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권속(3)
“성검과 열쇠는···청린께서 친히 가져가셨다.”
신음을 꾹꾹 눌러 참는 목소리로, 엘프가 말했다.
성기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말이 맞다면 최악의 상황이었다.
성검과 균열 방벽의 열쇠는 단언컨대 기사단에서도 가장 중요한 보물들.
진룡의 마법과 권능은 악마에 비견되는 바, 만약 청린이 기사단의 보물에 직접 술수를 부린다면 그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었다.
그때는 요새 하나 무너진 게 문제가 아닐지도 몰랐다.
“이 엘프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둬야 합니다. 청린은 오래 전 입은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어요.”
심문관 피드나가 나섰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엘프를 노려봤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다 알려진 놈입니다. 만약 엘프의 말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청린이 기사단의 보물에 손댈 정도로 원기를 회복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맞는 말이네. 성검도 그렇지만, 균열 방벽의 열쇠 역시 허락되지 않은 이가 만질 수 없게 되어있어. 아무리 진룡이라도 오늘내일하는 상태에서 그걸 다룰 순 없을 걸세.”
차석 심문관 도메르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댈런은 턱을 슬슬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이 귀쟁이 입을 좀 더 열어달라는 소리지?
그는 무심한 눈으로 엘프를 내려다봤다. 그림자 엘프는 다시 슬슬 눈을 굴리고 있었다.
두 볼이 퉁퉁 붓고 한쪽 무릎은 으스러졌음에도,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워진 눈빛. 아무래도 성기사들의 당혹감 어린 대화를 듣고 정신이 좀 든 모양이었다.
엘프는 눈을 치켜뜬 채,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서 말했다.
“맞아. 청린께서는 이미 오랜 부상을 회복하셨지. 나를 죽이면 청린께서 친히 네놈들의 팔다리를 자르고, 토끼 같은 아내와 자식들이 그분의 이빨 사이에서 잘게 으깨진 고깃덩이가 되는 걸 똑똑히 보게 하실 거다.”
명백한 협박조의 선언. 댈런은 픽 웃었다.
밤은 꽤 길었고,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멀쩡한 관절은 많았다. 제 할 말만 하고 입 닫게 둘 수는 없지. 그가 엘프에게 손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일행의 뒤편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내게 방법이 있네.”
원로 마법사 펠버였다. 제자와 함께 명상에 들어갔던 그는, 몇 시간만에 컨디션을 어느 정도 되찾은 상태였다.
이제는 제자의 부축 없이도, 지팡이를 짚고 혼자 걸을 수 있을 정도. 단정하게 묶은 갈색 수염을 쓰다듬으며, 펠버는 그림자 엘프의 면전으로 다가갔다.
“내 소영역의 능력은 대지의 기억을 읽어내는 것이지.”
“대지의 기억이라 하시면···?”
“자세히 설명하기는 복잡하지만, 대충 다른 이의 과거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된다네.”
펠버가 인자하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과거를 읽어낸다는 말에 몇몇 성기사들이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붉어진 얼굴. 작게 흔들리는 눈동자. 뭐, 원래 사람이 모든 부분에서 떳떳하기는 힘든 거지.
댈런이 턱을 긁적이고 있자니, 몇몇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원로 마법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걱정 말게나. 남의 사생활을 몰래 들여다보는 취미는 없으니.”
펠버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그림자 엘프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엘프 역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기에, 기억을 읽어낼 수 있다는 마법사가 다가오자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물론 그 이상의 저항은 할 수 없었다. 몸을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부서진 무릎이 욱신거리며, 그녀의 곁에 선 괴물 같은 북방인 전사의 존재를 의식하게 만들었으니까.
“노인장, 괜찮겠소?”
댈런이 말했다. 펠버는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이 정도는 괜찮다네. 시간선에 손을 대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슬쩍 엿보기만 하는 것 정도야 이전에도 해왔던 일 아니겠나.”
본인이 괜찮다면야. 댈런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주었다.
펠버는 엘프 앞에서 지팡이에 기대섰다.
두 눈을 반개한 채, 노인의 수염 사이로 나직한 주문이 흘러나온다.
“엘르― 메멘토 엘레구스.”
우웅······.
희미한 파동이 퍼져나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 감응력만이 느낄 수 있는 울림.
마법사의 발밑에서 시작된 울림은, 평소처럼 넓게 뻗어나가지 않았다.
