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눈의 명공(4)
대화는 순조로웠다.
사람 몸에는 크고 작은 관절부가 많았고, 그것들은 적당히 만져주기만 하면 원활한 소통의 윤활제 역할을 해주었다.
피 섞인 침이 줄줄 흐르는 입에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차르국 반란자들에 대한 정보도 줄줄 새어나왔다.
어떻게 댈런을 추적해 처리할 계획이었는지 뿐 아니라, ‘일곱 왕관의 수호단’이라 자칭하는 반란군들이 현재 어떤 계획을 품고 있는지까지.
댈런은 턱을 쓰다듬었다.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대륙이 혼란한 틈을 타, 너네 반란군들은 더 늦기 전에 내전을 일으키려 한다는 거지. 맞나?”
“우린, 크윽. 반란군이 아니···끄아아악!”
이미 기괴하게 꺾였던 어깨가 다시 반대 방향으로 두 바퀴쯤 비틀리자, 산적수염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토해냈다.
소리가 좀 컸지만 상관없었다.
이곳은 화재가 났던 장소로부터 좀 떨어진 골목.
성의 경비대는 화재와 붕괴 현장을 수습하기 위해, 평소 순찰을 돌리던 인원까지 빼내 총력을 다하고 있을 테였다.
“질문에는 맞다, 아니다로만 대답해라. 알겠나?”
“마, 맞다···끄으윽.”
수염에 피거품을 묻힌 채 끅끅대는 산적수염을 내려다보며, 댈런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마물의 준동은 대륙 곳곳의 정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마물을 퇴치하는 군대의 사상자는 점점 늘어만 가고, 용병이나 칼잡이들의 몸값은 거의 배나 올랐다.
더불어 상인들의 운송료까지 비싸졌으니, 전반적인 물가 역시 껑충 뛰었음은 당연했다.
혼란한 정세는 당연한 결과였다.
경비대 인력이 대로 순찰 임무에 차출되면서,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 도시들의 치안.
치솟은 물가와 험악해진 뒷골목 분위기에, 종종 빚어지는 크고 작은 소요들.
대륙은 알게 모르게 점점 악순환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뭔가 큰 사건이 터지지 않았으나, 이대로 가면 사실상 시간 문제인 셈.
차르국의 반란군은 바로 이런 혼란한 틈을 노려, 현 차리나를 끌어내리고 자신들의 왕을 왕좌에 앉힐 생각이었던 것이다.
“쯧.”
댈런은 혀를 찼다.
이 대륙은 어떻게 되어먹은 게, 한 가지 사건을 덮으면 다른 사건들이 줄지어 소시지처럼 터지려 했다.
당장 근 몇 달간 터진 사건들만 해도 한 손에 꼽기 힘들 정도였다.
큼직큼직한 것만 골라봐도 마물의 준동과 악신과 계약한 재의 마녀부터 시작해, 악마의 부활과 에버로크의 배신으로 이어졌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원래 게임에는 있지도 않던 청린의 침공까지 발발한 게 고작 한 달여 전.
진룡과 한바탕 붙은 끝에야 스스로의 힘을 갈무리할 여유를 얻었나 싶었는데, 이제는 저 북쪽에서 내전이 벌어지려 한단다.
용혈을 어떻게든 제어 하에 둘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댈런의 입장에서, 이렇게 일이 자꾸 터지면 여간 귀찮아지는 게 아니었다.
‘외눈의 명공, 그 음지의 양반이 자기 홈그라운드인 팔시온을 벗어난 것도 보통 일은 아닐 테고.’
쯧. 혀를 한 번 더 찬 댈런은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는 뒷골목의 어둠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만 구경하고 나오시오.”
“···과연 소문의 전사시군요.”
차르르르르······.
댈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뒷골목의 어둠이 비늘 벗겨지듯 스르르 일어났다.
벗겨진 어둠 너머에서 나타난 건 검은 암행복 차림의 여자였다.
끅끅거리며 피를 흘리던 산적수염은 여자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놈이 소리쳤다.
“집행관 타란!”
“쉿.”
퓩!
여자가 들어올린 손끝에서,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암기가 쏘아져 산적수염의 목에 꽂혔다.
산적수염은 볼살을 파르르 떨더니, 그대로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축 넘어갔다.
