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18화 (118/288)

늪지의 소녀들(3)

찰박!

끈적한 늪지 위. 진흙이 튀며 파문이 일어난다.

가라앉아야 할 부츠는 마치 늪지를 단단한 땅처럼 내달렸다.

몇 걸음 만에 작은 늪을 건너버린 댈런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계속 뛰어갔다.

마른 땅과 질척한 늪을 가리지 않고 디뎌내는 발걸음.

달리는 말보다도 배 가까이 빠른 속도에, 호흡은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안정적이다.

‘자기 영역을 지키고 있어야 할 마물이 죄다 사라졌군.’

달리는 동시에 끊임없이 주변을 살핀다.

신비를 꿰뚫는 시야가 이질적인 마력의 흐름을 간파하고, 20대 중반에 접어든 감각 수치는 어떠한 흔적이든 잡아낸다.

드문드문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웃음소리. 자취를 감춘 다른 마물들의 존재감.

곳곳에 꺾인 나무들과 뒤엎어진 땅, 이빨과 발톱 자국들.

결론은 금방 도출됐다.

‘이미 한 차례 바닥까지 긁어먹은 뒤였어.’

이렇게 대놓고 마물들의 영역을 관통하며 질주하는데, 단 한 차례의 방해나 반응조차 없다.

간혹 들리는 원혼의 웃음소리만 제외하면, 사위는 말 그대로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이미 늪지 원혼들이 주변 일대를 죄다 쓸어버린 것.

마물이건 탐험가건 간에, 살아서 움직이기만 하면 전부 먹잇감으로 여기는 놈들다웠다.

‘사실상 3층의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지.’

미궁 2층의 샌드웜과는 달리, 늪지 원혼들에게 거대한 몸뚱이나 압도적인 힘은 없다.

그러나 불가시의 육신과 영체 속성, 정령계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은 그 이상으로 까다로웠다.

하나만 있어도 골치 아픈 상대일진대, 셋 모두를 지니고 있는 늪지의 소녀들.

거기다 홀로 움직이는 샌드웜과 달리, 늪지 원혼들은 모태를 중심으로 수백 단위의 무리를 이루곤 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는데, 어디선가 튀어나와 살점을 뜯어내고 사라져버리는 영체형 마물이 수백이라.’

어지간히 강력한 포식자가 아닌 이상, 그런 차륜전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지.

찰박!

댈런은 조금 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늪지 위로 일어나는 파문이 커져가더니, 순간 퍽 소리를 내면서 그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터터덩―

허공을 박차고 뛰어오른다.

쑥 내려가는 관목들과 순식간에 높아진 시야.

“키히히히!”

“크히힛!”

한 박자 늦게 방금까지 달려가던 땅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먹잇감을 노리고 모습을 드러낸 원혼들이, 닭 쫓던 개가 되어 하늘 위의 댈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딴에 이제는 자기들 구역이 됐다 이건가.’

다행히 놈들에게 비행 능력은 없었다. 지상에서 계속 쫓아오기야 하겠다만.

휘이이―

좀 더 올라가자 퀴퀴한 공기가 얼굴을 스치고, 주변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른 땅 사이로 느릿하게 흘러가는 끈적한 흙빛 지류. 중간중간 보이는 부서진 나무들과 헤집어진 땅들.

전투의 흔적 주변으로, 아직 신선한 마물의 피가 지척에 널려있었다.

늪지 원혼들이 대대적인 사냥을 벌인 지 얼마 안 됐다는 소리다.

‘흔적을 보면···대충 이틀에서 사흘 정도.’

그 시간 동안 일어날 만한 변수는 사실상 하나뿐. 심증이 점차 확신이 되어간다.

‘반란군이 모태에 심각한 타격을 준 게 확실하군.’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질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답은 이미 머릿속 한 켠에 자리 잡아 있었다.

이곳에서 반란군은 엄연히 쫓기는 입장이다.

굳이 마물의 영역 심부까지 파고들며 시간을 지체했다는 건,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만한 필요성이 있었다는 이야기.

놈들의 목적이 악마의 소환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게 무엇인지 맞추기는 어렵지 않다.

