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97화 (97/288)

외눈의 명공(1)

몇 달만에 방문한 르비바흐는 붐볐다.

도시연합 남쪽 끝자락의 그리 크지 않은 도시임에도, 거리의 밀도는 미궁도시 팔시온 못지않다 느껴질 정도.

이전에 방문했을 때도 비슷하긴 했지만, 그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대규모 만드레이크 서식지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던 탓에, 전 대륙의 상단이 죄다 몰려오다시피 했었으니까.

“사람이 많군.”

“그러게 말일세. 내 젊을 적에는 약초꾼들끼리 모여사는 작은 도시였는데 말이야.”

“이쪽 근방은 오랜만인가 보시오?”

여관 1층의 카운터 앞에서 펠버와 잡담을 주고받고 있자, 여관 주인이 열쇠를 건네며 끼어들었다.

“와본 지 좀 되긴 했소. 그렇게 오래는 아니지만.”

“그럼 아직 소문이 낯설겠군. 약초신께서 르비바흐에 신성한 불꽃의 비를 내리신 사건을 아시오?”

댈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성한 불꽃의 비라니. 그보다 약초신은 또 뭐야?

“제국의 만신전에서도 그런 이름의 신을 들어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이런, 그 종교쟁이들 이야기가 아니라오. 이건 진짜요. 실재하는 신이시라고. 르비바흐 수백 년 역사 동안 약초꾼들이 빌어온 염원을 신께서 들으시고 은총을 베푸신 거지.”

“뜬구름 잡는 소리 말고 제대로 이야기해보시오.”

여관 주인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댈런은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동화 하나를 꺼내 튕겨주었다.

찹 소리가 나게 손바닥으로 동전을 받은 여관 주인은, 다시 헛기침을 큼큼 하며 말을 이어갔다.

“때는 세 달쯤 전. 르비바흐 숲에서 있었던 일이오. 하늘이 잿빛 기운으로 뒤덮이고, 번개와 뇌성이 마치 용의 울음소리처럼 세상을 뒤흔들던 날이었지.”

“······.”

“약초꾼들이 하는 말로는, 거대한 빛의 기둥 속에서 약초의 신께서 강림하셨다고 하오. 르비바흐 숲의 가장 깊은 곳.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험지에 말이오.”

쿡쿡.

옆구리를 찌르는 느낌에, 댈런은 슬쩍 눈을 돌렸다.

돌아보니 펠버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이거 네 이야기 아니냐’하는 듯한 눈빛.

“그날 밤, 신께서 강림하심과 동시에 숲 전체에 불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소. 이곳 르비바흐의 성벽에서도 어렴풋하게 보일 정도였지. 한동안은 헛소문이 돌기도 했소. 악마와 마녀, 마법사들이 그 안에서 끔찍한 의식을 벌였다는 소문.”

여관 주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마치 신앙심 깊은 성직자가, 자신의 옛 죄악을 참회하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보름 정도가 지나고, 그 모든 건 헛소문임이 드러났소. 악마가 나타났다던 숲에는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쳤고, 이전의 몇 배나 약초들이 싹을 틔우며 빠르게 자라나기 시작했던 거요. 르비바흐 숲에 약초신께서 강림하셨다는 이야기만이 진실로 판명되었지.”

“···그렇군. 이야기 잘 들었소.”

“안 믿는 모양이군. 어디 가서 함부로 약초신을 의심하는 발언을 하지 마시오. 나 같은 장사치들이라면 몰라도, 도시에 오래 살아온 약초꾼들은 대번에 역정을 낼 테니.”

댈런은 대충 알았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으며 카운터를 떠났다. 그는 계단을 오르며 관자놀이를 지그시 문질렀다. 머리가 괜히 지끈거렸다.

시발, 약초신이라니. 몇 달 전에 이 근방 사람들 추리력이 꽤 정확하다 생각했던 게 후회스러웠다.

“끌끌, 이제 하다하다 신 소리도 듣는 겐가? 자네에게 성검을 준 전쟁신이 노하겠구만.”

“···썩을.”

“땅속 깊은 곳의 지력을 죄다 빨아들이던 만드레이크가 몰살당했으니, 어마어마한 양분이 지표 근처에 산더미로 쌓이게 되었겠지. 대충 만드레이크 천 뿌리가 죽었다고 가정하면, 앞으로 두세 해 정도는 평년보다 열 배는 약초가 많이 날 걸세.”

“그 뒤로는?”

