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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87화 (87/288)

진룡(1)

날이 밝았다.

일행이 탄 작은 범선은 안개 사이를 천천히 순항하고 있었다.

평화롭게 흔들거리는 갑판 위. 고위 성기사 마우그가 퀭한 얼굴로 하품을 쩍 했다. 짜증 섞인 하품이었다.

“빌어먹을 바위트롤 새끼들.”

“프로그맨도 마찬가집니다.”

피드나가 말을 받았다.

“개구리 다리가 닭고기 맛이라던데. 죄다 뜯어서 삶아버릴까 고민했습니다.”

그녀는 다크서클 짙은 눈을 끔뻑이며 중얼거렸다.

일행의 작은 범선은 밤새 걸레짝이 되어있었다.

프로그맨의 독침이 무슨 여관 다트판처럼 빼곡하게 박힌 배 옆구리. 거미인간들의 덫에 걸려 부러진 중간 돛대.

새벽녘에 바위트롤이 나타났을 때, 마우그는 순간이나마 이 여정이 여기서 끝나는 건가 생각했다.

뱃머리 선수상을 박살낸 바위트롤의 돌덩이 세례는, 선체에 조금만 제대로 맞아도 그대로 침몰할 만큼 위협적이었으니까.

때마침 엘가이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가 명상을 마무리하고 갑판 위에 올라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가 공중에서 바윗덩이의 방향을 되돌려 날릴 정도의 강력한 대지술사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정말 여정은 여기서 끝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마법사님.”

마우그가 말했다. 그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눈앞에서 덮쳐오는 바위를, 지팡이를 슬쩍 까딱인 것만으로 돌려보내 바위 트롤을 깔아뭉개버리던 마법사의 주문을.

존경 어린 시선을 보내는 고위 성기사 앞에서, 펠버는 갈색 수염을 슬슬 쓰다듬었다.

“아닐세. 그나저나 다 와가는가?”

“거의 도착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만 더 가면 될 겁니다.”

“그렇군.”

펠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뱃머리에 올라가 배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같은 생각을 했는지, 선객 한 명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 시간쯤 걸린다고 했소?”

“그렇네.”

거구의 용병이 턱을 긁적였다.

그는 부서진 선수상의 받침대에 팔꿈치를 기댄 채 강을 응시하고 있었다.

안개로 뒤덮인 강 위를 꿰뚫어보는 검은 눈. 약간은 멍해 보이기도 하는 눈빛이었다.

펠버는 그가 보는 방향을 눈을 끔뻑이며 쳐다봤다. 그의 시야에는 온통 안개뿐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의 육신은 주문 없이는 그저 팔십 먹은 노인의 몸뚱이였으니까.

반대로 약간 흐리멍텅한 전사의 시선 앞에서라면, 이 자욱한 아침 안개도 없는 거나 다름없겠지.

펠버는 새끼손가락으로 눈곱을 떼어내며 물었다.

“무슨 생각하나?”

“용굴에 있을 금은보화.”

“자네 이미 금화가 한 궤짝쯤 있지 않나?”

“돈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 그게 자본주의 아니겠소.”

“···그건 또 뭔가?”

댈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선 펠버에게 고개를 돌렸다.

“몸은 좀 괜찮으시오?”

“보다시피.”

“안 괜찮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펠버가 끌끌거렸다. 그는 뱃머리 난간에 몸을 기댔다.

안개 속을 바라보는 펠버의 눈은 평소처럼 마력광이 일렁이고 있지 않았다.

지금 순간만큼은 마법사의 눈이라기보다, 오랜 인생의 끝자락을 바라보는 지긋한 노인의 눈이었다.

“나는 살 만큼 살았네. 마지막 여행일지도 모르지.”

노인이 말했다.

“몸 상태 정도야 신경 쓸 게 아니지. 중요한 건 얼마나 의미 있는 끝맺음을 매듭짓냐는 거니까.”

“······.”

“내 죽을 자리는 내가 정한다네. 죽을 방법 역시도.”

그리고 그건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감사한 특권이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덧붙이는 노인의 말에, 댈런은 적절한 대답을 골라내지 못했다.