“···원혼의 핵.”

[에엑?]

아공간에 가만히 있던 악마가, 댈런의 나직한 중얼거림을 듣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래도 명색이 악마라고, 마물의 생태를 대충은 알고 있는 모양.

[모태를 죽이는 게 아니라, 거기서 핵만 빼낸다니. 그러면 모태에 구속된 원혼들은 한참을 미쳐 날뛸 텐데······.]

그래서 미쳐 날뛰고 있는 거 아니냐.

늪지 원혼이 개미라면, 모태는 놈들의 여왕개미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하는 일도 비슷했다. 지옥에서 방출된 영혼 찌꺼기들을 흡수해, 마물이라는 실체로 빚어내는 게 모태의 역할.

특징이라면 영혼을 마물화시키며 남는 끈덕한 사념을, 물리적인 핵의 형태로 빚어내 자기 안에 보관한다는 것일까.

그렇게 만들어진 원혼의 핵은, 모태의 심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런 걸 빼갔으니 모태가 발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놈에게 예속된 늪지 원혼들도 함께 미쳐 날뛰고 말이다.

‘그러니 특무대를 습격했을 때도, 대부분 먹어치우는 게 아니라 납치해간 거야.’

사념으로 만들어진 핵은, 복구하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양분이 필요하다.

흔히 생각하는 평범한 양분이 아니라, 사념으로 가득한 영혼이라는 양분이.

“끼히히힛!”

“흐히, 꺄하하하!”

발밑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몇 배는 불어나 있다. 댈런은 슬며시 시선을 내려보았다.

공간을 넘나들며 그를 쫓는 소녀들의 형상이 대략 백 남짓.

이 정도면 특무대가 있는 방향의 원혼들은 죄다 끌어왔다고 봐도 되겠지.

‘어그로는 잘 끌렸고.’

지켜야 할 파티원들에게서 소환수를 떼어낸 걸로, 일단 일차적인 목표는 달성.

이제 놈들을 처리할 적당한 장소로 유인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기왕 사냥할 거, 보스몹과 잡몹을 함께 잡을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을 터.

‘슬슬 보스전으로 들어가볼까.’

어쩌면 오늘, 레벨업을 한 번쯤은 할 수 있을 듯했다.

***

미궁 3층, 바닥 없는 늪의 지형은 단순했다.

북쪽의 거대한 수원지에서 시작되는 끈적한 강물.

그 강물은 남쪽으로 끊임없이 흘러가며, 점점 더 유속이 느려지고 깊이가 깊어진다.

다만 비교적 수심이 얕은 북쪽 지역이라 해도, 수심 십여 미터가 넘어가는 깊은 늪이 군데군데 형성되어 있긴 했다.

강의 상류 부근에 위치한 호수 같은 지형이랄까.

철벅!

늪지 원혼의 모태가 자리 잡은 곳은, 바로 그런 호수들 중 하나였다.

“시발.”

가볍게 착지했을 뿐인데, 쑥 하고 발이 빠져들며 부츠 안쪽으로 물컹한 질감이 스며든다.

도약 스킬로 물은 물론 허공까지도 딛고 뛰어오를 수 있지만, 이런 끈적한 늪에서조차 가만히 서 있으면 별수 없이 가라앉는다.

단숨에 정강이까지 잠겨버린 다리. 불쾌한 감각에 혀를 쯧쯧 차고 있자니, 등 뒤에서 아스라이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으히히!”

“흐헤, 끼히히히!”

좀 뒤쳐져서 따라오던 늪지 원혼들이었다. 슬쩍 돌아보니 그 숫자는 어느새 이백 이상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 정도면 몸을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놈들은 정령계로 숨어들기는커녕, 대놓고 히죽거리며 우르르 몰려와 그를 반원형으로 포위했다.

[워메···. 등골에 소름이 쫙 돋네.]

요즘 들어 왠지 말이 많아진 악마의 헛소리를 흘려들으며, 댈런은 어깨를 자연스레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원혼들의 전략은 나쁘지 않았다.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적이 까다롭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숫자가 엇비슷할 때 이야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숫자로 주는 위압감이 오히려 더 크기 마련이다.

