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천화우滿天火雨(3)
“크르르······.”
백인대장 계급의 놀 전사, 글루트는 불편하게 으르렁거렸다.
머리 위 하늘의 모든 것이 적의를 품고 있었다.
궁병들의 쇠뇌 세례와 투석기가 날려대는 폭발하는 돌덩이들.
그리고 그보다 한참 더 올라가, 절벽 너머의 먹구름에서부터 쏟아지는 불의 비까지.
갈고리를 던지던 부하는 화살을 피하려는 찰나 쏟아진 화염 세례에 불타버렸다.
같은 어미에게서 태어난 형제 백인대장은 앞장서서 공성추를 이끌던 도중, 신성력의 폭발에 휘말려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땅 위에서는 저것들을 피할 수 없다.’
죽어가는 놀 전사들을 보며, 글루트는 생각했다.
다만 물러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오천이 넘어가는 놀 군세를 이끄는 그들의 대장이, 여전히 살아서 무리를 이끌며 독려하고 있었으니까.
혼란스런 전장 속에서 대장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으나, 특별한 유대감으로 묶인 놀의 영혼은 그들의 지휘관이 품은 의지를 느끼는 게 가능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성기사들을 향해 불타오르는 대장의 투지.
“그르르···.”
글루트는 고심했다.
성벽을 넘어서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번번이 죽음으로 끝나고 있는 상황.
어떻게 하면 이 싸움에서 승리해, 저 더러운 인간 놈들의 살점을 씹어삼킬 수 있는가.
놀의 원시적인 두뇌는 간단한 해답을 도출해냈다.
‘···땅 아래. 성벽 밑으로 내려가면 돼.’
아우우우!
글루트가 길게 울부짖었다. 그의 부하들을 불러모으는 울음소리였다.
금세 모여든 부하들에게, 글루트는 땅을 파기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최대한 깊고 튼튼하게, 그러면서도 성벽 쪽으로 기울어진 땅굴을 만들라는 지시.
상명하복 체계가 철저한 놀들은 이유를 묻지 않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퍽퍽! 퍽!
수십 마리가 돌과 흙을 헤집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땅굴의 초입 지점이 번듯하게 완성되었다.
균열의 절벽에 동굴을 파고 사는 놀들은, 다른 지역의 동족들보다 땅굴 파는 능력이 월등히 뛰어났기에 가능한 일.
글루트는 재빠르게 부하들을 이끌고 땅굴 안으로 들어갔다.
눈 먼 죽음들이 오가는 지상에 비해 땅굴 안은 굉장히 아늑했다.
더 이상 떨어지는 불덩이들도, 날아드는 화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조금만 더 깊게 내려가면 폭발하는 돌덩이들까지도 막아낼 수 있겠지.
그리고 부하들의 땅굴 파기 실력이라면, 성벽 아래로 침투하는 건 금방일 듯했다.
“크르릉.”
글루트는 클클 웃었다.
역겨운 성기사 놈들, 뒤에서 우리가 등장할 거라곤 생각도 못 하고 있겠지.
놈들의 방심한 뒷덜미를 물어뜯고, 분수처럼 뿜어지는 피를 뒤집어쓸 생각에 벌써부터 군침이 고였다.
구르릉······.
그때였다.
땅굴 벽면이 미세하게 떨렸다.
근처에서 끔찍한 전쟁신의 힘을 담은 돌덩이가 폭발했나? 글루트가 그렇게 생각하며 굴을 더 깊게 파라고 지시하려던 찰나였다.
쿠르르릉···!
발밑이 뒤흔들린다. 바닥만이 아니었다.
천장에서 푸스스 모래 부스러기가 흘러내리고, 튼튼하게 다져진 흙벽이 퍼석거리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그······.
땅굴이 붕괴한다. 토사가 머리 위로 쏟아지고, 돌덩이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크르릉! 크어!”
지진이다. 도망쳐라.
원시적인 놀 언어로 그렇게 외친 글루트는, 곧장 몸을 돌려 굴 입구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외침은 놀 백인대장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뒤흔들리던 땅이 다음 순간 입을 쩍 벌리고, 굴 안에 있던 모든 놀들을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
“후우.”
펠버는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에서도 유독 높게 솟은 첨탑 위, 그는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수인을 맺어내고 있었다.
복잡한 수인이 아니었다.
몇 개의 선을 긋고, 그것을 둥글게 이어내는 간단한 손짓들.
허나 그 수인 끝에 발현된 마법은 계곡의 지면을 진동시키고, 지하로 침투하던 놀들을 그대로 생매장할 정도로 강력한 위력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의 손에 매장된 놀이, 벌써 백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스승님, 축하드립니다! 마침내 경지를 이뤄내신 거군요!”
곁에서 큼직한 돌덩이 창을 빚어 날리던 토미가 외쳤다.
제자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주문 한 줄 없이 수인과 의지만으로 빚어낸 마법이, 땅을 몇 번이고 움직이며 갈아엎는 광경.
그건 분명 자신의 스승이 오랜 정체기를 뚫고, 노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래.”
