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의 바텐더(1)
잿빛 시체가 빛의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손끝으로 빨려 들어와 전신을 채우는 미묘한 고양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의 끄트머리에, 시체가 사라진 자리에서 반투명한 알림창이 떠올랐다.
[마녀를 스토킹한 흑마법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지능 +2, 마력 +1, 지옥문의 열쇠(C)]
“쯧.”
댈런은 혀를 찼다.
부끄러운 과거를 마주하는 건 언제나 달갑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뛰어난 지능 수치로 인해 과거의 모든 장면들이 생생한 댈런에게는 더욱 그랬다.
모니터 속 마녀의 미색에 빠져, 한참의 시간을 허비했던 시절.
성기사 캐릭터로 한 회차 내내 마녀를 따라다니다 실패한 그는, 다음 회차에 흑마법사 캐릭터로 다시 한 번 도전했었다.
‘바보 같으니라고. 공감대를 만들었어야지! 마녀랑 성기사는 서로 죽자 달려드는 사인데 퍽이나 잘 되겠냐?’
싸늘한 주검이 된 캐릭터를 비추는 모니터 앞, 과거의 자신이 읊었던 대사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 흑마법사 캐릭터로 플레이하며 한 회차를 갈아 넣은 끝에, 댈런은 마녀가 이미 임자 있는 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차라리 다행이었지.’
마녀의 애인인 반쪽짜리 흡혈귀를 만나 피를 죄다 빨아 먹히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두세 회차는 더 그녀를 쫓아다녔을 테니까.
댈런은 고개를 털었다. 과거의 실수는 과거에 묻어두는 걸로 족했다.
습관처럼 허리춤의 검과 도끼, 단검, 흐트러진 갑옷끈을 정리한 그는 상태창을 열었다.
――――――――
이름 : 댈런
레벨 : 20
[근력 : 34] [기량 : 28] [체력 : 31]
[감각 : 24] [지능 : 28] [마력 : 27]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지옥문의 열쇠(C)
――――――――
드디어 레벨 20이었다.
청린을 죽인 이후 놈의 용굴에서 수많은 하수인들을 처치하고, 르비바흐의 차르국 반란자들과 방금 전 복수자들까지 쓸어 담고서야 오른 레벨.
댈런은 얻어낸 능력치를 기량에 투자했다. 이로써 기량 능력치 역시 30이 코앞이었다.
불꽃 화살의 숙련도 역시 최대치가 머지않았고, 그 다음 순번은 아마 분쇄검이나 쏘아지는 번개가 될 듯했다.
‘하다 하다 흑마법사의 힘까지 얻게 되다니.’
스킬 목록을 살피던 그의 눈에, 용의 피 옆자리를 차지한 지옥문의 열쇠가 유독 밟혔다.
[지옥문의 열쇠(C)]
- 흑마법의 가장 기초가 되는 주문. 희생물을 대가로 지옥의 문을 열어젖히며, 그 크기는 희생의 가치에 따라 달라진다. 악마나 악신과 계약한 흑마법사라면, 그들의 힘을 빌려 좀 더 적은 대가로 문을 열 수 있다.
- 숙련도 1%
원래라면 신성력을 머금은 스킬과 한 영역 안에 담길 수 없는 힘.
하지만 계승자 옵션은 호환성이고 나발이고 무시한 채, 언제나 그랬듯 흑마법사의 힘을 영역 안에 들이밀었다.
온전한 용혈이 아니었더라면 두 힘을 함께 허용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에 무리가 왔겠지.
‘그러고 보니 용혈은 아직 숙련도가 하나도 오르지 않았군.’
댈런은 턱을 쓰다듬었다.
용혈의 재생 인자와 체력 수치가 영역의 힘에 접목되며, 검붉은 용의 피를 얻은 게 거의 두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적어도 몇 퍼센트의 숙련도는 올라야 정상인 시간. 그러나 용혈의 숙련도는 처음 얻었을 때와 동일하게 1퍼센트에 머물러 있었다.
‘비단 A등급 스킬이라 그런 건 아냐.’
신비의 영역으로 분류되는 B등급 이상의 스킬들.
동일한 A등급 대조군이 없기에 확언할 수는 없으나, B등급인 레레도나라의 비검 역시 신비의 힘임을 생각하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원인으로 꼽을 만한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성검으로 힘을 억누르고 있는 현 상태가 문제라는 것.
혹은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 힘을 온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었다.
‘조만간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겠지.’
댈런은 걸레짝이 된 흑마법사의 시체를 이리저리 뒤져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애당초 성기사단 본단에서 미궁도시로 급하게 출발한 게 이 문제를 손보기 위함이었다.
팔시온은 전 대륙에서 가장 많은 초인들이 모인 도시.
