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81화 (81/288)

타락기사(2)

“생각할수록 대단하군요. 성검의 주인으로 인정받으셨을 뿐 아니라, 신께 기적까지 하사받으셨다니.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어떤 기적을 받으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직이오.”

“역시. 경이라면 그런 상위급의 기적을···예?”

마우그가 눈을 파르르 떨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이거 놀리는 맛이 있는 사람이네.

“아직 기적을 받지는 못했소.”

“···기적을 받지도 않으셨으면서, 기적을 사용하기 위한 문신을 새기신 겁니까?”

“뭐 문제라도 있소?”

여상스런 대답에 마우그의 눈에 혼란이 어렸다.

사실 보통이라면 문제가 있긴 했다.

일반적으로는 수행이나 전투 중에 기적을 하사받는 게 먼저고, 그 기적을 사용하기 위해 문신을 차후에 새기는 게 맞았으니까.

애당초 신이 기적을 아무에게나 주는 게 아니다.

전체 성기사 중 기적을 내려받은 성기사의 비율은 많이 쳐줘야 5퍼센트 정도.

언제나 기도와 수행으로 심신을 갈고닦는 성기사들도 그럴진대, 신성력 한 줌 없는 댈런이 문신을 미리 받는 행동은 상식보다는 비상식에 가까우리라.

물론 댈런의 상황은 좀 달랐다.

계승자 옵션으로 인해, 그는 기적마저도 스킬의 형태로 회수하는 게 가능했으니까.

그리고 균열 깊은 곳에는 성기사로 활동했던 시체가 몇 구 있는 만큼, 문신을 미리 받은 건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아, 아닙니다. 문제라니요. 역시 성검의 주인이십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하였는데, 제 믿음 없음이 이렇게 또 드러나는군요.”

당혹감에 빠져있던 마우그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갑자기 회개 모드로 돌아선 중년의 고위 기사를 두고, 댈런은 느긋하게 말을 몰며 다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재밌게도 그의 주변에는 뭔가 계산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일수록 말이 참 많은 것 같았다.

신성 문신을 연구한다는 마우그나, 갈리오스 상단주인 상인 볼크마나.

‘그러고 보면 저 노인장도 원래는 수다쟁이였지.’

앞서가는 펠버의 좁은 등을 보며, 댈런은 문득 생각했다.

진중한 인상이냐 좀 더 자유분방해진 느낌이냐의 차이지, 펠버 역시 말이 많은 건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성소에서 있었던 싸움 이후로, 이 원로 마법사의 말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꼭 필요한 말만 하고, 그마저도 단답이거나 그냥 웃어넘기는 경우가 잦았다.

‘뭔가 변할 만한 사건이 있었군.’

댈런도 얼마 전부터 느끼고 있기는 했다.

성소에서 부단장에게 치명상을 입고 회복한 뒤, 펠버의 경지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다는 것을.

아마 그 사건을 계기로 오랜 시간 막혀있던 자신만의 벽을 뚫어버린 것이겠지.

그리고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말수가 준 건 그런 급격한 경지 상승의 부작용일지도 몰랐다.

‘하긴, 당장 나만 봐도 그리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니까.’

댈런은 뻐근한 어깨를 휘휘 풀며 생각했다.

요 근래 들어 어쩐지 몸이 미묘하게 삐걱대는 느낌이었다.

싸움을 할 때는 거의 느끼지 못하지만, 일상생활로 돌아왔을 때면 유독 부각되는 불편함.

‘흠.’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일단 용혈의 부작용 때문은 아니었다.

용혈의 재생 인자로 소진시키기에, 그의 체력 수치는 이미 너무 높았으니까.

아마 모래바람 왕조의 지하 유적 때처럼, 거대한 미로를 홀로 부수는 정도는 되어야 조금이라도 부담이 오리라.

‘능력치의 균형 문제도 아니다. 근력과 체력이 다른 능력치보다 좀 많이 높기는 하지만, 그래도 두 능력치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니까.’

댈런이 생각하기에, 이건 영역의 문제였다.

정확히는 영역 안에 담긴 힘이 너무 비대해서 생긴 문제.

지금까지 그가 습득한 스킬은 열이 훌쩍 넘어갔다.

개중에는 평범한 재능으로는 닿을 엄두도 낼 수 없는 C등급 이상도 여럿이었고.

심지어 그 스킬들이 하나씩 숙련도의 최고치를 찍어가며, 원래보다 더 큰 가능성의 힘에 닿는 중이었다.

그리고 강력한 여러가지 힘이 한 영역 안에 거하게 된 이상, 그릇에 담긴 힘의 총량이 막대하게 늘어나는 건 필연적.

‘그 막대한 힘의 규모가, 내 몸에 부담을 주는 게 분명하다.’

영역이 그릇이라면, 육신은 그 그릇에 연결된 통로였다.

물론 영역의 힘을 사용한다 해서, 환상세계에 한계 없이 풀어진 가능성의 전부를 불러오는 게 아니긴 했다.

다만 원체 그 힘이 강력하다 보니, 얼마 전부터는 이 현실 세계로 표출되는 일부마저도 그의 몸에 무리를 가하게 된 상황.

