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특무대(1)
행인들 사이로 익숙한 묶음머리가 보인다. 댈런은 몸을 움직여 자연스레 그 앞을 가로막았다.
“이 조막만 한 놈들 같으니···앗!”
콩.
묶음머리 청소부의 이마가 가슴팍에 부딪힌다.
짜증을 담아 휙 치켜드는 고개. 조막만 한 이마에는 한껏 힘줄이 돋아있었다.
“어?”
물론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어머! 댈런 씨!”
“오랜만이오.”
페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쳤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두어 걸음 물러서서 눈을 비빈 그녀는, 댈런이 진짜임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활짝 폈다.
“오랜만? 정말 오랜만이죠! 거의 반 년 만 아닌가요? 이제 도시에 돌아오신 거예요? 아니, 그보다 그동안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니셨길래···.”
간만에 들어보는 해맑은 목소리였다. 듣는 이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는 톤.
하지만 인파로 드글드글한 대로 한가운데는, 재회의 반가움을 나누기에 썩 적절하지 않은 장소였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누굴 쫓던 거 아니었소?”
“어? 아차! 맞아요! 저 꼬마놈들이 돈주머니를 훔쳐갔···어디 갔지?”
“베테랑 하수도 청소부라더니. 공무원 부심은 다 어디 간 거요?”
“이익, 못 알아들을 소리 하지 말라니까요! 그리고 평소 같았으면 이런 허접한 시도에 당할 일도 없었다고요. 오늘만 제 주머니에 손을 댄 녀석들이 몇 명이나 됐는지 아세요?”
페니가 살짝 약이 오른 목소리로 대꾸했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확실히 사람이 많긴 많았다.
원래부터 청동 구역의 남부 지구는 사람으로 바글바글한 장소지만, 오늘은 그 원래를 가볍게 능가할 정도.
순식간에 거리 전체를 뒤덮은 감각은, 그 숫자가 몇 달 전과 비교해 어림잡아 두 배쯤 된다고 말해주었다.
행인의 머릿수가 두 배면 소매치기의 숫자도 최소 그만큼은 늘었을 터.
어쨌든 이 정도로 사람이 불어났다면 그 이유 역시 알아둘 필요가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잡담이나 나눌 때는 아니었다.
“털린 거. 돈주머니요?”
댈런이 물었다. 페니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네. 저희 대장간 인장을 은색 실로 수놓은 가죽 주머니예요. 제가 직접 수놓았답니···아니, 이게 아니라.”
제 손으로 입술을 탁탁 친 페니는 짧게 상황을 덧붙였다.
소매치기 소년소녀들이 털어간 돈주머니 안에는 금화와 은화만 있던 게 아니었다.
새로 확보한 거래처에서, 선납금을 지불하고 목재와 금속괴를 계약한 전표까지 들어있다는 게 문제.
르베론 아하킴의 대장간, 미스릴 제련소는 근 몇 달간 청동 구역의 명품 대장간 중 하나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만큼 새로이 거래를 트는 공급처들이 많아졌고, 이제 막 안면을 터가는 거래에서 전표를 잃어버리는 건 상당히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요즘 들어서 소매치기들이 너무 날뛴다니까요. 뭐, 소매치기뿐만은 아니지만요. 살인이며 강도, 그보다 더 음습한 범죄들도 몇 배는 불어났다고 들었어요.”
“청동 경비대가 고생하겠군.”
“그치들은 이미 반쯤 포기했을걸요?”
페니가 볼을 부풀렸다. 하긴, 청동 경비대의 신뢰도야 원래부터 바닥이긴 했지.
댈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확장한 감각을 좀 더 세밀하게 가다듬었다.
붐비는 인파 속. 이미 한참 전에 도망간 이들의 흔적을 쫓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허나 댈런의 감각과 지능 수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되었고, 영역의 힘은 불가능을 가능성으로 빚어내는 것에 본질을 두는 바.
달그락. 쩍.
도자기를 가득 실은 상단의 수레 안, 짐더미 속에서 약한 도자기의 파열음이 귓가를 울리고.
꾸르륵.
진창을 밝아대는 수백 개의 발디딤 아래로, 단단해져버린 땅을 파고드는 지렁이의 꿈틀거림이 발끝에서 느껴진다.
수천을 넘어 만 단위의 자극들이 동시에 머릿속에 쏟아져 들어오고, 이를 분류하고 선별해냄과 동시에 자연스레 한 줄기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우우웅···.
댈런은 눈을 떴다.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번뜩이는 마력광. 그곳에서 시작되는 미약한 마력의 울림.
물리적인 어둠을 넘어 신비를 꿰뚫어 보는 시야가, 새로운 방향으로 가능성의 첨단을 뻗어나간다.
‘수레바퀴 자국에서 아래쪽으로 세 번째 흔적. 헐거운 가죽신 발자국. 시간은 3분 전. 체중은 대략 30에서 40킬로그램에 보폭과 발 크기는 어린아이의 것. 불규칙한 속도로 달려갔다.’
