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80화 (80/288)

타락기사(1)

싸움은 끝났다.

대장의 목이 하늘 높이 들리자, 놀 군세는 일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균열 안쪽을 향해 내달리는 그들의 등 뒤로 내리꽂히는 수많은 화살과 돌덩이들.

접전을 벌이며 이천에 가까운 사상자를 낸 놀 군세는, 결국 도망치는 과정에서 이천쯤을 더 희생하고서야 후퇴할 수 있었다.

천의 병력으로 하룻밤에 오천의 놀을 쳐부순 수성전.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였지만, 요새 안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쿵!

갈기갈기 찢긴 시체가 관 안에 거칠게 놓인다.

동료의 시체를 벌써 열 구도 넘게 옮긴 성전사는, 거의 울음을 토하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사제복을 입은 성기사의 손에 관뚜껑이 덮이고, 짧은 묵념 이후 관이 수레에 실렸다.

끼이이익.

열 개가 넘는 관짝을 실어 위태위태한 수레의 모습.

사람의 무게도 무게일진대, 워낙 처참하게 죽은 탓에 갑옷에서 제대로 분리할 수도 없는 시체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사지 육신이 온전하게 남아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팔다리나 머리를 잃어버리거나, 아예 온몸이 뜯어먹혀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덜커덩. 덜커덩.

적재량의 한계에 다다른 수레가 장례를 위해 본단으로 출발했다.

착잡한 표정의 생존자들은 머지않아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들에게 죽음을 슬퍼할 시간은 없었다.

언제 마물의 군세가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는 지금, 요새의 모든 시설은 최대한 빠르게 복구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

창가 쪽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댈런은, 문득 입안에 퍼져나가는 씁쓸함을 느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포도주로 입안을 헹궜다. 고개를 들어보니 회의실에 둘러앉은 이들 모두 비슷한 표정이었다.

“이번 전투로 기사단은 성전사 삼백 열네 명. 성기사 스물일곱 명을 잃었습니다.”

상석에 앉은 마우그가 착 가라앉은 말투로 이야기했다.

“본단에 지원 요청을 보냈으니, 며칠 지나지 않아 다수의 병력과 보급품이 도착할 겁니다. 먼저 떠난 이들에게 내세에서 신의 은총이 임하길.”

은총이 임하길. 읊조리는 목소리들. 후우. 혹은 작게 내쉬는 한숨들.

마우그는 잠시 시간을 두고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버로크를 처치하고 방벽 열쇠를 회수하는 임무는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이견 있습니다.”

성기사 하나가 손을 들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여자였다.

“심문관 피드나. 말씀하세요.”

“모두들 아시겠지만, 어젯밤 이곳을 침공한 놀 대군은 균열 안에서부터 왔습니다.”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가 한탄과 우수에 젖어 축 늘어진 공기였다면, 이제는 그 슬픔을 딛고 현실을 바라보는 베테랑들의 완숙함이 테이블 위에 깃들었다.

“그리고 저 정도 규모의 놀 군세가 균열의 첫 번째 방어선, 에스트라 요새를 우회할 방법은 없죠.”

“심문관 피드나, 지금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혹시···.”

“예, 맞습니다. 저희의 일차 목적지인 에스트라 요새가 적의 손에 떨어졌다는 사실이죠.”

그녀의 선언에 회의실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여기 모인 모두의 생각을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 하나, 몰려드는 놀 군세를 보고 에스트라 요새의 함락을 생각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까.

“원래의 임무 계획은 에스트라 요새를 거점으로, 원활한 보급선을 유지하며 며칠 단위의 단기간 수색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거점으로 예정했던 곳은 파괴되었고, 이곳 제2 방어선은 수색해야 할 곳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죠.”

피드나가 차분하게 정리했다. 그녀의 어조는 일견 냉소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구구절절 맞는 말이기도 했기에, 일행의 리더인 마우그의 얼굴에는 점점 더 갈등이 어렸다.

“자네는 마치 성기사가 아닌 세속의 지휘관들처럼 이야기하는군, 피드나 심문관.”