“그 열 배의 기간 동안 약초꾼들은 풀뿌리나 캐먹고 살게 되겠지. 잘못하면 약초의 도시라는 이름이 지도에서 지워질지도 모르겠구만.”

하지만 어차피 그때쯤 되면 마물들이 판을 칠 테니, 약초가 문제가 아니지 않겠나? 펠버는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댈런은 관자놀이를 다시금 문질렀다. 다가오는 종말을 알게 된 이후로 사고방식이 묘하게 이상해진 주문쟁이였다.

***

일행이 묵는 방은 여관에서 가장 넓고 좋은 방이었다.

펠버야 마탑의 원로 마법사인 만큼 원래부터 재산이 많았고, 댈런의 수중에도 이제는 꽤 많은 돈이 쌓여있었기 때문.

특히나 댈런의 재산은 일개 용병이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몇 달 전에도 궤짝에 넘칠 정도의 금화가 있었는데, 이제는 거기에 귀한 보석까지 작은 상자로 더해진 상황.

사실 이 정도 금은보화면 순은 거리에서 저택이라도 살 수 있는 재물이었다.

원체 오만 가지 사건들에 치이고 다니다보니, 쓸 틈도 없이 돈이 쌓여만 가고 있는 것.

“바로 그 의원이라는 곳에 갈 건가?”

“그래야지.”

댈런은 배낭을 내려놓았다. 입구를 열어주니 새끼용이 뽈뽈거리며 기어나와 방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뀨융. 뀽뀽!

해맑은 눈망울로 침대며 안락의자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새끼용.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댈런은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 새끼용에게 주의를 줬다.

“너무 시끄럽게 굴면 안 된다. 아직 쓸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숨결이나 주문도 안돼. 혹시나 누군가 들어오면 알아서 숨거나 도망쳐라.”

[뿌까!]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새끼용.

태생이 진룡이라 그런지, 가르치지 않은 사람의 언어도 곧잘 이해하는 모습이었다.

“허허허,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구만.”

“사람도 어릴 때는 그렇지 않소.”

“그렇긴 하네만, 내가 알던 용의 생태보다도 더 빠른 느낌이네.”

그런가? 댈런은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식탁 위에 전리품을 늘어놓았다.

촤르르르.

8인용의 넓은 식탁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멀쩡한 장총 일곱 자루와 권총 두 자루. 수류탄 둘. 기름 먹인 종이 카트리지에 싸인 탄과 화약. 여분의 탄알 주머니와 화약병까지.

현대의 기억을 가진 댈런에게는 백 년도 넘게 낙후된 화약 병기이지만, 대륙에서는 하나같이 최첨단을 달리는 무기들이었다.

개인 화기는 전 대륙에서 단 두 나라, 제국과 차르국만이 공식적으로 채택해 사용하는 무기.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제 막 비밀리에 대포를 도입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두 강대국의 기술은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댈런은 권총 한 자루와 수류탄 하나만 챙기고, 나머지는 아공간 안에 쑤셔넣었다.

악마 아르보르가 제 공간 좁아진다고 비명을 지른 건 물론이었다.

[으윽, 나 죽네. 여러분, 자기 아공간에서 짐더미에 깔려 죽는 불쌍한 악마가 여기 있습···.]

‘엄살 부리지 마라, 새꺄. 예전보다 넓어진 거 다 아니까.’

댈런은 마지막 남은 장총으로 아공간 속 악마를 쿡쿡 찔렀다.

청린의 저주를 흡수한 이후, 놈의 아공간은 두 배 이상 늘어나 있었다.

이로써 불사의 악마가 저주를 흡수할 뿐 아니라, 그걸 소화시켜 제 힘으로 삼는다는 게 증명된 셈.

언젠가 걸어다니는 것만으로도 저주에 걸려 죽는 지독한 미로에도 가봐야겠다 생각하며, 댈런은 장총을 아공간 안에 툭 던져넣었다.

악마는 그걸 조심스레 받아 차곡차곡 정리해놓으며 말했다.

[하, 하지만 주인님, 그만큼 제 몸집도 커진 걸 고려해주셔야 합니다.]

‘대충 구겨넣고 살아.’

[···훌쩍.]

***

짐 정리는 금방 끝났다. 일행은 곧장 의원을 찾아 떠났다.

1층으로 내려가 여관 주인에게 동전 몇 개를 더 쥐어주자, 그는 손을 싹싹 비비며 의원의 위치를 말해주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행여 거기서 행패를 부릴 생각은 않는 게 좋소. 르비바흐의 용병들이 죄다 몰려와 그쪽에게 칼침을 놓을 테니.’

