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진 재앙(3)
구어억! 구어어어!
바위 트롤이 괴성을 질렀다. 사과만 한 검은 눈이 기이한 푸른빛으로 번들거렸다.
그 눈동자에 검붉은 번쩍임이 비쳤다. 순간뿐이었다.
번쩍임은 순식간에 두 눈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그르륵······.
피 끓는 소리를 내며 쿵 쓰러지는 바위 트롤.
돌아온 손도끼를 잡아챈 댈런은, 쓰러진 트롤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려봤다.
그···흐으······.
“이거 진짜 살아있네.”
댈런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검으로 트롤의 심장을 꿰뚫었다.
뇌가 쪼개져도 얕게 들리던 트롤의 숨소리는, 심장이 꿰뚫리자마자 작게 경련하더니 이내 멎었다.
‘트롤은 오래된 놈일수록 심장이 뇌의 역할을 점점 대신해간다지.’
댈런은 트롤을 발끝으로 재차 툭툭 건드렸다.
쓰러진 바위 트롤은 머리부터 어깨까지 푸른 냉기의 결정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마 청린이 잡일을 시키기 위해 용굴에 데려온 놈일 터.
수명에 제한이 없는 트롤이 불가침의 영역인 용굴 안에 있었으니, 못해도 백 년은 넘게 묵었을 것이다.
댈런은 마물들을 처리하며 청린의 용굴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용굴에는 바위 트롤 이외에도 마물이 득시글했다.
고블린이나 놀, 도마뱀인간, 쥐인간 등등.
하나같이 동족들보다 반 배정도 큰 덩치를 가진 개체들은, 주인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저돌적인 기세로 침입자를 저지하려 했다.
마치 뭔가를 지키려는 듯한 행동양식.
그러나 수백 마리가 무리 지어 달려드는 게 아닌 이상, 댈런의 도끼질 앞에서 버텨낼 수 있는 놈들은 없었다.
[에휴, 명색이 용굴인데 금화 무더기나 다이아몬드로 가득한 궤짝 하나 없어서야······.]
악마, 아르보르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댈런은 픽 웃었다.
그러고보니 이놈, 깨어나자마자 자기 은신처에 온갖 금은보화를 쌓아놓으려 흑마법사들을 달달 볶았었지.
악마의 말대로, 마물을 제외하면 청린의 용굴은 휑한 편이었다.
용굴에는 금화가 넘쳐난다는 세간의 통념과는 달리, 금은 고사하고 실링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함이었다.
물론 댈런은 알고 있었다.
보물을 쌓아두는 용은 비교적 인간에게 덜 적대적인 용뿐이라는 것을.
애당초 금이나 은 자체가 필멸자들이 사용하는 교환 수단이다.
인간이나 엘프 같은 필멸자들과 주기적으로 교류하는 용이 아니라면, 금은보화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돌덩이일 뿐.
인간을 먹잇감 정도로 생각하는 청린 같은 용들은, 자신의 불멸성과 신비, 그리고 힘을 곧 화폐로 삼았다.
강력한 힘을 탐하는 필멸자들에게 자신의 신비를 조금 나누어줌으로 권속을 만들고.
포식자의 위치 자체를 이용해 수많은 마물 위에 군림하며 다스리는 게 용의 생태.
악마들이 제물을 얻기 위해 각종 보화로 추종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비해, 용들은 그런 제물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말 다한 셈이었다.
스으으······.
댈런은 옷에 맺힌 서리를 툭툭 털었다. 깊이 들어갈수록 온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내쉬는 숨마다 하얗게 김이 맺히고, 방금 털어낸 서리가 옷과 갑옷 위에 금세 다시 내려앉는다.
별다른 마법이나 주문이 걸려있지 않음에도, 진룡의 몸이 오랫동안 뉘임으로써 그 신비가 쌓인 장소.
평범한 사람이라면 단순한 추위를 넘어서 동사할 지경의 극저온 속에서, 이제는 용굴을 지키는 마물마저 자취를 감췄다.
댈런은 그런 장소를 마치 집 앞 산책하듯이 돌아다녔다.
그의 혈관에서 끓어오르는 검붉은 용의 피는, 단 한 점의 냉기도 피부 속으로 침투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용굴 안으로 걸어갔을까.
모퉁이를 돌아선 댈런은, 마침내 거대한 공동 속에 발을 내디뎠다.
***
자박.
발밑에서 차가운 수정이 부서진다.
공동의 모든 벽과 천장은 청백색의 수정으로 빼곡하게 뒤덮여 있었다.
자체적으로 신비한 빛을 내뿜으며, 서로가 서로의 광채를 난반사하는 아름다운 정경.
