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권속(1)
“노인장이야말로 괜찮소?”
“쿨럭! 괜찮네! 크흐흐, 나이가 드니 잔기침이 많아지는구먼. 쿨럭! 크흠!”
정말 별 것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는 펠버.
댈런의 멀뚱한 시선을 뒤로 하고, 원로 마법사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타락기사의 절반만 남은 몸뚱이를 향해 다가갔다.
“크흠, 쿨럭! 큼! 이게 에버로크의 시신인가?”
품이 넉넉한 로브 소매로 입을 가리고, 남은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제자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린 모습.
노인의 뒷모습을 보며, 댈런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보다 더 상태가 좋지 않은데.’
피보라가 덮쳐온 뒤 둔감해진 후각.
그 사이로 새로운 혈향이 희미하게 느껴진다.
피 묻은 소맷자락을 안 보이게 숨기고, 그마저도 간단한 주문으로 빠르게 세탁해냈지만 댈런의 감각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을 알아온 만큼, 펠버 역시 댈런의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잘 알고 있을 테였다.
그럼에도 굳이 저렇게 딴청을 부리는 이유는 둘 중 하나일 터.
다른 이에게 약한 모습을 내보이기 싫은, 마탑의 한 축을 맡았다 할 수 있는 원로 마법사로서의 자존감이든가.
아니면 진심으로 댈런이 자신을 걱정하길 원하지 않는 것이겠지.
“재생이 한계에 달했구만. 신성력과 영역의 힘이 재생을 방해하기도 했고 말이야. 잔여 마력의 성질을 보아하니 이미 악마나 다름없어졌어.”
지팡이 끝으로 시체를 쿡쿡 찔러보며 펠버가 말했다.
댈런은 얼굴의 핏자국을 대충 닦아내고 고개를 돌렸다.
성기사들이 한발 늦게 공터 안으로 우르르 들어오고 있었다.
“댈런 경! 괜찮으십니까?”
“저건···설마 에버로크?”
“말도 안 되네. 한때 성기사였던 이가 저렇게까지 타락하다니!”
공터에 들어서자마자 머릿수만큼이나 가지각색인 반응들이 튀어나온다.
댈런은 슬그머니 옆으로 물러나, 성기사들이 에버로크의 시체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심문관들은 곧바로 타락기사의 사체를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뭔가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에서 연신 뱉어내는 답답한 신음과 탄성들.
성기사가 악신의 힘을 뒤집어쓰다 못해, 사실상 악마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냥 타락도 아니고, 아예 악마화되는 건 찾아보기 힘든 일이긴 하지. 종말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드문 일도 아니지만.’
종말의 최후반부.
악신의 대대적인 침공이 슬그머니 전조를 드러낼 즈음에는, 고위 악마가 직접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잦았다.
그리고 고위 악마들 중에는 단순히 마물의 군세를 앞세워 인간 세력을 짓밟는 게 재미없다는 놈들도 있었다.
그런 놈들은 온갖 은밀한 유혹을 통해, 인류를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걸 즐겼다.
‘에낙사구스나 라필렘 휘하의 악마들이 그런 놈들이 많지.’
고위 악마들, 혹은 대악마의 유혹을 견딜 수 있는 필멸자는 많지 않다.
성기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아무리 철저한 훈련과 수행으로 단련되었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신앙심이 상당히 깊지 않고서야 고위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힘들었으니까.
“댈런 경,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마우그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어왔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상념을 털어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충 괜찮다는 뜻이었다.
“하루쯤 쉬면 될 거요.”
“다행입니다. 요새의 안전을 확보하고 임시 거점을 설치하는 동안, 못해도 하루 이상은 머무를 예정입니다. 그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하시죠.”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우그는 문득 그의 손등을 내려다보고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기적을 받으셨군요. 제 믿음이 부족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뭐야, 또 혼자 회개 모드야?
받았다기에는 뭔가 어폐가 좀 있긴 했지만, 댈런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이런 신실한 성기사에게 괜히 혼란을 줘봐야 좋을 게 뭐 있겠는가.
그는 그냥 피식 웃으며 왼손을 들어봤다.
손등 위의 신성 문신은 아직까지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삼각형 형태로 배치된 원 세 개, 그 사이를 꿰는 부드러운 곡선과 날카로운 직선들.
세 개의 원을 중심으로 한 문양은, 얼핏 보면 대칭을 이루는 듯하면서도 자세히 살피면 조금씩 달랐다.
“전쟁의 신께서 내려주시는 기적은 신성 문신을 통해서만 사용할 수 있죠. 기적의 사용을 성법구나 성유물에 의존하는 제국의 만신전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그쪽 사제들이 들으면 조금 기분 나쁠 말이겠군.”
