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털의 마녀(2)
입김이 새하얗게 맺혔다. 밤공기는 서늘했다.
아니, 사실 서늘하다는 말로는 한참 부족한 게 작열사막의 밤이었다.
사막의 모래가 흘려내는 냉기는 만년설도 저리 가라 할 정도.
낮 동안 뿜어대던 빛과 열기는 다 거짓이었다는 듯, 야영지의 텐트마다 고드름이 줄기줄기 얼어있었다.
자박. 자박.
그런 모래 위를 걸으면서도 시에나는 딱히 추워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즐겨 입는 어두운 빛깔의 털옷은 상당한 값어치의 보온 마법이 내장된 물건이었다. 부츠에도 비슷한 주문이 몇 개 걸려 있었고.
온기 마법으로 약간 발그스레 물든 흰 피부. 언제 씻었는지 물기가 촉촉한 머리칼.
왠지 희미하게 향기까지 나는 듯했다. 차향(茶香)이었다.
“저번에 이야기했지.”
얼마나 걸었을까. 한동안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시에나가 말문을 열었다.
“뭘?”
“나 빚지는 거 싫어한다고.”
“그랬지. 기억나는군.”
미궁으로 내려가기 전이었나. 어느 건방진 제국 귀족 자제놈이 시비를 걸어오던 날이었다.
그날 시에나는 연발 쇠뇌로 놈의 기사를 적당히 만져놓았고, 덕분에 그 이후 까마귀 둥지에서 댈런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놈은 없었다.
자박.
발밑에서 모래가 바스라진다. 시에나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또 져버렸네. 그것도 이번에는 목숨빚을.”
옅은 한숨이 섞인 문장이었다. 댈런은 코를 긁적였다.
그가 이곳에 내려온 건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버번과의 거래. 다른 하나는 깃털의 마녀이자 최고의 정보상인 시에나의 생존.
당사자인 시에나에게는 좀 다르게 이야기했다.
차르국 특무대에게 길잡이 의뢰를 받고, 그 과정에서 그녀가 선발대의 길잡이로서 먼저 내려갔다는 걸 알게 됐다는 식으로.
댈런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미궁의 밤하늘.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미궁의 별. 환상세계의 빛 쪼가리들. 언젠가 종말 앞에 부서질, 혹은 그의 손에 부서져야 할 존재들.
잡생각 속에서 튀어나온 건, 평소의 그와는 조금 다른 대답이었다.
“친구 사이에 빚이 뭐 있겠소.”
시에나의 발걸음이 멈췄다. 잠시였다. 그녀의 부츠는 모래사막 위, 다시금 깊고 좁은 발자국을 만들어냈다.
폭 넓은 저벅임과 좁고 빠른 자박거림만이 한동안 맴돌았다.
또 한 번의 정적 끝에서, 시에나는 마침내 우물거리던 단어를 뱉어놓았다.
“친구······.”
“친구 아니었소?”
“맞지, 친구. 맞아.”
“고맙소. 아싸 주제에 인싸랑 친하다고 혼자 설레발 치는 줄 알았군.”
“···그 이상한 단어들 좀 그만 써주겠어? 그거 북방어도 아니잖아.”
시에나가 슬쩍 눈썹을 추켜세웠다.
“당신 때문에 나 북방어를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다고. 가짜 북방인인 걸 알고 얼마나 배신감 느꼈는지 알아?”
“내가 언제 서리고원 넘어왔다 한 적 있소?”
댈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시에나의 눈썹 사이 각도가 조금 더 첨예해졌다.
“당신은 북방인이 아니야.”
“아니지.”
“가문이 어딘지, 어디서 태어나서 무슨 삶을 살아왔는지도 알 수 없고.”
“그래. 알 수 없지.”
시에나가 눈살을 찌푸린 채 째려봤다. 댈런은 왠지 그 표정이 웃겨서 입꼬리를 내릴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노려보던 미궁도시 최고의 정보상은, 검고 긴 머리칼을 거칠게 헝클어뜨리며 중얼거렸다.
“나 원, 어디 미래에서 오기라도 했나.”
“그럴지도 모르지.”
“얼씨구.”
그녀가 팔을 짝 때렸다. 가벼운 셔츠 차림이라 꽤 매서운 손맛이었다.
잠시 가벼운 웃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시에나가 본론을 꺼낸 건 그 뒤였다.
“사실 나는 마녀야.”
“알고 있소.”
“···뭐?”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나는 미래에서 왔거든.”
“···뭐라는 거야. 아무튼 어릴 때 나는 청동 구역에 살지 않았어. 내 집은 금강궁에 있었지.”
금강궁.
그 말에는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
약간의 애증, 원한, 그리고 그리움.
금강궁은 일곱 성벽으로 둘러진 미궁도시 팔시온에서도, 스물여섯 전당을 제외하면 가장 안쪽에 위치한 구역이었다.
유일하게 두 개의 성벽이 지키는 구역이자, 미궁도시의 심장 그 자체.
팔시온에서 가장 높은 궁전이며, 스물여섯 초월자와 그 가문이 자리 잡은 성지.
