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자들(1)
다음날. 댈런과 비요른은 바로 짐을 싸 도시를 떠났다.
펠버는 토미와 함께 한동안 남기로 했다. 계획했던 대로 르비바흐에 머물며, 약초와 의술로 육신의 한계를 더 넓혀보고자 한 것이다.
시간선에 개입하는 마법은 필멸자의 육체에 어마어마한 부담을 주는 바.
육체의 개선이 시급한 건 대영역을 이뤄낸 펠버만이 아니라, 권속으로서의 긴 수명을 얻지 못한 토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을 잘 부탁하오.”
“으하하, 그러지! 내 평생에 대마법사님을 모실 기회가 언제 또 있겠는가. 믿고 맡겨주시게. 내가 아는 최고의 의원과 약초상을 붙여드리겠네!”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상단주를 뒤로하고, 댈런과 비요른은 성문을 나섰다.
르비바흐에서 북쪽으로 뻗어나가는 길. 말발굽의 방향은 몇 달 전에 이 길을 밟았을 때와는 반대였다.
남쪽으로 내려올 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겨울은, 북쪽으로 향하는 지금 완연한 봄이 되어가고 있었다.
길은 반쯤 진창이었다. 비에 가까운 진눈깨비가 이틀 내리 쏟아졌던 탓이었다.
“시에나는 한 달쯤 전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네.”
도시를 떠난 지 몇 시간쯤 지나, 대로의 인적이 뜸해질 즈음 비요른이 입을 열었다.
“까마귀 둥지 자체는 한동안 계속 열었지. 술도 팔고. 하지만 거기가 술맛 때문에만 가는 건 아니지 않나. 가게 주인이 없는 정보상에는 손님이 줄기 마련이야.”
“그쪽한테 따로 말해둔 건 없었소?”
“글쎄. 최근에 분위기가 좀 달라지긴 했었던 것 같군. 하지만 자네도 알지 않나. 시에나는 업무적인 연락 외에는 주변 사람들과 잘 교류하지 않는다는 걸. 쯧, 어릴 땐 그렇게 살가운 꼬마였는데.”
“어릴 때부터 잘 아는 사이셨소?”
“그녀의 어머니와도 친분이 깊었으니까.”
난쟁이는 덥수룩한 수염을 습관처럼 꼬아댔다.
“시에나의 유년기는 험난했다네.”
“들어봤소.”
설정상으로 알고 있기도 했지만, 언젠가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한 적이 있었다.
“그럼 추억팔이 듣는다 생각하고 한 번 더 들어주게나.”
비요른은 낮게 웃으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시에나가 홀로 선 건 그녀가 일곱 살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어린 몸으로 청동 구역에서도 밑바닥인 낮은 거리를 배회하고, 마약상과 밀수꾼들 틈바구니에 끼어다니며 거래와 협박에 대해 배워나갔다.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에게는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것마저 쉽지 않은 일.
그러나 환경 탓인지, 핏줄에 내재된 재능 탓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몫을 해내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간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이 이어졌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낮은 거리에서는 성공했다 말할 수 있는 삶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표는 오물투성이 뒷골목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었네. 그 조그만 것이 한 세기를 넘게 산 나보다도 더 큰 꿈을 품고 있었지.”
그 꿈의 시작은, 하수도 청소부들과 친분을 쌓으며 일궈낸 작은 정보상이었다.
몇 년 뒤, 청동 구역의 뒷골목에서 까마귀 둥지라는 이름은 꽤나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많은 밑바닥 인생들과 안면을 텄다.
열 명 중 아홉은 어리고 영특한 그녀에게 흑심을 품고 해코지하려 했으나, 하나둘 정도는 그녀를 지지하는 친구가 되어주었다.
외눈의 명공 비요른 역시 그 친구들 중 하나라 할 수 있었고.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처음에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네. 말 없이 자리를 비운 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거든.”
비요른은 소시지를 질겅이며 말했다.
“그런데 돌연 보름 전, 까마귀 둥지가 문을 닫았네.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그때 알게 됐지.”
“보름?”
“그래. 나는 그 날로 공방을 내던지고 자네와 연이 있다는 갈리오스 상단을 찾았네. 시에나는 항상 말했거든. 만약 까마귀 둥지가 영업을 그만두는 날에는, 자신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거라고 말일세.”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시에나가 자리를 비우는 건 여러 경우가 있었다.
보통은 정보상으로서의 영역을 넓힌다거나, 다른 세력과 교섭하기 위한 경우들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는 비요른의 말대로 둥지 자체가 문을 닫지는 않는다. 바텐더인 버번이 항상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바텐더는? 그도 자리를 비웠소?”
“아니네. 웃긴 건 둥지가 문을 닫았는데도 그놈은 아직까지 술집에 출근한다는 거야.”
내가 볼 때 그놈이 이 일의 원흉일세. 덧붙이는 비요른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 댈런은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는 거군.’
