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92화 (92/288)

길들여진 재앙(2)

골짜기는 시끌시끌했다.

바로 며칠 전까지 진룡의 영역이었던 곳답지 않게, 미로 같이 얽힌 골짜기들 사이에는 인간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길을 닦을 거다!”

“큰 바위는 나중에 쓸 수 있도록 적당히 조각내고, 자잘한 돌덩이는 바로 수레로 실어날라라!”

“절벽에 난 틈이나 동굴을 조심해! 혹시나 마물들이 숨어있을 수 있다!”

목소리의 주인은 성전사들이었다.

두 손에는 끌과 정을, 허리띠에는 무기를, 뒷춤에는 각종 공구가 든 가방을 맨 기사단의 성전사들.

이들은 소대 단위로 흩어져서 계곡의 입구 근방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전투의 여파로 곳곳에 떨어진 낙석을 치우고, 길이 닦일 곳의 땅을 한 차례 엎어놓는 작업이었다.

깡! 깡! 덜그덕. 덜그덕.

기사단이 도착한 지 고작 한나절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전격적으로 진척되는 작업 현장.

성전사들이 이렇게 길을 정리하거나 강가에 임시 진영을 세우는 사이, 성기사들은 정찰대를 편성해 일대의 남은 마물들을 처리해 일대를 안전 지역으로 만들고 있었다.

‘요새를 하나 더 지을 생각인가 보군.’

댈런은 말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수백 회차에 달하는 플레이 중, 간혹 지금처럼 성기사단이 제 세력을 넓혀내는 때가 있었다.

보통 청린이 자연사한 틈을 노려, 에스트라 요새 너머로 병력을 진격시킨 경우가 그런 것.

나쁘지 않은 전략이었다.

균열 심부의 초입 구간은 실질적으로 청린의 통치 하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바.

청린이 자연사하고 세력이 사분오열되는 타이밍을 잘만 고르면, 성공적으로 균열 심부의 일부분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그 타이밍이 가장 문제긴 하지만.’

타이밍을 잘못 잡아 일찍 진격한다면, 아직 건재한 청린의 세력에게 역공을 맞는다.

그렇다고 너무 늦으면 균열 더 깊은 곳에서 치고 올라온 악마들이, 이미 청린의 영역이었던 곳을 다 흡수하고 자리를 잡은 상태일 테고.

청린이 정확히 몇 날 몇 시에 죽는지를 알 수는 없으니, 사실상의 도박수나 다름없는 행위.

거기다 설령 그렇게 땅을 빼앗아냈다 해도, 오래 버티지는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애당초 성기사단의 존재 목적은 균열의 입구를 지키는 거지, 균열 안으로 치고 들어가는 게 아니니까.’

제 영역을 지키는 데 가장 많은 힘을 쏟는 기사단이, 균열 안으로 진격하고자 결단을 내렸다는 건 뭘 의미하는가.

백이면 백 대륙 전체가 일찌감치 혼돈에 빠져, 미궁 안의 악마들에게 어떻게든 한 방을 먹여야 하는 상황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어찌 한 방을 먹였다한들, 뒤이어 덮쳐오는 더 큰 종말의 손아귀 앞에서 기사단이 버텨내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지만.’

종말이 그 속도를 높이고 있는 건 확실하다.

허나 그 주요한 시도들이 번번히 댈런의 손에 저지되고 있는 것도 사실.

모르긴 몰라도 몇몇 악마들의 마음은 꽤 조급할 것이다.

계속해서 뒤틀리는 미래를 보다못해, 원래 정해진 순서보다 몇 년을 앞당겨서 대륙을 침공하려 했건만.

그 시도들이 한 사람의 손에서 번번히 무너지는 걸 보고 있을 테니까.

어쨌든 지금은 그 어느 회차보다도 대륙의 인간들에게 유리한 상황이다.

종말이 열심히 삽질을 하는 와중에, 이렇게 기사단이 균열 안쪽으로 세력권을 넓혀내는 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깡! 깡!

사람들의 외침 사이사이로 공구로 바위를 쪼개는 소음이 울려퍼진다.

노새의 투레질과 수레의 덜커덩거리는 소리 사이로, 댈런은 천천히 말을 몰아갔다.

그리고 그때.

“끄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계곡 저 안쪽에서부터 그의 귓가에 닿았다.

***

그어어어어!

“바위 트롤이다, 물러나!”

“으악! 뭐야, 순찰대가 다 정리하고 간 거 아니었어?”

절벽의 갈라진 틈 안쪽.

비좁은 동굴 같은 지형에서 트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한창 작업중이던 성전사들은 하얗게 질린 채 우르르 물러났다.

절벽 틈을 반원형으로 넓게 둘러싼 성전사들이, 황급히 공구를 버리고 각종 병장기며 굵은 올가미를 꺼내들었다.