인구 수백만의 거대도시에 자신의 정체를 숨긴 사람들이 한둘은 아니겠으나, 지금 찾아가려 하는 이는 그중에서도 단언컨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베일에 감춰진 존재였다.
그 존재의 정체를 알고 있다 밝히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리스크를 감수해야만 하는 일.
허나 용혈을 통제하지 못함으로 빚어지는 위험보다는, 언젠가 마주해야만 할 그와의 대면을 좀 더 앞당기는 게 나은 선택지이리라.
“크으윽. 결국 입에 걸레 문 놈을 아예 걸레짝으로 만드셨군, 그래.”
그때 고통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피웅덩이 한가운데 쓰러진 기사가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직도 안 갔소?”
“쿨럭! 안 갔지. 크흐흐, 이래 봬도 한창때 거인이랑 홑몸으로 붙은 적도 있다네.”
기사는 피를 왈칵 토해내며 웃었다. 사실 내버려 둬도 얼마 안 가 죽을 몰골이었다.
전격 품은 도끼는 놈의 왼쪽 어깨부터 가슴께까지를 그대로 썰어버렸고, 그 과정에서 온몸을 번갯불로 지져버렸다.
그렇게 반쯤 통구이가 된 몸뚱이 내부를, 비요른의 특제 총탄이 헤집고 들어가며 진탕으로 만든 상황.
사실상 그 즉시 절명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다.
제 목숨줄을 부여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 능력이 평범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댈런은 성큼성큼 다가가 기사의 품을 뒤적였다.
도끼를 막으려다 부러진 장검은 저 멀리 던져놓고, 고급품으로 보이는 단검과 금화 주머니를 챙겼다.
“재생 포션이 있었군.”
품속 깊은 곳에서 붉은 물약이 든 병 두어 개를 꺼낸 그가 말했다. 기사가 피거품 섞인 웃음소리를 냈다.
“크흐, 마시기라도 했다간 단칼에 죽였을 거 아닌가? 난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네.”
“그렇군.”
“흐흐, 자네···같은, 쿨럭! 자네······.”
기사가 말을 흐렸다. 댈런은 고개를 들어 놈의 눈을 쳐다봤다.
이미 생기가 빠져나간 눈. 흐리멍텅한 동공은 별 많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쯧쯧. 꼴 좋다, 제국 차별주의자 새끼.”
뒤에서 유탄과 총을 갈무리하던 비요른이 말했다. 말은 꼴 좋다였지만 그리 기쁜 표정은 아니었다.
일행은 썩어버린 망자의 유골들과 두 복수자의 시체를 치워두고 다시 잠을 청했다.
모닥불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잘만 타닥거렸다.
***
일주일 후.
두 사람과 용 한 마리, 악마 하나는 미궁도시에 도착했다.
여관에 짐을 푼 그들은 곧장 청동 구역의 뒷골목으로 향했다.
거미줄처럼 좁고 복잡하게 뻗어있는 골목길들.
판석 없는 흙바닥은 오물과 쓰레기로 지저분했고, 어두운 응달에는 쥐와 이름 모를 벌레들이 만찬을 벌이고 있었다.
경비병의 순찰권을 벗어난 골목길에는 초점이 흐릿한 사람들이 곳곳에 맴돌았다.
거적때기나 다름없는 옷. 헝클어진 머리. 침 자국과 뭔지 모를 흔적들로 지저분한 얼굴.
반쯤 풀린 눈은 그들 곁으로 누군가 지나칠 때 순간 또렷하게 빛나곤 했다. 재빠르게 눈앞의 사람을 탐색해, 희생자인지 지배자인지 분류하는 곁눈질이었다.
물론 이 미터쯤 되는 거구의 전사와, 그 반 남짓밖에 안 되는 신장이지만 충분히 단단해 보이는 난쟁이는 언제나 지배자였다.
얽히고설킨 골목을 제 집처럼 돌아다니던 난쟁이는, 어느 지점에서 멈춰서서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떻게 하겠나?”
“뭘?”
“까마귀 둥지 말일세. 아직 그 바텐더 놈이 지키고 있거든. 시에나의 행적을 뒤쫓아보려 해도, 그 놈이 지키고 있는 이상 둥지 안을 들쑤시기는 쉽지 않을 거야.”
비요른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며칠 전에 언데드 수십 놈에게 총알 세례를 쏟아붓던 드워프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뭐 대단할 거 있소? 그냥 들어가서 물어보면 되겠지.”