바텐더 버번이 자리를 비웠다는 건, 시에나의 신변에 치명적인 위해가 가해졌다는 이야기다.
비요른의 말이 맞다면 적어도 보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난쟁이의 푸념과는 달리, 아직 시간이 있는 셈이었다.
‘그나저나 의외군. 벌써 그럴 때가 됐다니.’
댈런은 턱을 쓰다듬었다.
수백 회차를 플레이한 그가 지금 상황에 대해 모를 리 만무하다.
시에나가 둥지를 닫고 훌쩍 떠나버리는 건, 일반적으로 게임 중반부가 마무리되어갈 즈음 벌어지는 일.
팔시온에서 가장 거대한 정보 길드의 수장이 되었음에도, 스스로의 무력을 키워야겠다는 판단 하에 발생하는 사건이었다.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힘을 되찾기 위함을 목적으로 하는 여정.
‘틀린 판단은 아닐지도. 종말의 발걸음은 명확하게 빨라지고 있으니까.’
산골짜기며 깊은 숲속마다 마물이 준동하고, 대륙 곳곳에서는 전란의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당장 댈런의 피부에 와닿는 것만 해도 이 정도인데, 정보상인 그녀가 느끼는 위기감은 그보다 몇 배는 더 강렬하겠지.
“버번이라는 바텐더, 보기만 해도 음침한 놈이야. 만약 놈이 시에나의 머리털 한 가닥이라도 건드렸다면, 내 친히 산더미 같은 화약 안에다 놈을 파묻고 그대로···!”
한편 소식을 전한 비요른은 엄한 바텐더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도 모자라,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열심히 펼치는 중이었다.
혼자 왜 저럴까 하고 생각하던 댈런은, 문득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버번의 정체를 떠올렸다.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군.’
본능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부디 애꿎은 바텐더의 면전에 총부리를 들이대지 않기만을 기도해야겠지.
댈런은 등 뒤에서 꿈지럭거리는 배낭을 툭툭 쳐주며 말을 몰아갔다.
말발굽 아래로 빗물 젖은 땅이 찰박거렸다.
***
[뿌까!]
새끼용이 전성을 토했다.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토끼 고기를 날것으로 오물거리던 용은, 이내 배가 불러오는지 눈을 끔뻑이며 자리에 몸을 파묻었다.
그 자리는 댈런의 머리 위였다.
앞발과 몸통 앞쪽을 머리칼 사이에 파묻어두고, 뒷다리와 꼬리로 목과 어깨를 휘감아 안정감을 더한 자세.
졸지에 중형견 사이즈의 도마뱀을 머리에 얹은 꼴이 된 댈런은, 장작 몇 개를 모닥불에 던져넣은 뒤 스튜 그릇을 집어들었다.
“그···참, 몇 번을 봐도 적응이 되질 않는군.”
모닥불 맞은편, 살짝 질린 얼굴의 비요른이 말했다.
그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댈런에게서 멀찍하게 떨어져 앉아있었다.
사실상 반쯤 어둠 속에 파묻힌 자리. 모닥불의 온기가 닿기나 할까 싶을 위치였다.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래, 트롤 앞에 선 인간이 본능적으로 품는 두려움을 생각해보게나.”
“잘 모르겠군. 트롤이 무서운가?”
“···됐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댈런을 멀리한다기보다는, 그 머리 위에서 고롱거리는 새끼용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지난 며칠을 함께 해왔는데도 불구하고, 난쟁이가 용에게 본능적으로 가지는 두려움은 쉽게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던 모양.
“진룡의 새끼를 애완용 도마뱀처럼 데리고 다닌다니. 역사 이래로 이런 일이 있었나 싶군.”
[그르릉! 뿌우!]
“아, 아니. 미안하네. 자네에게는 부모 같은 관계라는 거 알고 있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말이야······.”
부릅뜬 노란 눈에 흠칫 어깨를 움츠리며, 허둥지둥 변명거리를 늘어놓는 모습에 댈런은 픽 웃었다.
생각보다 둘 사이에 말이 잘 통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사람마다 새끼용에게 보인 반응이 가지각색이었다.
펠버는 학구열과 호기심에 불타는 눈빛이었고, 그 제자인 토미는 그저 무념무상. 기사단장 에드거는 복잡미묘한 시선을 보냈었고, 볼크마에게는 일부러 아예 보여주지 않았다.
‘뀽?’
‘어머, 아가야?’
개중에도 루시아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지. 욕쟁이 성기사라는 첫인상이 와장창 깨진 순간이었다.
‘잘 지내려나.’
함께한 시간이 적잖았기 때문일까.
야영지를 꾸려놓고 스튜를 끓이고 있으면, 그녀의 요리가 떠오를 때가 종종 있었다.