그때 중후한 얼굴의 노기사가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어젯밤의 싸움은 근 십 년간 전례가 없을 정도로 치열한 혈전이었다네. 그럼에도 이번 임무에 참여한 우리들 중에는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았지. 이건 신이 우리로 하여금 임무를 속행하라 말씀하시는 걸세.”

“혹은 우리 전력이 온존함으로 이후에 있을 싸움을 대비하게 하신 걸지도 모르죠, 도메르 차석 심문관님.”

피드나가 곧바로 반박했다.

“당장 어젯밤 싸움을 돌아볼까요? 저희가 없었다면 이 요새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함락되었을 겁니다.”

이번에도 맞는 말이었다.

이 요새에 주둔하던 병력은, 백 가량의 성기사를 포함해도 천에 못 미치는 숫자.

반면 적들은 하나하나가 진룡의 힘에 조금씩이라도 물들어, 보통보다 반 배는 더 강해진 놀 전사들이었다.

때마침 합류하게 된 고위 기사와 심문관들이, 성벽 곳곳에서 전투기도로 아군의 사기를 돋우며 버텨주지 못했다면.

접전이 벌어지고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성벽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점령당했으리라.

그건 적진을 종횡무진 누비며 끝내 대장을 처치한 댈런이나, 후방에서 끊임없는 마법 지원을 보태준 두 마법사가 있었다 해도 변하지 않았을 테였다.

댈런과 발렌티노 사제(師弟)가 아무리 분전했다 한들, 성벽이 적의 손에 떨어지는 순간 싸움은 진 것이니까.

“거기다 어제의 놀 군대가 공세의 끝이라는 법은 없습니다. 이 정도로 대대적인 공격이라면, 청린은 균열 깊은 곳에 언제든 공격할 준비가 된 마물의 군대를 몇이나 더 두었을 겁니다.”

피드나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 저희만 전선 앞으로 튀어나가서 임무를 수행하는 건 자살 행위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에스트라 강을 건너기 전까지는 일만 대군이 몰려와도 피하거나 숨을 곳조차 없지 않습니까?”

동의를 구한다는 듯, 좌중을 한 차례 둘러보는 그녀의 시선.

대놓고 동의하는 이는 없었다. 다만 누구도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엄한 목소리로 그녀를 나무라듯 말하던 차석 심문관 도메르마저, 그저 불편한 침음을 흘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댈 뿐이었다.

“···그럼 임무 전에 이야기한 대로, 이번 일은 투표로 결정하겠습니다.”

결국 잠깐 사이 얼굴에 피로가 가득해진 마우그가 입을 열었다.

“임무 속행이 신의 뜻이라 생각하신다면, 손을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

푸르릉.

번쩍이는 판금 갑주를 걸친 군마가 거칠게 투레질했다. 하루 동안 준비를 마친 일행은 동틀녘에 제2 방어선을 떠났다.

일행이 디딘 길은 오르막이 아니라 내리막이었다.

그 말인즉, 어제 회의에서 임무를 속행하기로 결론이 났다는 뜻이었다.

덜커덩. 덜커덩.

일행의 짐은 지금까지에 비해 몇 배로 불어나 있었다.

말에 각자의 짐을 실었을 뿐 아니라, 수레까지 두 대나 동원될 정도.

그만큼 속도는 더뎌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스트라 요새의 함락이 기정사실이 된 이상, 제대로 된 보급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방금 떠난 요새가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렇게 몇 시간이나 균열 안쪽으로 들어갔을까. 육포를 씹는 댈런에게 마우그가 느리게 말을 몰아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댈런 경.”

중년의 성기사가 조용히 말했다. 댈런은 수통의 물로 입안에 남은 육포를 삼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경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임무는 계속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럼 나 혼자라도 갔겠지. 말했잖소.”

마우그는 묘한 얼굴이 되었다. 설마 그 발언이 진심이었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댈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태양은 균열의 절벽 너머로 고개를 빼꼼 드러내고 있었다.