그 대신 펠버와 엘프를 감싸는 범위 내에서, 조금 더 세밀하게 공명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확실히 달라졌군.’
댈런은 팔짱을 낀 채 생각했다.
신비를 꿰뚫어보는 그의 눈에는, 펠버를 중심으로 공명하는 마력이 마치 황금빛 파동처럼 보였다.
그는 펠버의 소영역에 대해 알고 있었다.
대지의 기억 속에서, 이 땅을 밟고 선 생명의 과거를 반추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대지의 기억 속 수많은 선례들을 바탕으로, 흐릿하게나마 다가올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
허나 판타지 버전 빅데이터처럼 보였던 그 능력은, 지금 원래의 한계마저 한 꺼풀 벗어던진 채였다.
황금빛 파동을 자세히 뜯어본 그는,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이전에 엘가이아 마탑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펠버의 능력은 단순히 대지의 기억만을 읽어내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 추측은 정확했다.
대영역으로 확장된 펠버의 능력은, 더이상 읽어내는 기반을 발 밑의 물리적인 땅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땅이라는 기본 심상만 충족된다면, 굳이 지금 발을 디딘 장소로 그 한계를 단정지을 필요 없었으니까.
물리적인 대지와 더불어 기반 삼은 건, 그 존재의 심상과 기억 속에 비친 대지의 모습.
그 심상 속 대지의 기억이 원래 땅의 기억과 대조와 공명을 거치며, 기존에는 볼 수 없던 영역의 시간선까지 들여다본다.
전지의 편린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건, 그런 개념의 확장 덕분이었다.
“으음······.”
작게 침음을 흘리는 원로 마법사.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걸까. 엘프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이내 펠버는 반개하고 있던 눈을 완전히 떴다. 그는 황금빛 안광을 안개처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청린이 악신과 거래했군. 그가 에낙사구스에게 무엇을 대가로 주었는지는 알 수 없네. 다만 그 거래로 받은 지식과 원기를 기반 삼아, 성검과 균열 방벽의 열쇠로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있는 건 분명하네.”
“새로운 일이라면···?”
마우그가 물었다. 숨을 잠깐 고른 펠버가 말을 이었다.
“직접 기사단을 무너뜨리고, 단장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걸세.”
***
다음 날, 본단을 향해 전령이 출발했다.
임무의 진척도를 보고하는 것과 더불어, 혹시 모를 침공을 대비하라는 전언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나머지 열두 명의 일행은 기존의 계획대로 임무를 속행했다.
네 명은 폐허가 된 에스트라 요새에 임시 거점을 세우고, 나머지 여덟은 강을 따라 청린의 영토로 진입하는 방식이었다.
다만 임무의 목표는 조금 달라졌다.
성검과 방벽 열쇠를 회수하는 대신, 적의 동태를 살피는 게 이제는 주 목적이었다.
진룡이 직접 두 보물을 가져간 이상, 지금의 전력을 가지고 정면에서 충돌하는 건 위험부담이 막대했다.
그보다는 청린의 영토에 잠입해서 놈의 계획을 살핀 뒤, 전력을 온존한 채 복귀하는 게 더 나은 선택.
일행은 에스트라 요새 앞 선착장에서 배를 골라탔다. 대부분 부서졌지만 몇 대 정도는 남아있었다.
작은 범선이 강물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댈런은 갑판 위에서 가만히 상념에 잠겼다.
여유 시간에 심상 너머의 영역을 관조하는 건 언제부턴가 습관이 되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온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 보아왔던 익숙한 설산의 풍경.
쿠르르릉.
조금씩 변해가는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면, 수많은 변수와 가능성들로 복잡해졌던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차분해지는 느낌이었으니까.
후우웅.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친다. 균열 안쪽에서부터 사시사철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댈런은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조심스레 다가오던 금발 청년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엇, 일어나셨습니까?”
원로 마법사의 제자, 토미 발렌티노.
고작 몇 달 전 하수도에서 죽다 살아난 철없던 청년은, 여러 일을 겪으며 어느새 완숙한 마법사가 되어있었다.
“네 스승님은?”
“선실에서 홀로 명상에 들어가셨습니다. 전 실내가 멀미 나고 답답해서 올라왔는데, 마침 명상중이신 것 같아 함께할까 하고······.”
