.

그러나 그의 저항이 극심해질수록, 종말 역시 전에 없는 맹렬한 기세로 그를 추격해 끝내 앞질러냈을 뿐.

그리고 마지막 삶을 시작하게 된 지금.

댈런이 생각하는 대처법은 간단했다.

지나온 길들에서 비롯된 지식들과, 새 육신에 힘입어 또렷해진 의지.

이 정도 조건을 갖춰낸 이상, 예전처럼 쫓길 생각은 없다.

단순한 생존이든 지구로의 귀환이든,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어디를 바라보느냐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어떤 것이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종말에 정면으로 부딪혀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단 한 번도 이겨낸 적 없는 놈을, 철저하게 깨부숴야만 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즐겨야지. 그렇지 않겠소?”

“···거참, 성검의 인정을 받은 분다운 대답이시로군요.”

너무나 이상적인 그의 대답에, 마우그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댈런은 한 번 더 소리내어 웃으며 전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 군세는 시시각각 성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 선 건 놀 기병들이었다.

단창을 꼬나쥔 기병들은, 보통의 군마보다도 월등하게 빠른 속도로 성벽을 향해 달려오는 중이었다.

당연하게도 사선에 가장 먼저 노출된 것 역시 놈들이었다.

긴장감에 사로잡힌 성벽 위.

놀 기병대가 지면에 깔린 화로의 범위 안에 들어온 순간.

침묵을 깨고, 지휘관이 명령을 내렸다.

“발리스타! 발사!”

기릭― 철컹!

수십 문에 달하는 발리스타가 일제히 사격을 가한다.

거대한 화살들이 굵은 은빛 직선이 되어 날아들었다.

그건 마치 성벽 아래로 은빛 소나기가 떨어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콰과과광!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더 속도를 높이는 기병대의 진형 한가운데.

굵은 소나기가 늑대 무리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지면을 갈아엎고, 거대한 먼지구름이 순간적으로 뿌옇게 시계를 가렸다.

연막 속 들려오는 소음과 짐승의 비명들.

곧이어 선두의 놀 기병들이 그 구름을 헤치고 빠져나왔다. 지휘관이 다시금 소리쳤다.

“궁수! 발사!”

굵은 소나기의 뒤를 이어 가느다란 장맛비가 쏟아진다.

거대 화살을 피해낸 놀 기병들 앞에 닥친 건, 수백에 달하는 화살이 이뤄낸 넓은 화망이었다.

퍼버버벅!

고슴도치가 된 놀들이 고꾸라진다.

발리스타의 일제 사격으로 한 차례 타격을 입은 기병들에게, 이어지는 은화살 세례는 치명적이었다.

고작 두 차례의 일제 사격.

그것만으로도 백 남짓 되는 놀 기병대는 절반 가까이가 시체가 되었다.

나머지 절반 중에서도 크고 작은 상처를 안 입은 놈이 없을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의 노란 눈동자는 흉포함을 잃지 않았다.

애당초 놀 종족을 퇴각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뿐이었으니까.

무리 전체에게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히던가.

아니면 놈들을 이끄는 지휘관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것.

두두두두―

생존한 놀 기병들은 마지막 투지를 불태우듯 순식간에 성벽에 접근했다.

놈들이 꼬나쥐고 있던 단창을 들어올렸다. 지면에 깔린 화롯불에 붉게 번쩍이는 창날들.

쐐애애애―

그리고 그 번쩍임은 이내 아래에서 위로 쏟아지는 수십 가닥의 붉은 소나기가 되어 성벽을 덮쳐들었다.

“커헉!”

“끄아아악!”

투창 세례에 성전사들이 쓰러진다.

투박한 창끝에 판금과 사슬이 꿰뚫리고, 성벽에 맞은 투창은 튕겨나가기는커녕 돌 자체에 박혀들었다.

과연 진룡에게 조금씩이라도 힘을 하사받은 놀 전사의 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저들 딴에는 단창이라고 하나, 사람에게는 평범한 창이나 다름없는 크기의 투창을 성벽 위로 날려보낼 정도였으니.

“발사!”

십수 명에 달하는 성전사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성전사들이 시위를 다시 메기고 화살을 쏘아냈다.

재차 가해진 사격에 놀 기병들이 고꾸라지고, 놈들은 곁에서 아군이 죽어감에도 아랑곳 않고 단창을 던져댔다.