상대가 경험치에 미친 고인물 플레이어만 아니었더라면.

‘퇴로를 가로막은 놈들이 이백. 모태 주변을 지키는 놈들이 삼백 언저리.’

합쳐서 오백 마리가 좀 넘는 늪지 원혼.

아니, 오백이 넘는 경험치 덩어리들.

사냥 나갔던 원혼들까지도 침입자를 눈치채고 속속 복귀하고 있었으니, 수는 계속해서 불어날 테였다.

스륵―

댈런은 성검을 뽑아들었다. 왼손에는 도끼를 가볍게 쥐었다.

저 멀리, 드넓은 호수 중앙에는 거대한 무화과 형태의 살덩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직경 오십 미터, 높이는 십 미터에 가까운 압도적인 덩치의 마물.

[늪지 원혼이 된 길잡이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회복을 위해 평소보다도 몇 배는 비대하게 몸을 불린 모태 위에, 한 회차의 결말을 나타내는 글자들이 주르르 나열되고.

그걸 바라보던 댈런은 가볍게 손을 들어올렸다가, 내리그었다.

패래래랙―!

공간을 빗겨내지 않았다. 실수는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일부러 조금 느리게 던진 도끼의 궤적은, 원혼들의 눈으로도 아슬아슬하게 쫓을 수 있을 정도.

“꺄하!”

“이히히!”

모태를 향해 날아가는 빛의 원반을, 늪지 원혼들이 앞다투어 가로막는다.

퍼버버버벅!

고기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성화를 덧씌운 도끼날에 늪지 원혼들의 몸뚱이는 손쉽게 썰려나갔다.

첨벙!

열 마리가 넘는 원혼이 목숨을 잃고서야, 위력을 잃고 늪지에 떨어진 손도끼.

그때까지도 모태는 천천히 숨을 쉬듯 몸을 부풀렸다 줄였다 할 뿐,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변이종은 아니군.’

원혼의 모태 중에는 가끔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개체도 존재한다.

원래는 지옥에서만 볼 수 있는 강력한 마물이지만, 워낙에 변수가 많은 회차이니 한 번쯤 확인해본 것.

허나 지금 반응을 보아하니, 눈앞의 모태는 그저 평범한 개체였다.

그렇다면 망설일 건 없었다. 댈런은 다리에 힘을 더했다.

푸확!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가 폭발한다. 진흙과 오물, 부유물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댈런의 신형은 이미 제자리에서 십여 미터 떨어진 곳을 내달리고 있었다.

촤자자작―

늪지 호수 위를 내달리는 발걸음. 양손으로 거머쥔 성검에 회오리가 맺힌다.

“꺄르르르!”

“끄힛힛!”

방금의 도끼질로 한껏 경계심이 끌어올려진 원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스스슥···!

공간을 넘나들며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얇은 형체. 정령계로 숨어버리면 댈런의 검도 닿을 수 없다.

하지만 초조해할 일은 아니었다.

모태를 향해 짓쳐드는 침입자를 막기 위해서는, 놈들도 언젠가는 현실 세계로 모습을 드러내야만 하는 법.

스으···.

코앞에서 튀어나와 이빨을 들이미는 원혼에게, 댈런은 그대로 이마를 들이받았다.

콰직!

“끄아···!”

날카로운 이빨이 우수수 비산하고, 투명한 핏줄기가 그 뒤를 따른다.

안면이 함몰된 채 넘어가는 소녀의 몸뚱이. 그 위로 망설임 없이 성검을 내리긋는다.

스각!

단조롭게 양단되는 육신.

콰과과과···!

그 너머로 뻗어간 분쇄검의 기운이 두 놈을 더 으깨버린다.

첨벙!

댈런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늪지에 거친 파도를 일으키며 달려나갔다.

레이더처럼 주변을 뒤덮은 감각권 안,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며 기회를 노리는 원혼이 수백.

구태여 정령계에 숨어든 놈들을 쫓는 건 하책이다. 괜히 체력만 낭비하는 짓일 뿐.

‘개미집에 쳐들어갈 때는, 여왕개미만 노리면 되는 법.’

모태에 가까워지면 알아서 모습을 드러낼 테다.