지나간 이들의 자취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체격과 성별, 나이와 같은 표면적인 정보가 먼저.
달려가는 모양새와 호흡의 가쁜 정도, 얼굴에 묻어나는 감정이 그 위에 더해지고.
머지않아 그 품속에 움켜쥔 돈주머니의 무게까지도 또렷하게 인식됐다.
‘찾았군.’
그건 흔적을 추적하는 걸 넘어서, 과거를 역산하는 이적에 가까운 행위였다.
댈런이 상단 호위를 업으로 삼던 용병 시절부터, 감각과 지능 수치는 단언컨대 가장 오래도록 함께 사용한 조합.
다가오는 습격을 인지하는 속도가 곧 생존률을 의미하는 용병의 세계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조합해온 두 능력치가.
어느덧 30에 근접하게 성장하면서, 이미 또 하나의 이적으로 완성된 야간 시야의 디딤돌을 밟고 새로운 가능성을 틔워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댈런 씨?”
페니가 말했다. 댈런은 그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어······.”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는 소녀의 어깨.
눈동자 안에서 번뜩이는 마력광은, 같은 인간의 것이라 말하기에 다소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창백해지려 하는 그녀의 얼굴을 본 댈런은 뒤늦게 그걸 깨달았다.
원체 초인적인 존재들과 붙어다니다보니 잠시 잊었던 반응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슬쩍 고개를 털었다. 다시 뜬 눈은 원래의 건조한 검은 눈동자였다.
“사람···맞으신 거죠?”
“그 질문 저번에도 하지 않았소?”
댈런은 낮게 웃었다. 페니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준 그는, 인파 속으로 스르르 몸을 감추며 말했다.
“갈리오스 상단 쪽에서 기다리시오. 주머니를 찾아서 따라가겠소.”
***
“흐흐흐.”
뒷골목 깊숙한 곳의 다 주저앉아가는 단층 건물.
퀴퀴한 냄새가 풀풀 나는 안락의자 위에서, 민머리 건달 머핀은 돈주머니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었다.
“흐흐. 으흐흐흐.”
묵직했다. 심지어 금화가 반 이상이었다. 웃음을 참으려야 참을 수 없는 무게였다.
심지어 함께 들어있던 종이 쪼가리는 어느 상단의 전표인 것 같았다. 까막눈인 그였지만 눈칫밥으로 이 정돈 알아볼 수 있었다.
암상에 팔아먹으면 삼 할 정도의 가격은 쳐주겠지. 전표로 거래할 정도면 금화 단위일 테였다.
‘몇 달은 흥청망청 써도 남아돌겠구만. 이참에 마약 쪽에도 사업을 조금 확장해 볼까?’
자꾸만 입꼬리가 씰룩이는 걸 애써 참아내며, 머핀은 소녀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줬다.
“잘했다. 오늘 저녁은 닭고기를 주마. 다음.”
“진짜요? 야호!”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뛰쳐나갔다. 그 뒤를 이어 주둥이가 퉁퉁 부은 소년이 나아왔다.
풀 죽은 표정. 머핀은 바로 눈치챘다. 이놈 허탕이구나.
묵직한 돈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그는 곧장 몽둥이를 들었다. 눈치 빠른 소년이 곧장 바닥에 엎드리며 빌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분명 털었는데, 분명 금화였는데···!”
“입으로만 금화였다 씨불거리는 건 길거리 주정뱅이라도 할 수 있겠다! 이 좆 만한 새끼···!”
머핀은 소년을 사정없이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뻑! 뻑!
“아악! 컥! 사, 살려주세요! 아아악!”
소년이 비명을 질렀다. 물론 몽둥이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머핀은 알았다. 이런 놈들 버릇을 미리 고쳐두지 않으면, 나중에도 뺀질거릴 게 분명하다는 걸.
어차피 요즘 남부 지구의 인력은 넘칠 만큼 유입되고 있었다. 뒷골목 애새끼 하나쯤 죽는다 해도 전혀 탈이 없을 정도였다.
오히려 이참에 본보기를 만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한 머핀이 몽둥이 쥔 손에 힘을 더 실은 찰나였다.
“야.”
굵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머핀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활짝 열려있는 창문을 뒤로 하고, 웬 거구의 용병이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있었다.
머핀은 재빨리 용병을 훑었다.
자신보다 머리 한 개 반은 더 큰 덩치. 무감정한 얼굴. 여기저기 손상되고 더러워진 갑옷.
‘씁.’
완전 초짜는 아니었다. 못해도 의뢰 몇 개쯤은 받아본 모양새였다.
하지만 정말 노련한 용병이라면, 창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소리 없이 목에 칼부터 들이밀었을 터.
거기다 이런 뒷골목에 들어오는 용병은 정말 잘 쳐봐야 은패였다.