두두두두―

곧이어 전멸에 가까워진 첫 기병대를 뒤이어, 또 다른 백여 마리의 기병대가 들이닥쳤다.

다시금 아래로 쏟아지는 굵은 소나기와 가느다란 장맛비. 역류하는 단창 세례의 번뜩임들.

“재장전! 재장전! 쉬지 말고 사격해라! 놈들을 고깃덩이로 만들어라!”

“투석기는 본대를 노린다! 전원 발사!”

마침내 뒤따르던 본대가 투석기의 범위 안에 들어오고, 투창 세례가 닿지 않는 후방에서 커다란 돌덩이들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밧줄의 거친 마찰음과 함께 날아가, 어둠 속에서 포물선을 그리는 거대한 사람 크기만 한 석재들.

꽈과광! 꽈광!

그 하나하나가 신성력을 품고 은은한 빛의 궤적을 남겨내다, 종국에는 지면과 만나며 폭발해 육편과 핏자국이 가득한 구덩이를 만들었다.

‘이게···전쟁인가.’

그 모든 광경이 내려다보이는 성벽 위.

댈런은 날아드는 화살과 투창들을 반사적으로 쳐내며 생각했다.

살의를 품은 투사체들이 끊임없이 오간다.

크고 작은 화살들. 투창과 돌덩이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암기들.

반복되는 날붙이의 교환 속에서, 번복될 수 없는 죽음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단창에 머리가 꿰뚫린 성전사.

발리스타에 상반신이 터져나간 놀 기병.

큼직한 장궁에서 쏘아진 맹독 화살은 성기사의 갑옷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로 하여금 스스로 팔을 잘라내야 하게 만들었고.

그 화살을 쏘아낸 놀 궁병은, 투석기가 날려보낸 돌덩이의 낙하 지점 한가운데 서 있다가 폭발에 휘말리며 단숨에 고깃조각이 되었다.

화로에 타고, 바닥을 구르고, 낙마해 목이 부러지고, 성벽에서 떨어져 몸이 으스러지고, 내장이 흘러나오는 중상이나 그보다는 작은 수많은 상처들을 입은 채,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절명하는 몸뚱이들.

“······.”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전장의 풍경만큼은 모니터 너머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수많은 목숨이 있던 자리에서 산화하고, 악신으로 예표되는 악의와는 또 다른 종류의 악의가 공기중에 퍼져나간다.

깎아지른 두 절벽 사이.

오직 혼돈으로 가득 찬 대지.

“후우.”

댈런은 잠시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눈앞의 압도적인 광경은, 이미 한 단계를 이뤄낸 그의 심상 속에도 어떠한 변화를 이뤄내기에 충분했다.

잠시 후 다시 뜬 그의 눈은, 기이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검은 눈동자 안, 번뜩이는 마력광 사이로 붉게 일렁이는 불과 같은 기운.

그 검붉음 너머에서, 섞이지 않던 두 하늘이 서로에게 스며들어가는 모습이 언뜻 비쳤다.

***

치열한 싸움 속에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동안 놀 기병대는 다섯 차례나 자살돌격에 가까운 공격을 감행했다.

성벽 위의 적들에게 일차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과 더불어, 본대에 집중되어야 할 화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목적.

그렇게 오백에 가까운 기병들이 들이닥쳐 산화할 즈음, 투석기에 몇 차례 두들겨맞은 놀 군세의 본대 역시 성벽 앞까지 도달했다.

가장 먼저 날아든 건 갈고리였다.

캉! 카가각!

성벽에 걸린 갈고리에는, 칼로도 쉽게 자를 수 없는 튼튼한 밧줄이 묶여 있었다.

이내 길다란 사다리도 성벽에 걸쳐지고, 본격적으로 놀 전사들이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돌을 던져라! 끓는 기름을 부어라!”

지휘관이 소리쳤다. 성전사들이 훈련받은 대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미리 준비해둔 솥을 기울여 펄펄 끓는 기름을 쏟아내고, 큼직한 돌을 떨어뜨려 성벽을 기어오르는 놀들의 머리통을 깨뜨렸다.

댈런 역시 단검과 도끼를 뽑아들고 나섰다.

휘리릭! 촥!

주문살해자가 저 혼자 성벽 위를 누비며, 막 성벽에 기어오른 놀 전사들의 목젖을 꿰뚫기 시작한다.