허나 그 안에 맴도는 강대한 한기의 마력은, 댈런마저도 순간 주춤하게 할 정도였다.
자박. 자박.
그리고 댈런은 머지않아 발견할 수 있었다.
공동 한가운데.
마치 거대한 새의 둥지처럼 결정 조각들이 수북이 쌓인 언덕 위.
가장 강력한 마력을 품은 결정들로 둘러싸여, 마치 이 공동이 존재하는 이유임을 나타내듯 곱게 모셔진 존재를.
[대륙 남서부의 투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대전쟁에 참가한 마법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암월의 귀족 사냥꾼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빛을 잃은 용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올곧은 성자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그건 집채만 한 알이었다.
테데라 리울라크의 자녀이자, 역사 이래 가장 강력한 청린용 중 하나라 일컬어지는 진룡의 알.
저 알에서 태어나 성장하게 될 용은, 가히 게임 전체를 통틀어 최악의 보스몹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많은 회차를 다시 시작하게 한 장본인이자, 직접적으로 그를 다섯 번이나 죽인 대적 중 하나.
동시에 마물 군세의 필두에서 성기사단을 무너뜨리고, 대륙 남서부 노리아 왕국의 왕도(王都)를 도시째로 얼려버린 살육자였으니까.
“······.”
꽈드득.
무의식적으로 검을 움켜쥔다. 검손잡이에서 들어본 적 없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고작 알임에도 불구하고, 등줄기를 타고 흐른 긴장감이 팔다리를 찌르르 울린다.
댈런은 오래전 기억을 떠올려봤다.
날갯짓에서 빚어진 우박과 폭풍이 왕도의 성벽을 모래성마냥 무너뜨리고.
가벼운 숨결 한 번으로 천 명의 병사를 얼려버리는 광경을.
모니터 너머에서 종종 목격하던 그 압도적인 기세를, 현실이 된 이 세계에서 마주한다면 과연 그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부상도, 저주도 없던 전성기 시절의 어미 청린보다도 더 강력한 진룡이다.
저도 모르게 알을 반으로 쪼개버리지 않은 건, 오직 펠버의 유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쩌저적. 쩍.
그리고 이 거대한 알을 어떻게 할까 갈등하던 찰나, 알껍질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쉬이이이이―
동시에 공동을 가득 채운 냉기가, 깨진 껍질의 틈 사이로 소용돌이치듯 빨려 들어가고.
우우우우······.
기묘한 공명음이 알을 중심으로 울려 퍼지더니, 껍질이 팍 하고 깨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쩌저저저정!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쳐낸 파편들. 그 하나하나의 위력은 발리스타에서 발사된 화살 못지않다.
어느새 검신에 화염을 둘러내며, 용의 힘을 끌어올린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 순간.
꾸루룩! 끼잉!
부서진 알의 중심에 떠 있던 형체가, 희끗한 그림자처럼 보일 정도로 빠르게 날아들어 댈런에게 쇄도했다.
검을 내리치려 했으나 늦었다.
육감에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펠버의 유언이 그의 손을 잠시나마 막아섰기 때문.
그리고 그 짧은 틈 사이, 댈런의 간격 안쪽까지 파고든 푸른 새끼용은.
끼잉! 끼이이이······.
댈런의 품에 사정없이 머리를 비벼대며, 어미의 품을 갈구하는 어린 짐승처럼 낑낑 소리를 냈다.
“······.”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서 검끝을 내린 댈런.
그는 얼떨떨한 시선으로 고개를 떨궜다.
지구의 포메라니안과 비슷한 크기쯤 되어 보이는 새끼용은,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비비적대던 걸 멈추고 고개를 살며시 들어올렸다.
빙룡의 세로로 찢어진 노란 눈이, 댈런의 검붉은 눈을 마주하고.
[뿌까!]
해맑게 웃는 표정으로, 용이 탄생 후 첫 전성을 내뱉었다.
***
어두운 방.
성체가 된 진룡이라도 넉넉하게 몸을 뉘일 수 있을 거대한 공간은, 칠흑같이 새까만 반구형 천장으로 덮여있었다.
까만 배경 위에 기이한 색채가 제멋대로 흘러 다니고, 그 사이로 반짝이는 섬광들이 점점이 박힌 반구형의 천장.
마치 밤하늘을 수백 배 확대하면 나올 것 같은 전경 아래, 백발의 소녀가 멍하니 천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별들이 다시 움직입니다.”
소녀가 입을 달싹였다.
그녀의 작은 목소리는 기이한 파동이 되어, 천구 아래의 방을 웅웅 울렸다.
“정해진 길들이 자꾸만 비틀리는군요.”
“이번에도 그 전사가 원인인가?”
남자가 물었다.
뚜벅.
