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지의 소녀들(2)
쉬익―
전조는 없었다.
쩍!
댈런의 팔이 흐릿해진 순간, 공간을 빗겨낸 도끼는 핏자국 얼굴 위에 즉시 돋아났다.
“칵―!”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뒤로 넘어가는 핏자국 얼굴.
비검의 힘으로 도끼날에 신성력을 덧씌우자, 붉은 입술이 웃음기 섞인 비명을 질러댔다.
“끼히, 히히······.”
끝까지 히죽대는 입모양으로 최후를 맞이한 핏자국 얼굴.
마침내 숨이 끊어지자, 놈의 투명한 몸뚱이가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 저게 대체···.”
요원 하나가 중얼거렸다. 곁에 선 분대장도 깊은 침음을 흘렸다.
나타난 건 사람의 형상과 닮아있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하다시피 한 피부에, 기껏해야 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신장.
피골이 상접한 팔다리와 조그마한 머리, 골반 너머까지 풀어헤친 머리칼.
얼핏 보면 그저 예쁘장하게 생긴, 허나 잘 먹지 못해 빼빼 마른 소녀로 착각할 수도 있는 외견이었다.
“귀, 귀신···?”
머리에 도끼를 꽂고도 활짝 웃는 입술과, 그 입 안쪽에 한가득 들어찬 살덩이.
그리고 검붉은 피가 끈적하게 묻은 길쭉한 손발톱만 아니었다면.
“겁먹지 마라. 늪지 원혼이라 불리는 마물이다.”
어느새 천막에서 뛰쳐나온 사샤가 요원을 진정시켰다.
불침번이 깨운 나머지 일행들 역시, 무기와 갑옷을 갖추고 신속하게 합류하는 중이었다.
“하나가 아니오.”
숲 안쪽을 내다보던 댈런이 말했다. 그 말에 사샤는 곧장 요원들을 돌아보며 손을 들어올렸다.
“원형진을 구축해라!”
“예!”
순식간에 모닥불을 둘러싼 원형진이 만들어진다.
잠에서 덜 깬 이들이나, 처음부터 이 모든 걸 지켜본 불침번이나 움직임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뼛속까지 새겨진 훈련으로 인해, 몸의 상태 따위와는 상관없이 수행해내는 동작들.
진형이 갖춰지자마자 곧장 다음 명령이 떨어진다.
“상대는 영체 속성을 가지고 있다. 탄종 교환! 순은탄으로!”
슥― 척척척!
역시나 재빠른 손놀림으로 교체되는 납탄과 은탄.
촉수아귀 때도 그랬듯, 지금 상대해야 할 적 역시 순은탄이 훨씬 효과적인 공격수단이었다.
초행길임에도 이런 기민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건, 집행관인 그녀가 미궁 각 층의 환경과 서식하는 마물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 숙지해두었기 때문.
거기에 더해 수많은 상황들을 상정하고, 그에 따른 대처법까지 세워놓았기에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집행관의 위치를 거저 얻은 건 절대 아니군.’
댈런은 질서정연한 대처를 보며 생각했다.
왕실 직속 부대의 훈련도는, 왕실의 힘 그 자체와도 무관하다 할 수 없는 바.
그런 의미에서 집행관 사샤와 특무대는, 이번 여정 속에서 차르국의 역량을 몇 번이고 증명해내고 있었다.
현 차리나의 통치 아래, 백 년 만에 전성기를 맞이한 차르국답달까.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큰 전력이 되어줄 수도 있겠어.’
종말에 맞서는 미래를 그려내는 한편, 댈런은 원형진의 안쪽에 선 채 요원들의 머리 너머를 가만히 응시했다.
스륵···.
숲 안쪽. 움직임이 느껴진다.
투명한 몸뚱이의 마물이지만, 신비를 꿰뚫어 보는 댈런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물리적인 육신과 영체에 가까운 육신. 두 가지 상태를 원하는 대로 취해가며 공간을 건너뛰는 소녀들.
입가에 히죽거리는 웃음과, 광기로 번들거리는 흰 눈동자.
“으히! 이히히히!”
“끼햐아!”
기괴한 웃음이 관목들 사이를 메아리친다. 댈런은 손을 들어 도끼를 회수했다.
촉수아귀 때와는 달리, 이 마물들은 무작정 공격해봐야 소용없는 종류였다.
‘늪지 원혼.’
탐험가들 사이에서는 ‘늪지의 소녀’라고도 불리는 언데드형 마물.
신체능력 자체는 다른 마물들을 크게 압도한다 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놈들은 명실공히 미궁 3층의 최대 난적 중 하나였다.
태생적인 주술로 투명한 놈들의 육신은, 원할 때마다 영체에 가까운 형태를 취하는 게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그 상태에서라면 공간의 틈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어 다닐 수도 있었고.
‘정확히는 정령계를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능력이지.’
정령계는 현실 세계에 그림자처럼 덮여 있는 차원.
일종의 이면 세계라고도 볼 수 있는 장소다.