펠버는 입꼬리만 살짝 끌어올렸다.
그는 앙상하게 마른 손을 들어, 자신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제자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주었다.
그 미적지근한 반응에 제자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그가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기쁘지 않으십니까?”
“아니. 기쁘다. 어찌 기쁘지 않겠니.”
펠버는 의식적으로 조금 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제자의 말이 맞았다. 그는 경지를 돌파했고, 그건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삼십대 중반에 작은 영역을 빚어내고, 사방에서 천재라고 치켜세워주던 목소리에 오만했던 젊은 시절.
그렇게 엘가이아 마탑의 최연소 원로 마법사 직책을 단 이후, 수십 년간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되었던 절망감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궁여지책으로 경지를 뚫어내기보단 지금 가진 힘의 활용성을 극대화하는 걸 택해, 나름 대지술 주문의 응용 방면에서는 일가견이 있는 권위자가 되긴 했다.
‘경지는 위로만 뻗어가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도 넓어지는 법일세.’
동료 교수들과 후배들 앞에서 그렇게 끊임없이 선언하며, 스스로의 정체기를 합리화하다 못해 안주해버린 그의 노년기.
그 과정에서 젊을 적 잃어버렸던 겸손과 인내라는 미덕을 다시 배우게 되긴 했지만, 어찌됐건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마 성취가 막힌 여느 마탑의 원로들처럼, 그 역시 그렇게 살다가 끝을 맞이했으리라.
어느 날, 아주 우연한 계기로.
한 줄기 빛과 같은 기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댈런.’
펠버는 고개를 들었다.
균열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과, 그 먹구름에서 쏟아지는 불덩이의 세례가 보였다.
전장을 압도하는 대규모 마법을 시전하고도, 적들의 심부로 파고들어가 홀로 세 자릿수의 놀을 격살하고 있는 대전사.
그 초인적인 역량을 눈앞에 둔 채, 펠버는 문득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떠올려보았다.
***
‘그땐 의뢰주와 용병의 관계였었지.’
쫓겨난 사형의 흔적을 따라가다가, 되려 실종되어버린 제자를 놓고 애타던 시절이었다.
안면이 있던 청동 경비대의 침묵중대장 가웨인이, 한 용병을 추천해주기에 망설임 없이 지명 의뢰를 넣었었다.
사실 의뢰를 맡겨놓고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컸는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제자를 돌려받고서 얼마나 놀랐던가.
그 장본인이 대체 누군지 궁금해 만남을 요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댈런과 마탑 지부에서 대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놀랐다.
호기심에 몰래 펼쳐낸 영역의 힘이, 한낱 용병의 혈관에 용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말해주었으니까.
‘끌끌, 그게 고작 반 년도 안 된 과거라니.’
그 이후 몇 달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저 전사에게 붙은 이명은 한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였다.
사교도의 수괴를 죽이고 미궁에서 악마를 처치한 것도 모자라, 마녀의 숨통을 끊어버리며 성검의 주인으로 인정받은 신의 전사.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기사단을 구해낸 용살자라고까지 일컬어지는 그였다.
공교롭게도 펠버 자신이 오랜 정체기를 돌파해낸 것 역시, 그가 용의 목을 잘라버린 바로 그날이었다.
‘죽음의 위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계를 뛰어넘게 만든다더니.’
홀로 주문을 쥐어짜 특임대의 공세를 막아내던 그날.
대부분의 마력이 소모된 채, 에버로크의 일격에 얻어맞은 펠버는 며칠간 생사를 오갔었다.
다행히 성기사단의 치유 기도와 고도화된 의술은 그의 몸을 완전히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만 안정된 마탑의 삶에 적응했던 그에게, 죽음의 위기가 가져다온 충격의 크기는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충격만이 돌파구를 만들어주는 법.
수십 년간 정체되어있던 영역의 풍경은, 사경을 헤매는 중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우웅······.
손끝을 까딱이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떨린다.
의지의 발현은 곧 마력의 바람과 일체가 되었다.
생사의 갈림길 끝에 이루어낸 상승은, 모든 마법사들이 꿈꾸는 지고의 경지.
‘큰 영역.’
흔히들 대마법사라 불리는 기준에, 펠버는 마침내 도달하게 된 것이었다.
“스승님! 11구역 성벽에서 지원 요청입니다! 엘르― 발라둠!”
어둠 속에 휘적이는 깃발을 본 토미가, 황급하게 주문과 함께 수인을 맺어냈다.
한 번의 마법으로 열 개에 가까운 돌화살을 만들어내, 필요한 적재적소에 지원 사격을 가하는 능숙함.
근래 들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 1인분 이상을 하게 된 청년 마법사의 뒤에서, 손끝을 까딱이는 것만으로 그걸 동일하게 해내며 펠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심상 너머, 영역을 들여다본다.
전에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확장된 영역의 크기.
‘엘르― 메멘토 엘레구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입모양만으로 중얼거린 영창에 그의 발밑에서 파문이 퍼져나갔다.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영역을 이룬 이조차 감지하지 못할 희미한 파동.