천구 아래, 남자는 동서남북 십자 형태로 뻗은 길을 따라 걸어왔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하얀 피부. 단정하게 빗어내 고정시킨 머리칼.
귀족가의 자제 같은 외양의 남자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천구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근 반 년 사이 할망구한테 비슷한 이야기를 듣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군. 지난 이백 년 동안에 난 그쪽이 앵무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무슨 의미인가요, 에버론?”
“운명은 변하지 않습니다, 에버론. 강물은 수없이 갈라지고 합쳐지지만, 결국에는 대해로 이어지기 마련이죠. 대본처럼 이 이야기만 읊어대는데, 그게 앵무새 아니면 뭐겠어?”
남자가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장난기 많은 소년 같은 말투였다.
소녀는 그제야 하늘을 보던 시선을 조금 내렸다.
우주 같은 빛깔의 유리체 위에, 순백색으로 점 찍은 듯한 눈동자.
그 기이한 눈을 남자와 마주친 그녀는 이내 피식 웃었다.
“그 나이 먹고도 여전히 투정을 부리는 건가요?”
“내가 천 년을 더 살아도 당신 나이의 반도 못 따라가.”
“쉿. 예의가 없군요.”
청년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웃는 소녀.
그 미소에 슬쩍 고개를 내리깐 에버론은, 머지않아 코를 긁적이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소녀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우주에 점점이 찍힌 별들. 마치 소녀의 흰 눈동자와 같은 섬광들.
인간의 두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별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동자에, 기이한 음영이 몇 번이고 덧씌워졌다 사라진다.
다음 순간, 소녀의 전성이 넓은 천구 아래를 가득 채웠다.
[역행의 사도들이 무너지고, 미궁의 놀들은 두령을 잃고 흩어졌습니다. 골라캅이 타락시키려던 성검은 전사의 손에서 제 힘을 되찾았으며, 그 성검을 빼돌린 타락기사는 라필렘의 손아귀에 놀아나다 목숨을 잃었죠.]
일정한 빠르기. 기나긴 문장들. 그러나 숨을 몰아쉬지도, 흐트러지지도 않는 목소리.
기묘하게 빛나는 두 눈은 단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았다.
장난기 다분한 표정이던 에버론도 이 순간만큼은 진지한 얼굴로 소녀를 지켜봤다.
[재의 마지막 혈통은 에낙사구스의 솥구덩이에 빠졌습니다. 테데라 리울라크는 성검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벗어던지려 했으나 실패했고요. 그녀가 남긴 어린 용은 전사를 제 어미라고 인식했고, 나무는 그의 수중에서 기억을 점차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개판이군. 그래도 좋은 의미로 개판이긴 해. 그래서 오늘의 요점이 뭐야? 할망구.”
[거대한 별들이 움직입니다. 너무 많이요. 수백만의 작은 운명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원래의 흐름에서 벗어나 강둑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소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긴 백발이 그녀의 얼굴을 커튼처럼 덮은 가운데, 미세한 중얼거림이 머리칼 너머로 새어나왔다.
천구를 울리는 초월자의 전성이 아닌, 작고 여린 목소리였다.
“···깃털의 마녀는 사슬옥좌와 맺은 계약을 끊기 위해 내려갔습니다.”
“쯧. 예정보다 빠르네.”
“네. 그녀는 죽을 거예요. 그녀의 어미를 끝내 구해내지 못했듯, 저희는 이번에도 실패하겠죠.”
“그건 모르는 일이지.”
에버론이 말했다.
소녀는 고개를 슬쩍 들었다. 늘어진 머리칼 사이로 흥미롭게 올라간 청년의 입꼬리가 보였다.
“문제의 전사랑 그 마녀는 꽤 각별한 사이가 아니었나? 내가 본 그 전사라면 그녀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첫 만남에서부터 느꼈지만, 예측 밖의 일들을 해낼 것 같은 사람었거든.”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없습니다. 강줄기를 잠시 비틀어도, 결국 다시 순리대로 흘러가는 게 운명인 걸요.”
“할망구, 밖에 나가서 사람을 좀 만나. 방구석에서 음침하게 별이나 째려보지 말고.”
청년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소녀는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미간에 주름을 팍 만들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계속 놀릴 거면 나가세요. 전 농담 따먹기 할 시간 없습니다.”
“그래. 나가줄 테니 할망구도 동네 마실 좀 나오고 그래. 알았지?”
여전히 슬슬 웃는 얼굴. 소녀는 홱 고개를 돌려 다시 하늘을 쳐다봤다.
에버론의 발소리는 서서히 멀어졌다. 이내 그의 기척이 천구의 영역 밖으로 완전히 벗어났다.
그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우.”
작은 한숨 소리가 천구 아래에 조용히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