늪지 원혼이 상대하기 까다로운 가장 큰 이유는, 그 정령계에 몸을 숨긴 채로 접근해 기습하는 패턴을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이히히! 히힛!”
“꺄하하하!”
댈런이 기다리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정령계로 넘어간 상태의 원혼은 아무리 댈런이라 해도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현실의 사냥감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놈들 역시 이쪽으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법.
그리고 그 찰나야말로, 원혼을 처치하기에 최적의 순간이었다.
스으···.
소리 없이 열린 공간의 틈.
“끼히히히!”
가장 먼저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전조다.
허공에서 솟아난 희미한 일렁임은, 원혼이 일시적으로 물리적인 형태를 취했다는 의미.
더불어 마력광으로 번뜩이는 댈런의 눈은, 일렁임만이 아닌 원혼의 형체까지도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망설임 없이 손을 내뻗고, 성화가 일렁이는 도끼를 공간 사이로 밀어보낸다.
쉭― 쩍!
요원 하나의 목덜미를 노리던 소녀가, 머리에 도끼자루가 돋아나며 움직임을 멈췄다.
댈런은 곧장 도끼를 회수했다. 회수하자마자 다시 던져지는 도끼. 그 사이 시에나도 주문을 외워냈다.
“녹스, 펠리렘! 오벡스!”
콰지직!
또 다른 요원에게 달려들던 원혼이, 보호막과 충격 주문 사이에 끼어 전신이 으깨진다.
댈런이 신비를 꿰뚫는 시야로 놈들을 확인했듯이, 시에나는 마법사 특유의 예민한 마력 감응력을 이용해 그 위치를 대강 특정한 것.
하지만 두 사람만으로 모든 기습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캬아아!”
“끄아아악!”
도끼가 채 돌아오기도 전에, 반대쪽에서 튀어나온 원혼이 요원 하나의 목덜미를 낚아채 사라진다.
타다당!
특무대의 일제사격이 그 뒤를 쫓았지만, 이미 원혼은 요원과 함께 정령계로 자취를 감춘 뒤.
댈런이나 시에나와는 달리, 다른 이들은 원혼의 투명한 육신을 간파할 수 없었다.
공격을 당한 이후에나 그 위치를 추측할 수 있을 뿐.
“이히히! 아하하하!”
“깔깔깔!”
이제 시작이라는 듯, 관목 사이사이에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메아리친다.
이대로라면 놈들에게 농락당하며 요원을 하나씩 잃어갈 뿐이다.
지금의 싸움은 단지 적을 처죽이는 게 끝이 아니라, 아군을 지켜내면서 적을 쫓아내야 하는 싸움.
‘썩을.’
댈런의 머리가 재빠르게 굴러갔다.
늪지 원혼을 상대하는 법은 보통 세 가지다.
정령계에 직접 간섭하는 건 지금 가진 스킬들로는 불가능하고, 아예 근방 일대를 힘으로 찍어누르자니 요원들도 함께 휘말리게 되는 상황.
그렇다면 남은 건, 지금처럼 원혼이 공격하는 타이밍에 선수를 치는 방법뿐.
‘문제는 손이 모자라다는 건데······.’
해결할 방법은 하나였다. 바로 요원들의 눈에도 원혼이 보이게 만드는 것.
“비요른. 공터 주위로 연막탄을 까시오.”
“연막? 지금 말인가?”
“지금 당장.”
“알겠네!”
딸깍! 치이이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낸 연막탄이, 순식간에 원형진 주변을 두르고 잿빛 연기의 벽을 구축해낸다.
그 짧은 사이에도 요원 두 명이 더 납치되어 사라졌다.
댈런의 도끼와 시에나의 주문이 세 마리를 죽였지만, 수십 명이나 되는 요원들을 둘만으로 지켜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연막의 벽이 구축되고 나자, 상황은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스륵···.
공간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는 원혼.
물리적인 형체를 취했음에도, 투명한 육신은 요원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육신으로 인해 밀려나는 연막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에릭! 네 앞에!”
타다다다당!
연막탄의 한쪽이 확 일그러지고, 그 즉시 빗발치는 총알 세례.
퍼버버벅!
순은탄이 닿는 곳마다 영체의 속성을 지닌 뼈와 살이 퍽퍽 터져나간다.
“끄히히힛!”
“꺄하악!”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지는 소녀들.
투명했던 원혼이 죽어 모습을 드러내며, 공터 주변으로 가냘픈 소녀들의 시체가 쌓여간다.
“흐으···히이···.”
죽어가면서도 히죽대는 소녀들의 얼굴은,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으나.
장총에 순은탄을 욱여넣는 요원들의 눈빛은, 더이상 공포심에 물들어있지 않았다.
전환점이었다.
***
전황은 순식간에 역전됐다.
적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치명적인 불리함이 해소되자, 특무대 요원들은 빠른 반응사격으로 원혼을 처치해나가기 시작했다.
투명한 몸뚱이를 믿고 달려들었다가, 순은탄의 탄막에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늪지 원혼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감을 눈치챘는지, 미친 듯이 몰아치던 원혼들의 공세도 점차 공백이 많아졌다.