고작 서른 먹은 아저씨였던 그가, 뭐라고 죽음에 대해 논한단 말인가.

노인의 앞에서 자신은 마치 어젯밤에 찾아온 금발 청년과 그리 다를 바 없을 텐데.

댈런이 말없이 수면만 바라보고 있자, 펠버가 낮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얼굴 좀 펴게. 자네라고 평생 지금 같을 거라 생각하나?”

“노인장보다는 천천히 늙을 것 같소만.”

“예끼! 버르장머리 하고는. 노망난 할아범의 지팡이에 두들겨지고 싶은 건가!”

노인이 지팡이를 무슨 검처럼 치켜들었다. 댈런은 노인 공경의 차원에서 몇 대 맞아주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웃어젖혔다.

그건 낮거나 사나운 웃음이 아닌, 시원한 웃음이었다.

두 사람의 투닥거림은 한동안 뱃머리를 소란스럽게 했다.

***

마우그의 말대로 배는 한 시간쯤 지나 뭍에 닿았다.

수많은 계곡이 거미줄처럼 얽힌 균열의 심부에서도, 유독 넓은 계곡의 입구.

일행은 모래사장 근처에서 닻을 내리고 배를 정박시켰다.

버석. 버석.

가장 먼저 내린 댈런은 발밑이 푹 빠지는 걸 느꼈다. 생각보다 깊은 모래사장이었다.

거기다 구름에 햇빛이 거의 가려졌음에도, 한낮의 햇빛을 받은 것마냥 반짝거리는 모래밭은 왠지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스르륵.

댈런은 모래를 한 줌 쥐어보았다.

수분기 없는 모래가 손 안에서 쉽게 바스라진다.

자세히 보니 보통의 모래알과는 좀 달랐다. 얼음 같기도 하고, 수정 같기도 한 모래알들.

그 하나하나가 살을 에는 듯한 냉기를 품은 결정이었다. 댈런의 두터운 피부마저도 살짝 시릴 정도였으니.

‘뭔진 몰라도 주문인 건 확실하군.’

댈런은 모래를 몇 번 지근거리며 밟아보았다. 두꺼운 가죽 부츠 너머로도 발바닥에 한기가 전달되었다.

그 때문일까. 마지막으로 배에서 내린 토미가 흠칫 몸을 떨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차갑냐?”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차가울 걸세. 청린의 영역은 마법적인 냉기로 가득하거든. 옷을 껴입는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니, 정 힘들면 마력을 끌어올려서 버티게나.”

도메르가 말했다. 댈런은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여기 와본 적 있소?”

“한 번. 내가 막 성년이 되었을 때니, 대충 백 년쯤 전이었지.”

백 살이 넘는다라. 겉보기에는 일흔쯤 되어 보이는데.

겉모습만으로는 초인들의 나이를 분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도메르는 댈런이 했듯 발밑에서 모래를 한 움큼 주워들고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지금과 상황이 비슷했어. 연이은 마물들의 침공에 에스트라 요새가 함락되었고, 단장님께서는 기사단의 정예 수십 명을 대동해 용 사냥에 나서셨네. 평범한 용사냥꾼들과 달리, 아룡이 아닌 진짜 용이 사냥감이었지.”

“진룡 사냥이라니. 정신 나간 단어로군.”

“맞네. 단장님이 아니셨다면 누구도 엄두를 못 냈을 걸세.”

도메르가 끌끌 웃었다. 추억을 회상하는 노인의 웃음이었다.

“사냥 결과는···글쎄, 반쪽짜리 성공이라 할 수 있겠군. 치명상을 입은 용은 그 날 이후로 제 용굴에 틀어박혔으니 말일세.”

“아예 죽일 수는 없었던 겁니까?”

“안타깝게도 그랬지. 용과 직접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분인 단장님께서 부상당하셨으니까.”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노인이 청년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단장님께서 팔과 눈을 잃으신 게 그날이었다네. 쉰에 달하던 정예 기사들도, 나를 포함해 몇을 제외하고는 전부 죽었고 말이야.”

