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기사(3)
쿨럭. 주문 직후에 어렴풋이 들리는 기침소리.
평범한 기침이 아닌 피를 토하는 듯한 소리였지만, 댈런은 무시하고 앞만 바라봤다.
오랜 한계를 돌파한 노년의 원로 마법사가, 자신의 몸이 무너지는 걸 불사하고 힘을 썼다는 건.
땅의 기억을 읽어낸다는 영역의 능력을 통해, 그 역시 무언가 예견한 끝에 결단했다는 이야기니까.
우웅―
공간이 물결친다. 거대한 힘이 등 뒤에서부터 일대를 휩쓸었다.
한없이 느려진 시간감각 속, 눈앞에서 믿기 힘든 현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츠즈즈즈···.
블랙홀처럼 휘어진 채 빨려들어가며, 폐허가 된 요새 안쪽으로 향하고 있는 공간의 비틀림.
그 비틀림의 방향성이 순간적으로 뚝 멈추더니, 도리어 댈런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
에버로크의 눈이 당혹감으로 커졌다.
펠버의 주문은 비틀린 공간에 이중으로 개입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빨려들어가던 공간은, 방금 전까지 밟아가던 궤적을 정확히 되짚어가며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건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듯한 광경.
댈런은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파직!
찰나의 시간 끝. 주문이 힘을 잃었다.
역행하던 시간이 원래의 방향을 되찾고, 타락기사의 신형 역시 멀어지기 시작했다.
펠버가 돌려낸 시간은 말 그대로 찰나에 불과했다.
허나 댈런에게 필요했던 것 역시, 그 찰나가 전부.
그의 손이 흐릿해졌다.
꽈광!
단검이 연이은 소닉붐을 터뜨리며 날아간다.
타락기사의 신형을 집어삼키고 닫혀가는 공간의 왜곡에, 암월의 주문살해자가 충돌하며 마력을 한껏 뒤틀어낸다.
쩌적!
거의 닫혀버린 공간의 균열.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그 한가운데 실낱같은 틈이 벌어졌다.
스릉―
반 박자 늦게 공간의 왜곡을 따라잡은 댈런은, 단검을 회수함과 동시에 허리춤의 성검을 뽑아들었다.
펠버가 만들어준 잠깐의 시간.
주문살해자가 뚫어낸 손바닥만 한 틈.
번쩍이는 푸른 검신과, 그 검신에 휘감기는 회오리는 그것이면 충분하다 말하는 듯했다.
꽈르르릉!
힘줄이 바짝 솟은 손아귀로 내려치는 검끝에서, 온몸의 근섬유 가닥가닥으로부터 힘이 모여든다.
필멸자의 육신에는 다 담아낼 수 없어, 영역이라는 소우주에 한 발을 걸친 초인적인 근력.
인간의 물리적인 한계를 초월한 힘이, 한 줄기 섬광으로 화하며 그 틈을 찢어발긴다.
콰지지지직―!
마력과 마력이 충돌한다.
악신의 힘과 성검의 신성력이 맞부딪혔다.
두 힘이 격돌하며 발생한 거대한 폭풍은, 닫혀가던 공간을 다시 열어내며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틈을 만들어냈다.
댈런은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순간적으로 시야가 반전되며, 모든 감각이 뒤섞였다.
***
···
···
···
사위가 고요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발밑을 단단하게 받쳐주는 지면이었다.
발을 들어 바닥을 꾹꾹 다져보던 댈런은 문득 눈치챘다.
방금까지 귓가를 울리던 소음들이, 한순간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는 것을.
···
검끝에서 터져나오던 우렛소리도.
강철 같은 피부를 따갑게 스치던 바람의 저항도 없다.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공간에서, 댈런은 눈을 떴다.
···
그의 눈앞에 기괴한 광경이 펼쳐졌다.
갖아 먼저 연상되는 단어는 정글, 혹은 숲.
그러나 괴이하게 뒤틀린 식물의 줄기와 뿌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뿌리내리고 얽혀가며 사방을 빽뺵하게 채운 광경을.
