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진 재앙(1)
“크흑···차석 심문관님······.”
청린의 영역 입구. 정박한 범선 근처에 임시로 마련해둔 마련한 야영지.
모닥불의 빛이 희미하게 닿는 야영지 외곽에서, 심문관 피드나는 잘려나간 차석 심문관의 머리를 앞에 둔 채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상태도 그리 좋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왼팔은 팔꿈치 아래가 사라져 너덜너덜했고, 얼굴 반쪽은 동상으로 얼어붙은 상태였으니.
그나마 치유 기도와 재생 포션으로 수많은 찰과상과 타박상을 치료했기에 이 정도였다.
첫 격돌의 여파로 의식을 잃은 그녀는, 이어진 전투로 무너진 계곡의 잔해들에 깔려 상당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후우.”
저 멀리 흐느끼는 심문관을 바라보던 마우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괜히 모닥불을 쿡쿡 헤집으며 입을 열었다.
“···원로 마법사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죽지는 않을 거요. 의식을 언제 차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군요. 그럼 그 제자는···?”
“노인장을 간호하다가 쓰러져 잠든 것뿐이오.”
“···다행입니다.”
마우그가 중얼거렸다. 그는 야영지 외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댈런과 두 마법사를 포함해, 에스트라 요새에서 출발한 건 총 여덟 명이었다.
그리고 그중 살아남은 건 다섯뿐.
용의 첫 일격에 죽은 차석 심문관을 포함해, 이후 이어진 전투의 여파로 두 명이 더 사망했다.
“무릇 성기사라면 언제든 죽음을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죽음이든, 아끼는 동료의 죽음이든 간에 말이죠.”
야영지 외곽에 하얀 천으로 덮어둔 시신들을 바라보며, 고위 성기사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허무하게 스러진 전우의 빈자리는, 나이가 들수록 이상할 정도로 아려지곤 합니다.”
댈런은 가만히 소시지를 질겅거렸다. 때론 침묵이 가장 좋은 공감 수단이었다.
그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균열의 밤은 빨리 찾아왔다.
싸움이 끝난 지 몇 시간 안 된 것 같은데,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는 벌써부터 제 자취에 반짝이는 섬광들을 흩뿌려놓고 있었다.
“먼저 주무십시오. 제가 심문관 피드나를 지켜보며 깨어있겠습니다.”
마우그가 말했다. 댈런은 고개를 저었다.
“잠이 오지 않는군. 편할 때 주무시오.”
“···진룡과 싸우시고도 괜찮으신 겁니까?”
“피가 끓어오르는 모양이지.”
댈런은 낮게 웃으며 모닥불 곁에 소시지를 몇 개 더 꽂아두었다. 이거 다 먹기 전까지는 잘 일 없다는 뜻이었다.
마우그는 끝까지 함께 깨어있으려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고 말았다.
고위 성기사인 그에게도 지난 열흘은 상당히 가혹한 여정이었다.
울다가 끝내 실신한 피드나를 모닥불 근처에 잘 눕혀둔 뒤, 댈런은 딱딱한 빵을 얇게 잘라 저민 햄과 같이 우물거렸다.
그가 문득 말했다.
“야.”
[···넵, 주인님?]
“너 진짜 옛날 기억 안 나냐?”
불사의 악마, 아르보르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제 또렷한 첫 기억은 에낙사구스의 솥구덩이 안에서 시작합니다. 요즘 들어 그 이전의 삶이 있다는 것은 조금씩 자각하고 있지만···구멍이 숭숭 뚫린 치즈처럼 엉성한 장면들의 조합일 뿐입니다.]
“기억나는 장면들이 뭔데.”
[밝은 빛의 옥토. 묘목을 심은 누군가. 뻗어나온 줄기와 가지. 그리고···여행입니다.]
“여행?”
[많은 곳을 여행했습니다. 하지만 전부 흐릿한 장면들입니다.]
