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02화 (102/288)

복수자들(2)

아챌리스 필레놈.

오랜만에 들어보는, 하지만 결코 잊지 않은 이름이었다.

반 년여 전, 튜토리얼의 끝자락에 도달해 처음 팔시온에 발을 들였을 무렵.

몇 주간 이어진 사교도 집단과의 전쟁에서, 아챌리스와의 전투는 단언코 가장 인상 깊은 싸움 중 하나였으니까.

“나는 아챌리스의 스승이네. 제국 기사단에 몸담았을 적에 함께 거인을 사냥했었지.”

사교도들의 돈줄을 쥔 텔리아 상회의 상회주이면서, 동시에 제국 기사였을 적의 검술을 잊지 않은 전사였던 아챌리스.

투구 안에서 웅웅거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그 상회주와 정확히 동일한 준비 자세로 댈런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그가 말했다.

“제자 일은 유감이군.”

“맞아. 유감이지. 허나 늦게라도 복수행에 오를 수 있어 다행이네. 아챌리스와 연락이 끊긴 지 십 년도 넘었으니, 그대가 방금 쓰러뜨린 마법사가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끝까지 제자의 죽음을 몰랐을 걸세.”

“차라리 그랬으면 더 낫지 않았겠나? 괜히 먼 곳까지 와서 개죽음 당할 일도 없고 말이야.”

비요른이 끼어들었다. 기사의 투구가 난쟁이를 향했다.

안면까지 완전히 가려진 투구임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심기가 여실하게 드러났다.

“아인종 따위가 인간의 대화에 끼어드는 게 아니다, 귀리포대.”

“끌끌, 자유기사는 개뿔. 도적놈 주제에 역겨운 제국 차별주의자들 악취마저 안 빠졌구만.”

도끼 자루를 바닥에 쿵쿵 찍으며 으르렁거리는 비요른. 댈런은 무덤덤하게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기사가 움찔거리며 한 발 물러섰다.

“···뭐하나?”

곧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기사가 투구를 기울이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묻고.

“이그넬 로트.”

댈런은 낮게 주문을 외며, 기사가 아닌 그 곁에 널브러진 시체에 정신을 집중했다.

화르르륵!

불꽃이 타오른다.

손등의 신성 문신이 빛을 발하고, 레레도나라의 비검으로 연결된 도끼에서 성화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그리고 분명 심박이 정지했던 주문쟁이는, 그 불꽃에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기사는 당황한 기색으로 몇 걸음 물러섰다. 사방으로 낼름거리는 불꽃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이럴 수가. 어떻게 눈치챘지?”

“내가 너네 보스전을 한두 번 해본 줄 아냐.”

“···뭐?”

댈런은 피식 웃었다. 그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주문쟁이의 머리통에 틀어박혔던 도끼가 부르르 떨리더니, 쏜살같이 빠져나와 댈런의 손에 안착했다.

“쯧.”

기사는 혀를 찼다. 그는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 토템을 꺼내들었다.

콰직!

판금 손아귀 안에서 깨지는 유리 조각상. 동시에 성검을 뽑아드는 댈런.

비요른이 눈치 빠르게 품속에서 수제 수류탄 묶음을 꺼낸 것과 동시에, 공터를 내리쬐던 달이 빛을 잃으며 불길한 마력이 일대를 뒤덮었다.

우우우우······.

사방에서 울려퍼지는 기괴한 비명의 합창.

하늘의 별들이 빛을 잃고, 사이한 마력의 불꽃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불꽃들은 이내 덩치를 불려가며 포탈로 변했다.

크기가 제각각인 공간의 틈에서 튀어나온 건 잿빛 판금을 걸친 기사들이었다.

쿠궁. 쿵.

하늘에서 떨어진 수십의 기사. 그리고 그 열 배쯤은 되어 보이는 병사.

썩어 문드러진 살점과 달그락거리는 뼈마디의 군대가, 시퍼런 귀화를 번뜩이며 일행을 넓게 둘러쌌다.

“킬킬킬. 이런 용병 놈들이 눈치는 빠르단 말이야.”

화륵.

성화에 잿더미가 되어버린 시체 위.

사이한 불꽃으로 만들어진 마지막 포탈에서, 방금 죽은 주문쟁이와 동일하게 생긴 남자가 걸어나왔다.

별다른 힘이 느껴지지 않던 시체와 달리, 놈에게서 흘러나오는 진득한 마력은 최하급 악마에 근접할 정도였다.

댈런은 놈을 알고 있었다.

놈은 원래라면 혈귀전쟁의 전조 중 하나로 등장해, 제국 북부에 피바람을 몰고 오는 사령술사.

하지만 특정 조건을 만족했을 경우, 은빛 갑주의 기사와 함께 팀을 이뤄 주인공 캐릭터를 척살하기 위해 쫓는 사냥꾼이 되는 보스몹이었다.