그 사이 댈런은 손도끼로 놀들의 머리를 쪼개거나, 사다리에 도끼날을 걸어 성벽 너머로 되돌려 넘겨버렸다.

스가각!

부상당한 성전사에게 커다란 칼을 내리치려는 놀.

순간 번뜩인 댈런의 도끼가, 놈의 두 팔을 시작으로 머리까지 몸에서 분리시킨다.

“으르르―칵!”

콰직―

곧장 몸을 돌리며 그의 등을 노리고 달려들던 근육질의 놀 광전사에게 발끝을 뻗어내고, 일격으로 단단한 두개골을 그대로 함몰시켜버린다.

후두둑 튀어오르는 뇌수와 피, 그리고 눈알.

‘흠.’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 그것들을 대충 피해내며, 댈런은 생각했다.

과연 지금처럼 도끼를 들어 놀 궁병의 화살을 쳐내고, 올라오는 놈들을 찍어버리며 사다리를 밀어 넘어뜨리는 게 나을지.

아니면 직접 성벽 아래로 내려가, 좀 더 거친 싸움을 하는 게 나을지를.

선택지는 두 가지.

판단은 빨랐다.

스릉.

기사단의 대장간에서 만들어준 검집에서 성검의 푸른 검신이 뽑혀나왔다.

허리춤에 도끼를 꽂아넣은 댈런은, 근처에서 싸우던 고위 기사 마우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자리를 잘 부탁하겠소.”

“···예?”

마우그가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댈런은 씩 웃어준 뒤 성벽의 엄폐 위로 몸을 드러냈다.

사다리가 성벽에 드리워지고, 갈고리 밧줄이 날아드는 가운데.

접전 중에도 끊임없이 화살과 돌, 투창 세례가 오가는 양쪽 진영의 이목이 단번에 그에게 집중된다.

성벽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성검을 든 전사를 바라보는 수십 쌍의 붉은 눈동자들.

동시에 이쪽을 겨누는 십수 개의 위협적인 사선에 감각이 저릿하게 경고성을 토해냈다.

탁.

댈런은 그 모든 걸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성벽 너머로 내딛은 그의 발이, 허공을 디디며 기이한 파문을 일으킨다.

꽈아아앙―!

곧이어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솟아오르는 신형.

성벽 너머, 어둑한 하늘 높이 치솟은 그의 눈이 마력광으로 번뜩였다.

스으―

숨을 깊게 들이쉰다. 마력의 바람을 붙들어 세우고, 심상을 구체화해 그 바람에 의지로 덧입힌다.

우르르릉.

그러자 균열 저 위 하늘에서부터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마치 화산이 제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불편하게 토해내는 듯한 기이한 울음소리.

두 절벽 사이를 메아리치는 불길한 뇌성 저편에서, 붉은 열기가 먹구름을 뚫고 드리웠다.

“이그넬― 셀티데오 라그레타.”

짧은 영창이 심상을 형상화한다.

검붉은 먹구름은 균열 안쪽으로 불꽃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댈런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 전장이 변화시킨 그의 심상 너머, 환상세계의 풍경에서 그려지는 그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휘릭―

거의 백 미터 가까이 치솟은 그가 신형을 반전해, 공중에서 거꾸로 지상을 향한 채 허공을 디뎌낸다.

발밑에 일렁이는 파문. 양손으로 굳세게 쥔 성검.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건, 그의 심상 너머 영역에서 보이는 하늘이었다.

붉은 화우(火雨)의 기운과, 번쩍이는 우레가 공존하는 빽빽한 먹구름.

원래라면 섞이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던 두 힘이, 마치 전장이라는 혼돈 속에서 수많은 것들이 교차하듯 한 장소에 뒤섞여버린 정경.

우르르릉.

검은 눈동자가 그 심상의 마력을 품어냄과 동시에, 진동하는 성검과 구름 안쪽에서 서로 화답하듯 우렛소리가 울리고.

오천에 달하는 놀 전사들의 눈동자에 선명하게 새겨진 건, 쏟아지는 불의 비 사이로 지상에 내리꽂힌 섬전 같은 신형과.

번쩍!

그의 궤적을 그림자처럼 쫓은 끝에, 그보다 앞서서 내려치는 한 줄기 벼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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