슬픔이 조금 묻어나는 어조였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공간 주머니나 휴대용 버너 정도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댈런은 아르보르의 숨겨진 과거에 대해 언제나 의식하고 있었다.
기사단장부터가 그 존재를 알고 있었고, 모래바람 왕조나 청린과는 아예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던 모양이니까.
어쩌면 저주를 먹어치우는 그 능력 역시, 악마의 과거와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다만 당장 알아보기에는 다소 막막한 일이고, 그보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들도 산처럼 쌓여있었기에 잠시 미뤄둘 뿐이었다.
‘우선 이 몸뚱이에 대해서부터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판이니까.’
댈런은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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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댈런
레벨 : 19
[근력 : 34] [기량 : 28] [체력 : 31]
[감각 : 24] [지능 : 26] [마력 : 26]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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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린과의 전투를 거치며 상태창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벌써 레벨 20이 코앞. 레벨업으로 얻은 능력치는 체력과 마력에 분배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스킬 목록의 마지막에 위치한 ‘검붉은 용의 피’였다.
숙련도 최대치를 찍은 용혈의 재생 인자와, 그보다 한참 전에 30에 도달한 체력 능력치가 함께 빚어진 결과물.
댈런의 영역은 두 가지 가능성의 발아를 한 줄기로 꼬아내어, 초월적인 존재의 특성 자체를 스킬의 형태로 발현시켰다.
마치 영역을 처음 이뤄냈던 순간처럼, 각성과 동시에 모든 능력치를 두 개씩 끌어올린 건 덤이었다.
‘펠버를 권속으로 삼으며 근력과 체력이 다시 감소하긴 했지. 스킬도 둘이나 사라졌고.’
물론 그만 한 대마법사를 살려낼 뿐 아니라 영구적인 아군으로 삼을 수 있다면, 충분히 감수하고도 남는 희생이었다.
‘그나저나 A급 스킬···확실히 강력하긴 하군.’
혈관을 따라 흐르는 용의 피에 감각을 집중하며, 댈런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사실 용의 피를 얻기 전, 그의 몸은 시시각각 무너지는 중이었다.
방대한 영역의 힘을 필멸자의 육체가 감당하지 못해, 힘을 사용할 때마다 조금씩 축나는 현상.
그의 신체 능력이 범인의 수준은 이미 아득히 초월했음에도 불구하고, 필멸자의 육신이라는 한계가 생각보다 큰 제약이었던 탓이다.
‘용의 피를 얻게 된 이후로, 그 압박은 거의 씻은 듯이 사라졌어.’
호흡을 가다듬으며, 댈런은 스스로의 내면을 더 깊이 관조했다.
쿵. 쿵. 쿵. 쿵.
그리 크지 않게 맥동하는 심장.
그 울림에 따라 온몸을 휘도는 무거운 열기.
용혈을 얻은 이후, 댈런의 육신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건 단순히 능력치 증가의 개념이 아니었다.
재생 인자로 말미암은 회복력은 더이상 예전처럼 막대한 체력을 요구하지 않았고.
필멸자의 육신으로는 감당해낼 수 없던 영역의 힘을, 혈관에 흐르는 신비의 그릇은 너끈히 담아내고도 남았다.
먼 미래에 더 큰 힘을 여럿 얻게 된다면 몰라도, 당장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어쩌면 지금보다 스킬이 두 배쯤 증가하더라도 문제가 없을지도.
허나 큰 힘은 큰 대가를 요구한다던가.
진룡의 피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쉽게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
화륵.
손아귀에서 피어오르는 검붉은 불길.
입으로 가져가던 소시지가 한 줌 잿더미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
댈런은 물주머니를 열어 손에 묻은 재를 씻어냈다.
이런 의도하지 않았던 발화 현상이 한나절 사이에만 벌써 열 번이 넘어갔다.
시시때때로 눈의 형태가 변하고, 숨결이 열기로 달아오르는 건 양반이었다.
