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룡(4)
쿠르르르······.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거대한 용의 진체가 추락한 자리였다.
연막처럼 피어오른 먼지구름 앞. 댈런은 입에 고인 피를 뱉었다.
치이이이―
붉은 핏물에 공기가 이지러진다. 마치 뜨겁게 달군 쇳물을 땅에 흘렸을 때와 비슷했다.
‘이건 뭐 사람 몸뚱이가 아니군.’
진작에 평범한 인간의 육신은 벗어던졌으나, 이제는 사람이라는 범주에 속한다기도 뭣한 상황.
기묘한 감상에 이글거리는 핏자국을 바라보는 사이, 흙먼지 연막을 가르고 무언가가 빠르게 쏘아졌다.
스가가가각!
수십 개의 푸른 결정이었다. 궤적을 따라 차디찬 냉기를 꼬리처럼 달고 날아오는 새파란 결정들.
댈런은 별 동요 없이 검을 들었다. 검붉은 화염이 휘감긴 검로가, 예정된 사선을 몇 번이고 가로지른다.
쩌저저저정―!
냉기와 열기가 만나며 폭발하고, 밀려난 공기가 연막을 확 몰아낸 순간.
화르륵!
온몸에 불꽃을 둘러쓴 댈런의 신형이, 폭발의 여파를 뚫고 용에게 부딪혔다.
꽈아아앙!
가벼운 검격. 무거운 화염.
너덜너덜해진 용의 진체가 또 한번 두들겨지고, 신비와 신비의 충돌에 비늘과 근육이 찢겨나간다.
두 쌍의 날개로 최대한 공세를 막아내며, 청린은 순간적으로 동공을 좁혔다.
[――――!]
피칠갑된 주둥이에서 용언이 흘러나오고, 그녀의 눈에 푸른 잿빛이 점멸했다.
시선만으로 쏘아내는 건, 진룡의 피에 새겨진 수많은 권능들 중 하나.
스아아아아―
공기가 얼어붙는다. 급격한 냉동은 어떤 증기의 폭발로 화해 허공에 하얀 궤적을 남겼다.
그건 마력으로 빚어진 냉기의 개념이 아니었다.
‘저주.’
초월자의 심상과 이질적인 의념으로, 한랭지옥의 일부를 끌어오는 권능.
시선에 닿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저주 앞에서, 댈런은 망설이지 않았다.
꽈아아앙―!
발밑에서 흑염이 터져나온다. 저주를 뒤집어쓴 육신이 소리의 벽을 넘어섰다.
순식간에 용의 거체를 스쳐 지나가며, 검붉은 화염을 물감 삼아 성검이 그려낸 거대한 호선.
쿠궁. 쿵!
그 호선의 경계에 걸쳐졌던 용의 두 날개가 동시에 땅에 떨어지고, 날개 잃은 용이 한 발 늦게 거센 비명을 토해낸다.
[끄아아아아! 어떻게 저주를 무시하지! 어떻게 지옥의 냉기에도 아무렇지 않은 거냐!]
놈의 눈이 푸르게 번쩍였다. 다시금 쏟아지는 시선의 저주가 공기를 동결시켰다.
목숨을 도외시한 마력의 운용으로, 주둥이에 모아낸 숨결이 저주와 함께 쏟아진다.
콰아아아아―!
댈런은 단순하게 대처했다.
화염의 검을 내리쳐 숨결을 갈라내고, 전신을 강타하는 저주는 무시한다.
[으읍. 끄윽. 꺼어어억···.]
지옥의 저주를 두 번이나 포식한 악마가, 아공간에서 부른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런 트림을 내뱉었다.
다치고 노쇠한 용은 그제야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떻게 네가 나무를···!]
[끄르륵. 너 나 아냐?]
[···알다마다. 에낙사구스의 솥구덩이에서 영락했다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네놈이 건 저주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거늘, 어찌 그 날을 잊을 수 있으···!]
