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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89화 (89/288)

진룡(3)

[스킬, ‘검붉은 용의 피(A)’를 획득했습니다.]

눈앞에 그 알림창이 떠오르기 이전부터, 댈런의 심장은 거세게 맥동하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그건 평소의 두근거림과는 달랐다.

인간의 피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상 속에서 산소를 실어나르는 혈액의 움직임도.

몸을 수복하기 위해 전신으로 뻗어나가는, 재생 인자를 품은 뜨거운 피의 내달림도 아니었다.

좀 더 깊고 열기로 가득한 박동.

물리적인 혈액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흘러가는 듯한 감각.

오래 전.

하수도에서 처음 용혈의 재생 인자를 얻은 직후 이런 느낌이었던가.

그동안 수많은 시체를 회수하며 두 자릿수에 달하는 스킬을 얻었으나, 몸의 일부에 신비가 더해진 감각을 느낀 건 그때 한 번뿐이었다.

‘바로 지금 전까지는.’

스으―

숨을 들이쉰다.

본디 산소를 흡수해 운반해야 할 피는, 산소가 아닌 공기중의 마력을 받아들여 온몸으로 실어날랐다.

세포 하나하나가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인해 이질적인 각성의 순간을 맞이하고.

신체 능력의 전반이 강제로 끌어올려짐과 함께, 격의 상승이라 할 만한 감각이 느껴진다.

후···.

가볍게 내쉬는 날숨. 그 숨결에 이글거리는 열기.

심상 너머의 영역을 들여다보지 않았으나, 댈런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의 현상은 숙련도의 한계치에 다다른 용혈의 재생 인자와, 진작에 임계를 넘어선 체력 수치가 맞물려 벌어진 일임을.

동시에 그건 먼 미래의 갈림길 중 하나에서, 역행의 사도들이 모종의 경로로 입수한 용혈의 인자가.

계승자 옵션으로 뒤틀린 시간선과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환상세계의 성질을 통해, 인간의 몸속에서 진짜 용의 피로 되살아났음을 의미했다.

[크으··· 이건 불가능하다.]

냉기와 불꽃이 폭발한 여파를 정면에서 허용한 일이, 쇠약해진 육신에게는 생각보다 큰 타격이었던 것일까.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공중에서 휘청거리는 푸른 용을 댈런은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고 그 시야의 한 켠.

낯선 존재의 시선이 느껴진다.

[······.]

그건 또 하나의 용이었다.

검고 붉은 비늘로 화려하게 몸을 두른 채, 이쪽을 응시하는 거대한 용의 형체.

실체가 아니었다. 용의 그림자는 마치 환상처럼 언뜻 비쳤다 흩어졌다.

“······.”

그러나 댈런은 그 찰나의 시선으로부터, 더없이 복잡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지금의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불편함.

허나 어쩔 수 없는 결과이자 과정임을 알기에 선택한 외면.

[어찌 필멸의 존재 따위에, 지고한 용의 피가 깃들 수 있다는 말이냐! 이건 단순히 향취가 묻은 것과는 다르다! 이건···이건······!]

푸른 진룡의 노기가 담긴 전성이 귓가를 울렸다. 댈런은 검붉은 용의 환상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었다.

새로 주어진 힘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일.

허나 그보다 시급한 건, 이 힘을 사용해 눈앞의 강대한 적을 떨어뜨리는 것이었기에.

[진룡이라는 종을 더럽히는 네 존재, 나 테데라 리울라크가 친히 짓씹어서 소멸시켜주겠노라.]

“지랄하네.”

댈런은 발을 내디뎠다.

쿵.

존재감이 무형의 압력이 되어 주변의 공기를 밀어낸다.

발밑에 흩어진 결정 같은 모래알이, 그 압력의 열기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를 번뜩이며, 댈런은 고개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두 절벽을 사이에 둔 수백 미터 상공에, 상처 입고 쇠약해진 푸른 용의 진체가 보인다.