제멋대로 화염이 터져 나와 용의 날개나 발톱의 형상을 취하려고 하는 통에, 방금처럼 입고 있는 옷이나 불길에 닿은 물건이 잿더미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두세 번 있었다.
균열 심부의 외딴 골짜기에 있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여기가 사람이 바글바글한 팔시온의 청동 거리였다면 대참사가 몇 번은 났을 테였다.
‘모르긴 몰라도 침묵중대장이랑 진지한 면담의 시간 정도는 가졌겠지.’
올곧으나 참 고지식하던 전사, 가웨인을 떠올리며 댈런은 피식 웃었다.
어쨌건 한나절 동안 스스로를 관조하며, 댈런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직면한 이 문제는, 단순히 외형이 좀 변하고 끝날 종류가 아니라는 걸.
‘···스킬이 제 의지를 가진 건 처음이군.’
의지를 가진 힘.
그게 문제의 핵심이었다.
지금까지 댈런이 얻은 스킬들은 일종의 도구 같은 개념이었다.
다루는 난이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스스로의 의지가 없이 주인의 손에 맡겨진 도구.
그러나 검붉은 용의 피는 그 자체로 초월자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아마도 이 피의 주인이었을, 댈런 자신도 설정상으로만 알고 있는 검붉은 용의 의지.
‘용신의 적창, 이름이 지워진 용.’
종말의 최후반부까지도 등장하지 않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용들에게 붙은 이명을 생각했을 때, 용신과 직접 관계가 있는 진룡이라면 청린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강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것도 어떤 부상이나 저주도 입지 않은, 전성기 시절의 청린 기준으로.
“쯧.”
댈런은 짧게 혀를 찼다. 그는 마지막 남은 소시지를 입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사람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 존재에게 말을 건다는 건, 생각보다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해야만 하는 일.
당장에 고민해서 어찌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댈런은 한쪽에 쌓아둔 짐더미에서 빵과 소시지를 몇 개 더 꺼냈다.
불에 달궈진 보존식량들이 천천히 온기를 머금어갔다.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고, 밤은 딱 적당하게 길었다.
***
다음날.
새벽부터 에스트라 강은 기사단의 증원 병력을 실어나르는 범선들로 가득 찼다.
일행은 물론 댈런도 살짝 놀란 부분이었다.
대규모 야영지가 준비되는 사이, 댈런은 증원 병력과 함께 온 익숙한 얼굴을 통해 자세한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방어선이 공격받는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본단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습니다.”
먼 미래에 악마 살해자라 불릴 영웅, 성기사단의 정식 기사이자 심문관인 루시아였다.
거의 보름 만에 본 금발의 성기사는, 분위기가 살짝 달라져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느껴지는 기세부터 다를 정도로 급속도로 성장한 모습.
아마 미궁도시에서부터 이어져온 여정에서 얻은 깨달음을, 이번에 갈무리해 정리하며 한 단계 높은 성취를 이뤄낸 모양이었다.
“부단장이 일으킨 반란의 여파는 쉽게 가라앉을 성격의 일이 아니었죠. 안 그래도 어수선한 상황인데, 첫 번째 방어선인 에스트라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전언은 끓는 기름에 물을 부은 격이었습니다.”
“그렇겠지. 그럼 어떻게 수백 명의 증원군이 올 수 있었던 거요?”
“단장님 덕분입니다.”
혼란에 혼란이 중첩되는 본단의 상황 속.
단장 에드거는 기지를 발휘했다.
그는 적절한 증거와 증인을 확보해, 부단장의 반란과 청린의 침공을 교묘하게 한데 묶어버렸다.
지금까지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이, 기사단을 혼란시켜 무너뜨리려 하는 악한 용의 계략이라 선언한 것이다.
“아주 틀린 말이 아니긴 합니다. 실제로 청린과 에버로크가 모종의 밀약을 맺기도 했었으니까요.”
