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기사(4)
에버로크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앞에서 지옥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불 붙은 덩굴들이 몸을 뒤틀고, 매캐한 탄내에 꽃잎이 진액을 토해낸다.
뿌리와 나무 줄기 곳곳에 난 수십 개의 눈이, 자욱한 연기를 참지 못하고 끔뻑이며 피눈물을 흘려댔다.
화륵!
또 하나의 불덩이가 떨어진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하게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그러나 넘실거리는 불꽃 위에, 아지렁이처럼 덮여있는 기운은 분명한 신성력.
그것도 극소수의 고위 기사만이 하사받는다는 기적, 성화의 불씨에서 비롯된 신성력이었다.
캬아아아아!
불 붙은 열매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버린다.
우묵함의 정원은 악신의 괴기한 식물들이 가득한 밀림과도 같은 곳.
그 근본이 식물이기에, 이곳에 서식하는 식물형 마물들이 불에 다소 약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물며 그 불에 성화의 신성력이 더해지고, 그런 불덩이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진다면.
아무리 지옥의 그림자라 해도, 그 그림자를 지상에 붙들어맨 사악한 마력째로 타들어갈 수밖에.
“씨발! 라필렘이시여!”
배교한 성기사가 신을 찾는다.
그건 이전에 섬기던 신이 아닌, 새로이 받아들이게 된 악신의 이름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불탄 끝에 역소환되는 지옥의 그림자 사이에서, 에버로크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청린과의 거래에 따라 악신 라필렘에게 받아낸 힘은, 사라져가던 신성력을 대체하고 남을 정도로 강력했다.
팔다리의 근력은 거인에 버금갔고, 수명을 초월한 활력이 몸 깊은 곳에서 끝없이 샘솟는다.
아룡에 버금가는 재생력은 어지간한 중상도 순식간에 수복할 수 있었으며, 역병의 주문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권능 역시 얻었다.
전쟁의 신을 열성적으로 섬기던, 젊을 적의 부단장 에버로크와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올려진 역량.
‘고작 보름 만에 그런 힘을 얻게 되었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거란 말인가!’
기세를 몰아 청린의 군세를 이끌고 에스트라 요새를 점령한 것까지도 좋았다.
성기사단의 최전방 요새라는 상징성을 제단 삼고, 이곳에서 죽어간 성기사들을 제물 삼아 지옥의 그림자를 강림시킬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강림시킨 우묵함의 정원은, 에버로크 자신만의 강력한 요새였다.
단순히 침입자를 집어삼키는 함정일뿐 아니라, 그 자신의 힘도 한층 더 강력하게 만들어준 요새.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다 생각했다.
그 요새가 한낱 야만인 전사의 손에 무너지기 전까지만 해도.
“···하찮은 야만인 새끼가!”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오른다.
눈앞의 세상이 붉게 물드는 것만 같았다.
지옥의 마력에 절여진 두뇌가, 더 이상의 생각을 이어가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콰작!
땅에 박혀있던 거대한 검이 의지를 가진 것처럼 손으로 빨려들어가고.
“크아아아아!”
타락기사는 증오와 분노를 담아 소리지르며, 지옥의 그림자가 흩어져가는 공터 한가운데서 홀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저벅.
그러던 중 들려온 발소리에, 에버로크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휙 돌아갔다.
“너···!”
붉게 충혈된 눈에 비친 건, 역병의 기운에 걸레짝이 된 갑옷을 걸친 야만인 전사였다.
검은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고, 돌덩이 같은 근육들이 꿈틀거리는 큰 키의 전사.
놈의 손에 들린 성검과, 무심하게 턱을 긁적이는 왼손에서 빛나는 신성 문신을 본 순간.
“크아아아아!”
에버로크는 더이상 판단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야수처럼 날뛰는 지옥 마력에 몸을 맡긴 채 달려든다.
까가가가강―!
찰나의 순간 수십 번의 격검이 이루어지며 튀어오르는 불티들 사이에서, 야만인 전사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뭔데 혼자 2페이즈로 넘어갔어?”
그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에, 분노가 이성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에버로크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
두 자루의 검이 교차한다.
한 쪽은 푸른빛을 흘리는 성검이었고, 다른 한 쪽은 들것으로도 쓸 수 있을 정도로 검신이 길고 널찍한 양손검이었다.
찌르기와 베기, 폼멜로 찍고 가드로 걸어넘기는 검술의 동작들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야성에 몸을 맡겨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십 년간 쌓아온 검술의 묘리가 녹아난 타락기사의 검.
댈런은 어렵지 않게 그 검격 하나하나를 받아내며 생각했다.
‘뭔데 벌써 2페이즈냐.’
타락기사 에버로크 글라스덴은, 여타 보스몹들과 비슷하게 두 개의 페이즈로 구성되어 있었다.