‘마취침이군.’
댈런은 놈의 심박과 호흡이 빠르게 안정됨을 느꼈다. 효능과 작용 속도 모두 뛰어난 종류인 듯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댈런 님.”
그 사이, 타란이라 불린 여자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북방인 특유의 딱딱하고 차가운 말투, 공손한 태도와 사무적인 몸짓이 조합된 미묘한 분위기였다.
“전 사샤 타란, 차르국 왕실 특무대의 집행관입니다.”
“댈런이오. 이미 아는 듯하지만.”
“예. 아룡의 비늘로 만든 은신 도구를 간파하신 걸 보니, 남쪽 정보원들이 물어온 용살자의 소문이 과연 허명은 아닌 모양입니다.”
여자의 푸른 눈이 완만한 호선을 그렸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차르국의 왕실 특무대는 명목상으로 철혈군대에 소속되어 있지만, 사실상 차르국 왕실의 직속 공작 겸 정보조직이었다.
그중에서도 집행관이라는 직책은, 실력과 실적이 확실해야만 닿을 수 있는 높은 위치.
때문에 그녀가 정식으로 스스로를 소개한 건, 꽤나 조직의 주요 정보원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런 행동에서 유추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속한 특무대에서도 그만큼 댈런의 지위를 높게 보고 있다는 의미겠지.
“현명하게 일처리를 하셨더군요. 의원으로 위장한 적들을 처리하면서, 용병들의 원성은 저희에게로 돌리시다니. 그 난쟁이는 어디서 화약 다루는 기술을 배워온 겁니까?”
“나도 모르오. 그리고 누명 쓴 게 억울하면 일 터지기 전에 알아서 처리했어야지.”
댈런은 허리띠에 손가락을 끼운 채 대답했다.
여자의 말대로 외눈의 명공, 비요른의 노림수는 차르국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이 대륙에서 화약 무기를 다루는 게 가능한 집단은, 사실상 제국과 차르국 두 곳뿐.
그리고 경비대가 현장을 조사하다보면, 이 일이 차르국과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증거를 한둘쯤은 발견할 수 있을 테였다.
의원을 잃은 용병들은 진짜 범인인 댈런과 일행 대신, 온 대륙에 퍼져 있다는 차르국 왕실 특무대를 열심히 씹어대겠지.
더불어 도시연합 역시 차르국에게 이번 사건에 대해 약간의 정치적인 압력을 넣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것까지는 댈런이 알 바 아니었다. 말한 것처럼, 억울하면 자기네 반란군을 자기들이 때려잡았어야지.
“억울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저희도 기회를 노리는 중이었으니까요.”
오히려 저희의 일을 대신해 주셨으니 감사해야죠. 여자가 덧붙였다.
그녀는 품속에서 반짝이는 뭔가를 꺼내 댈런에게 가볍게 던졌다.
받아보니 은은한 청록색을 머금은 오각형 패였다. 그 위에는 차르국의 언어로 뭔가 복잡한 말들이 주르르 적혀있었다.
“저희가 드리는 감사의 표시입니다. 서리고원 근방에서만 나는 보석, 오리할콘으로 만들어진 왕실 특무대의 증표죠. 차르국에 소속된 자에게 그 패를 내미시면 어떤 도움이라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잘 받겠소.”
“언젠가 차르국에 직접 방문하셔서, 저희가 대접해드릴 기회가 있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여자는 다시금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댈런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는 패를 집어넣고 기절한 산적수염에게서 물러났다.
이 일의 책임을 뒤집어쓴 것과 더불어 특무대의 증표까지 주었으니, 그 대가로 생존자 하나쯤은 양보해주겠다는 뜻.
골목길을 나서기 위해 특무대 집행관인 여자를 지나치며, 댈런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쌍둥이 일은 유감이오.”
“······!”
집행관, 사샤 타란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렸다. 거구의 용병은 이미 뒷골목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
사샤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 암행복은 특수 제작되어 주문을 걸어놓은 물건이었다.
그 자체로 기척을 줄여주는 것은 물론, 복면 너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 게 주문의 능력.
하긴, 비늘 주문서의 신비마저 꿰뚫어본 전사다.
무슨 혈통의 힘이 아닌 이상, 복면 한 꺼풀에 걸린 주문은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닐 테였다.