청린용, 테데라 리울라크.

꼬리치기 한 번으로 그의 초인적인 육신을 빈사 상태에 몰아넣었던 진룡.

조금 전까지 항거할 수 없는 벽을 느끼게 만들었던 불멸자는, 더이상 상대가 불가능한 초월적인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강대한 저주에 당해 원래의 역량을 반도 내지 못하는 용.

그마저도 기사단장 에드거에게 치명상을 입고, 아예 필멸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게 된 불멸자.

물론 댈런의 상황도 그리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

갓 깨어난 용의 피에 담긴 타오르는 신비가, 그의 불완전한 육신을 거칠게 뒤흔들고 있었으니까.

허나 상관없었다.

이 불완전한 조합으로도 승리를 점쳐볼 수 있을 만큼, 저 용은 충분히 쇠약해져 있었으니까.

[그 알량한 불로 내 숨결을 막아낼 수 있겠느냐! 감히 필멸자가 불멸의 존재를 흉내낸 죄, 화염째로 얼어붙게 만들어 징벌해 주겠다!]

어렵사리 하늘에서 균형을 잡아내며, 악에 받쳐 토해내는 전성.

허나 그렇게 엄포를 놓았음에도, 섣불리 숨결을 내뿜지는 못했다.

용의 숨결은 가장 기본적인 권능 중 하나이기에, 시간이 되감긴 청린의 몸은 그만큼 몸이 상해 있다는 뜻이겠지.

댈런은 픽 웃었다.

“너 말이 좀 많아졌다?”

[······!]

“늙고 약해진 개가 더 사납게 짖는다고 하지.”

[이······!]

분노에 물든 청린의 전성을 무시하고, 내디딘 발에 힘을 모아낸다.

쩌적.

발밑에서 갈라지는 대지.

쿠르르.

영역의 힘을 굳이 이끌어내지 않았음에도, 균열 사이에서 일렁이는 검붉은 불꽃.

전신을 휘도는 불꽃의 깊이를 느껴내며, 댈런은 가볍게 몸을 밀어올렸다.

투웅―

떠오르는 신형. 소음은 없다.

도약이라기보다는 비행에 가까운 궤적 끝에, 어느새 몸을 감싼 불길은 등 뒤에 자연스레 날개를 빚어내고.

콰르르르―

검신을 뒤덮고도 모자라 그 너머로 뻗어나가는 흑염이, 맹렬하게 타오르며 묵직한 기세를 내뿜는다.

양손으로 들어올린 성검을 뒤덮은 화염의 형상.

댈런의 몸보다도 거대해진 그 일렁임은, 마치 언뜻 검붉은 용의 발톱과도 같아 보였고.

[――――!]

이제는 그 시선이 광기로 타오를 지경인 청린 역시, 용언을 토해내며 발톱을 앞세워 급강하했다.

균열의 심부.

청린의 영역 골짜기.

수백 미터 상공에서, 두 용이 충돌했다.

***

우르르릉······.

하늘이 낮게 포효했다. 토미는 겁먹었지만, 멈추지 않고 달렸다.

눈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돌더미를 향해, 청년은 수인을 맺으며 주문을 읊었다.

“엘르. 마이아린.”

쿠르륵.

바위와 자갈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산더미처럼 쌓인 돌 틈 사이에, 사람 한 명 지나갈 수 있는 작은 통로가 만들어졌다.

토미는 엎드리다시피 자세를 낮춰 그 사이를 비집고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제발 무너지지 않기를.

자신이 지나갈 때까지만이라도 버텨주기를.

다행히 마력으로 벌어진 돌 틈은 그가 지나갈 때까지 붕괴하지 않았고, 토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어나 다시 달려갈 수 있었다.

꽈릉! 쿠르르릉!

쩌적― 쩌저적―

한편 머리 위 상공에서는 거대한 두 힘이 끝을 모르고 격돌하는 중이었다.