악신의 힘을 얻어 강화된 신체를 기반으로, 성기사 시절 한평생을 쌓아온 검술을 마음껏 펼쳐보이는 게 첫 번째 페이즈.
그리고 아룡급 재생력을 자랑하는 육신에 상당량의 피해가 누적된 이후, 더이상 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힘의 본성에 이끌려 짐승처럼 변하는 게 두 번째 페이즈였다.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는 좀 엉성한 광역기이니, 거기에 그만 한 타격을 입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짐작되는 가능성은 하나였다.
“크아아악! 죽···어라! 야만인!”
“···너 이 정도로 유리멘탈이었냐?”
에버로크가 정신적인 데미지가, 페이즈를 그대로 넘길 정도로 강하게 누적되었다는 것.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었다.
놈이 악마 골라캅을 이용해 성검을 타락시키려던 계획부터, 내전으로 기사단을 혼란시키려는 시도까지 모두 자신에게 막혔다.
거기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강림시켰을 지옥의 그림자마저, 방금 전 동일한 사람에게 무너진 상황.
일생을 걸고 진행 중이던 작전들을 족족 방해하고서도, 정작 본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털레털레 걸어나오는 걸 눈앞에서 본 기분은 어떨까.
‘그 정도면 멘탈이 털려도 이상하지 않긴 해.’
댈런은 상념을 털어내며 감각을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이해가 간다 해서 손속을 가벼이 할 생각은 없다.
놈은 이미 수백의 희생자를 낸 악인.
그러고도 모자라, 아예 악신에게 제 영혼을 팔아버린 존재였기에.
까가가가―콱!
성검의 검의 가드 부분이 거검의 검신에 절묘하게 걸린다.
호흡과 호흡 사이의 틈을 파고든 기예에, 몰아치던 공세가 덜컥 멈춘다.
“크윽!”
댈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찰나에 뻗어낸 왼손으로, 타락기사의 갑옷 목덜미 부분을 잡아챈다.
“이그넬 로트.”
화륵!
영창과 함께 갑옷을 잡아챈 손끝에서 치솟는 불길.
동시에 손등에 새겨진 신성 문신이 빛나고, 하늘 저편과 연결되는 기이한 느낌과 함께 그 불꽃에 강력한 신성력이 깃든다.
‘성화의 불씨.’
성기사 캐릭터가 가지고 있던 C등급 스킬이자, 신성 문신을 통해서만 발현될 수 있는 전쟁신의 기적.
악신의 마력과 상극인 그 불꽃에, 타락기사가 움찔하며 행동을 멈춘 사이.
떠어어엉―!
신성한 화염을 갑주처럼 둘러낸 무릎이 놈의 명치께를 찍어버리며, 그 몸뚱이를 공터 귀퉁이의 폐허 안쪽으로 처박아버린다.
콰르릉! 쿠르르르르!
포탄에 맞은 것처럼 에버로크 위에 와르르 무너지는 건물.
타락기사의 악마적인 육신이라도, 오 층짜리 요새 건물이 머리 위에서 무너지는데 멀쩡할 리는 없겠지.
다리를 감싼 화염 갑주를 해제하며, 댈런은 고개를 들어 하늘 위를 쳐다봤다.
끼에에에―!
흐에에엑! 캬하학!
기분 나쁜 비명을 지르는 덩굴과 꽃들. 그 끝에 연기처럼 흩어지며 역소환되는 지옥의 그림자.
마치 한겨울 창문에 서린 김이 닦여나가는 듯한 광경 너머로, 먹구름 가득한 하늘이 불을 토해내는 게 보였다.
쿠르릉. 콰르르르···.
‘상상 이상이군.’
스스로가 만들어낸 장면임에도, 하늘에서 쏟아지는 성화의 비는 충분히 전율적인 광경이었다.
사실 성화의 불씨는 그 자체만으로는 그리 강력한 스킬이 아니었다.
통제 하에 놓인 어떤 불이든, 성화로 바꿔낼 수 있다는 게 그 능력의 골자.
일반적으로는 기껏해야 성화가 붙은 횃불로 마물에게 겁을 주거나, 불화살에 성화를 담아 쏘아내는 게 전부인 기적이었다.
하지만 보통은 함께 배울 수 없는 스킬들을, 계승자 옵션을 통해 한 영역 안에 담아낸 댈런에게는 달랐다.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에 성화의 불씨를 깃들이면, 광범위한 지역에 성화의 폭우를 쏟아붓는 정신 나간 스킬이 되어버렸다.
데하만의 갑주격투로 빚어낸 화염 갑주 역시, 마물에게 치명적인 신성력을 한가득 머금은 공방일체의 갑옷이 되었고.
물론 한계는 있었다.