노성을 터뜨리던 용은 순간 흠칫하며 물러났다.
본능에 가까운 동작. 뒤늦게 목덜미에 뜨끔한 감각이 올라왔다.
[커헉! 크······.]
“새끼가 어디 한눈을 파냐.”
댈런이 씩 웃었다. 성검의 날을 따라 극도의 한기가 서린 청백색 혈액이 흘러내린다.
용은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그래 봐야 네 발 달린 도마뱀 수준이었다.
망가진 심장은 공간 전이는커녕, 숨결 한 번에도 욱신거리는 상태였고.
두 쌍의 날개가 각각 한 쪽씩 잘려나가고 없었기에, 날아서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니까.
[네놈, 후회할 것이다! 필멸의 육신으로 불멸하는 용의 피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일그러진 얼굴로 청린이 소리쳤다. 댈런은 한쪽 눈썹을 슬쩍 들었다. 그는 검끝을 슬쩍 내리며 물었다.
“그건 내 사정이지. 살려주면 도와주기라도 할 건가?”
[···용의 몸은 용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다.]
“푸흐흐.”
목숨을 구걸하는 용이라. 이거 웃긴데. 댈런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멸의 삶을 경험하더니, 너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인간이 됐군.”
[그게 무슨···!]
“됐다. 해결책은 다른 놈한테 물어보면 돼.”
화륵.
타오르던 불길이 응집된다. 성검 위에 한 겹 덧씌워지는 검붉은 검신.
그 의도를 눈치챈 청린이 황급히 숨결을 그러모았지만, 댈런의 신형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꽈광―!
높이 치솟는 도약의 불길.
그 애꿎은 불길을 뒤덮는 용의 숨결.
이미 사라진 자리에 숨결을 뿜어내던 청린의 시선이, 어느새 머리의 옆쪽으로 돌아온 전사를 가까스로 발견하고.
[――!]
필사의 의지로 용언을 쥐어짜려 하는 순간, 검붉은 검이 세로로 떨어졌다.
까━━━
파육음이 아니었다.
너덜거리는 푸른 비늘과 검붉은 검날이 부딪친 결과는 거대한 폭발.
범선을 대어둔 골짜기의 입구에서도 보일 법한 섬광의 번뜩임 이후, 어마어마한 규모의 폭풍이 일대를 휩쓸고 지나가고.
쿵.
푸른 용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
댈런은 청린의 심장을 꺼내 아공간에 보관했다.
심장만이 신비의 결정체인 아룡과 달리, 진룡의 육신은 몸 전체가 신비의 산물.
다만 아무리 욕심을 낸다 해도, 아르보르의 그리 넓지 않은 아공간에 백 미터에 달하는 몸뚱이를 넣을 공간은 없었다.
거기다 그 거대한 시체를 가공하고 처리하는 것 역시, 개인인 그의 입장에서는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고.
‘단장에게 넘기고 빚을 한 번 지우면 되겠지.’
제대로 써먹지도 못할 거대한 도마뱀 사체보다는, 성기사단의 단장 같은 존재에게 빚을 지우는 게 훨씬 남는 장사였다.
그리고 용의 신비가 모여들고 순환하는 핵심 기관이 심장이기에, 어찌됐건 알짜배기는 확실하게 챙긴 셈.
[우왁! 이게 뭐야!]
제 안방에 떨어진 커다란 심장에 악마가 깜짝 놀라 소리친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검에서 피를 털어냈다.
사실 필멸자가 진룡의 심장을 제대로 사용할 방법은, 그의 머릿속에도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굳이 심장을 챙긴 건, 청린이 언급한 그 자신의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
초월적인 존재의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걸쳤으나, 말 그대로 발끝일 뿐이기에 만들어진 불안정함은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으으으. 추워라. 서리고원 너머도 이렇게 춥진 않을 텐데······.]