‘혼자 상대해서 좋을 건 없겠어.’
빠르게 판단을 마친 머핀은 보란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말했다.
“넌 뭐냐, 씹새끼야?”
“······.”
“씨발, 대답 안 하지? 야, 삼촌들 불러와라.”
머핀은 방금까지 개 패듯이 패던 소년을 툭툭 찼다.
죽은 듯이 엎어졌던 소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꼬챙이며 단도, 못 박힌 몽둥이 따위를 든 사내들이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자연스레 용병이 등진 벽을 둘러싸고 반원을 만드는 부하들.
머핀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슬쩍 웃었다.
“흐흐, 언제까지 그렇게 입 꾹 닫고 있는 게 가능할까. 용병 양반. 어디 조직에서 부탁 받고 왔어?”
***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그는 의문이었다. 이놈들 무슨 자신감이지?
보통 큼직한 칼 든 용병을 만나면 어지간한 칼잡이라도 한 수 접기 마련이다.
적어도 상대방의 기세를 살핀다거나, 최소한 간이라도 한두 번 보는 게 상식.
뒷골목 건달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오히려 뒷골목 생태에 익숙해진 놈들일수록 몸을 사리곤 했다.
미궁도시 팔시온은 초인들이 가득한 거대도시.
원체 광대한 탓에 자주 마주치지는 못할지언정, 이곳의 뒷골목에는 규격 이상의 초인도 종종 드나들곤 했으니까.
애당초 시에나의 까마귀 둥지나 필로폰네 과수원, 혹은 비요른의 공방 같은 곳들부터가 음지의 실력자들이 애용하는 장소다.
길거리나 삼류 여관에서 마주친 것도 아니고, 이렇게 대놓고 자기 영역에 침입한 걸 봤으면 일단 한 발 물러나고 보는 게 일반적인 반응일 텐데.
“죽어!”
내리치는 각목. 한 걸음 옆으로 움직이는 것만으로 그 궤적에서 벗어난다.
댈런은 건달의 손목을 가볍게 꺾어주고 가슴팍을 툭 밀어주었다.
손바닥 모양으로 움푹 파인 흉곽에, 건달이 피를 뿜으며 우당탕 굴렀다.
“씨발! 마법사다! 한꺼번에 족쳐라!”
그리고 우르르 달려드는 건달들을 보며, 댈런은 깨달았다.
‘이놈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군.’
쉬익!
찔러오는 쇠꼬챙이. 목을 노리는 단검. 어깨를 찍어오는 벌목도끼를 보며 댈런은 생각에 잠겼다.
몇 달 전, 댈런이 이 도시에서 막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그의 도움을 받은 청동 경비대는, 역행의 사도들과 텔리아 상회가 청동 구역 전역에 만들어둔 은신처들을 습격했다.
그 과정에서 뒷골목의 조직들이 대거 와해된 건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텔리아 상회는 음지의 거래망을 기반으로 급격한 성장한 이뤄낸 바.
그들의 공급 루트에 밀수꾼과 폭력 조직이 한식구가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전력을 다한 경비대의 진압에 수백에 달하는 조직이 풍비박산 난 지 어언 반 년.
반 년이면 실세가 사라진 청동 구역의 뒷골목에, 새로운 조직들이 제 자리를 만들어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댈런은 잠시 현실로 돌아왔다.
날붙이를 앞에 두고 한없이 느려진 사고감각 속. 그의 손이 순간 흐릿해졌다.
쩌저저저저적!
피와 살점, 뼛조각이 비산한다.
박살난 두개골. 으스러진 팔뼈.
쏟아지는 뇌수는 동료 건달의 내장과 뒤섞였고, 산산조각난 단검은 제 주인의 얼굴 거죽에 유탄 파편처럼 틀어박혔다.
뼈와 살이 꺾이다 못해 기괴하게 비틀리고, 으깨지는 걸 넘어서 폭발하듯 흩뿌려진다.
한순간에 몸 안에서 밖으로 나와버린 조직들이 뜨거운 김을 훅 피워올렸다.
후두두둑.
희고 붉은 것들이 떨어졌다. 댈런에게 날붙이를 들이밀고도 살아남은 이는 없었다.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놓고 뒤에서 지켜보던 민머리 건달 한 놈만이, 입을 뻐끔거리며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야.”
철벅.
방금 만들어진 질퍽한 웅덩이를 지나, 민머리 건달 앞에 선 댈런이 말했다.
“뭐 좀 물어보자.”
“어, 어어···.”
민머리 건달은 멍청하게 그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댈런은 핏자국 묻은 놈의 뺨을 슬쩍 만져주었다.
비명 지르고 쓰러진 건달은 그제야 초점이 돌아왔다. 댈런은 다시 물었다.
“대답?”
“우읍, 예에···물어보십쇼.”
“너랑 니 따까리들. 어디서 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