결코 일반적인 숲이나 정글이라 말할 순 없을 테였다.
‘들어왔군.’
그 환각과도 같은 풍경 속에서, 댈런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거미줄처럼 얽힌 줄기 사이사이로 붉은색의 덩굴, 진녹색 꽃, 푸른 열매들과 자줏빛 이끼가 뒤섞인 거대한 정글.
그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라필렘의 환영궁전. 그중에서도 가장 외곽 지대인 우묵함의 정원.’
정확히는 그 정원의 그림자가, 무너진 기사단의 요새 위에 덧씌워져 만들어진 일종의 던전이 바로 이곳이었다.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로운데.’
사람의 혼을 빼놓을 듯한 이질적인 풍경 안에서, 댈런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악신의 영역인 라필렘의 환영궁전은, 흔히들 지옥이라 부르는 장소들 중 하나였다.
환상세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다섯 악신의 심상과 권능이 고스란히 녹아든 다섯 개의 소우주.
개중 하나인 환영궁전의 초입부가 바로 우묵함의 정원이었다.
당연하게도 지금 댈런의 주변을 둘러싼 정경은, 결코 그 지옥의 본체가 아니었다.
‘그랬으면 뼈도 못 추렸겠지.’
실제 지옥의 악독함은 이곳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악마를 두들기고 용을 때려잡은 댈런마저도, 그곳에서는 몇 분도 못 가 영혼과 육신이 걸레짝이 될 테니까.
수많은 인간을 씹어삼키는 악마들이, 제 갈 길 잘 가다가도 문득 객사하곤 하는 장소가 바로 지옥.
수백이나 되는 댈런의 캐릭터들 중에서도, 진짜 지옥에 한 발짝이라도 들여본 건 열이 채 안 될 정도였다.
‘지옥의 그림자를 현실에 강림시키는 사술은, 그 진짜 지옥의 겉모습과 일부 속성만 베껴서 현실 위에 결계처럼 덧씌우는 것.’
대충 지옥의 열화판 복사 버전을, 현실이라는 바탕화면 위에 붙여넣기 한다고 보면 되려나.
스스로도 실없는 비유라 생각하며 댈런은 천천히 성검의 힘을 끌어올렸다.
쿠르르릉.
벼락의 성검이라 불리는 토르타니스와, 심상 너머 영역에서 들려오는 우렛소리가 공명하기 시작한다.
더이상 손속을 봐줄 필요는 없다.
먼젓번의 싸움에서는 부단장이 회심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었기에, 일격에 죽이지 않았던 것일 뿐.
하지만 수백 회차에 달하는 그의 경험에 따르면, 이 정도까지 타락한 부단장은 결코 기사단의 편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도 그러기엔 너무 멀리 걸어왔기 때문이겠지.
열 명의 흑마법사들 중 한 명만이 악마의 힘을 불러낼 수 있다면.
지옥의 그림자를 강림시키는 금술의 사용자는, 악마의 힘을 불러내는 백 명의 흑마법사 중에 많아야 한 명.
그만한 특권과 힘을 이 짧은 시간에 악신에게 내려받았다는 건, 그의 존재와 영혼 대부분을 그 대가로 저당잡혔다는 소리니까.
뿌드드드······.
성검에 깃든 힘을 끌어올리자, 거대한 풀과 나무로 이루어진 미로가 천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두꺼운 덩굴이 뱀처럼 스르르 움직이고, 사람만 한 꽃잎이 암술과 수술 사이에서 길쭉한 혀를 낼름거렸다.
이내 발밑의 바닥 역시 부르르 떨리더니, 수박만 한 눈을 차례차례 뜨기 시작했다.
끔뻑. 뒤룩.
주위를 살피더니 금세 댈런을 찾아낸 가지각색의 눈동자들.
성검의 존재를 눈치챈 지옥의 식물들이, 그 주인인 댈런을 향해 서서히 공격성을 띄기 시작한다.
