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룡(2)
푸쉬이이이···!
눈앞이 까맣다. 그러다 다시 새하얘졌다.
시야를 가득 뒤덮은 백색은 온몸에서 뿜어지는 증기였다.
안와 안쪽에서 박살났던 눈알이 재생되고 머지않아, 몸의 나머지 신경들도 하나씩 이어 붙기 시작하며 격통이 몰려왔다.
“쿨럭!”
주르륵.
온몸이 아프다. 입가에서 죽은 피가 흘러나왔다. 높은 감각 수치는 몸의 상태를 생생하게 전달해주었다.
반쯤 곤죽이 된 내장. 얼어붙고 찢겨나가 뒤집어진 피부.
벗겨진 살갗의 틈 사이로, 계곡의 냉기가 속살을 시리게 파고들었다.
그 안의 근육은 갈기갈기 찢긴 뒤 재조립되듯 붙고 있었다.
짝. 짝.
고막이 회복되면서 작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잘했다, 전사야. 네 사람들을 지켜냈구나. 팔다리 하나씩은 잃은 것 같지만, 하찮은 몸뚱이를 부지한 게 어디겠느냐.]
귓가를 웅웅거리는 전성. 청린이었다.
방금 전의 거대한 격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한껏 묻어났다.
그녀는 오히려 그 일격이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이 있는 듯했다.
[신비롭구나. 백 년 만에 맞은 손님에게서 오랜 친우의 향내를 맡을 줄이야.]
자박.
모래밭 위를 내딛는 가벼운 발걸음.
흩어져가는 증기 사이로, 품이 넓은 로브를 걸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용신께서 그를 소환하신 게 벌써 천 년이 다 되어가는가. 소식이 끊겨 내 궁금하긴 했었지. 드넓은 강물에서 한 줌을 퍼담은 수준이라도, 어떻게 그의 피를 이어받게 된 것이냐?]
“···지, 랄···하네.”
[호오. 그 상태가 되어서도 말을 할 수 있다니. 역시 그의 피를 받은 자인가. 그 역시 불 같은 성정과 의지의 소유자였지.]
여인이 입꼬리를 씰룩였다. 비웃음인지 감탄인지 모를 웃음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도끼든 뭐든 던져서 저 빌어먹을 아구창에 꽂아버렸을 테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방금의 일격으로 그의 몸은 사실상 박살이 난 거나 다름없었고, 용혈의 재생 인자는 무너져가는 몸뚱이를 붙잡은 채 급한 곳부터 여기저기 회복시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수행하는 생명 유지와 수복의 두 역할.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이 아슬아슬한 균형이 깨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때문에 당장은 어떻게든 시간을 끌면서 회복에 전념하는 게 우선이었다.
문제는 손끝 하나 까딱하기 힘든 몸뚱이로, 대체 어떻게 시간을 끌 것인가.
초인적인 지능 수치가 수백 가지 경우의 수를 뒤져가며, 머리를 뜨겁게 달구는 순간이었다.
“끌끌.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구만.”
터벅.
누군가 그의 곁을 스치듯이 지나쳤다.
곧게 편 허리.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는 걸음걸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잔영을 남기는 머리칼과 수염.
발걸음마다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황금빛 동심원의 파동이, 매혹적으로 눈길을 잡아끈다.
증기에 삼켜진 댈런을 열 발자국쯤 앞서간 펠버는, 잠시 멈춰서더니 뒤를 슬쩍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쉬고 있게나. 내가 일단 발을 잡아둠세.”
다시 정면을 향하는 마법사의 시선.
그 눈동자에서 황금빛 안광이 줄기줄기 흘러나온다.
[호오. 너는 또 무슨 재주를 가지고 있느냐?]
흥미롭다는 듯 이쪽을 바라보는 진룡의 면전에서, 두 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땅을 가볍게 찍자.