‘근력과 체력 수치가 일단 버텨주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서는 담아낼 수 없는 힘이야.’

사실 이건 보통의 경우라면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육신의 능력치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얻었다는 건, 현실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말이었으니까.

원래라면 게임 캐릭터라도 적합한 능력치를 달성한 뒤, 제대로 된 스승이나 비급을 통해 이론을 익혀야 간신히 얻을 수 있는 게 스킬이다.

그마저도 낮은 등급에 해당하는 말이었고, 상위 등급 스킬들은 이론과 더불어 오랜 수련과 실전을 거쳐 가며 얻어내는 경우도 많았다.

반면 지금은 어떠한가.

시체 한두 개 정도 회수하면 스킬 하나쯤은 얻어내는 게 일상이었다.

원래라면 함께 습득하기 극도로 어려워야 할, 서로 다른 학파의 주문들까지도 한 영역에 손쉽게 담아내고 있었고.

‘온갖 힘이 잡탕으로 뒤섞이고, 거기에 원래보다 더 강해지기까지 하는데 부작용이 없는 게 이상한 거지.’

댈런은 그렇게 상념을 갈무리하며,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 씹었다.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긴 하다.

다만 어떤 대책을 세우냐에 따라 이 여정이 끝나고 취할 행보가 달라지는 만큼, 미리 생각을 정리해두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겠지.

쫄깃한 식감 사이로 흘러나오는 육즙의 풍미를 즐기며, 댈런은 모니터 너머에서 경험했던 지식을 조용히 반추하기 시작했다.

***

제2 방어선에서 에스트라 요새까지는 이틀 길이었다.

다만 보급품을 가득 실은 수레로 인해, 일행의 발걸음은 꽤 많이 느려지게 되었다.

그렇게 사흘째 정오가 넘어갈 즈음, 그들은 저 멀리 피어오르는 연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좋지 않은 신호로군요.”

몇 줄기로 피어오르는 회색빛 연기를 본 마우그가 중얼거렸다.

일행은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에스트라 요새를 온전히 눈에 담게 된 건 그로부터 두어 시간이 지나서였다.

“신이시여······.”

그리고 현장을 마주한 노년의 성기사, 차석 심문관 도메르는 깊이 탄식했다.

에스트라 요새는 완전히 함락된 상태였다.

곳곳이 무너진 성벽. 그 위의 부서진 대(對)마물용 수성병기들.

무너진 돌 틈 사이로 거멓게 죽은 피가 굳어있었고, 그 너머로는 화염에 휩싸인 건물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을 뒤로 한 채, 성곽 바깥까지 점점이 흩어진 마물과 인간의 시체들 사이에서.

광택 없는 갑주를 차려입은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큼직한 바위 위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오나 했지.”

그가 말했다.

갑옷에 새겨졌던 성기사단의 문양은, 기이하게 비틀려 신을 모독하는 형상을 그려냈다.

강력한 치유 능력을 자랑하던 성검은 어디 두고, 바위에는 사람 키만 한 거대한 대검을 기대어둔 상태.

한때 성기사단의 부단장이었던 에버로크 글라스덴은, 이질적인 빛이 꿈틀거리는 눈으로 일행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일행의 비교적 뒤에 자리한, 남들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큰 전사를.

“내일까지 오지 않는다면 내가 찾아가려 했다. 북방의 야만인.”

놈이 입술을 길게 늘였다.

사악함이 뚝뚝 묻어나는 그 웃음을, 댈런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신을 배반했군.”

“흐. 배반?”

에버로크가 웃었다.

“난 지금도 신의 신실한 종복이다. 이전의 고리타분한 신이 아니라, 내게 끝없는 힘을 약속해주는 참된 신이 내 주인일 뿐이지.”

츄릅. 놈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보통의 혀보다 몇 배는 길게 늘어나, 턱 밑까지 유연하게 내려오는 새빨간 혓바닥.

번뜩이는 눈에서 사특한 안광이 줄줄 흘러내리고, 당긴 입꼬리는 안면 근육을 기괴하게 뒤틀어 마치 인간의 탈을 쓴 악귀의 얼굴처럼 보였다.

‘기본적인 신체 구조마저 변이될 정도인가.’

이성을 유지한 채 저 정도로 신체가 뒤틀렸다면, 대체 악신의 힘을 얼만큼이나 몸에 받아낸 것인가.

사실상 하사받은 힘의 총량만을 따지면, 놈은 악마화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였다.

그렇기에 딱딱하게 굳어있던 성기사들의 표정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물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쾅!

지면을 내려찍는 커다란 양날 도끼.

수백 킬로그램 무게의 추로 내려찍기라도 한 듯, 단단한 지면이 대번에 한 뼘 깊이 이상으로 움푹 파였다.

“타락한 배교자 같으니라고! 그래도 한때나마 기사단의 일원이었던 자가, 어찌 더러운 악마의 피를 핏줄에 품을 수 있는가!”

양손도끼에 신성력을 한가득 둘러내며 도메르가 소리쳤다.