“으, 으아아아!”

그때 바위 틈 안쪽에서 성전사 한 명이 뛰어나왔다.

아직 어린, 십대 후반쯤 되었을까 싶어보이는 소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소년은 반쯤 패닉에 빠져 소리질렀다.

“모, 모두 도망쳐! 트롤, 트롤이야!”

“래리! 이쪽으로 와라!”

소대를 이끄는 중년의 성전사가 외쳤다. 소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쪽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섬전같이 날아온 돌덩이가 소년의 다리를 스쳤다.

“끄아아악!”

피가 촥 튀고, 그대로 나동그라지는 소년.

허둥지둥 기어서 도망치려는 그의 등 뒤, 삼 미터에 가까운 근육질의 트롤이 절벽 틈을 비집고 나타났다.

“래리!”

중년 성전사가 소리쳤다. 그러나 그조차도 섣불리 다가서지는 못했다.

바위 트롤의 피부는 돌덩이처럼 쩍쩍 갈라졌으며, 그 강도는 말 그대로 바위나 다름없는 수준.

신성 문신으로 육신과 무구를 강화할 수 있는 성기사가 아니라면, 창칼 따위의 날붙이로 찔러봐야 별 소용이 없었다.

그륵, 그르륵. 그어어어!

“으, 으아아아!”

트롤의 코앞. 어깨를 붙잡고 주저앉은 성전사가 비명을 지른다.

바위 트롤이 손을 뻗었다. 먹잇감을 발견한 탐욕스런 눈빛에, 사람의 머리 정도는 단숨에 으깰 악력의 손아귀였다.

“으······.”

소년은 죽음을 직감했다.

그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은 순간이었다.

패래랙― 쾅!

머리칼이 휘날렸다. 뭔가 공기를 가르고 지나간 것이다.

거대한 쐐기로 돌을 쪼개는 소리가 그 뒤를 이었고, 소년은 저도 모르게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그어어어어!

트롤이 외마디 비명을 토해내더니, 놈의 손목이 스르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쿵.

녹색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소년의 눈에 절벽에 박혀 반짝이는 날붙이가 보였다.

그그극···.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판단이 서기도 전에, 그 날붙이는 저 혼자 절벽에서 뽑혀나왔다.

화륵!

검붉은 화염이 날붙이에서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건 손도끼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손도끼는 검붉게 타오르는 원반이 되어 바위 트롤에게 날아갔다.

패래랙― 퍼걱!

마치 부드러운 치즈를 가르듯, 가볍게 트롤의 가슴팍을 헤집고 나오는 원반.

일순의 번뜩임 같은 그 궤적을 따라가던 소년의 시선은, 마침내 동료 성전사들의 뒤에 선 덩치 큰 용병에게 닿았다.

“용병···?”

기사단이 외부인에게 보급하는 갑옷을 입은 걸 보니, 확실히 용병이 맞았다.

그는 제 손으로 돌아온 도끼를 옷자락으로 대충 닦고는 허리춤에 척 끼워넣었다.

도끼머리를 툭툭 두드린 자연스레 그가 동료 성전사들 사이를 지나쳐 다가왔다. 그리고 말했다.

“괜찮소?”

“예, 예에···으윽.”

“좀 다쳤군.”

두꺼운 곰 같은 손이 소년의 몸을 가볍게 뒤집었다. 뭐 어찌 저항하거나 할 틈도 없었다.

찢어진 바지와 그 안의 환부를 눈대중으로 살피던 그는, 품속에서 작은 약병을 하나 꺼내더니 뚜껑을 열고 부었다.

“으윽!”

재생 포션의 통증이 화끈하게 올라온다. 소년은 가까스로 비명을 참아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약병에서 털어낸 용병은, 능숙하게 붕대를 풀어 환부를 감쌌다.

“뼈는 안 상했소. 다만 새로 차오른 근육과 살점이 자리를 잡아야 하니, 하루쯤은 뛰지 말고 걸어만 다니시오. 무거운 것도 들지 말고.”

“예, 예. 고맙습니···어엇.”

“왜 그러시오?”

“누, 눈이······.”

“···아.”

용병은 손으로 눈을 덮었다. 그리고 뭔가 중얼거린 후 손을 치웠다.

방금까지 세로로 찢어져 검붉게 번들거리던 눈동자는, 어느새 평범한 검은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평범했으나 깊은, 묘하게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은 눈.

“가보겠소.”

용병은 소년이 뭐라 감사를 표하기도 전에 일어섰다.

그는 이들의 소대장인 중년의 성전사에게 다가가, 소년이 하루 정도 일을 쉬게 해달라 말했다.

중년 성전사는 바짝 얼어붙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은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곤 그대로 말을 타고 떠났다.

“펴, 편안한 여정 되십시오!”