“······.”
물론 순서가 좀 이상하긴 했다.
에버로크가 난데없는 북부 출신 전사에게 패배하고, 그 결과로 성검과 균열 방벽의 열쇠를 자신에게 가져다줄 거라고는 청린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어쨌건 내분과 외침이라는 연이은 악재 속에서, 에드거는 향할 곳 잃은 시선들을 외부의 적에게 자연스럽게 돌리는 데 성공했다.
정적들에게 기사단의 노괴라 불리는 그가, 성기사단의 수장으로서 백 년이 넘도록 자리를 지켜온 건 다 이유가 있는 법.
그렇게 에스트라 요새의 함락 사실을 전해들은 본단은, 그 즉시 대규모의 병력을 균열 안으로 밀어넣었다.
에드거는 그 병력을 직접 이끈 에드거는, 우선 병력의 칠 할 정도로 요새의 복구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는 한편 그는 댈런과 일행을 찾기 위해, 나머지 삼 할에 달하는 병력에게 에스트라 강을 건너라 명령했다.
‘아마 예지안의 능력이 개입했겠지.’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전략에 통달했다고 해도, 청린이 죽은 사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천에 가까운 병력을 무작정 용의 영역으로 밀어넣지 않았을 터.
어찌 됐건 한바탕 사투를 겪고 난 일행에겐 다행이었다.
청린의 영역 입구에 설치된 기사단의 임시 진영에서, 생존자들은 단순한 야전 응급처치 이상의 충분한 치료와 휴식을 보장받을 수 있을 테니까.
‘슬슬 가야겠군.’
끼익.
댈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잘거리던 루시아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녀가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용굴.”
댈런은 무장을 점검했다.
왼허리춤의 성검. 반대쪽의 도끼와 주문살해자.
넝마가 된 갑옷은 증원 병력에게서 하나 보급받았고, 아공간에는 루시아의 특제 용꼬리 육포를 새로 넉넉하게 쟁여두었다.
“벌써 말입니까? 아직 몸도 다 회복되지 않으셨잖습니까.”
“대충 살 만하오. 그만큼 급한 일이기도 하고.”
루시아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말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마 같이 가자는 것이겠지.
“금방 돌아올 거요. 여기 계시오. 노인장을 부탁하겠소.”
“······알겠습니다.”
살짝 풀 죽은 목소리. 댈런은 낮게 웃고는 막사를 나섰다.
비록 게임 속에서처럼 자연사는 아니었지만, 청린은 결국 제 운명을 바꾸지 못하고 죽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의 미래는 댈런이 알던 흐름과 다시금 엇비슷하게 이어질 테였다.
그리고 댈런이 아는 미래는 모두가 종말의 분기점들.
대륙의 운명이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걸 막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부탁하겠네. 어린 것을 거두어주게나.’
말 위에 올라탄 그의 뇌리에, 문득 펠버의 유언이 스쳐지나갔다.
기적적으로 되살아나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원로 마법사가, 시간선 너머를 내다봄으로 남긴 예언.
‘힘든 일이라는 걸 아네. 허나 내 마지막 부탁이니 들어주게나.’
“···쯧.”
댈런은 짧게 혀를 찼다.
펠버의 대영역은 그의 삶을 어디까지 들여다본 것일까.
마치 그가 겪어온 플레이들을 엿보기라도 한 것 같은 유언이, 은근하게라도 신경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고개를 슬슬 털어낸 댈런은 말을 출발시켰다.
예언가의 말재간에 놀아날 생각은 없다.
허나 그를 위해 목숨을 던진 이의 유언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어느 쪽이든 결정하기 위해서는, 용굴에 가서 그 예언의 주인공과 대면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대륙 남서부를 지옥으로 만드는 거대한 재앙.
‘왕국을 얼린 숨결’이라는 이명이 붙게 되는 사상 최악의 진룡 중 하나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