미궁도시가 가지는 정치적, 군사적 위상을 생각하면 이는 대륙 중부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랐던 시에나가, 청동 구역 뒷골목의 작은 술집 주인이 되기까지는 얼마나 다난한 시간의 연속이었을까.
의뢰 내용을 읊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한 마디 한 마디에 망설임과 더듬거림이 섞여든 건 그런 이유일 테였다.
“어머니가 금강궁에서 쫓겨나시고, 나는 도시의 가장 외진 구석에 숨겨졌어. 청동 구역 남부 지구의 낮은 거리. 일곱 살 먹은 어린아이가 살기에는 가혹한 곳이지.”
시에나는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가 지금 미궁에 내려온 건 그 시절에 내렸던 잘못된 선택 때문이야.”
수십 년 전, 그녀가 아직 일곱 살 먹은 어린아이일 적의 이야기를.
***
마녀의 혈통은 어머니에게서 외동딸에게로 전승된다. 당연히 시에나의 어머니 역시 깃털의 마녀였다.
그리고 그 당시, 깃털의 마녀들은 대대로 금강궁에 자리잡고 있었다.
태초의 마녀로부터 이어져온 마녀의 핏줄. 그 후손들이 품은 힘은 금강궁마저도 탐낼 정도로 막강했고.
때문에 인간에게 우호적이었던 깃털의 마녀는, 수백 년 전부터 금강궁과 깊은 협력 관계를 맺어왔다.
스물여섯 가문에 정식으로 포함되지는 않았으나, 그에 뒤처지지 않는 발언권과 재력을 가지게 된 깃털의 마녀들.
평화로운 공존에 금이 간 건, 시에나가 막 일곱 살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마녀사냥의 사흘밤. 들어봤어?”
“대충은.”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사냥의 사흘밤. 그건 대략 이십여 년 전, 미궁도시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금강궁의 가문 중 하나를 멸문에 가깝게 몰아간 마녀를, 도시 전체가 추격해 처단했던 사건.
이십 년이 흘렀다지만, 도시의 주민들 중 이 사건을 모르는 이는 드물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사실 악신의 계략으로 말미암은, 금강궁 최대의 실수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더더욱 드물었고.
“사실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또렷하지는 않아. 그나마 기억나는 건 어느 날부터 달라진 사람들의 시선과, 문앞에 쌓여가는 누가 보냈는지 모를 편지들 정도.”
편지의 내용은 다양했다. 정중한 비판이나 날선 협박, 폭력적인 단어들.
아무리 영특하다 해도 고작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그런 단어와 문장들은 낯선 종류였다.
물론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시에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편지의 내용은, 그녀의 어머니를 실추시키려는 정치적인 압박으로 가득했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적인 압력은 좀 더 실질적인 핍박으로 바뀌었어. 어머니가 쓴 누명은 그만큼 중대했거든. 그리고 사람들은 어머니가 해명할 시간도 주지 않으려 했지.”
평소부터 마녀의 힘을 시기하던 정적들이, 아슬아슬한 선에서 그들 모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대문 앞이 오물로 점철됐고, 우편함 안에는 맹독 품은 두꺼비가 배달됐다.
익명으로 고용된 폭력배들이 집 외부를 부수는 것도 십수 차례.
손을 쓰자면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재력과 무력이 있었으나, 시에나의 어머니는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어머니에게 씌워진 누명은 너무 치명적이고, 또 절묘했으니까.”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높았다.
역시 마녀의 핏줄에 내재된 폭력성은 속일 수 없다며, 수많은 마녀들이 저질러온 과오를 혼자 짊어지게 될 상황.
댈런은 턱을 쓰다듬었다. 그가 물었다.
“금강궁이 그렇게까지 비이성적인 곳은 아닐 텐데. 스물여섯 전당 앞에서 항변할 수는 없었소?”
“맞아. 시간만 충분했다면 결국 누명을 벗을 수 있었을 거야. 어머니 역시 그 생각으로 모든 수모를 참아내셨고.”
목숨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이는 없었고, 설령 암살 시도가 있다 해도 마녀의 힘으로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정적들은 예상 밖의 약점을 건드리고 말았다.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마녀의 역린 그 자체를.
“그게 나였어.”
납치범들은 어쩌면 별 생각 없었을지도 모른다.
집 앞에 오물을 쏟아놓는다든가, 우편함에 맹독 품은 마물을 집어넣는다든가 하는 짓과 비슷하다고 여겼을지도.
어쩌면 정말로 잠시 납치했다가, 별 문제가 되지 않도록 곱게 돌려보낼 생각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녀에게 외동딸은 그저 하나뿐인 자식 이상의 의미.
대를 이을 수 있는 유일한 혈육을 건드리자, 시에나의 어머니는 결국 눈이 뒤집어지고 말았다.
그날 밤 납치범들은 물론, 그들에게 사주한 가문의 식솔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사실상 스물여섯 가문 중 하나가 멸문이나 다름없는 상황을 맞이한 것.
“금강궁은 발칵 뒤집혔어.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도망쳤고, 금강궁의 수호자들은 청동 구역까지 우릴 쫓아왔지.”