구우우우―
발밑에서 퍼져나가던 동심원이 일순 일그러지며, 황금빛 색채가 계곡을 환하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엘르― 메멘토 엘레구스.”
입술을 달싹이며 외는 주문.
그 주문 직후, 원로 마법사의 시야가 용의 장대한 기억으로 점철되었다.
***
청린은 즐거웠다.
백 년 만에 회복된 육신. 그 육신을 시험해볼 만한 전사와 마법사. 그리고 전사에게서 나는 친우의 향취.
역겨운 전쟁신의 종자와 사투를 벌인 이래로, 오랜 세월 끝에 처음 맛보는 진정한 기쁨이었다.
‘자그마치 백 년이었지.’
백 년 전의 어느 날.
청린은 아직도 그 날만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당시 그녀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아무리 성기사단의 노괴라 해도, 설마 필멸자가 그녀를 직접 공격하는 광오함을 보일 거라고는 말이다.
허나 추종자들과 함께 그녀의 땅을 습격한 신의 종자는, 다짜고짜 그녀의 목덜미에 검끝을 들이밀었다.
‘용신의 좌완 갑주, 테데라 리울라크. 오늘은 네놈이 용굴 밖으로 나오는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하. 용기가 가상하구나. 하찮은 필멸자 주제에.’
당시 청린은 코웃음 쳤다.
제 신 하나를 믿고 진룡에게 검을 들이대다니, 얼마나 오만한 모습이었던가.
하지만 놈의 검에서 흘러나온 녹진한 백색 화염은, 그녀의 비늘마저 태울 정도로 강렬했고.
일대를 뒤덮은 놈의 영역의 힘은, 당황한 그녀가 용굴로 후퇴하는 걸 사전에 차단해버렸다.
끝내 성검에 꿰뚫린 심장과 뜯겨 나간 날개 또한, 어찌나 참혹한 아픔이었던가.
그 싸움에서 치명상을 입은 뒤, 청린은 천근만근 무거워져가는 육신을 억지로 붙잡은 채 살아왔다.
‘그마저도 이제 끝이라 여겼지.’
앞으로 기껏해야 오 년.
잘해봐야 그 정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천 년도 전에 나무에게서 받은 저주와, 기사단의 노괴가 근래 들어 입힌 치명상은 그녀의 몸을 안에서부터 철저하게 망가뜨리고 있었으니.
괜찮았다.
백 년간 설욕의 날을 기다려왔으나, 그게 꼭 자신의 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혹 자신에게 기회가 돌아오지 못할 걸 대비해, 청린은 지난 수십 년간 정성을 들여 알을 품어왔다.
하지만 운명은 기이한 법.
모든 걸 포기하고 내려놓은 순간, 그녀에게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청린, 내게 힘을 주십시오. 대신 기사단의 보물을 바치겠습니다.’
힘에 눈이 먼 성기사가 노괴를 배신하고 가져온 성검이, 모든 것을 바꿔놓은 것이다.
마냥 순탄치는 않았다.
역겨운 신의 힘을 담은 물건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대비해 준비해둔 수만의 마물을 에낙사구스에게 주어야 했고.
그 대가로 얻은 원기와 지식을 가지고, 성검을 해체하는 과정은 진룡인 그녀로서도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으니까.
허나 그 끝에, 그녀는 몸을 회복했다.
천 년도 전에 입은 저주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으나, 기사단의 노괴와 싸우며 입은 부상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다시 붙은 날개.
수복된 심장.
온몸을 충만하게 채우는 권능의 마력은, 단 보름 전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보름이라.”
의식의 흐름을 뚫고 들어오는 중얼거림.
청린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보름 정도면 어떻게든 가능하지.”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끌끌, 눈치 빠른 도마뱀이구만.”
펠버는 나직하게 웃으면서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 끝에서 터져나오는 황금빛 파동은, 방금까지 청린의 눈동자에 스며들었던 것과 동일한 색채였다.
