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04화 (104/288)

둥지의 바텐더(2)

[하지만 아직 힘을 다루는 데는 미숙한 모양이지.]

테이블 위. 손끝에서 피어난 불길과 검게 탄 자국을 본 버번이 말했다.

[용의 힘을 다스리는가, 아니면 용의 피에 삼켜지는가.]

세로로 찢어진 갈녹색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이미 술집을 가득 채웠던 마력이 더욱 강렬하게 소용돌이쳤다.

진룡의 존재감이 어깨를 짓누르고, 핏줄 속의 용혈을 툭툭 건드리며 자극한다.

[내게 보여라.]

카일버르쿠스 아르번. 용신의 첫 포효.

진룡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오랫동안 삶을 영위해온 이 고대의 존재가, 입을 열고 언령의 권능이 담긴 전성을 뱉은 순간.

화르르륵!

검붉은 용의 피가, 그 울림에 맞서 불꽃을 일으켰다.

파스슥―

불길이 앉아있던 의자를 집어삼킨다.

찰나 이후 남은 건 잿가루 몇 줌과 짤막하게 타다 만 나무토막뿐이었다.

자연스레 두 발로 서게 된 댈런의 부츠 아래, 검붉은 일렁임이 발자국처럼 남아 마룻바닥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쿠르르르······.

흔들리는 벽. 푸스스 먼지가 쏟아지는 천장 틈.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기둥과 바닥이 온몸을 덜덜 떨어댔다.

의자가 넘어가고 잔이며 그릇이 와장창 깨지는 배경 안에서, 오로지 두 사람의 모습만이 유일하게 정적이었다.

팔짱을 낀 채 필멸자를 응시하는 진룡과, 그 시선을 모자람 없이 받아내는 용혈의 주인.

쿠르륵. 콰직!

둘 모두 손짓 하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마력이 얽히는 것 자체에 이내 공간마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먼저 손을 거둔 건 버번이었다.

[되었다.]

스아아아―

술집 안을 뒤흔들던 언령의 마력이, 그 말 한마디에 언제 그랬냐는 듯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사라지는 과정에서 불탔던 바닥과 테이블을 수복하고, 어질러진 테이블이며 집기들을 모두 원상태로 돌리는 마력.

단순한 주문의 영역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현상은, 눈앞의 존재가 신비 그 자체인 진룡임을 증명하는 대목이었다.

“후우.”

핏줄 속 용혈을 자극하던 압박이 사라지고, 댈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심호흡하며 용혈을 가라앉힌 뒤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잡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후르르 떨기 시작하는 성검.

버번은 그걸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성검의 힘으로 용혈의 자의식을 억누른다라. 기발한 방책이군. 허나 엄밀히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다.]

“알고 있소.”

댈런은 검 손잡이를 툭툭 두드리고 대답했다. 그는 잔에 남은 얼음을 입에 들이붓고 씹었다.

아직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입안. 얼음은 씹히기보다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그래서 그쪽 도움을 받으러 온 거요.”

[내 도움?]

버번이 되물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의 힘을 담을 그릇을 원하오.”

***

자리를 옮기자는 버번의 말에, 오랜만에 방문하게 된 시에나의 사무실.

손때 묻어나는 책장과 찻잎 통들은 물론, 테이블과 소파를 비롯해 새로 들여온 가구들 역시 역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몇 달 전과 다를 바 없이 나긋한 적막감과 차향이 함께 감도는 건, 주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대신한 바텐더의 꾸준한 관리 덕분이겠지.

찻잔 두 개 곁에 술병을 올려둔 버번은, 소파에 털썩 앉는 댈런을 보고 아껴두었던 대답의 첫마디를 뱉었다.

[기고만장한 발언이구나.]

쪼르륵.

바텐더의 손끝. 찻잔에 차 대신 술이 따라진다. 시에나가 봤으면 기겁할 일이라 생각하며 댈런은 반문했다.

“뭐가 말이오?”

[네 부탁 말이다. 용의 힘을 담을 그릇이라니, 그건 곧 신비의 육신을 원한다는 이야기 아니냐.]

“맞소.”

갈녹색 눈이 찌푸려졌다. 기분 나쁘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도 어려운 일일진대, 무에서 신비를 창조함은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걱정은 마시오. 재료는 있으니.”

[호오?]

찌푸려진 눈이 기묘한 호선을 그린다.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다채로움이었다.

[무어냐?]

“진룡과 아룡의 심장.”

댈런은 아공간을 슬쩍 열었다. 심장의 실물을 꺼낼 것까지는 없었다.

열린 아공간의 입구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기운만으로도, 수천 년 묵은 진룡의 감각이 그 내용물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했으니까.

[···청린이 떨어졌는가. 추방자의 허울뿐인 군림도 끝내 저물었구나.]