“나도 소개하지. 네놈이 죽인 마녀, 에힐라의 애인이다.”

그 특정 조건이라 함은, 바로 역행의 사도들과 재의 마녀 모두를 회차 중반부가 넘어가기 이전에 처치하는 것.

[마녀를 스토킹한 흑마법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기사와 마찬가지로 복수행을 선언하는 놈의 머리 위,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가 알림창의 형태로 떠오르고.

“···썩을.”

댈런은 고개를 절레절레 털어내고는, 성검을 가볍게 두 손으로 쥐었다.

***

시작은 폭발이었다.

꽈광! 꽈과과과광!

물리적인 한계를 초월한 근력도, 어떤 주문의 형태로 빚어진 마력도 아닌 순수한 화약의 폭발.

독자적인 비법으로 강화한 비요른의 수류탄 묶음이, 언데드 병사들의 포위망 사이를 파고들어 화염을 토해낸다.

그어어어!

그아악!

고통 따위 느끼지 않기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드는 망자들.

비처럼 쏟아지는 파편과 이글거리는 화염에 동료가 쓰러지는 동료가 속출함에도, 놈들은 아랑곳않고 꼬나쥔 병장기를 댈런에게 찔러왔다.

번뜩이는 칼날이 목젖을 노린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칼 쥔 팔뼈를 잡아뽑았다. 빈 옆구리로 창이 찔러왔다. 살짝 상체를 틀어 갑옷으로 빗겨내고, 뽑아낸 팔을 둔기 삼아 내리쳤다.

콰직!

살점 너덜거리던 팔뼈가 박살나 비산한다. 투구 아래에 있던 해골 머리통 역시 마찬가지로 으스러졌다.

댈런은 깊게 파고드는 대신 반 걸음쯤 물러났다. 그러면서 성검을 길게 횡으로 그었다. 순식간에 반원형 포위망을 구성해 달려들던 망자들이, 죄다 검끝이 그리는 호선에 걸려들었다.

까가가가가각―

비명을 지르며 조각나는 철판들. 부서진 갑옷 틈으로 흘러내리는 썩은 장기와 뼛조각.

단칼에 망자 병사 다섯을 횡으로 갈라버린 댈런은, 이번에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검을 반대로 그었다.

사이한 마력으로 강화된 망자들의 뼈마디는 억셌고, 놈들의 갑옷은 녹슬었음에도 보통 철판보다 단단했다.

그럼에도 댈런은 예전처럼 힘을 쥐어짤 필요조차 없었다. 그저 가벼운 휘두르기. 그거면 충분했다.

그억!

캬아아!

검끝에 망자들이 다섯씩, 여덟씩 걸려들고.

콰지직!

쨍강!

놈들의 병장기며 갑옷은 유리처럼 깨지거나 종잇조각처럼 찢어졌다.

꽈과광!

“으하하! 더러운 혈귀의 노예들! 제국산 폭약으로 안식을 선물해주마!”

슬쩍 돌아보니 비요른 역시 모닥불 근처에서 종횡무진 날뛰고 있었다.

휙휙 털어내는 손마다 크고 작은 유탄들이 흩뿌려져 폭발하고.

그 충격을 뚫고 다가온 놈들에게 산탄을 먹여준 뒤, 양날도끼로 최후를 장식해주는 모습.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난쟁이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폭약에 산탄, 도끼까지 이어지는 공세는 망자 병사들뿐 아니라 기사까지도 어렵지 않게 무너뜨렸으니까.

그렇다면 좀 더 공격적으로 나가도 된다는 이야기. 어느새 달려드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모닥불을 향해 날아드는 날벌레마냥, 사정없이 돌격하던 놈들도 그저 갈려나갈 뿐임을 눈치챈 것.

스아아아······.

댈런은 시선을 들어올렸다. 하늘에는 불길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일대를 장막처럼 뒤덮은 어둠과, 가리워진 별들 대신 번쩍이는 사이한 불꽃들.

그어어어.

그때 발밑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슬쩍 아래를 보니 해골 병사 하나가 비척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조각난 몸뚱이의 뼈마디가 스르르 붙고, 깨진 턱뼈와 두개골 역시 달그락거리며 끼워맞춰진다.

댈런은 붙어가는 두개골을 지그시 밟았다.

꿈틀거림은 찰나. 으직 소리가 나며 움직임이 멎은 망자에게서, 반투명한 기운이 솟아올라 머리 위의 사이한 불꽃으로 빨려들어갔다.

“킬킬.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얼굴이 쩍쩍 갈라진 주문쟁이가 웃었다.

놈의 지팡이 끝에 달린 수정은, 음울하게 빛나며 장막의 불꽃들과 공명하고 있었다.

이건 저 반쪽자리 뱀파이어의 힘이자, 놈이 이뤄낸 소영역의 능력이었다.

별들의 눈을 가리고 쓰러진 망자들을 끝없이 일으켜세우는 어둠의 장막.