온몸에서 빛나는 신성 문신에, 노기사의 주변을 두르던 공기마저 함께 무거워지는 듯했다.

“요새가 함락됐는데도 불구하고, 왜 전령이나 하다못해 생존자라도 오지 않았나 했더니. 그게 당신 때문이었군요.”

그 곁에서 고위 기사 마우그도 살짝 붉어진 얼굴로 검을 뽑아들었다.

“요새를 우회하는 비밀 통로는 극히 일부의 고위 성기사들에게만 알려져 있죠. 그걸 이용해 패퇴한 기사단의 퇴로를 가로막을 줄이야. 그래도 부단장의 자리에 있었던 당신인데, 이토록 빠르고 잔혹하게 등을 돌릴 줄은 몰랐습니다. 에버로크.”

구우웅···.

수석 심문관에 고위 성기사의 기세가 더해진다.

보이지 않는 기운의 압박만으로도 지면의 작은 돌들이 파르르 떨렸다.

에버로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진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댈런을 계속 응시할 뿐.

“쯧. 말로 해서는 안 될 놈이군.”

도메르는 짧게 혀를 찼다. 그는 왼손을 주먹쥐어 들어올리며, 등 뒤의 일행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선언했다.

“기사단 내부의 악을 척결하는 심문관 도메르 라이커스 외 4인은, 지금 이 시간부로 배교자 에버로크 글라스덴을 처단하겠소.”

스르릉, 카강!

수석 심문관의 처형 선고에, 나머지 심문관들도 각자의 무기를 뽑아든다.

화르륵.

검신과 도끼날, 창끝에 일렁이는 백색 불꽃들.

악을 불태우는 단마의 백염을 마주한 에버로크는, 그제서야 시선을 노년의 기사에게 돌렸다.

“흐흐. 미안하지만 기사단장의 노리개 따위를 상대해줄 생각은 없어서 말이야.”

기이이이―

그 말과 동시에 공간이 왜곡됐다. 댈런은 잠시 눈을 의심했다.

저 멀리 있던 요새가 느닷없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서고, 에버로크가 서 있던 공간은 고무줄처럼 죽 늘어나며 요새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광경.

환각이나 착시가 아니다.

주문과 신비를 꿰뚫어보는 댈런의 시야는 눈앞의 비틀림이 마력의 결과물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공간을 뒤틀 정도로 강력한 마력이, 무너진 요새의 폐허를 기점으로 작동해 에버로크의 몸을 그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

그리고 단순한 공간 전이가 아닌, 저 정도의 현실 왜곡이 필요한 것이라면.

‘요새는 이미 악마의 힘에 물들었군.’

고도의 지능 수치가 순식간에 결론을 도출한다.

모니터 너머에서의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고, 수천 가지 경우의 수를 눈앞의 현상에 빗대어보며 분석한 결과.

성기사단의 부단장 에버로크가 타락기사로 변모할 때면, 필연적으로 악신 라필렘의 힘을 하사받게 된다.

그리고 타락기사가 된 끝에 에스트라 요새를 점령한 경우에, 놈이 취하는 행보는 세 가지.

용이 이끄는 마물 군세의 거점으로 삼거나.

거대한 지옥문을 열어젖히거나.

‘아니면 요새 자체를 라필렘의 환영궁전에 바치던가.’

꽈아앙!

판단을 마치자마자 지면이 폭발한다. 돌과 흙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 폭심의 가운데서 흐릿한 그림자가 되어, 요새 쪽으로 쏘아진 전사의 신형.

꽈과과과광―!

짧은 순간 허공을 십수 번이나 디디며, 순식간에 음속에 가까워진 그의 몸이 타락기사와 그 사이의 간격을 순식간에 좁혀낸다.

‘지금 저 현상은, 라필렘의 궁전이 강림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의 작용.’

그리고 라필렘의 이명 중 하나는 끝없는 변화와 뒤틀림의 악신인 만큼.

눈앞의 폐허가 그 환영궁전의 그림자라도 덮어썼다면, 이 인원으로 외부에서부터 그걸 파훼하는 건 불가능했다.

‘허나 안에서부터라면 가능하다.’

댈런은 확신했다. 아니, 그냥 알고 있었다.

일단 파고들기만 한다면.

저 일그러진 공간 안으로 따라들어가, 환영궁전의 그림자가 드리운 폐허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 이후에 그가 취할 행보는, 이미 완벽한 공략법으로서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었으니까.

‘썩을···!’

허나 조금 늦었다.

블랙홀처럼 요새 안쪽으로 빨려들어가는 공간의 뒤틀림은, 물리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 바.

어느새 타락기사의 일그러진 신형은, 아음속에 다다른 댈런의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그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꽈과과과―

찰나의 시간 속. 발끝으로 끊임없이 공간을 격한다.

터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 전신의 근육과, 음속의 벽에 가까워지며 온몸에 부딪히는 공기의 저항.

그러나 극한으로 힘을 끌어올렸음에도, 저 휘어지는 공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게 명백해진 순간이었다.

“엘르― 메멘토 엘레구스!”

펠버가 지팡이를 들어올린 건,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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