떠나가는 말의 뒤로 잔뜩 기합이 들어가 외치는 소대장.

소년은 천천히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갔다. 소대장의 표정은 소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빳빳하게 굳은 몸. 하얗게 질린 얼굴.

마치 자신이 트롤에게 잡히기 직전에 지었을 것 같은 그 표정을 보며, 소년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소대장님, 저 완전 말끔하게 나았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다. 너는 쉬어야 해. 저분의 명령이다.”

“···혹시 저분이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신가요?”

소년이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그는 소대장의 태도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바위 트롤이 꽤 강한 마물이긴 하지만, 강력한 마법사나 성기사라면 혼자서도 너끈히 감당할 수 있었다.

물론 단 일격에 바위 트롤의 심장을 부수는 주문은 들어본 적 없긴 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요상한 주문은 많은 법.

저 용병은 그가 모르는 주문을 알고 있는 듯했고, 그건 신기할 뿐 이렇게 덜덜 떨 일은 아니었다.

“넌 결코 모를 거다. 난 두 눈으로 직접 봤다. 얼마 전 기사단이 내전에 휘말렸을 때, 저분께서 어떻게 아룡을 죽이고 용살자의 칭호를 얻으셨는지.”

“예? 용살자요?”

소년은 순간 혀를 씹을 뻔했다. 그러나 소대장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래. 성소에서 까마득히 높은 창공 위. 날개도 없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성검으로 벼락을 뿜어내셨지.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말이다···.”

꿀꺽.

떨리는 입술로, 소대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진룡 청린의 목을, 저분이 직접 자르셨다고 하더구나.”

***

소년과 청년의 경계쯤에 있던 성전사를 구해준 뒤, 댈런은 계곡 안쪽을 향해 말을 몰아갔다.

떠날 때까지만 해도 해가 중천이었는데, 도착할 때쯤 되니 어느새 하늘은 보랏빛이었다.

푸르륵.

대런은 말에서 내렸다. 그는 고개를 꺾어 절벽 저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신비를 꿰뚫어보는 눈이 번뜩이고, 절벽 중간쯤에 펼쳐진 환상 마법 너머를 내다본다.

“여기 맞군.”

절벽의 중턱. 거대한 동굴이 댈런의 눈에 보였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찾아냈다. 주문의 주인이 죽으며 시시각각 약해지고 있는 결계 때문인 듯했다.

댈런은 몇 번 제자리에서 통통 뛰다가, 다리에 힘을 주고 땅을 걷어찼다.

콰광―!

발 아래에서 치솟는 검붉은 화염 기둥.

강렬하게 타오르는 화염은 등 뒤에서도 터져나와, 어렴풋한 날개의 형상을 갖춰낸다.

댈런은 절벽을 향해 날아올랐다. 도약보다는 비행에 가까운 궤적이었다.

머지않아 결계에 닿은 그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내리그었다.

우르르르―!

우렛소리와 함께 검끝에서 섬광 대신 화염이 쏟아진다.

화염은 원래보다 한참 약화된 결계와 환상 주문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박살난 주문들이 마력 조각으로 흩날리는 가운데, 댈런은 동굴 입구에 착지했다. 그가 투덜거렸다.

“썩을. 조절이 하나도 안 되는데.”

[···일부러 쓰신 것 아니었습니까?]

“일부러는 개뿔.”

댈런은 고개를 내저었다.

검붉은 화염의 위력 자체는 더할나위 없었다. 다만 컨트롤이 안 된다는 건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였다.

그저 도약 스킬로 뛰어올랐을 뿐인데 화염 날개가 갑옷을 망가뜨리질 않나.

뇌격 스킬에 원래의 섬광이 안 나오고 화염이 쏟아지질 않나.

낮에 성전사 소년을 바위 트롤에게서 구해냈을 때도 그랬다.

도끼를 처음 던질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비검 스킬로 되돌리는 순간 검붉은 화염이 도끼를 집어삼켰다.

‘통제할 수 없는 힘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위험 요소다. 오히려 강할수록 더 그렇지.’

지금이야 인적이 드문 골짜기니까 괜찮았다.

하지만 만약 대도시나 사람 많은 전장에서 싸우게 된다면, 지금 상태로는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적아를 가리지 않고 화염을 흩뿌려대는, 스스로의 힘도 제어하지 못하는 이의 곁에서 싸우려는 영웅이 어디 있겠는가.

다가오는 종말을 혼자서는 결코 이겨낼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하루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생각보다 시급한 문제군. 기사단에서의 일이 끝나는 대로 까마귀 둥지를 찾아가야겠어.’

청동 구역의 술집에는 이 문제를 해결해줄 만한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약간의 리스크를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어서 미룰 생각이었으나,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어쩔 수 없는 법.

“쯧.”

짧게 혀를 찬 댈런은 동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평소와는 다르게, 약간은 긴장된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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