청린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냉기로 인한 악마의 투덜거림을 못 들은 척하며, 댈런은 처음 청린과 맞붙었던 장소로 돌아갔다.
얼마 가지 않아 두 사람이 보였다.
탁한 회갈색 수염의 늙은 마법사와, 그 곁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는 청년이었다.
터벅터벅 걸어간 댈런은 소년과 노인의 곁에서 멈춰섰다. 노인은 가만히 눈을 감고 바위에 기대어 있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육체와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
그건 마치 방금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댈런은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쭈그려 앉았다. 성검은 대충 땅바닥에 꽂아놓고, 주워온 도끼도 그 곁에 내려두었다.
그가 말했다.
“죽었소?”
“···아직이네, 쯧. 버르장머리하곤.”
“죽을 때가 다 되긴 했나보군. 입이 거칠어졌어.”
노인이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제자의 금발에 툭 올려놓았다.
“내 영역의 능력은 이 아이에게 전해주었다네. 전승자가 한 명뿐이니 마탑이라 하긴 뭣하지만, 그래도 내가 한 주문의 시조가 될 수 있다니 감격스럽군.”
“······.”
“이 전사를 잘 보필하거라, 토미. 대륙을 구하기 위해 영겁의 시간을 노력해오신 분이다.”
소년은 말이 없었다. 끄덕이는 고갯짓은 속눈썹에 맺혔던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댈런은 그걸 보며 눈썹 가장자리를 긁적였다. 나지막이 웃은 펠버가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 인사를 해야겠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말해주겠네.”
“뭐요?”
“용굴에서 어린 것이 자네를 따르게 될 걸세. 언젠가는 자네의 숙적이었을 테고, 그 원한을 잊으라 요구할 수는 없겠지. 그래도 부탁하겠네. 어린 것을 거두어주게나.”
눈썹 긁적이던 손이 멈칫했다. 펠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힘든 일이라는 걸 아네. 허나 내 마지막 부탁이니 들어주게나. 그 아이는 자네가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걸세.”
후우.
노인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몸. 숨결의 온도가 미지근했다.
조금씩 헐떡이는 숨소리는, 한 인생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말해주었다.
펠버는 짧게 숨을 끊어 쉬며 남은 말을 이어갔다.
“흐흐. 사실···물어보고 싶은 게 많긴 하네. 어찌 그 영겁의 시간을 버텨냈는지,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서 부러지지 않을 수 있는지······. 내 인생의 말미에 자네를 알게 되어 영광이었네. 별들 사이에서···자네의 활약을 지켜보도록 하겠네, 댈런.”
노인이 눈을 감았다. 그의 마력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은은하게 감돌던 황금빛이 자취를 감추고, 노인의 숨마저 끝내 흐릿해져간다.
그 앞에서,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소.”
“···예?”
의식이 사라진 본인 대신에, 눈물 자국 가득한 얼굴로 의문을 표하는 제자.
댈런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세로로 찢어진 눈이 하늘을 응시한다. 초월적인 시선은 좀 더 많은 걸 볼 수 있었다.
내리쬐는 햇빛. 그 햇살 너머에 빛나는 별들. 두 줄기 은하수.
이 땅의 별들이 머나먼 고향의 가스 덩어리와 동일하지 않다는 건 진작에 알았다.
단순히 중력과 기타 등등 뭔지 모를 물리 법칙들에 끌려다니는 무생물이 아닌, 신들의 시선이 묻어나는 어떤 이질적인 규칙의 결정체들.
허나 그 별들을 바라보는 용의 눈은, 언제나 그랬듯 이 우주 어딘가에 있기를 소망하는 고향의 푸른 별을 회상하고 있었다.
그건 회상이자 회한이었고, 그리움이자 지겨움이었다.
나 하나의 안락함을 위해 많은 걸 희생한 나날들. 그게 당연시되고 때로 권장되던 사회. 서로를 돌보지 않는 사람들. 자신의 이익이 곧 정의라 외치는 집단들.