마치 손자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담담한 어조.

허나 그 속의 내용은 희미한 회한을 품고 있었다.

백 년이 지나도록 다 닳지 못한 슬픔. 그리고 잃어버린 이들을 향한 그리움이겠지.

대답을 들은 토미는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괜한 걸 물어봤나 싶었던 것이다.

도메르는 신경 쓰지 말라며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어찌됐건 그 날 이후로 놈은 용굴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네. 단장님께서는 놈이 검에 입은 상처가 너무 심각해서 그런 거라 하시더군. 설령 그게 아니라도, 애당초 용이라는 족속 자체가 제 용굴에서 나오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이기도 하지.”

차석 심문관은 청년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다시 지어주었다.

“그러니 적어도 이번 임무에서 우리가 마주칠 확률은 희박할 걸세.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예, 감사합니다.”

겁먹었다는 사실을 들킨 게 부끄러웠던 걸까. 노인과 눈이 마주친 토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던 손을 내려 허리띠에 걸쳤다. 안개가 더 짙어지고 있었다.

물가에서 이미 한참을 멀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한기를 품은 안개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짙어져, 이제는 그의 눈으로도 생각보다 멀리 볼 수 없을 정도.

발밑의 모래밭 역시도 계곡의 초입부에 비해 냉기를 조금씩 더해가고 있었다.

‘좋지 않군.’

심장이 두근거렸다.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강하게.

긴장한 건 아니었다. 당연히 두렵지도 않았고.

알 수 없는 몸의 반응에, 댈런의 손은 어느새 허리띠에서 성검의 손잡이로 옮겨져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잠깐.”

제일 후미에서 걷던 펠버가 일행을 멈춰 세웠다.

“누군가 있네.”

그가 말했다. 동시에 댈런이 성검을 뽑아들었다.

스아아아―

어깨로부터 시작된 회오리가, 팔과 손목을 지나 검신을 뒤덮는다. 댈런은 가볍게 회오리를 흩뿌렸다.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었기에, 범위를 극단적으로 넓히고 위력을 줄인 채였다.

후웅―!

회오리 앞에 안개가 부서져 흩어지자, 저 멀리 가녀린 인영이 보였다.

[재미있는 재주로구나.]

그리고 스산한 전성이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

촤르르르···.

안개가 사라진다.

아니, 사라진다기보다는 결정화된다는 말이 더 적절했다.

빽빽하던 안개는 순식간에 발밑의 모래알과 비슷한 결정으로 압축되더니, 우수수 떨어지며 모래밭 위에 한 겹을 더했다.

결정이 옷 속을 파고들어 바스락거린다. 반 뼘 정도 더해진 결정의 높이에, 발목까지가 모래밭에 파묻혔다.

그러나 일행 중의 누구도 그런 자잘한 것에 신경 쓰지 못했다.

순식간에 넓어진 시계 속.

모두의 시선은, 화살 한 바탕 거리쯤 떨어진 여성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오랜만의 손님이로구나. 어언 백 년 만인가.]

자박.

여성이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작고 가녀린 체구.

길게 늘어뜨린 탁한 청백색 머리칼.

또렷한 이목구비와 가느다란 턱선은 분명 미형의 얼굴을 나타냈지만, 거기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아름다움이 아닌 섬찟함이었다.

그건 인간 같지 않은 피부의 창백함 탓이었을까.

아니면 세로로 찢어져 번뜩이는 노란 눈동자 때문이었을까.

어느 쪽이건 일행 가운데에는 긴장 어린 침묵이 내려앉았고, 여성은 그걸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니 대접이 좀 부족하여도 이해하길 바란다. 백 년이라는 시간은 필멸자에게만 긴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

“청린···!”

도메르가 씹어뱉듯 말했다. 여성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를 아느냐?]

스릉―

대답은 없었다. 검을 뽑아든 도메르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섰다.

그의 몸에서 신성력이 줄기줄기 흘러나오고, 검신에서 새하얀 불꽃이 폭발하듯 타올랐다.