꾸드드득.
성인 장정을 덮고도 남을 크기의 잎사귀가, 제 잎맥 위를 뾰족뾰족한 가시들로 뒤덮기 시작했고.
크흐으···.
수레만 한 열매는 길게 갈라진 틈을 뻐끔거리며, 그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을 언뜻언뜻 내비쳤다.
푸쉬이이이―
성검의 기운에 자극 받은 이끼와 버섯들은 사방으로 독기를 뿜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독기가 아닌, 살이 썩고 내장이 뒤틀리게 만드는 역병의 기운.
사방에서 조여오는 살기와, 피부를 파고드는 역병을 느끼며 댈런은 낮게 웃었다.
치이이······.
살짝 벌린 입에서 뿜어지는 증기.
코와 귀, 눈과 피부 곳곳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흰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공기를 농밀하게 뒤덮어가는 역병의 기운에, 용혈의 재생 인자가 반발하며 죽어가는 세포를 재생시키고 있는 것.
댈런은 가만히 성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발밑에서 끔뻑거리는 큼직한 눈 하나를, 그대로 검끝으로 내리찍었다.
***
――!
―――!!
하늘과 땅이 비명을 질렀다.
라필렘의 환영궁전.
그곳에서도 우묵함의 정원은 하늘과 땅마저 악신의 애완용 식물로 구성된 기괴한 장소.
이곳에 자생하는 모든 식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었기에, 개중 하나를 공격하는 건 그 모든 식물을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달리 말하면, 세계를 공격했다는 이야기.
슈르르륵!
캬햐―!
가시 돋친 덩굴이 사방에서 댈런을 잡아채려 쏘아지고.
거대한 열매가 주둥이를 쩍 벌린 채, 먹잇감이자 침입자인 전사를 한 입에 집어삼키려 달려든다.
독액이 뭉글뭉글 솟아나는 가시와, 삼중으로 돋힌 이빨을 보고도 댈런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더 끌어올리며, 한껏 사나운 웃음을 지어보일 뿐.
그가 어째서 이곳을 알고 있는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공들여 육성했던 성기사 캐릭터를 잃은 뒤, 처음 접해보는 지옥의 파편을 공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던가.
그리고 그 수많은 연구와 시행착오들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던전 밑바닥에 잠들어있을 성기사의 시체는, 이 지옥을 깨부술 수 있다는 희망이자 목표가 되어주었고.
지옥의 기괴함에 대한 수십 시간의 공부는,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전략으로 그에게 힘을 더해주었으니까.
스가가각!
휘둘러낸 검끝. 파쇄검의 검풍이 몰아치며 수백 가닥의 덩굴을 단숨에 조각낸다.
꽈광! 꽝!
큼직한 나무의 줄기에 내딛는 발걸음은, 그 자체로 진각이 되어 나무에 돋아난 눈을 으깨며 육신을 강하게 띄워올렸다.
파지지지직!
허리춤에서 뽑혀나온 손도끼가 저 혼자 춤을 추며, 주인의 주변을 수호하듯이 다가오는 나뭇가지들을 번개로 지져버린다.
비산하는 검붉은 수액.
토막난 줄기와 으깨진 열매들.
검끝만이 아니라 손발이 닿는 모든 곳이, 무언가 으깨지거나 끊어지는 파괴의 현장이 되어간다.
그건 일견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듯한 광경이었으나,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열매의 색깔을 보고 품은 독액의 종류를 파악해, 독성이 강한 것은 멀리서 으깨고 그나마 약한 건 다가왔을 때 처리한다.
덩굴의 움직임을 계산해 모니터 너머에서 보던 패턴에 대입시키며, 적재적소에 날리는 뇌격으로 놈들이 큼직하게 구축하던 포위망을 뚫어낸다.
아무리 그림자라도 그 근원이 지옥 그 자체인 이상, 파훼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뿐만이 아니라 경험과 지혜 역시 필요했다.