마우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쪽에서도 우리의 기적을 야만신을 섬기는 서리고원 너머 이교도들의 신앙 주술에 비교하곤 합니다. 둘 다 문신을 통해서 사용한다면서요.”
“그렇소?”
댈런은 괜히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는 송곳니를 슬쩍 드러내며 웃었다.
그 사나운 미소를 마주한 고위 기사가, 뒤늦게 댈런의 덩치와 외견을 의식하고는 더듬거리며 두 손을 펼쳐 내저었다.
“···죄송합니다. 댈런 경의 고향을 비하할 의도는 결코 없었습니다.”
“장난이오. 장난.”
댈런은 낮게 웃었다. 가본 적도 없는 북방 서리고원.
그쪽 사람으로 오해받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지는 것을 넘어 진짜 그곳 사람인 것 마냥 느껴질 지경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가게 되겠지.’
댈런은 모니터 너머에서 보았던 서리고원의 풍광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일 년 내내 눈보라가 몰아치는 그 험지 너머에는, 놓치기 아까운 시체가 몇 구나 있었다.
‘생각해보면 미궁에서 봤던 그 용병이 서리고원 남쪽의 차르국 출신이었지.’
루시아와 성검을 찾으러 가던 시절, 미궁도적 중 화약 병기를 쓰는 놈.
이름이 보리스였던가. 꽤나 완숙한 금패 용병이었던 놈의 용병패는, 아직까지도 그의 가방 깊은 곳에 잠들어 있었다.
정확히는 그 가방이 담긴 아공간 안에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그러고 보니 요즘 좀 조용하다?’
[···성기사들 앞에서 절 부싯돌로 쓰실 생각이라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간만에 악마의 풀 죽은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때 반쪽짜리 시체를 만지작거리던 심문관들이 돌아왔다.
“댈런 경께서 처치하신 반인반마가 에버로크 글라스덴임이 확인되었소. 성검의 주인으로서 타락한 성기사를 단죄해주신 것에, 심문관들을 대표해 감사를 표하오.”
물론 임무가 끝난 뒤 합당한 보수를 약속드리겠소.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노년의 성기사, 차석 심문관 도메르가 말했다.
“하지만 놈이 가지고 도망쳤던 성검 누미스라크와 균열 방벽의 열쇠는 찾을 수 없더군요.”
심문관 피드나였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폐허가 된 요새를 둘러봤다.
“여기 어딘가에 숨겨놨을 수도 있으니, 생존자를 수색하면서 함께 찾아보도록 하죠.”
***
일행은 에스트라 요새의 폐허에 야영지 겸 임시 거점을 꾸렸다.
성기사단의 최전방 방어선인 만큼, 에스트라 요새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
상주병력만 이천이 넘어가고, 최대한으로 병력을 집결시키면 오천 명 이상도 어렵지 않게 수용할 수 있는 규모.
에스트라 강을 마주 보고 수 킬로미터 길이의 성벽이 이중으로 쌓여있는 이 웅장한 요새를, 소수의 인원으로 하루만에 수색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타닥. 타다닥.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목재를 모아 지핀 모닥불 앞.
큼직한 솥에는 고기와 곡물, 그리고 신선한 채소를 썰어넣은 스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오늘의 저녁 식사는 차석 심문관 도메르의 작품이었다.
루시아가 만든 것보다야 못했지만, 그래도 양과 질 모두 나쁘지 않았다.
균열을 여행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성기사들은 평균적으로 요리 실력이 괜찮은 편이었다.
타다닥. 탁.
댈런은 스튜가 담긴 나무 그릇을 입에 대고 조금씩 홀짝였다. 모닥불 앞에는 그 혼자밖에 없었다.
성기사들은 빠르게 식사를 끝마친 뒤 생존자와 성검, 방벽 열쇠를 찾아 수색작업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펠버는 내상을 다스리기 위해 몇 시간 전부터 제자와 함께 그나마 멀쩡한 어느 건물 안에서 명상에 들어갔고.
때문에 한때 사람으로 북적거렸을 요새의 연병장에는, 이제 쓸쓸한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이런 폐허라면 으레 들려야 할 풀벌레 우는 소리나, 생쥐가 기어다니는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지옥의 그림자가 덧씌워졌던 곳에, 섣불리 발을 들일 만큼 간 큰 생명은 없었기 때문.
지구에서나 이 대륙에서나 짐승은 인간보다 예민했다.
뭔가 불길함을 느끼는 감각 기관이라도 따로 있는 건가?
머릿속으로 잡생각을 굴리던 댈런은 문득 중얼거렸다.
“야.”
답은 없었다. 그는 한 번 더 불렀다.
“야. 악마 새끼.”
[···네?]
“주인님 세 글자는 팔아먹었냐?”