“도망치시게들. 돌아보지 말고, 곧장 배를 타고 떠나. 떠나서 청린이 용굴을 벗어났다고 알리게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가 처음 보이는 면모였다.

노인은 언제나 여유가 있었다.

놀 군세가 기사단의 요새에 들이닥쳤을 때도, 용의 권속들이 한밤중에 일행을 습격했을 때에도.

심지어 그 습격으로 본인이 부상을 입었음에도 그랬다.

허나 쯧쯧 혀를 차며 커다란 놀을 밟아대던 노인은 이제 없었다.

온몸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가녀린 여인 앞을 막아선 고강한 성기사만이 존재할 뿐.

쿠르르르······.

발밑의 모래가 밀려난다.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으로 뿜어지는 신성력이었다.

강대한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노쇠한 육체에, 빼곡하게 새겨진 신성 문신으로 유예를 더한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노인의 눈을 빤히 응시하던 여성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탁 쳤다.

[아, 기억나는구나.]

그녀가 말했다.

[너, 그 역겨운 신의 종자와 함께 왔던 어린 것이었지.]

그 말이 신호였다.

공기가 반전된다. 살기가 실체화되어 짓누른다. 피부를 찌르는 무형의 압(壓)에, 신성력의 불꽃이 위태로이 흔들렸다.

[알고 있느냐?]

노란 눈이 말했다.

[내 이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노인은 눈을 부릅떴다. 그가 소리쳤다.

“어, 어떻게 그때의 상처를 회복···!”

후웅―

바람이 뺨을 훑었다. 차가운 미풍이었다.

모래 바닥을 훑고 지나가며 그 미풍을 일으킨 무언가의 궤적 이후에, 성기사의 가슴팍은 한 줌 핏물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그게 거대한 살덩이라는 건 댈런만이 알아챌 수 있었다.

마치 저항 하나 없는 듯, 신비로운 기색으로 휘둘러진 용의 꼬리.

상반신을 잃은 머리가 모래밭 위에 툭 하고 떨어지고, 반쯤 남은 허리에 붙은 두 다리도 기우뚱하며 쓰러졌다.

노인은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피드나가 비명을 질렀다.

“차석 심문관니···!”

후웅―

궤적이 다시 공기를 갈랐다. 댈런은 이번에는 반응했다.

꽈광―!

성검을 양손으로 움켜쥔 채, 발밑의 모래밭을 폭발시킨 신형이 앞으로 쏘아진다.

내면의 천둥이 울었다. 성검이 그 우렛소리에 공명했다.

검신을 휘감은 회오리가 섬광을 엮어내고, 두 손에서부터 발아한 불꽃이 순식간에 온몸을 감쌌다.

그 모든 건, 단지 찰나.

그 찰나의 끝.

성검과 꼬리가 만난다.

쩌━━━━━━

부서진다.

공간이 찢어졌다.

힘과 힘이 부딪혔다기보다, 신비와 신비가 겨루었다 설명해야 할 격돌.

필멸자의 신비는 강했다. 통로로서의 피륙이 간신히 버틸 정도였으니.

허나 태생부터 신비 그 자체인 존재 앞에서는, 한 번의 꼬리질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격.

콰학―!

찢긴 공간이 아물어지는 순간, 모래밭이 뒤집어진 건 댈런 쪽이었다.

쿠과과과과······!

폭풍이 몰아쳤다. 백 년간 쌓인 모래밭이 그 폭풍 앞에서 파도가 되어 밀려났다.

거대한 골짜기가 우르릉 울면서, 오래 묵은 바위들이 절벽에서 아래로 우후죽순 떨어졌다.

쿠궁. 쿵.

민낯을 드러낸 딱딱한 지면 위에, 제 질량의 속도대로 부딪혀 부서지는 바윗덩이들.

잘게 떨리는 대지 위에 서 있는 건 두 사람뿐이었다.

두 발을 지면에 디디고 우뚝 선 채, 온몸에서 증기를 뿜어대는 전사와.

그보다 몇 걸음 뒤에서, 황금빛 안채를 번뜩이는 노년의 마법사.

[호오.]

청린용, 테데라 리울라크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흥미로운 손님들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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