정확히는 스킬과 영역의 한계라기보다, 그걸 감당해내는 육신의 한계였지만.
“쿨럭.”
목구멍에서부터 터져나오는 비릿한 혈향.
댈런은 입안 한가득 모인 죽은 피를 퉤 뱉으며 생각했다.
‘대책이 필요하겠군.’
얼마 전부터 느낀 문제였다.
원래라면 일평생 노력해도 닿기 힘든 경지의 힘이, 한 사람의 영역 안에 뒤섞인 부작용이 생각 이상으로 크다는 것은.
여러 힘이 서로 시너지를 내면서, 원래보다 더 강력한 결과물을 빚어내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 강력한 힘 자체가, 인간의 한계를 아직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육신에 막대한 부하를 가하는 현상마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영웅들 중에는 혈통의 힘을 다루는 동시에 검술의 달인이고, 성기사이면서 주문을 연구하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그들은 뼈를 깎는 노력과 기나긴 수련으로 쌓아올려진, 인간의 것을 한 발짝 벗어난 육신과 심상의 소유자이기에 가능했던 일.
더불어 오랜 수행은 그들의 육신과 힘의 결을 동일하게 변화시켜냈기에, 아무리 강대한 힘이라도 큰 무리 없이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느긋하게 백 년씩 수행을 쌓아올릴 시간은 없다.’
댈런은 고개를 내저었다.
근 몇 달간, 그는 대륙의 역사 이래로 그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수십 개의 시체를 회수하며, 거기서부터 수많은 힘을 한 영역에 우겨넣어 부작용이 생길 정도였으니.
그렇다고 이 길을 되돌리거나 멈출 생각은 없었다.
다가오는 종말은 세계 곳곳에 은둔한 초월자들도 막아내지 못한 재앙.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과 비슷한 속도, 혹은 그 이상의 속도로 강해져야지만 그 초월자들을 뛰어넘어 종말을 막을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쿠르르르.
소매로 입가의 피를 훔치는 사이, 무너진 건물 폐허에서 기괴하게 뒤틀린 한 인영이 걸어나왔다.
에버로크였다.
“···아직도 안 뒈졌냐.”
“크륵. 크르르.”
반인반마가 신음을 흘렸다.
세 개의 팔. 네 개의 다리.
이마 한쪽에 길게 돋아난 뿔과, 그 뿔에 점점이 박힌 눈알들은 혐오감의 극치였다.
온몸에 수포가 부글거리는 가운데, 놈은 끈적한 진액으로 이어진 손가락을 들어 댈런을 가리켰다.
“이, 이교도 야만인. 죽···어···.”
“지랄. 누가 누구한테 이교도냐.”
댈런은 상념을 털어내고 검을 들었다.
튼튼한 육신을 만드는 건, 이 싸움이 끝난 이후에도 늦지 않는다.
“크아아아!”
입가에 노란 거품을 질질 흘리며 달려드는, 반쯤 악마에 가까워진 타락기사를 향해.
꽈아앙―!
공터 바닥을 터뜨리며 날아간 댈런이, 번뜩이는 성검을 내리그었다.
***
본래 뛰어났던 검술을 악마 같은 힘으로 보완해낸 게 1 페이즈.
그리고 그 검술을 반쯤 잊은 채, 야성에 몸을 맡기고 달려드는 게 2 페이즈.
그렇다면 이제 사람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반인반마의 몰골이 된 에버로크의 상태는 무어라 불러야 할까.
‘···3 페이즈냐?’
모니터 너머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락기사의 모습을 관찰하며, 댈런은 휘둘러오는 길쭉한 팔에 성검을 가져다댔다.
“캬아아아아!”
반쯤 잘린 팔뚝에서 고름과 피가 흩뿌려진다.
잘려나간 상처는 순식간에 살이 차오르고, 단단한 딱지 같은 조직이 그 위를 덮어씌운다.
이제는 아룡마저 넘어선 재생력과 변이능력.
그러나 그 대가로 달인의 검술과 기민한 판단력은 이미 상실했고, 묵직하게 휘두르는 팔다리는 빠르기만 하지 정교함은 하나도 없다.
지금의 에버로크는 고강한 무예를 보존한 성기사가 아니라.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짐승 같은 마물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캬하아아악!”
콰과과과과―
숨 한 번 들이쉴 시간 동안, 수십 번 내질러진 검격이 건물 하나를 버터처럼 잘라버린다.
댈런은 굳이 맞부딪혀주지 않았다.
그 대신 가볍게 허공을 밟으며 놈의 주변을 반 바퀴 돌아낸 그는, 연격이 끝나는 순간 반인반마가 된 타락기사에게 몸을 날렸다.
스각―
깔끔하게 양단되는 허리.
촤자자작!