“히히, 히······.”
어느 순간 웃음소리들이 점차 멀어져가기 시작한다.
습격할 때와 마찬가지로 원혼들은 예고 없이 자리를 떠났다.
싸움이 끝난 것이었다.
“···맙소사, 차르시여.”
부족한 수면과 전투의 피로, 과한 긴장감으로 여기저기서 신음 섞인 한숨이 흘러나온다.
지극히 짧은 전투였음에도, 요원들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원래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하는 일이 가장 골치 아픈 법이다.
거기다 그 적이 사람과 비슷한 형상을 취하고 있고, 스산한 웃음소리까지 흘려내기까지 하니 등골이 오싹하지 않는 게 이상하겠지.
댈런은 원혼들의 소리가 멀어진 방향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비요른이 다가왔다.
“뭔가 이상하군.”
“예. 저도 느꼈습니다.”
대답한 건 댈런이 아닌 사샤였다.
분대장들에게 야영지 수습을 맡긴 그녀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자신의 총기에 순은탄을 한가득 욱여넣고 있었다.
난쟁이는 수염을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늪지 원혼들은 미궁 3층의 마물들 중에서도 가장 영역 중심적인 놈들이네. 내가 아는 게 맞다면, 여긴 가장 가까운 놈들의 영역에서도 몇 시간이나 떨어진 거리야.”
“제가 공부한 자료에서도 그렇더군요. 왠지 반란군 놈들이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직감이 듭니다.”
사샤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댈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둘 다 정확히 봤군.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오.”
“그렇지? 그럼 어서 여길 떠나···.”
“그래서 확인하러 가봐야겠소.”
“뭐, 뭐라고?”
난쟁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댈런은 도끼를 허리춤에 꽂아 넣고 말했다.
“늪지 원혼이 활동 반경을 넓혔다는 건, 그만큼 사냥감이 많이 필요해졌다는 이야기요.”
늪지 원혼은 미궁 3층에서 가장 까다로운 상대 중 하나다.
그럼에도 댈런과 일행이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놈들은 본디 ‘모태’를 중심으로 일정 범위 이상 벗어나지 않는 습성이 있기 때문.
더불어 프로그맨이나 놀 같은 마물들과 다르게, 원혼들에게는 세력을 넓히고 동족의 수를 불려야 한다는 동기 자체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런 늪지 원혼이 제 영역을 넓혀내고, 더 많은 사냥감을 확보하려 한다면 이유는 단 하나.
“놈들의 모태에 뭔가 이상이 생긴 게 분명하오. 집행관의 말대로, 앞서간 반란군이 뭔가 술수를 부렸을 확률이 높소. 금방 확인하고 오도록 하지.”
어떤 방법으로,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는 알 수 없다.
달아나기에 급급하던 놈들이 어디서 그런 여유를 얻었는지 역시 의문이었고.
허나 댈런의 초점은 반란군이 아니라, 놈들이 섬기는 악마에게 맞춰져 있었다.
‘악마 칼카스.’
에낙사구스 휘하, 아홉 옥좌 중 하나의 주인.
미궁 3층으로 넘어오는 통로에서부터, 놈은 이미 반란군의 행동에 깊숙이 간섭하고 있었다.
악마 칼카스와 놈의 수족이 될 반란군 병력들, 그리고 뭔가 이상이 생긴 늪지 원혼들의 모태.
‘설마 그 미친 시나리오가 이 시점에 나오지는 않겠지만.’
머릿속에 맞춰져가는 퍼즐은,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가리키고 있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수고를 들여서라도 확인해봐야겠지.’
댈런은 갑옷 끈을 조였다.
“서, 설령 그렇다 해도 자네 혼자 그 위험한 곳을 가겠다는 건···.”
“혼자가 더 편하오.”
비요른이 걱정을 표했으나, 댈런은 단칼에 잘랐다.
외눈의 명공이나 차르국 특무대 모두 도움이 되는 전력임은 분명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늪지 원혼을 상대로는 마법사인 시에나를 제외하면 전부 짐덩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그녀라 해도 마녀의 힘을 깨워내지 못했다면, 놈들의 영역 깊숙이 쳐들어가는 상황에서 큰 도움은 못 되겠지.
이곳에서 맡길 역할이 따로 있기도 했고 말이다.
“시에나, 결계 주문에 조예가 있으시오? 혼령을 막거나 그 시선을 피해내는 종류로.”
“마법보다는 주술에 가깝기는 한데···어깨 너머로 배운 거지만, 가부를 묻는다면 가능하다고 답할게. 다만 결계를 유지하는 동안은 전투에 참여할 수 없어.”
“그거면 됐소. 늪지 원혼의 세력권에 들어온 이상, 이 근방에 다른 마물은 없을 테니.”
시에나를 통해 혹시나 모를 추가 습격을 대비한 뒤, 댈런은 마지막으로 무기를 점검했다.
그는 관목 숲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납치당한 요원들도 데리고 오겠소. 만약 살아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