그 파동은 단숨에 전장 전체를 뒤덮어버리고, 그 범위 내의 수천에 달하는 생명들이 펠버의 머릿속에 동시에 각인되었다.
두려움에 숨을 헐떡이는 성전사.
그 성전사에게 투창을 겨누는 놀 기병.
섬전처럼 날아들어 놀의 머리를 쪼개버리는 손도끼와, 그 도끼에 연결된 의지의 주인까지.
마치 신이 땅을 굽어보듯 모든 존재를 동시에 인식하는 펠버의 시선은, 심지어 현재에만 묶여있는 것조차 아니었다.
각 생명체의 과거가 수천 개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그 과거를 기반으로 각자에게 예정된 미래까지 그려진다.
단순히 대지의 기억을 읽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에 아슬아슬하게나마 미친 영역의 힘.
그건 신의 능력인 전지(全知)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편린의 편린 정도에는 닿았다 할 수 있는 권능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이상도 가능할지도.’
펠버는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그가 이뤄낸 영역의 힘은, 단순히 과거와 미래를 관망하는 선에서 그치는 종류가 아니었다.
다만 그 숨겨진 진가를 이끌어냈을 때, 늙고 노쇠한 몸이 버틸 수 있을 것일까.
펠버는 거기에도 명확하게 답할 수 있었다.
그 힘을 사용하는 순간, 그의 여정은 거기까지라고.
주륵.
뜨끈한 액체가 코에서 흘러내린다. 펠버는 제자 모르게 손수건을 꺼내 흘러내린 핏줄기를 훔쳤다.
‘후후···그러든 말든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긴 하다만.’
짧으면 몇 주. 길어봐야 반 년.
펠버는 소리 없이 웃으며, 남은 날을 대략 셈해보았다.
‘그래도 아쉽구나. 이제야 가까스로 닿은 힘이거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노년에 경지의 급격한 상승을 이뤄내긴 했지만, 그 힘은 노쇠한 육신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분량.
필멸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힘을 담아두는 게 영역이라는 그릇이라고 하나, 그 통로가 되는 육신의 역할 역시 영역의 크기 못지않게 중요했다.
영역의 힘을 굳이 이끌어내지 않더라도, 그릇에 담긴 물이 찰랑거리듯 그 힘의 일부분은 끊임없이 육신을 통해 현실로 새어나오는 건 당연한 일.
그 일부마저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낡은 몸뚱이라면, 필연적으로 얼마 가지 못해 부서지는 법이었으니까.
‘어차피 마지막을 맞이할 신세라면, 그 끝은 의미 있게 마무리하는 게 좋겠지.’
펠버는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놀 군세의 한가운데, 유독 듬성듬성 비어있는 공간이 보였다.
그건 홀로 수백의 놀을 학살하고, 그들의 대장과 맞붙기 시작한 어느 용병이 만들어낸 공백.
운 좋게도 펠버가 이뤄낸 전지의 편린은, 출처를 알 수 없던 저 용병의 과거마저도 조금은 알아낼 수 있었다.
‘대지의 기억이 없다 해서 기이하게 여겼거늘. 회귀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펠버가 본 건 누군가의 인생이었다.
그것도 하나의 인생이 아닌, 수많은 삶의 시작과 끝.
거기에는 현자의 얼굴을 한 노인도 있었고, 지금의 댈런과 같은 용병도 있었다.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방향으로 걸어간 인생들을 펠버는 목도했다.
동일한 지점에서 시작하여 각자의 삶을 살아가다, 끝내 종말에 맞서며 장렬하게 전사하는 수십에 달하는 삶의 궤적들.
‘내가 본 것만 수십이었으나, 내 힘으로도 내다볼 수 없는 수백이 더 이상이 있었지.’
한 사람의 과거에 그 수많은 생애가 들어있다는 걸, 펠버는 회귀라는 현상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마치 종말을 막기 위해 태어난 듯, 똑같은 시점을 다양한 조건으로 끊임없이 반복하는 회귀자의 영혼.
그리고 적어도 그가 본 바에 의하면, 지금만큼이나 성공적으로 종말의 기세를 꺾어놓은 회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한이 정해진 인생에서, 의미 있는 마무리는 무엇일까.”
펠버는 저도 모르게 스쳐가는 상념을 중얼거렸다.
무슨 소린가 싶어 제자가 고개를 돌렸지만, 펠버는 끌끌 웃을 뿐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는 대신 제자의 어깨를 툭툭 치며, 손을 들어 전장 한가운데의 공터를 가리켰다.
“아! 드디어···!”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토미가 외쳤다.
나직하게 웃는 원로 마법사의 마력광으로 번뜩이는 눈동자 역시, 청년이 본 것과 동일한 광경을 비춰내는 중이었다.
웅성이며 소란이 퍼지기 시작하는 놀 군세의 진형.
그 한가운데, 놀 시체가 산처럼 쌓인 공터 한복판.
푸르게 빛나는 성검을 든 전사가, 적장의 목을 잘라 높이 들어올리고 있었다.
싸움이 끝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