버번은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저거 자기 잔만 채우네. 나는 뭐 입도 아니라 이건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또 한 번 자신의 잔을 채운 바텐더가 테이블 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긴 이야기는 접어두도록 하지. 그대 같은 필멸자들은 현재에 충실한 법이니까. 허면 내 묻도록 하겠다. 내가 왜 그대의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 생각하느냐?]

“그야 나도 그쪽을 도와줄 생각이니까.”

댈런이 퉁명스레 말했다. 잔을 들어올리던 손이 멈칫했다.

[필멸자가 불멸의 존재를 돕겠다? 대체 무엇으로 말이냐.]

“불멸의 존재라고 모두 자유의 몸인 건 아니오. 오히려 오랜 세월을 살아왔기에, 그 시간만큼이나 수많은 족쇄를 달고 사는 법이지.”

[···말 하나는 번지르르하게 하는구나. 악마를 그 입으로 베었던가?]

“둥지가 빈 건 시에나가 미궁으로 내려갔기 때문이겠지.”

용이 입을 다물었다. 댈런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쪽이 신비의 육신을 빚어주는 대가로, 내가 그녀를 따라가 위험에서 구해주겠소.”

끼이익.

댈런은 소파에 몸을 깊이 묻은 채 바텐더를 응시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 꿈틀거리는 눈꼬리.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몸을 앞으로 천천히 기울인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 꺼낸 말의 무게를 아느냐?]

짧은 물음에 마력은 담겨있지 않았다.

허나 착 가라앉은 공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창칼이 되었다.

눈앞의 진룡이 날 때부터 쥔 언령의 권능.

그 권능의 깊이와 너비는,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감정의 미세한 변주만으로도 필멸자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였다.

“무게라.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댈런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송곳니를 씩 드러내며 말했다.

“그쪽이 시에나의 조상, 첫 번째 깃털의 마녀와 나눴던 계약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분신체로 시에나의 곁에 붙어있게 된 복잡한 사정을 이야기하는 건가?”

용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좋은 신호였다.

이건 몇 달 전, 금강궁의 심처에 거하는 초월자 중 하나를 대면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천변만화의 얼굴이라 불리는, 에버론 라크탈라.

수백 년을 살아온 노괴의 앞에서, 댈런은 초월자 중 가장 베일에 싸인 선각자의 이름을 언급함으로 그 환심을 샀던 적이 있었다.

눈앞의 노룡도 그와 같았다.

까마귀 둥지의 바텐더, 카일버르쿠스 아르번.

용신의 첫 포효라 불리는 노룡은 다가오는 멸망을 내다보았을 뿐 아니라.

그 멸망의 무게와 견주어볼 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살아오기까지 한 존재.

그런 존재의 호의와 도움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필멸의 존재를 대할 때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하는 법이다.

“깃털의 마녀 시에나는 혈통을 타고 내려오는 계약으로 그쪽과 이어져 있지. 시에나가 위험에 처하면, 그쪽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를 구하러 가게 되어있소.”

수천 년 세월을 거슬러, 역사보다 전설에 가까워진 비밀을 풀어놓는다.

그건 오래 전, 인간이 이 대륙에 지금과 같은 세력을 잡기도 전의 이야기였다.

태초의 마녀에게서 흩어진 열세 마녀의 시조들.

그중 깃털의 마녀와 계약한 용.

용은 당신의 후손이 위험에 처하면 단 한 번 본신을 일으켜 목숨을 구해주겠노라 맹세했으며, 그 약속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빛을 바래지 않고 이어져왔다.

비록 분신이라지만 마녀 본인에게마저 정체를 숨긴 채, 작은 술집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여기서 한술 더 뜨면 어떨까.

댈런은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허나 그쪽 본체는 지금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되는 상황이지. 그건 종말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을 테니까. 칼날산맥 저 깊은 골짜기, 함께 봉인된···.”

[그만. 거기까지다.]

버번이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억누른 동요. 술잔에 일어나는 파문들.

댈런은 말을 멈추고 용의 얼굴을 쳐다봤다.

[많은 걸 아는군. 인간.]

용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수천 년 전 초대 깃털의 마녀와 그가 맺은 계약은, 당대에 이르러는 당사자인 마녀마저도 잊어버린 약속이었다.

하물며 깊은 산맥 속에 기거하는 본신의 사정이야, 두말할 것 없이 극소수의 초월자들 이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고.

한 세기도 채 살지 않은 필멸자가, 눈앞에서 그 모든 비밀을 낱낱이 내뱉을 때의 기분은 어떠할까.

적어도 영겁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경험이 없는 댈런으로선 이해가 불가능한 심정이겠지.

[허면 무얼 말하고자 하느냐.]

중요한 건 그의 몇 마디 말이 노룡의 심중에 작은 파문 정도는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비밀 위에 비밀을 끼얹고, 스스로가 그 어떤 초월자도 예측하지 못한 변수임을 증거해낸다.