그리고 끝없어 보이는 공세를 극복하며, 댈런은 느끼고 있었다.
그가 군대라도 집어삼킬 공세의 파도를 뚫어낼 때마다, 이전보다 더한 악의와 마력이 농밀하게 공기를 잠식하는 것을.
콰직!
덩굴이 끊어진다. 느껴지는 손맛이 질겼다.
뻐어어엉!
화염을 두른 발끝에 터져나가는 열매에, 이제는 이빨만이 아니라 뒤틀린 손발까지 돋아나 있었다.
죽이면 죽일수록 덤벼드는 식물들은 더 기괴하고 강력해진다.
마치 개미가 발버둥칠수록 개미지옥의 깊은 곳으로 끌려들어가듯, 그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지옥의 악의가 절절하게 느껴지는 현상.
사실 댈런은 알고 있었다.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우묵함의 정원에서는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어갈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가장 깊은 밑바닥의 악의는, 종말이 닥친 세상에서 고위 기사의 자리를 꿰찬 성기사라도 버틸 수 없다는 것 역시도.
그렇기에.
“푸흐.”
오히려 한껏 부풀어버린 기대감이 몸을 움직인다.
고위 기사의 시체가 있을 이 지옥의 끝에서, 전에 없던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기대감.
그리고 그렇게 힘을 쌓아가는 여정에서, 어쩌면 이번 회차의 끝에는 종말을 극복해낼 수 있다는 기대감까지도.
사실 그림자라 해도 지옥의 편린을 부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종말 그 자체를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작게나마 증명하는 게 아니겠는가.
성화의 불꽃을 품고도 가장 깊은 함정 속으로 빨려들어가, 끝내 죽음을 맞이한 그의 성기사 캐릭터는 그 증명의 마지막 조각이 될 테였다.
스륵! 쉬이이익!
댈런은 그렇게 생각하며, 피할 공간도 주지 않고 몰아치는 덩굴과 가시의 파도 앞에서 검을 들어올렸다.
성검의 푸른 검신은 역병의 기운에도 날카로움을 잃지 않고 빛났다.
식탐에 더해진 증오와 분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압박으로 어깨를 짓누르는 가운데.
쿠르르릉···.
내디딘 발걸음에서 울려퍼진 천둥이, 그대로 다리와 배를 타고 올라와 손끝에까지 다다르고.
번쩍―!
산맥 거인의 주먹과도 같이 덮쳐오는 이끼와 덩굴의 파도가, 한 줄기의 섬광 앞에 두 갈래로 쩍 갈라졌다.
콰과과과과―
섬광과 함께 몰아치는 힘의 폭풍.
전력을 다해 내지른 검격의 여파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빽빽하게 들어찬 식물들과 그 너머의 공간 자체를 일부분 일그러뜨렸다.
상쾌한 공기가 폐부를 스며든다.
성검의 힘으로 부름받은 벼락이, 폐허 위에서부터 떨어져 거대한 결계의 천장에 구멍을 뚫어버렸기에 벌어진 일.
지금이라면 도약 스킬로 허공을 디뎌가며 이 지옥의 그림자를 탈출할 수 있었으나, 댈런은 그러지 않았다.
굳이 성검의 힘을 끌어올려가며,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 지옥을 자극한 이유는 그게 아니었으니까.
저벅.
서서히 수복해가는 지옥의 식물들이, 곧장 덤벼들지 못하고 망설이며 만들어진 정적 한가운데.
거듭 강해지는 지옥의 압박을 정면으로 깨부수며 도달한, 우묵함의 정원 밑바닥에서.
[지옥 그림자의 밑바닥에서 성화를 밝혀낸 성기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댈런은 웅크려 엎드린 잿빛 시체의 형상 위로, 익숙한 알림창이 떠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지옥 그림자의 밑바닥에서 성화를 밝혀낸 성기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기량 +1, 감각 +1, 지능 +1, 마력 +1, 성화의 불씨(C)]
지옥의 그림자를 무너뜨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