그 충돌의 파편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이따금씩 화염이나 냉기의 덩어리 같은 형태로 토미의 근처에 떨어지기도 했다.

꽈과과광―!

집채만 한 돌덩이를 단숨에 얼리고 태워 가루로 만드는 힘의 잔재.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인 그 폭격 속에서, 청년이 두려워하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꽈악.

그럼에도 달린다.

투명 망토를 움켜쥔 손이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됐음에도, 청년 마법사는 내달리는 발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고막을 때리는 거대한 폭음.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는 지면과 절벽.

지나온 길 위로 몇 번이나 떨어지는 집채만 한 돌덩이들.

쉴새 없이 주문을 외워대며, 한 손으로 수인을 맺어내는 청년은 그 모든 것을 무시했다.

‘정 두려우면 언제든 뒤집어쓰고 도망치면 된다.’

바로 어젯밤, 댈런이 그에게 해준 말이 머릿속을 스친다.

‘네 죽을 자리는 네가 선택하라는 거야.’

“···선택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내뱉은 중얼거림.

그 말이 맞았다. 청년은 선택했다.

전사가 건네준 투명 망토를 뒤집어쓰기로.

그리고 설령 이곳이 죽을 자리가 되더라도 도망치지 않기로.

언젠가 맞이할 삶의 마지막이라면, 그 마지막 숨은 누군가를 살리는 데 걸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청년은 오직 한 사람만을 생각하며, 지옥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스승님.’

엘가이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 펠버 발렌티노.

천애고아였던 자신을 거두고, 마탑에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게 해 준 은사.

젊은 피의 호기심과 어리석음으로 몇 번이나 실수를 거듭했지만, 스승은 그때마다 어김없이 자신을 구해주었다.

성년을 훌쩍 넘긴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때로는 원로 마법사라는 정치적 입장마저 도외시하면서, 자신을 도와주던 스승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더불어 그 비호 아래에 온실 속 화초처럼 머물던, 그동안의 자신이 얼마나 답 없는 철부지였는지도.

‘···이대로 돌아가셔서는 안 됩니다.’

닿지 못한 말을 되뇌인다. 토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눈물과 콧물의 짭짤함과, 비릿한 혈향이 섞인 목넘김이었다.

이제야 한 사람 몫을 하는 마법사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아직 그 은혜를 조금도 값지 못했는데, 이대로 떠나버리시면 어찌한단 말인가.

상공에서 두 초월적인 존재가 맞붙는 가운데, 토미가 도망치지 않고 스승이 있던 자리를 향해 달려가는 건 그런 이유였다.

그 절절한 의지를 신이 듣기라도 한 것일까.

“···큿!”

어디선가 튄 돌멩이가 이마를 스치고, 눈앞을 가린 핏물을 닦아낸 토미의 시야에.

우우우웅···.

뿌옇게 일어난 먼지와 이리저리 뒤집힌 지면 한가운데, 은은하게 빛나는 황금빛 반구가 보였다.

“스승님!”

토미가 외쳤다. 젖 먹던 힘을 쥐어짜 달렸다.

가까이 갈수록 거세지는 잔해의 폭격이 목숨을 노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어느 거리 안쪽으로 다가오자, 황금 반구는 마치 살아있는 듯 출렁거리더니 그 범위를 넓혀냈다.

토미의 몸을 감싸 보호하며,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돌덩이 몇 개를 받아내는 금빛 마력.

반구의 안쪽에 들어온 토미는, 마침내 커다란 바위에 등을 기댄 펠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끌끌. 괜찮다마다. 너야말로 몰골이 그게 뭐냐?”

스승이 눈꼬리를 길게 늘이며 웃었다. 희뿌예진 동공. 초점 없는 눈동자.

극에 다다른 마력 감응력으로 제자의 존재를 또렷하게 인식할 수 있었으나, 반면 한계 이상으로 몰아붙인 노쇠한 몸은 천천히 식어가는 중이었다.

“크으······.”