‘용살자에, 대마법사에, 화약을 수준급으로 다루는 난쟁이라니.’
사샤는 문득 용병의 동료들을 떠올리고 몸서리쳤다.
이런 초인들이 그저 평범한 여행자처럼 길을 쏘다니고 있다니, 대체 이 대륙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여전히 떨리는 두 손을 서로 꽉 맞잡은 채, 사샤는 기절한 반란 간부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후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잡생각은 다음에 해도 충분했다.
지금 중요한 건 이 반란군 간부에게서 최대한의 정보를 뽑아내는 것.
산적수염의 팔다리를 주문 걸린 밧줄로 꽁꽁 묶으며, 사샤는 다시금 냉랭한 눈빛을 되찾았다.
‘바실리코프.’
일곱 왕자 중 하나를 최측근에서 보필한, 반군의 가장 깊은 비밀들을 알고 있을 간부진 중 하나.
동시에 철혈군대의 저격수였던 그녀의 쌍둥이 동생, 나타샤 타란을 꾀어 반란군에 들어가게 만든 장본인.
얼마 지나지 않아 완벽하게 포박된 산적수염은, 암행복 차림의 장정들에게 붙잡혀 어딘가로 끌려갔다.
그는 머지않아 모든 기밀을 토해내고, 끝내 죽여달라는 신음과 비명만 흘리게 될 예정이었다.
***
다음날.
밤 사이 의원 건물을 붕괴시킨 폭발은, 도시를 말 그대로 발칵 뒤집어놓았다.
르비바흐는 작은 도시였고, 평소보다 몇 배는 많은 외지인들이 머물고 있는 바.
간밤에 있었던 일이 순식간에 도시 전체로 퍼져나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차르국의 왕실 특무대가 의원으로 위장 잠입한 반란 세력을 제거했다.’
‘차르국 반란 세력은 르비바흐의 용병들을 대상으로 모종의 음모를 획책하는 중이었다.’
‘차르국 왕실은 자국 특무대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도시연합이 입은 피해에, 깊은 유감과 더불어 합당한 배상을 약속했다.’
상인들과 용병들을 중심으로 퍼진 소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그리고 이런 소문들의 집결지인 여관 1층 주점은, 대낮부터 평소의 배는 되는 손님으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특무대의 힘이 대단하기는 한가봅니다. 하룻밤 사이에 적당히 날조된 소문으로 사람들 눈과 귀를 막아버리다니. 그냥 허여멀건 무뚝뚝이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묽은 꿀물이 담긴 잔을 앞에 두고, 볼크마가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전날 마셨던 맥주의 숙취가 아직도 다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왕실 직속이잖나. 그리고 차르국 사람들이 전부 무뚝뚝하다는 건 편견일세. 저들도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친절하다네.”
“그렇습니까?”
상인은 두통에 살짝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 펠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 탄 약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몸이 젊어지더니 술도 같이 세진 것일까.
어째 어제보다도 더 술을 많이 마시는 듯한 마법사를 보며, 댈런은 말없이 스튜를 우물거렸다.
펠버는 단숨에 비운 잔을 탕 내려놓더니 말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점원이 약주는 몸에 좋다고 했네.”
“···내가 무슨 말 했소?”
“아니, 자네 눈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껏 얻은 육신을 술 퍼마시면서 축내냐고 말이네.”
그거 노인장 양심의 소리 아닐까. 댈런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며 스튜를 한 번 더 퍼먹었다.
지나가던 점원에게 약주를 한 잔 더 주문한 펠버는, 편안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깊이 묻으며 물었다.
“자네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나야 처음부터 목적지가 여기였지만, 자네는 미궁도시에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소.”
“언제쯤 출발하려는가?”
댈런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에서 소시지를 우물거리던 난쟁이는, 그 시선을 느끼고 입안의 음식을 꿀꺽 삼켰다.
“외눈의 명공이 도시를 떠날 정도면, 아마 상당히 중요하고 긴급한 사안이겠지.”
“···조금은. 하지만 내 일정에 굳이 맞춰줄 필요는 없다네.”
어쩌면 이미 늦었을 지도 모르고 말이야. 비요른은 코를 킁킁거리며 덧붙였다.
“까마귀 둥지. 그 주인의 신변에 아무래도 이상이 생긴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