자작자작 타오르는 모닥불. 그 위에서 익어가는 향신료 듬뿍 뿌려진 고기. 바람에 살랑거리는 금발과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 문득문득 조잘거리는 작은 입술. 그 입술의 부드러운 촉감.
잡생각과 함께 스튜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은 댈런은 그릇을 놓고 일어섰다.
[뿌?]
“음? 왜 그러는가?”
머리에 얹혀있던 새끼용을 번쩍 들어 내려놓자, 용과 난쟁이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댈런은 가만히 도끼를 뽑아들었다. 그가 말했다.
“손님이 왔소.”
화르르륵!
그 말과 동시에, 어둠 저편에서 창백한 불꽃이 번뜩이며 일어났다.
사이함을 품은 화염은 허공에서 춤추며 타원형 문을 만들고, 그렇게 열린 포탈 안에서 두 인영이 걸어 나왔다.
두 인영 중 하나, 은빛 전신갑주를 차려입은 기사가 댈런을 가리켰다. 놈이 말했다.
“저 전사가 맞나?”
웅웅거리며 투구 안에서 울리는 음성.
놈의 곁에 선 로브와 두건 차림의 남자가, 쩍쩍 갈라진 메마른 사막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다. 티아라의 붉은 눈물이 놈을 가리키는군.”
두건 남자는 품속에서 붉은 보석을 꺼내들었다.
손바닥만 한 보석 안, 물방울 같이 맺힌 자국들이 불길한 빛깔로 번뜩이며 댈런을 가리키고 있었다.
보석을 갈무리한 남자는 두건을 벗었다. 목소리만큼이나 생긴 것마저도 사막 같이 쩍쩍 갈라진 모습이었다.
비유가 아니었다. 놈의 두건 아래 얼굴은 실제로 마른 찰흙처럼 군데군데 금이 가 있었다.
거기다 창백한 피부 위로 빽빽하게 돋아난 푸른 핏줄까지 더해지니, 방금 무덤에서 일어났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외관이었다.
“혈귀의 사생아라. 음지의 마법사들 중에 저런 놈들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직접 보긴 처음이군. 이거 진귀하고도 역겨운 광경인데.”
스르르릉.
비요른이 자리 곁에서 양날도끼를 집어올리며 이야기했다.
느닷없는 괴한들의 등장에도, 난쟁이의 얼굴에는 한 점의 동요조차 없었다.
새끼용 앞에서 좀 추태를 보일 뿐이지, 그 역시 일인분은 하고도 남는 장인이자 전사.
난쟁이 특유의 탄탄한 골격과 근육, 그리고 모닥불의 빛을 받아 번뜩이는 양날도끼는 다가오는 누구라도 단번에 베어 넘길 기세였다.
비요른을 본 기사는 투구를 갸웃거렸다.
“흠. 칙칙하게 생긴 난쟁이에, 저건 새끼 아룡인가? 함께 다닌다는 성기사는 어디 있지?”
“둘이서 제국 접경지를 지났다지 않았나? 야만인답게 노예시장에 팔아먹거나 했겠지. 들리는 소문으로는 성기사단에 내전이 일어났다고 하던데, 애당초 처음부터 성기사 따위도 아니었을지 몰라. 그냥 길거리 창관에서···어억!”
얼굴 한가운데 도끼자루가 돋아난다. 창백한 주문쟁이는 눈을 부릅뜬 채 뒤로 넘어갔다.
평소보다도 좀 더 세게 던져진 도끼는, 두개골에 박히고도 그 힘이 해소되지 않아 주문쟁이의 고개를 기괴하게 꺾어버렸다.
“끄륵···.”
두뇌 파열과 경추 골절로 피거품을 문 채 죽은 동료를 내려다보며, 은빛 갑주의 기사는 혀를 쯧쯧 찼다.
“대신 사과하지.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으나, 이 친구가 평소부터 입에 걸레를 문 작자이긴 했네.”
“상관없소. 이제는 걸레 대신 거품을 물었으니까.”
기사가 낮게 웃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갑옷과 마찬가지로 은빛 검신이, 모닥불의 붉음을 머금고 요란하게 번들거렸다.
“이름이 뭔가?”
“댈런.”
“그래, 댈런. 나는 바인하트 울펜마우그. 제국 기사단의 은퇴 기사이자, 도시연합 북쪽에서 활동하는 자유기사단 ‘스칸덴의 은솔매’의 단장일세.”
살짝 틀어낸 몸과 적당한 간격으로 땅을 디딘 두 발.
양손으로 잡고 비스듬하게 기울인 검.
검끝이 자연스럽게 흔들리며 초점을 잡아가고, 그 모습에서 댈런은 오래 전 상대했던 어떤 검사를 떠올렸다.
눈앞의 갑주 기사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기사단에 한때 몸담았으며, 은퇴 후에도 그 실력이 바래지 않았던 늦은 중년의 상인을.
“텔리아 상회주, 아챌리스 필레놈의 핏값을 받으러 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