“보통은 기억을 읽힌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는데. 대영역을 이뤄낸 뒤 처음 보는 일이군.”
과연 초월적인 존재의 저주를 받았어도 진룡은 진룡인가.
완전하게 전개한 대영역을 순식간에 간파한 것도 모자라, 방심한 틈을 타 기억을 읽어내던 마법사의 마력을 무의식 차원에서 몰아내버리는 기예.
필멸자로서는 흉내조차 내기 힘든 그 마력 응용력은, 진룡이 존재 자체가 신비인 생물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아직 부서지던 몸을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력과 육신의 운용에 다소 어려움이 있을 걸 감안하면 원래의 능력이 어떨지는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늦었다네.”
허나 필멸자의 범주를 한참이나 벗어난 그 능력도, 파고들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청린의 기억을 되짚어본 결과, 그녀가 지금의 역량을 회복한 건 고작 반 개월 전.
부상을 회복한 지금의 그녀는 이곳에 있는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지만.
반 개월 전의 그녀를 마주한다는 전제만 있다면, 지금 몸을 회복 중인 댈런도 충분히 승리를 점쳐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스륵···.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이 지팡이에서 떨어진다.
주저하지 않고 빠르게 수인을 맺기 시작하는 손끝. 나직하게 읊는 기나긴 주문.
손에서 떨어졌음에도 허공에 둥둥 떠있는 지팡이를 중심으로, 황금빛 파동이 반전되더니 용을 향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엘르― 메멘토 카시볼그.”
펠버의 입에서 처음 맺어지는 영창과 함께, 동심원의 파동이 기이하게 일그러진다.
청린이라는 존재 자체를 대지로 삼고, 그 대지의 기억을 읽어내는 걸 넘어 과거에 지나쳐온 순간으로 회귀시키는 대영역의 힘.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걸 과거로 돌려버리는 권능은, 아무리 대영역을 열어낸 대마법사라 해도 손에 쥘 수 없었다.
하지만 육신에 한정해 시간선에 손을 대는 것 정도는, 목숨을 내던질 각오를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
콰아아아아―!
파도처럼 몰아친 황금빛 정광이 청린의 몸을 집어삼키고.
[크···!]
투웅―!
육신에 나타나는 변화를 눈치채자마자, 청린은 제자리에서 높이 도약해 파도를 벗어났다.
허나 영역의 힘은 이미 몸의 시간을 되돌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빛의 파도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그 영향을 떨쳐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빠드득.
창백한 살결이 갈라진다.
마력이 하얀 숨결의 형태로 새어나왔다.
찢겨나가는 날개로 인해 수백 미터 상공에서 여린 몸이 휘청이고.
깨진 심장에서 신비 그 자체인 몸뚱이를 유지할 동력이 소실되어간다.
[너, 초월자도 아닌 필멸자가 어찌 시간선에 직접 손을···!]
당혹감에 물든 목소리로 전성을 토해내는 청린.
방금까지 넘쳐나던 여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노란 눈동자가 스산한 마력으로 번뜩이고, 그녀의 존재감이 기이하게 뒤틀리며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쿠르르···.
골짜기가 진동한다.
발밑의 돌들이 파르르 떨렸다.
작은 인간의 몸이 자취를 감춘 순간, 불현듯이 거대한 그림자가 계곡에 드리웠다.
쿠구구구구······.
한기를 품은 공기가 사방으로 몰아치고, 지면에 남아있던 결정 모래들이 폭풍처럼 밀려난다.
전조도 없이 나타난 용의 진체는, 수백 미터의 상공에서도 거대하게 보일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
체고는 요새의 성벽보다도 높았고, 몸길이는 자그마치 백 미터에 가깝다.
두 쌍의 푸른 날개는 상단의 행렬을 뒤덮을 수 있을 정도였으며, 북부의 빙하를 깎아놓은 듯한 이빨들은 하나하나가 성인 장정 이상의 크기였다.