“쯧쯧. 포션 사용에 주의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거늘. 그렇게 사용했다가는 언제 팔다리 불구가 될지 모른다 하지 않았느냐?”

더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 제자를 앞에 두고, 스승은 힘겨운 손길로 그 머리를 토닥이며 습관처럼 핀잔을 주었다.

토미는 그 핀잔마저도 달가웠다. 스승의 걱정 어린 한 마디에 욱신거리던 통증도 녹는 듯했다.

“이리 와보거라.”

펠버는 제자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잘게 떨리는 손길이 제자의 다친 환부를 더듬거린다.

“으음. 심각하구나.”

“···어쩔 수 없었습니다.”

토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석 심문관을 단숨에 죽인 용의 일격은, 댈런이 나서서 막아섰음에도 새어나온 힘의 여파마저 강렬했다.

성기사들과 함께 수백 미터 거리를 튕겨나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의식을 유지한 것 자체가 기적.

청년은 끊어진 손가락을 주워 모으고, 으깨진 다리를 어거지로 끼워 맞춰 재생 포션을 들이부어가며 몸을 수복했다.

당연히 제대로 된 처치는 아니었다.

재생 포션은 상당한 고통을 수반할 뿐 아니라, 말 그대로 재생만 해주는 것이기에 외과적인 처치를 동반해줘야 하는 치료수단.

지금처럼 막 갖다대고 붙였다가는, 관절이 잘못 접합되거나 신경이 눌리는 등 온갖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었다.

펠버는 혀를 차며 제자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주문을 속삭였다.

“가만 있거라. 엘르― 메멘토 카시볼그.”

떨리는 손끝. 황금빛 파동이 역전되어 청년의 몸에 스며든다.

억지로 끼워 맞췄던 근육과 뼈들이, 순식간에 으스러지더니 다시 원래의 정상적인 형태로 되돌아갔다.

“쿨럭! 이제 좀 낫구나.”

“스승님! 제가 아니라 스승님의 시간을 되돌리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째서···.”

“이놈아.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고 스스로의 시간선을 다스릴 줄 안다면, 그게 신이지 인간이겠느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울먹이는 제자에게, 펠버는 또 한 번 핀잔을 주며 끌끌 웃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안전한 곳으로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서라, 안 간다. 내 종착지는 이곳이다. 다행히 댈런에게 인사 정도는 하고 떠날 수 있을 것 같구나.”

펠버는 고개를 탁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실시간으로 죽어가는 육신과 다르게, 영역의 힘은 아직까지도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전개되어 있었다.

덕분에 초첨 잃은 눈으로 보지 않고도, 펠버는 하늘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전황을 생생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푸름과 붉음의 싸움.

냉기와 화염의 사투.

한쪽은 날 때부터 불멸의 존재이되, 저주와 부상으로 필멸의 굴레를 짊어지게 된 초월자였고.

다른 한 쪽은 오롯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끝없는 생의 반복으로 종의 한계를 몇 번이고 뛰어넘어 불멸의 끝자락을 쥐게 된 존재.

불완전한 필멸의 육신으로 신비를 받아들였으니, 분명 뒤탈이 없지는 않겠다마는.

적어도 지금만큼은 영락한 불멸자를 상대로, 댈런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선전(善戰)을 이뤄내고 있었다.

쿠구구궁······.

하늘이 검붉은 기운으로 번쩍였다. 거대한 푸른 덩어리가 계곡 저편으로 낙하했다.

그 뒤를 쫓아 지면으로 내리꽂히는 검붉은 전사의 신형.

싸움이 끝나간다는 걸 느낀 펠버는, 제자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좀 더 가까이 오너라, 토미. 네게 내 마지막 깨달음을 전수하겠다.”

가까이 다가온 청년의 이마에 얹어진, 주름 자글자글한 노인의 손.

“대지의 심상으로 시간선에 손을 대는 나의 영역을, 네가 후대에 계승하도록 하여라.”

그 손등 위에서, 새로운 마법체계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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