내리쬐는 햇빛에 눈이 아렸다. 댈런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어제 있었던 회의를 떠올려봤다.

회의실에서 임무의 향방을 놓고 투표를 한 것도 딱 이맘때쯤이었지.

불편한 침묵이 감돌던 회의실 공기 속에서, 댈런은 가장 먼저 손을 들었었다.

그리고 말했다.

‘미리 말해두겠소. 다들 안 가더라도 나는 갈 것이오.’

무심한 얼굴로 툭 뱉었던 말.

홀로 균열에 들어가겠다는 선언 치고 너무나 가벼운 어조여서, 사람들이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어째서 그러시려는 거죠?’

그리고 그 조금 이후, 끊임없이 임무 중지를 주장했던 피드나가 그를 쏘아붙였다.

‘어차피 나는 의뢰를 받은 용병일 뿐이니, 의뢰가 무산되고 나면 어딜 가든 내 자유지.’

‘지금 균열 안으로 들어가면 마물 군대와의 싸움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게 개죽음을 원하신다면, 기사단의 보물인 성검은 반납하고 가시죠.’

피드나의 힐난에 회의실 분위기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기사단의 정예인 심문관이라지만, 성검의 주인인 댈런을 상대로 선을 넘은 소지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댈런은 그런 말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뚱한 눈으로 피드나를 마주 봤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 돌아가면 피할 수 있나?’

‘적어도 충분한 준비 끝에 싸울 수 있겠죠.’

‘그리고 균열의 마물들에게도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주겠지. 언제부터 성기사단이 악마와 마물들 앞에서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겁쟁이들을 기사로 들여왔는지 모르겠군.’

낮은 비웃음. 그리고 발작하듯 일어난 심문관.

고위 기사 마우그는 순식간에 험악해진 회의실의 분위기를 중재하느라 애를 먹었었다.

그리고 이어진 투표에서, 대부분의 성기사들이 임무 속행에 손을 들었다.

그게 성검이 택한 전사의 의견을 존중해서인지, 아니면 나름대로의 전략적인 판단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혹은 정말로 신의 뜻을 헤아렸거나, 아니면 웬 이방인 전사의 도발에 그냥 욱하는 마음에서였을지도.

‘어쨌든 결과적으로 잘 되었으니 상관없지.’

두 마법사를 포함해 나머지 성기사들까지 전부 찬성표를 던지니, 심문관 피드나도 끝에는 마지못해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애매한 만장일치로 임무 속행이 결정된 결과, 일행은 지금처럼 균열 안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고.

‘피드나 심문관은 빠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함께 가는군.’

사실 출발하기 직전, 마우그는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도 좋다고 한 번 더 선언했었다.

일행의 구성원들은 하나같이 기사단의 고급 전력이었고,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 임무가 반쯤 자살행위인 것 역시 맞았으니까.

그럼에도 끝끝내 혼자서는 돌아가지 않는 걸 보면, 성기사들에게 명예가 중요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안정화에 시간이 좀 걸리시는군요.”

그때 마우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댈런의 왼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곳곳에 크고 작은 흉터가 가득한 손등. 그 위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신성 문신.

완전히 안정화가 된 이후의 신성 문신은, 피부와 동화되어 평소에는 보이지 않아야 한다.

허나 어깨에 새긴 다른 두 개와 달리, 손등의 신성 문신은 그 안정화에 시간이 꽤 걸리고 있었다.

“하긴, 성기사들 중에도 흔히 새기는 문신은 아니니 그럴 법도 합니다. 그만큼 조건이 까다롭고, 사용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 문신이니까요.”

“그렇게 보기만 해도 뭔지 아시오?”

“물론입니다. 신성 문신을 새길 권능은 극소수에게만 주어지지만, 새 문신을 연구하고 옛 문신을 계량하는 작업에는 저 같은 고위 성기사들도 많이들 참여하는 편입니다.”

마우그가 뿌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댈런 경께서 손등에 새기신 문신은 기적을 사용하기 위한 촉매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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