곧장 터지는 끈적한 고름으로 다시금 붙어버리는 상흔.
쿠구구궁―
그러나 검로를 따라 터지는 분쇄의 폭풍이, 한 차례 회복된 타락기사의 몸을 안에서부터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끄아아아아!”
마치 내장에서 폭탄이 터진 듯, 반인반마의 피부가 안에서부터 꿀렁거린다.
떠나갈 듯한 비명과 함께, 타락기사가 검을 쥐지 않은 두 팔로 배와 가슴팍을 감싸고 몸부림쳤다.
놈의 몸뚱이 곳곳이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안에서 밖으로 터져버리며 살점과 내장을 왈칵 쏟아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뿌드드득!
그 상흔 하나하나로부터, 곧장 새로운 팔다리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캬학! 캬아아아!”
한 다스가 넘는 팔과 다리가 몸 곳곳에 주렁주렁 달린 모양새.
그로테스크함에 눈살을 찌푸릴 새도 없이, 그 팔다리들이 제각각 수인을 맺어낸다.
콰자작!
빈 허공이 유리처럼 깨져나가고, 수인만으로 열린 지옥문의 파편에서 독을 품은 가시들이 쏟아져 나온다.
댈런은 곧장 성화의 갑주로 몸을 감쌌다.
지옥의 가시는 고열의 신성력으로 일렁이는 화염을 견디지 못하고 바스라졌다.
그 갑주마저 뚫고 침투한 역병의 기운 역시, 댈런의 피부 위를 덮는 어떤 얇은 막에 가로막혀 소멸한다.
누더기가 된 갑옷의 어깨받이 너머로, 타는 듯 빛을 머금은 신성 문신이 드러났다.
단장에게 받은 신성 문신 중 하나.
역병 저항의 문신이었다.
“크아아아! 어떻게! 어떻게 신성력을 숨기고 있었지!”
가까스로 일말의 이성을 되찾은 걸까.
짐승과도 같은 소리로 울부짖는 에버로크를 향해, 댈런은 피식 웃으며 답해주었다.
“숨긴 게 아니라, 방금 얻은 거다.”
“말도···안 되는, 크륵, 소리!”
믿기 싫으면 말던가. 댈런은 무덤덤한 눈으로 팔다리가 스무 개 가까이 달린 반인반마를 쳐다봤다.
“크륵. 크르르륵.”
타락기사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놈도 한계였다.
재생이 거듭될수록 육신에 대한 통제력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고.
악신에게 받은 힘이라 해도 무한한 건 아니었으니.
더군다나 놈의 힘을 증폭시켜주던 지옥의 그림자마저도, 성화의 비로 인해 거의 다 역소환된 상태였다.
“크아아아아아!”
타락기사가 달려들었다.
십수 개의 팔다리를 휘저으면서도,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고 댈런을 향해 이빨과 손톱을 들이댄다.
마지막 기회라는 걸 직감했는지, 온 힘을 쥐어짜 가하는 일격.
“후우.”
댈런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어깨 위로 들어올린 검을 가로로 눕혀 겨눴다.
“이그넬 로트.”
화륵!
비검의 힘으로 성검 위에 불을 붙인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성화가 순식간에 검신을 집어삼켰다.
고강한 검술이나 기교는 필요하지 않았다.
피부를 찢어내는 타락기사의 손발톱을 무시한 채, 놈의 가슴팍을 향해 검을 찔러낼 뿐.
푸욱!
성검이 가슴팍을 꿰뚫는다.
두터운 검신에 타락기사의 심장이 반으로 쪼개진 순간이었다.
“끄힉! 꺽! 끄아아악······!”
뻐어어엉!
이미 한계에 다다랐던 악마의 피가, 성화의 신성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반발하며 폭발했다.
후두두둑.
붉은 고깃덩이의 비가 쏟아진다.
허리 위가 사라진 타락기사의 하반신이 스르르 넘어갔다.
치이이이···.
놈의 손톱에 찢긴 상처가 순식간에 아무는 가운데, 댈런은 지옥의 그림자가 말끔하게 걷혀나간 폐허의 참상을 둘러봤다.
흔한 배신자들의 최후가 그렇듯, 격렬한 싸움에 비해 싱거운 결말이었다.
그렇게 얼마 동안 서 있었을까.
“댈런! 댈런! 살아있는가!”
지옥의 그림자가 걷혀나간 폐허 안쪽으로, 엘가기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가 제자의 부축을 받으면서 그를 찾아 들어왔다.
공터 한가운데 서 있는 댈런을 발견한 펠버는, 근심 가득했던 얼굴을 활짝 펴며 그에게 다가왔다.
“댈런! 살아있었···쿨럭! 살아있었구만! 쿨럭! 컥!”
···노인장, 지금 날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