수십억의 하나로 태어났을 뿐인 그가, 그 수많은 목소리들에 무릎 꿇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는 타인보다 스스로를 선택했다. 희생이 요구되는 관계보다 안락한 외로움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었다 생각했다.
이 대륙에서 눈을 뜨기 전까지는.
‘···나를 희생할 수 있는 관계라.’
한때는 외로움이라 생각했다.
낯선 타지에 떨어진 이방인의 고독에서 비롯된 감정일 뿐이라고.
어쩌면 생전 얻어본 적 없는 힘을 손에 쥐고서, 스스로가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인간이라는 걸 잠시 망각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
그러나 자신을 위해 삶의 마지막을 불태운 노인 앞에서, 댈런은 오랜 고민의 답을 마침내 조금쯤 알 것 같았다.
알게 된 지 고작 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사실상의 타인.
허나 배불뚝이 아저씨의 삼십 년 인생 속에서 찾을 수 없는 자기희생의 관계.
0과 1로 이루어진 게임 속 세상에서, 종말을 막아내지 못한 건 어쩌면 현질의 결여 때문만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에게는 화면 속 세상을 지켜야만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
그렇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나 자신일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일까.
피식.
댈런은 헛웃음을 지었다. 쓸데없이 길어지는 문답이었다.
그는 고개를 내려 노인을 바라봤다. 생기를 잃어가는 몸. 굳게 닫힌 눈꺼풀.
이미 보거나 듣지 못하게 되었을 터인 노인의 앞에서, 댈런은 마지막 남은 기감에라도 들리도록 마력을 담아 또박또박 말했다.
“그쪽이 먼저 부탁했으니 나도 하나 부탁하겠소, 노인장. 앞으로 조금만 더 고생해주시오.”
화륵.
손바닥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검붉은 화염. 그 중심에는 어떤 녹진한 덩어리가 들어있었다.
온전한 용혈을 스킬로 얻게 된 이후, 용의 피에 담긴 수많은 힘들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처음 얻은 A급 스킬이기에, 지금의 지능 수치로도 다 해석해낼 수 없는 부분들이 다수였지만.
어렵사리 깨닫게 된 몇몇 권능들 속에서, 댈런은 권속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용이 스스로의 힘을 떼어, 자신을 따르는 존재에게 하사해주는 것.’
모니터 너머에서 수십 수백 번을 싸웠을 뿐 아니라, 바로 얼마 전에도 칼을 맞댔던 청린의 권속들.
그들에게 새겨진 인장은 단순히 그들의 소속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진룡이 자신의 힘과 불멸성의 일부를 떼어주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초월자의 힘을 덧입는 만큼, 원래부터도 수준 이상의 경지에 올라야만 받을 수 있는 권속의 인장.
펠버는 그럴 능력이 충분하고도 넘쳤다. 대영역을 이뤄낸 대마법사가 안 된다면 누가 되겠는가.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였다.
바로 본인의 의지.
의식이 꺼져가고, 무의식의 깊은 본심만이 오롯이 남은 상태.
삶의 끝자락에 선 원로 마법사의 속마음은, 과연 누군가에게 속한 삶이라도 달갑게 받아들일 것인가.
개인적인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찬반의 의사뿐.
심상 깊은 곳에서 지금껏 쌓아온 힘의 일부가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댈런은 그 힘이 응축된 손을 노인의 머리 위에 얹었다.
후르르르······.
기다렸다는 듯이 노인에게 스며드는 불꽃.
그리고 한동안 이어지는 초조한 정적.
눈물 자국 가득한 제자의 시선이, 스승의 죽은 듯한 얼굴을 얼마나 바라보고 있었을까.
화륵!
느닷없이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한 노인의 이마 위에, 검붉게 타오르는 표식이 또렷하게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