추적은 집요했다. 결국 시에나의 어머니는 결정을 내렸다.
하나뿐인 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되어 도시 밖으로 도망치기로 한 것.
그렇게 시에나는 청동 구역의 남부 지구, 수많은 외지인들로 인해 경비대가 통제조차 포기한 곳에 남겨졌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추적자들은 그녀가 도시 안에 숨겨졌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정처없이 거리를 떠돌았어. 그러던 어느 날 사흘에 걸친 마녀사냥이 성공했다는 소문이 들려왔지.”
“유감이오.”
“다 지난 일이야.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지.”
시에나는 가볍게 고개를 털었따.
어느새 천막이 가까워졌다. 야영지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돌아, 원점에 가깝게 돌아온 것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나는 힘을 숨겨야만 했어. 나이를 먹을수록 마녀의 힘은 끝을 모르고 성장했거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낮은 거리의 흑마법사 하나를 찾아갔지.”
시에나가 작게 웃었다. 삐뚜름히 올라간 입꼬리는 조소에 가까웠다.
“악마와 거래를 했고, 내 힘이 들킬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어. 하지만 이제 그 힘이 다시 필요해졌지. 난 사실 그걸 되찾으러 가는 길이야.”
“악마와의 거래라. 끊기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든 담판을 지어야겠지. 자세한 건 다음 기회에 말해줄게.”
자박.
댈런의 천막 앞. 시에나는 슬그머니 뒷짐을 지고 물러섰다. 그녀는 약간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고 말했다.
“편히 주무시오.”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가만히 보던 댈런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천막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잘게 흔들리는 천막 문 앞. 그 틈 사이로 내비치던 불이 꺼진 뒤, 마녀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잘 자.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웠어.”
***
다음날.
집행관 사샤의 선언에 따라, 특무대는 미궁 3층을 향해 출발했다.
사실 이대로 작열사막을 행군하는 건 반쯤 미친 짓이었다.
재편을 마친 특무대 병력은 예순 명쯤 되는 인원이었고, 그중 삼분의 일은 어젯밤의 전투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부상자들이었으니까.
재생 포션으로 상처 자체는 치료했으나, 아직 컨디션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상황.
다행히도 그 문제는 댈런이 해결할 수 있었다. 바로 며칠 전, 작열사막 전용 횡단 버스를 뽑은 덕분이었다.
쿠르르르······.
피부로 부드러운 진동. 지하 깊은 곳의 기반암과 두터운 모래층을 죄다 갈아버리면서도, 승차감은 안락하기 그지없다.
“멋지지 않나? 샌드웜의 비늘은 충격을 극한까지 흡수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 장인들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재료 중 하나야. 조금만 뜯어갈 수 있다면···.”
“이미 많이 챙겼잖소. 욕심은 적당히 부리시오.”
“아, 아니 그게. 새로 개발 중인 화약 첨가물에 쓰면 또 어떨까 해서······.”
댈런은 말없이 난쟁이를 쳐다봤다. 난쟁이의 하나뿐인 눈동자는 이리저리 방황하더니, 결국 시무룩한 눈빛으로 땅바닥을 쳐다봤다.
그 광경을 보던 시에나가 피식 웃었다. 그녀가 말했다.
“살다살다 외눈의 명공이 용병에게 고개 숙이는 걸 볼 줄이야.”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 아니겠소.”
“그런 게 인생이지. 어디쯤 왔어?”
“슬슬 거의 다 왔을 거요.”
댈런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감각에 집중했다.
그 추측은 정확했다. 샌드웜의 비늘 밖, 부서지는 흙은 점점 더 질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짝 마른 작열사막의 대부분 일대와 다르게, 미궁 3층으로 내려가는 입구 주변은 습기가 가득한 축축한 땅.
뻗어나간 감각권 끝자락에서 지하수가 흐르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니, 목적지에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쿠구구구···!
조종간을 조금 당기자, 샌드웜이 지상을 향해 솟구치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쨍한 작열사막의 빛이 일행을 다시 반겼다.
샌드웜이 일행을 내려준 곳은 높게 솟은 모래언덕 꼭대기.
댈런은 샌드웜의 등판에서 창을 뽑고 내려왔다. 먼저 내린 일행은 모래언덕 저 아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허허, 오랜만에 보는구만.”
비요른이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모래언덕 저 아래, 거대한 구멍을 바라보고 있었다.
콰과과과과······.
그건 사막 한가운데 뻥 뚫린 싱크홀이었다.
구멍 깊은 곳에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습기를 머금은 상승기류가 솟구치고, 그 기류가 작열사막의 열기와 만나 아지랑이처럼 변한다.
마치 거대한 마물이 제 숨을 토해내는 것만 같은 광경.
민간에 나도는 전설 속, 지옥으로 내려가는 입구가 정말 있다면 저런 모습일 듯했다.
“별 탈 없이 도착했군요.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사샤가 말했다. 그녀의 뒤쪽으로 특무대 요원들이 장비를 챙기고 있었다.
지옥의 입구처럼 보이는 저 구멍은, 바로 미궁의 3층으로 이어지는 입구.
다음 층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그 아래로 내려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