오래전 에정되어 다가오는 종말 앞.

체념마저도 추억일 뿐인 존재에게, 그런 변수란 흥미를 품지 않기 어려운 법.

그 결과는 마치 손에 쥔 술잔에서 일어난 파문처럼, 수천 년 동안 잔잔하던 호수에 연달아 파문을 겹쳐내기에 충분했다.

달칵.

잔을 내려놓은 버번의 손이, 병을 들어 댈런의 잔에 투명한 증류주를 따라주었다.

댈런은 독주에 가까운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대답했다.

“시에나의 죽음을 막아, 그쪽이 스스로 택한 두 가지 의무를 저버리지 않도록 해주겠소. 더불어 그녀가 힘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주지. 처음부터 그걸 위해 떠난 여정일 테니까.”

[좋다.]

버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의 이름으로 언약을 맺도록 하지.]

***

찰박.

골목길은 진창투성이였다. 이틀 내리 쏟아진 봄비 탓이었다.

밑창이 불타버린 부츠 대신 아공간에서 새 부츠를 갈아신은 댈런은, 청동 구역의 골목길 사이를 활보하고 있었다.

‘버번을 가장 먼저 만나길 잘했군.’

댈런은 왼팔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용의 이름으로 계약을 체결한 이후, 버번은 그에게 작은 도움을 건넸다.

가방에서 꼬물거리던 새끼용, 청린을 불러내 그 능력의 일부를 일깨워준 것.

‘청린의 이명은 용신의 좌완 갑주. 그대가 아는지 모르겠으나, 청린은 대대로 용신의 광기를 억누르는 제어장치였지.’

바텐더는 그렇게 말하며 새끼용의 몸을 몇 번 쓰다듬고 나지막이 언령을 읊어주었다.

그러자 용은 곧장 댈런의 팔에 달라붙더니, 어깨부터 손끝까지 감싸는 단단한 결정 갑옷의 형태로 모습을 바꿨다.

‘뀽?’

‘용의 피가 몸과 정신을 잠식하는 걸 막아줄 거다. 지금처럼 성검에 의지해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면서 시에나를 구하는 건 힘들겠지.’

‘뀽뀽.’

‘눈에 띄는 게 꺼려진다면, 문신의 형태로 대체할 수도 있다. 북방인 전사가 몸에 그림을 그리는 건 드문 일이 아니지.’

새끼용은 그렇게 왼팔 전체에 문신으로 자리 잡았다. 반가운 일이었다.

더이상 가방에서 들킬 듯 말 듯 꼬물거릴 일도 없었고, 청린이 왼팔에 달라붙은 순간 성검의 도움 없이도 용의 피는 잠잠하게 가라앉았으니까.

뒷골목에서 대로변으로 접어들자 인파가 몇 배는 많아졌다.

엇갈린 강물처럼 저마다의 흐름에 편승한 사람들 사이. 댈런은 갈리오스 상단 지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덜그덕. 덜그덕.

강물 위를 떠다니는 선박처럼, 수레와 말들이 인파를 헤집고 지나다닌다.

그런 배들이라면 으레 떨어질 쓰레기들을 노리고 달려드는 물고기도 있기 마련이었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아이들은 그런 고기떼였다.

작게는 대여섯, 크게는 스물 이상이 뭉쳐서 몰려다니는 소년소녀들.

개중 한 무리가 댈런의 곁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탁. 무리의 소년 중 하나가 댈런의 몸에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 제 갈 길을 가려는 소년의 어깨를, 댈런은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붙잡아 세웠다.

“으앗.”

억센 손아귀에 옴짝달싹 못하고 붙잡힌 소년. 댈런은 소년의 품으로 손을 가져갔다.

“뭐예요! 당신 뭔데! 여기 용병이 사람 팬다!”

“도둑질은 나쁜 짓이라고 배우지 않았나?”

소년의 옷 안쪽에서 돈주머니를 꺼낸 댈런이 물었다.

금화가 가득 담긴 묵직한 주머니. 그건 방금까지 댈런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물건이었다.

“씨발! 재수 없게!”

“말버릇 고쳐라.”

“으읍!”

댈런은 엄지와 검지로 소년의 입을 잡아 오리 주둥이처럼 만들어주었다.

몇 번 그러고 놓아주자, 입술이 살짝 부은 소년은 금방 제 무리로 달려가 합류했다.

다시 우르르 몰려가는 소년소녀들. 아마 저 중 몇몇의 품속에는 어느 행인의 돈주머니가 들어있을 테였다.

“야, 이 도둑놈들아! 거기 서지 못해!”

그때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경비대에 넘기지 않을 테니, 곱게 돈주머니 내놔!”

그건 대장장이 르베론 아하킴의 조카딸이자, 댈런의 첫 지명의뢰를 함께했던 길잡이.

하수도 청소부, 페니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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