존재만으로도 공기를 짓누르는 격의 압박.
그 앞에서 골짜기의 까마득한 절벽마저도, 가느다란 겨울철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가운데.
“쿨럭! 커헉···!”
완전히 전개된 대영역의 힘을 빌어 간신히 버텨내며, 펠버는 그녀의 심상을 어렴풋이나마 읽어낼 수 있었다.
‘이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을 거다.’
과거의 회한과 침입자를 향한 살기가 뒤섞인 의념.
불멸자의 몸을 입고 태어나, 한 세기 동안 겪어온 필멸자의 삶은 대체 어떤 원한을 새겨놓은 것일까.
다시금 무너지기 시작하는 육신을 진체로 현현해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남은 수명마저 단축된다는 건 그녀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용골 깊숙한 곳까지 새겨진 원한은, 목숨조차 도외시하는 강박에 가깝게 그녀를 몰아붙였고.
끝내 이 자리에서 모든 힘을 쏟아붓더라도, 침입자를 죽이겠다는 의지로 빚어진다.
[――――!]
전성으로 내뱉어지는 용언.
마력의 바람이 요동친다.
아룡과 달리 주둥이로 깊은 숨결이 모이고, 청백색의 기운이 목구멍 안쪽에서 일렁이는 건 단 한순간.
모든 걸 얼려버릴 극한의 냉기가, 눈앞의 마법사와 그가 선 대지를 뒤덮어버릴 기세로 뿜어지려는 찰나였다.
패래래랙―!
빛의 원반이 날아간다.
여느 때처럼 햇살을 부수고 날아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검붉은 빛을 토해내는 빛의 원반.
일렁이는 검붉음은 점차 그 크기를 키워가더니, 거대한 불덩이나 다름없게 되어 막 쏘아지는 숨결에 부딪혔다.
꽈릉━━ 꽈과과과과―!
두 신비가 부딪혔다.
먼젓번의 격돌보다도 몇 배는 강렬한 힘의 폭발.
터져나오는 격돌의 잔재가, 일종의 폭격이 되어 절벽과 지면을 우르르 강타한다.
“커헉···크으으.”
검게 죽은 피를 토해내며 무릎 꿇은 펠버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만들어낸 황금빛 역장으로 스스로를 감쌌다.
역장에 충돌하는 붉고 푸른 힘의 잔재들.
용이 숨결을 토해내려는 순간에 죽음을 직감했던 그에게, 눈앞의 광경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펠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힘의 파편들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댈···런···?”
그의 뒤편.
수십 걸음쯤 떨어진 골짜기의 한가운데.
그곳에는 한 전사가 팔을 길게 뻗은 채 우뚝 서 있었다.
그가 익히 아는, 아니 알아왔다고 생각한 전사.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한 개 이상 큰 키와, 갑옷 그 자체나 다름없는 돌덩이 같은 근육들은 여전했다.
그러나 그 근육을 뒤덮은 검붉은 화염과, 전신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결코 그가 알던 사람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발만 잡아두겠다더니, 아예 반 죽여놔버렸군.”
전사가 말했다.
입 밖으로 내뱉은 육성인 동시에, 공간을 뛰어넘어 귓가를 울리는 전성과도 같은 목소리.
그 기묘한 목소리에서 자신이 알던 전사의 말투를 느낀 펠버는, 피 흘리는 입술을 힘겹게 끌어올리며 웃었다.
“좀 분발해봤네. 그래서 불만인가?”
“아니. 상관없소.”
전사가 마주 웃어주었다.
평소의 검은 눈이 아닌, 세로로 찢어진 검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거세게 타오르는 화염을 성검에 둘러낸 그는, 찢겨나간 날개로 힘겹게 허공에 머무는 진룡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차피 경험치는 막타 친 사람 거니까.”
사납게 드러내는 송곳니.
그건 포식자의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