최근에 침입자에게 한 번 당한 사례가 있으니, 더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겠지.

아니나다를까, 댈런이 호수 중앙까지 반쯤 도달했을 무렵.

“이히히히!”

“꺄하하! 꺄아!”

입가에 광소를 머금은 소녀들이, 순식간에 사방을 에워싸고 촘촘한 포위망을 구축해냈다.

샤아아아―!

전후좌우, 심지어는 머리 위에서도 짓쳐드는 이빨과 손발톱.

하나하나가 강철 판금도 손쉽게 찢어발길 완력의 공격이다.

어지간한 탐험가라면 단번에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찢겨나가겠지.

아무리 댈런이라도 이 많은 숫자를 일일이 쳐낼 수는 없었다.

물론, 애당초 그럴 생각조차 없었지만.

키이잉···.

마력이 일렁이는 발끝.

늪지의 파문이 커다란 동심원으로 퍼져나간다.

도약 스킬이 발현되는 찰나의 순간. 이 순간만큼은 발밑에 굳건한 대지를 디딘 거나 다름없었다.

‘부족해.’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경지를 넘어선 댈런의 기량 능력치는, 능력 전반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내고 있었다.

단순히 그 자체로 하나의 기술이 된다기보다, 이미 영역 속에서 현실화된 가능성을 다시 재단해내는 역량.

[도약(E)]

- 한 번의 발디딤으로 몸을 높게 띄워올리는 기술. 단순한 동작이지만, 그 안에 힘과 기교의 총체적인 응용이 담겨있다.

- 숙련도 100%

스킬의 본 의미.

그 뿌리부터 재해석한다.

손을 뻗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스킬의 이름 모를 창시자보다도 높은 경지.

디뎌 밀어내는 것이 도약의 원리라면, 아예 딛고 서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힘을 주어 밀어내지 않는다. 부드럽게 마력을 퍼뜨리며, 체중을 온전히 발밑에 실어낸 순간.

[고유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보상 : 답보(D)]

원래라면 게임 후반부가 시작할 즈음에야 볼 수 있을 알림창이 눈앞에 떠오르고.

쿠우웅―

발밑에서 다시 한 번 거대한 동심원이 일어나며, 댈런의 검이 불꽃에 휩싸였다.

[답보(D)]

- 용을 떨어뜨린 전사가 창안해낸 기술. 마력으로 디딜 수 없는 곳을 딛고 서는 기예다. 첫 발디딤의 순간에 방출되는 마력의 일부분을 완력으로 전환할 수 있다.

뿌드드득!

발밑에서부터 터져나오는 힘이, 발목을 거쳐 무릎, 골반, 허리, 어깨에 이르며 회전력으로 치환된다.

한계까지 몰아붙여진 관절이 작게 비명을 지르고, 오랜만에 근육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성화가 더해진 분쇄의 기운.

밝디밝은 붉음이 검신을 뒤덮은 채 단단하게 응축되고.

발밑에서 시작된 힘의 파도가, 마침내 팔을 거쳐 손끝까지 이르렀다.

베어낸다.

쩌━━━

몸의 회전력을 실은, 단순한 횡베기.

그 앞에서 질긴 마물의 육신은 의미가 없었다.

한 획으로 그어진 검끝이 그려낸 건, 선이 아니라 면.

가장 앞에서 달려들던 원혼들만이 아니라, 그 뒤의 뒤쪽까지 공간째로 갈려나간다.

후두두두둑.

투명한 육편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진다.

떨어지면서 불가시의 주술이 풀려, 마치 허공이 끊임없이 피와 살을 토해내는 것만 같았다.

그 붉은 비의 한가운데.

바윗덩이 같은 근육질의 전사는, 양손으로 쥔 검을 천천히 내렸다.

착.

붉게 물들어가는 늪지에, 발은 더이상 빠져들지 않았다.

순식간에 백에 달하는 동족을 잃은 늪지 원혼들이, 처음으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히···?“

히죽 올라간 입꼬리가 의문 가득한 웃음기를 흘려내고.

“쫄기는.”

사납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댈런은, 거대한 모태를 향해 다음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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