“그놈에게? 안 되는 일일세. 시에나가 사라진 원인이 그놈일지 어떻게 아는가? 평소에 입 꾹 닫고 있을 때부터 수상했던 놈이네. 어쩌면 말 할 줄 알면서 숨기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난쟁이가 기관총처럼 말을 쏟아냈다.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아무리 본능적인 경계심이라지만 좀 과해 보이는 것도 사실. 그가 별 대답이 없자 난쟁이는 혀를 차며 제 생각을 정정했다.
“···쯧. 하긴, 시에나의 행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놈 역시 그놈이겠지. 그럼 이렇게 하세.”
“어떻게?”
“자네가 도시에 오랜만에 왔으니, 우리 함께 손님으로 위장 잠입하는 걸세.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에나의 행방을 물어보고, 제대로 대답하지 않거나 수틀리면 도끼로 찍어버리는 거네.”
“······.”
***
[까마귀 둥지]
[영업 시간 : 일시 영업 중단]
낯익은 술집의 문 앞에는 익숙하지 않은 패가 걸려있었다.
딸랑-
댈런은 문을 열었다. 여전히 잠겨있지 않은 문 안쪽, 깔끔하게 정리된 테이블과 의자들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찬장에 꽉꽉 들어찬 술병도, 천장에서 은은하게 분위기를 만드는 마력석 조명도 여전했다.
그러나 몇 주째 손님 하나 없는 술집은, 미묘하게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댈런은 바테이블 앞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언제나 앉는 자리. 그는 언제나 보아왔던 바텐더에게 손을 들고 주문했다.
“멜론드 하이랜더 한 잔.”
잔을 닦던 버번은 손을 멈추고 댈런을 슥 쳐다봤다. 댈런도 마주 봤다.
잠시 적막한 공기가 맴돈 끝에, 바텐더는 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쪼르르륵.
투명한 유리잔에 얼음이 담기고, 연갈색 액체가 빈 공간을 가득 채운다.
뒤늦게 쭈뼛거리며 앉은 난쟁이가 자기 술을 주문했다.
“독한 맥주 한 잔 주시오.”
“······.”
“없으면 아무거나. 그, 그냥 나도 저걸로 주시면 좋겠소.”
난쟁이는 말을 더듬다 못해, 귀까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댈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위장 잠입이라며?
버번이 새 잔을 준비하는 동안, 댈런은 그 말 없는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각진 턱과 뚜렷한 눈썹. 약간 멍한 듯 무뚝뚝한 얼굴.
까마귀 둥지의 단골들에게 버번은 말을 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리고 바텐더에게 말 없음은 나쁜 게 아니었다.
술잔을 앞에 두고 제 비밀을 술술 늘어놓는 취객들에게, 입 무거운 바텐더만큼이나 좋은 친구도 없었으니까.
거기다 그는 바텐더로서의 실력도 훌륭했다.
까마귀 둥지가 정보상으로뿐만 아니라 술집으로도 인기 있었던 건, 그의 공이 팔 할은 되리라.
달칵.
댈런은 단숨에 잔을 비우고 내려놓았다. 버번은 난쟁이에게 술을 따라주곤 다시 잔을 닦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손님에게 술을 건넨 뒤면 으레 기계처럼 다시 접시나 잔을 닦는 그 모습.
댈런은 유리잔을 손끝으로 두어 번 톡톡 건드리곤 입을 열었다.
“부탁할 게 있소, 카일버르쿠스 아르번.”
“음, 풉!”
난쟁이가 마시다 말고 잔의 내용물을 뿜었다. 그리고 동시에 바텐더의 손도 멈췄다.
잔에서 시선을 뗀 버번의 눈은, 평소의 진갈색 눈동자가 아니었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지?]
입을 뗌과 동시에 술집 안을 가득 채우는 전성.
[잊어라.]
마성을 품은 한 마디가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공기를 짓누르고.
덜컹, 쿠당탕!
언령의 힘에 난쟁이가 눈을 까뒤집고 마룻바닥에 널브러진다.
톡. 톡.
댈런은 바테이블을 두드렸다.
손끝에서 넘실거리는 작은 화염에, 테이블 위로 검게 탄 자국이 점점이 남았다.
그의 세로로 찢어진 두 눈은 바텐더의 시선을 정면에서 받아내고 있었다.
눈동자 안 검붉게 일렁이는 화염. 어느새 진동을 멈춘 성검.
바텐더, 버번은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짚었다.
[그래, 익숙하다 했는데 적창이었나.]
흥미와 경계, 호기심과 지루함이 미묘하게 뒤섞인 눈빛.
그 눈빛을 담아낸 눈동자는, 댈런의 동공과 마찬가지로 세로로 찢어진 채였다.
갈녹색으로 번뜩이는 눈의 용이, 용혈을 가진 인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 불멸자로서도 오래 살아온 편이라 생각하건만, 인간의 핏줄이 온전한 용의 피를 담아낸 건 처음 보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