“명상 아니다. 난 그런 거 할 줄 몰라.”
댈런은 대충 대답해주고 찌뿌둥한 등과 어깨를 풀었다.
배가 조금 고팠다. 선착장에서 출발한 게 정오였는데, 하늘은 벌써 어둑해져 있었다.
아직 저녁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선창에 내려가 뭐라도 주워먹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곁에서 머뭇거리던 금발 마법사가 그냥 털썩 앉아버렸다.
댈런은 어깨 풀던 걸 멈추고 고개를 슬쩍 돌렸다. 뭐야. 어쩌라고?
“저희는 용과···싸우게 되는 겁니까?”
청년이 고개를 푹 떨구며 중얼거렸다.
“글쎄.”
댈런은 간식은 글렀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균열의 심부로 접어드는 경계, 에스트라 강의 하류는 기이한 지형이었다.
10킬로미터를 훌쩍 넘어서는 까마득한 절벽. 그 위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폭포로부터 시작되는 강.
지상에서 제국과 노리아 왕국의 국경선인 에스트라 강은, 균열 아래로 떨어지고서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
균열을 따라 천천히 흘러가며, 인간과 마물의 영역을 구분지어준 것.
강의 시작점인 폭포까지는 인간의 땅이고, 흘러가는 강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얽힌 복잡한 골짜기들은 마물의 영토였다.
넓은 강 양쪽으로 이따금씩 드러나는 뭍은 그런 골짜기들 중 하나의 입구였다.
그 안쪽에는 놀이나 프로그맨, 고블린 따위가 부족을 이루고 있을 테였다.
‘청린의 영토로 이어지는 골짜기는 하루쯤 배를 타고 내려가면 나오지.’
내려갈 때는 물길을 따라가고, 돌아올 때는 돛을 펴고 바람을 타면 되었다. 노잡이가 사실상 필요없었다.
“진룡은 죽일 수 없는 존재라 들었습니다.”
상념을 뚫고 청년이 다시 중얼거렸다. 댈런은 꺾어져라 치켜들었던 고개를 천천히 내렸다. 그가 말했다.
“용도 죽는다.”
“허면 왜 불멸자라 불리는 건가요?”
“우리처럼 늙어 뒈지진 않으니까.”
“그럼 어떻게 죽일 수 있습니까?”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용은 칼로 찌르고 주문으로 지지면 죽었다. 필멸자들보다 좀 더 많이, 그리고 더 강하게 찌르고 지져야 할 뿐.
하지만 그렇게 말해주는 대신, 댈런은 청년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섭나?”
“···예.”
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대답. 댈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청년은 고개를 슬쩍 들고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제 그림자 엘프를 심문하고 죽일 때, 표정이 썩 좋지 않더군. 네 미래가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아닌가?”
“···맞습니다.”
들렸던 고개가 다시 푹 떨궈졌다.
댈런은 낮게 웃었다. 무서울 만하지. 어떻게 안 그렇겠는가.
원로 마법사의 제자가 될 정도면, 재능이 평범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어느 마탑에나 있는, 특별할 것 없는 비범한 마법사.
그러던 청년이 어쩌다보니 이런저런 여정 끝에, 초인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마물이 득시글하다는 균열 안으로 들어가는 상황이다.
심지어 곱게 가는 여로도 아니었다.
오천에 달하는 놀 군세와 공성전을 벌인지 며칠이나 됐다고, 한밤중에 용의 권속들에게 습격까지 당했으니.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이 모든 일의 배후인 용의 아가리로 머리를 들이밀겠단다.
답답해 미칠 지경이겠지. 여기 있는 다른 초인들이야 제 한 몸 빼낼 실력이 된다지만, 자신은 아니지 않은가?
거기다 믿고 있던 스승마저 얼마 전부터 골골대기 시작하는 판이다. 당장에 주저앉아 집에 가겠다고 울어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러지 않는다는 건, 하나뿐인 제자로서 차마 제 스승의 체면을 깎아먹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야. 악마 새끼.’
[···넵, 주인님.]
‘유적에서 얻었던 천쪼가리 좀 꺼내봐라.’
품속에 손을 넣고 아르보르를 부르자, 악마가 꿈지럭거리며 공간을 살짝 열어 손에 잘 접힌 천을 쥐어주었다.
댈런은 그걸 토미에게 건넸다. 청년은 얼떨결에 받아들고 물었다.