[아, 아닙니다, 주인님! 어쩐 일로 부르셨는지······.]
“심심해서.”
영혼의 연결을 통해 악마가 약간 벙찐 표정이 되는 게 느껴졌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는 두 손을 등 뒤에 짚고 고개를 젖혔다.
두 절벽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 너머, 별들이 소리 없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교차하는 두 줄기 은하수와, 지구의 한적한 시골에서 보던 것보다도 몇 배나 많은 별들의 반짝임.
“······.”
몽글몽글 솟던 잡생각이, 별들의 반짝임과 모닥불의 춤사위 앞에서 차분하게 흩어져간다.
붉은 온기마저도 외롭게 느껴지는 침묵. 나쁘지 않았다.
초인의 감각과 지능 수치를 얻은 이래, 언제나 내외적으로 소음에 둘러싸인 신세였기에 고요함은 언제나 달가웠다.
댈런은 부지깽이로 불을 좀 쑤신 후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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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댈런
레벨 : 17
[근력 : 34] [기량 : 26] [체력 : 30]
[감각 : 22] [지능 : 24] [마력 : 23]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용혈의 재생 인자(C), 도약(E), 불꽃 화살(D), 급속 빙결(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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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십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레벨.
기사단의 방어선을 습격하던 놀 군세를 박살내며 하나, 지옥의 그림자를 초토화시키고 타락기사 에버로크를 처치하며 또 하나가 올랐다.
추가 능력치는 지능과 마력에 하나씩 투자했다.
능력치의 불균형이 당장에 어떤 문제를 초래할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보다 좀 더 균형잡혀 있다면 영역의 힘을 보다 수월하게 감당할 수 있을 테였다.
스킬을 하나씩 확인해보며 숙련도의 변화까지 살펴본 댈런은, 상태창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지개를 쭉 켠 그가 말했다.
“야.”
[넵, 주인님!]
“너 말고.”
댈런은 픽 웃었다.
“거기 기둥 뒤에 숨어있는 놈.”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그리고 이내 반쯤 무너진 기둥 뒤에서, 그림자가 스르르 흘러내려 사람의 형체를 이뤘다.
“감이 좋네? 야만인.”
응달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엘프였다.
뾰족한 귀. 갸름한 얼굴선. 또렷한 이목구비와 가늘고 길쭉길쭉한 팔다리.
동쪽 바다 너머에서 몇 년에 한 번 모습을 드러낸다는 엘프와 상당히 유사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댈런은 그녀의 잿빛 눈동자와 보라색 입술이, 바다 너머의 비교적 우호적인 엘프들과 명백히 다른 종족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어느새 웃음기를 지운 댈런은 평소의 무감정한 얼굴로 엘프를 바라봤다. 그가 말했다.
“그림자 엘프군.”
“역사에도 관심이 많나 봐? 야만인답지 않게.”
엘프 여자가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자신을 알아본 게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유려하게 휘어진 곡도를 천천히 뽑아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나는 하시키루크의 딸, 탈라리나의 손녀, 그림자 엘프의 시조 멜브리데의 십칠대손, 타티아델라!”
마력이 서린 목소리가 폐허의 공터에 메아리쳤다.
어떤 주문이 담긴 목소리인지, 희미한 청회색 기운이 검신을 은은하게 덧씌우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엘프의 눈이 신비한 빛으로 번뜩였다. 댈런은 말없이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용신의 좌완 갑주 청린의 권속이며, 수정과 냉기의 힘을 받은 자, 응달의 감시자···!”
큰 소리로 외치던 엘프의 동공이 좁아졌다. 그녀에게 무언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건 어떤 빛의 원반이었다.
밤하늘 아래, 모닥불의 불그스름한 일렁임을 부숨과 동시에 사방으로 흩뿌리며 날아오는 빛의 원반.
너무 빠르게, 또 너무 갑작스럽게 날아왔기에, 엘프의 감각으로도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도리는 없었다.
그러나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그녀의 재주로는 저걸 피할 수 없었고.
어느새 코앞까지 날아온 빛의 원반은, 자신을 확실히 죽일 것이라는 사실.
쐐애―
그 순간.
까아앙!
어디선가 쏘아진 검은 선이, 그 원반에 적중하며 궤도를 비틀었다.
바람이 머리칼을 스쳤다. 원반이 지나가는 걸 눈이 쫓지 못했다.
느껴진 건 목 오른쪽에서 화끈하게 퍼지는 통증과, 골반까지 덮던 머리칼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머리가 약간 가벼워진 감각.
콰광! 쿠르르르···.
그리고 등 뒤에서 무언가 포탄에 맞은 듯,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뿐이었다.
야만인 전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가 말했다.
“한 놈이 더 있었군.”
청린의 권속, 엘프 타티아델라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건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