그렇게 붙잡혀 안식을 취하지 못하는 영혼들의 울부짖음을, 하늘의 불꽃들에 모아내 파괴적인 주문으로 바꿔내는 이적.

싸움을 오래 끌면 끌수록, 그래서 많은 망자들이 쓰러질수록 강력해지는 고위 뱀파이어의 특성을.

반쪽자리 사생아인 저 사령술사는, 자신의 영역을 이용해 불완전하게나마 가져온 것이다.

“이건 처음부터 네놈들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놈이 입꼬리를 씰룩이며 말했다. 갈라진 입술에서 검은 피가 송골송골 맺히다 딱지처럼 굳었다.

댈런은 그저 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그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내려앉았다.

우우웅···.

어깨에서 시작된 폭풍 같은 기운이 팔을 내달린다.

화륵.

회오리는 이내 검신 밑부분에서 일어난 불꽃과 맞물려, 검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화염의 날을 빚어냈다.

사령술사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어, 어떻게. 이제 막 영역을 깨우친 수준 아니었나···!”

댈런은 피식 웃었다. 용살자의 소문은 일부 정보기관들을 제외하고는 아직 기사단 바깥으로 퍼지지 않았다.

악마와 마녀를 죽인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으나, 일신의 능력은 이제 막 제 영역을 깨우친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는 바.

정작 용혈과 성검이라는 가장 큰 두 힘을 억누른 채인 댈런이, 으레 과장되기 마련인 소문보다도 월등한 강자일 줄은 몰랐겠지.

우웅―

성검이 울었다. 검은 눈에 뭉근한 불길이 언뜻 비쳤다 사라진다.

통제할 수 없는 용혈의 힘을 잠재워두고, 그걸 억누르기 위해 성검의 능력 역시 꺼내기 힘든 상태.

그러나 댈런은 그 두 가지 가장 강력한 힘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더 뛰어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화르르르!

검끝에서 라판텔라의 분쇄검과 성화의 불씨가 융합되고.

지직. 지지직.

비검의 묘리로 둥실 떠오른 주문살해자와 손도끼에 전격이 휘감긴다.

비대한 영역의 힘 때문에 골골대던 건 이제 옛날 이야기다.

용의 힘을 직접적으로 제어하지 않는다 해도, 진룡의 피가 흐르는 육신은 그 자체로 수많은 힘을 동시에 흘려보낼 수 있는 튼튼한 통로가 되어주었다.

“크으, 그래봐야 한낱 필멸자! 흡혈귀의 피를 이은 내게 상대가 될 리 없다!”

얼굴 가득 드러난 동요를 숨기지도 못하면서, 반쪽 밖에 이어받지 못한 뱀파이어의 혈통에 대해 비틀린 자존심을 과시한다.

주문쟁이는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장막에서 번뜩이는 불꽃들이 일시에 공명하고, 댈런을 향해 마치 별똥별처럼 내리꽂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십의 불꽃.

그 하나하나가 가진 파괴력은 난쟁이가 흩뿌려대던 유탄 이상.

[―――!]

그때 모닥불 쪽에서 펄쩡 뛰어오른 푸른 그림자가, 하늘을 향해 날개를 퍼덕이며 전성을 토해내고.

쩌저저저저정―!

댈런이 따로 손을 쓰기도 전에, 용언으로 빚어진 수백 개의 작은 결정들이 솟아오르며 떨어지는 불꽃들을 받아친다.

“무슨, 아룡 새끼가···어떻게!”

이제는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는 주문쟁이.

사이한 불꽃과 냉기 결정의 충돌로, 기이한 마력 파편들이 반짝거리며 허공을 수놓는다.

[뿌까!]

마치 ‘나 잘했지?하는 듯한 전성을 토해내며, 작은 날개로 파닥거려 날아와 앉는 새끼용.

댈런은 피식 웃었다. 펠버가 유언처럼 남겼던 말이, 마냥 헛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검을 들어올렸다. 하늘의 불꽃은 꺼졌지만, 아직 장막은 그대로인 상황.

뒤에서 신나게 폭발물을 흩뿌려대는 난쟁이의 화약을 아껴주려면, 주문쟁이의 영역을 처리해줄 필요가 있었다.

의지를 조금 집중하자, 성화가 뒤섞인 회오리가 폭발하듯이 검끝에서 쏘아지고.

콰과과과과―

단숨에 장막을 찢어발긴 그 폭풍을, 댈런은 그대로 내리그었다.

밤하늘에 그어지는 붉은 호선의 끝. 사령술사의 육신이 흡혈귀의 재생력을 시험할 틈도 없이 소멸하고.

“이거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군.”

거리를 두고 전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갑주 기사는, 쓰게 웃으며 잿더미가 된 자신의 동료를 쳐다봤다.

패랙―탕!

그리고 총성과 도끼가 동시에 허공을 찢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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