“이게 뭡니까?”
“투명 망토다.”
작은 노파 올가의 투명 망토.
모래바람 왕조의 유적에서 시체를 회수하고 얻은 아이템이었다.
사람 한 명을 딱 덮을 수 있을 크기의 천은, 뒤집어쓰는 순간 거의 모든 기척을 차단할 수 있는 강력한 마법이 부여되어 있었다.
단점이라면 댈런이 사용하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다는 것.
기껏해야 상반신만 가려지면 다행이려나.
어떻게든 쓰자면 활용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이 금발 청년에게 더 유용한 물건일 테였다.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망토와 자신을 번갈아 보는 청년에게, 댈런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정 두려우면 언제든 뒤집어쓰고 도망치면 된다. 네 죽을 자리는 네가 선택하라는 거야.”
“······.”
청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천천히 선실 입구로 걸어갔다.
고민 많은 걸음걸이였다. 두 손은 투명 망토를 간절히 움켜쥐고 있었고.
다시 혼자가 된 댈런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머릿속에 청년의 질문이 맴돌았다.
‘저희는 용과 싸우게 되는 겁니까?’
“글쎄.”
머릿속에 한 가지 질문이 더 떠올랐다. 이번에는 청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용과 싸운다면 이길 수는 있고?’
“······.”
‘청린과는 싸워본 경험도 없잖아.’
머릿속 목소리가 신랄한 어조로 말했다.
맞았다. 대부분의 보스몹들과 달리, 진룡 청린은 원래라면 상대할 일 없는 배경 설정 같은 존재였다.
용신의 좌완 갑주라는 이명만큼이나, 한때 동족들 중에서도 손에 꼽는 강함을 지녔다는 진룡.
그런 존재와 싸우게 됐다는 건, 이번 회차가 전례 없을 정도로 꼬였다는 소리였다.
‘너 잘못하면 죽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내고 싶어?’
머릿속의 목소리가 말했다. 걱정스런 말투. 달콤한 유혹.
이길 수 있을까. 모른다. 아룡도 간신히 잡았는데. 지면 죽겠지? 그건 확실해. 지금이라도 도망쳐? 그러면 살 수는 있겠지. 그래.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되는 거야.
머릿속 문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합리적이고 매혹적인 논리와 설득. 익숙한 편안함이 뇌리를 잠식한다.
댈런은 왠지 머리가 아팠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찬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우고, 두근거리는 용의 피가 혈관을 달군다.
그가 말했다.
“씹새야. 이 세계에서도 평생을 도망만 다닐 거냐?”
‘······.’
“난 그렇게 살기는 싫은데.”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댈런은 씩 웃었다.
모든 게임에는 분기점이 있다. 이 게임도 마찬가지였다.
싸움을 피할 건지, 아니면 들이받을 건지를 선택하는 분기점.
어쩌면 전자가 더 합리적이고 전략적인 판단이었다. 후자는 무식한 야만인의 호승심일지도 몰랐고.
정말로 게임이었다면, 그도 전자를 택했을 테였다.
일단 물러나서 돌아가는 꼴 좀 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음 회차도 있으니까- 라는 태도.
누구보다 이 게임의 고인물이라 자부하던, 머릿속의 삼십 대 아저씨는 그걸 원했다.
“스읍―”
그러나 폣속을 채운 찬 공기는 현실이었다.
한 번뿐인 기회. 실수하면 끝인 현실.
이 현실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근육질의 금패 용병 댈런은 그렇게까지 합리라는 방패 뒤에 숨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합리적인 판단이 정말로 그의 목숨을 살릴 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건 인정한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동시에 한 걸음만 물러나도 끝없는 낭떠러지라면? 지금껏 싸워온 싸움들이 다 그렇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이 게임의 판돈에는 그의 목숨만 올려져 있는 게 아니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쌓아온 인연들.
하지만 삼십 대 아저씨가 경험했던 그 어떤 운명보다도 깊은 관계들.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저울로 무게를 달기에, 그 관계들은 이미 지나치게 무거워져 있었다.
“으챠.”
댈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저녁때가 다 되어있었다. 냄새로 보아하니 오늘의 메뉴는 구이 종류인 듯했다.
문득 루시아의 땅굴토끼 구이를 먹고 싶다 생각하며, 덩치 큰 용병은 흔들리는 갑판 위를 휘적휘적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