여관 주인의 당부를 대충 받아넘긴 뒤, 일행은 용병 길드 지부로 향했다.

의원의 위치는 길드 지부 뒤편의 골목 안쪽이었다.

사실 이런 골목길에 의원을 차리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작은 도시인데, 대로변이 아닌 비좁은 골목길에 가게를 차린다는 건 금싸라기 상권을 포기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으니까.

그러나 작은 약초상과 채소 가게, 잡동사니를 파는 단칸짜리 고물상 곁에 자리한 의원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의원 앞 골목에서부터 늘어선 줄이, 아예 대로변까지 뻗어나와 길게 이어질 정도.

그렇게 줄을 선 사람들은 대부분 거칠게 생긴 용병들이었다.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를 하나씩 달고서, 붕대나 부목 따위로 대충 응급처치만 하고 온 용병들.

“자, 줄 서십시오, 줄! 질서를 지켜 기다립시다!”

“가벼운 상처는 저희에게 보여주세요! 응급 환자부터 앞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길게 늘어선 줄은 의원에서 나온 것 같은 젊은 청년 두엇이 돌아다니며 관리하고 있었다.

치료가 시급해 보이는 사람은 순서를 좀 더 앞당기고, 가벼운 상처는 즉석에서 약초 등으로 치료해주기도 했다.

“···장사가 잘 되는 이유가 있었군.”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펠버가 말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나? 내 약초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네만, 아무리 르비바흐라 해도 고작 저 정도 금액만 받을 건 아니라 보이는데.”

“잘 봤소. 못해도 은화 정도는 받아야지.”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생 포션 같은 어마어마한 물건도 있는 세상이지만, 이곳에서의 전문적인 의료 행위는 현대 지구와 비교할 수 없게 비쌌다.

용병들이 붕대며 약초 따위를 알아서 가지고 다니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

하지만 눈앞의 청년들은 고작 동화 몇 닢 만으로 꽤 수준급의 처치를 해주고 있었다.

의원을 연 지 고작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이렇게나 많은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건 그런 이유겠지.

“허허, 이거 저들 딴에는 완벽한 작전이었겠구만. 자네가 아무 것도 모르고 부상당한 채 도시로 들어왔다면, 이런 선량한 의원을 마다할 리 없지 않겠나?”

“그랬겠지.”

생각 이상으로 치밀한 놈들이었다.

처음부터 일방적인 방법으로는 암살하기 힘들다는 걸 생각하고, 장기간에 걸쳐 방심할 수밖에 없는 덫을 놓은 것이었으니.

더불어 혹시나 작전이 틀어졌을 경우, 그 과정에서 호의를 얻은 도시의 용병들이 스스로 방패가 되어 놈들을 지켜줄 것이었다.

“쯧.”

댈런은 혀를 찼다. 짜증나는 상황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이 자리에서 바로 의원에 쳐들어가, 관련자를 죄다 족친 뒤 자리를 떴을 테였다.

하지만 이렇게나 많은 용병들이 의원에 줄을 선 상황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이 모든 이들의 공적이 될 게 뻔한 일.

아무리 댈런이 금패 용병이라지만, 제 밥그릇 지키는 일에는 금은동이고 나발이고 없는 게 용병들의 사회였다.

“이거 곤란하게 됐구만······.”

펠버 역시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댈런은 문득 시선을 돌렸다.

저도 모르게 낯익은 기척을 쫓은 시선이, 의원 문을 열고 나오는 두 사람에게 꽂혔다.

하나는 키가 작은 드워프. 다른 하나는 수염을 멋있게 기른 상인.

“상단주?”

익숙한 얼굴에 그가 잠깐 당황한 사이, 건물에서 나와 자연스럽게 거리를 둘러보던 상인도 그를 발견했다.

“어?”

당황한 목소리.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

허나 얼굴에 스몄던 당혹감은 곧바로 반가움으로 바뀌었고, 상인은 두 팔을 번쩍 들고는 소리쳤다.

“맙소사, 시셀라시여! 이게 얼마만인가! 댈···으읍!”

“조용히.”

그리고 그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란 댈런은, 곧장 상인의 입을 틀어막고 골목 밖으로 빠져나왔다.

“으읍, 읍!”

“내가 여기서 르비바흐의 용병들 전부랑 대판 붙는 걸 보고 싶은 게 아니면, 가만히 따라오시오.”

귓가에 속삭이는 댈런의 말에, 상인 볼크마 갈리오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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