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19화 (119/288)

소환 의식(1)

“끼히히!”

내뻗은 손끝. 손목째로 잘라버린다.

“캬아···!”

목덜미를 노리고 들이미는 이빨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긴 검의 폼멜로 찍어 부쉈다.

끈적한 늪의 호수. 처절한 난투전은 그 수면 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굉장하군.’

댈런은 짧게 검을 휘둘러 원혼 하나의 목을 날려버리며 생각했다.

이곳은 발을 조금이라도 잘못 디디는 순간, 십여 미터 깊이의 끈적한 침전물들 사이로 영원히 가라앉는 장소다.

그런 호수 위를 마른 땅처럼 활보할 수 있다는 건, 냉병기를 휘두르는 전사에게 굉장한 이점이 아닐 수 없었다.

찰박!

늪지 위에 얕은 발자국만 남기고 뛰어다니는 소녀들.

착―

그 앞에서 발 아래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늪지를 마치 단단한 땅처럼 디뎌낸다.

고유 스킬은 일반적인 스킬과 달리, 영역을 통해 재창조해낸 능력이다.

숙련도의 개념이 없으며, 따라서 처음 얻었을 때부터 완숙한 경지에 이른 것처럼 사용할 수 있는 능력.

거기다 기량 능력치를 조금 더 끌어올리면, 수면만이 아니라 허공에서도 비슷한 기예를 펼칠 수 있을 것 같은 직감마저 느껴진다.

원래라면 일반적으로 게임 후반부에 접어들 즈음에야 얻을 수 있는 능력인 만큼, 파고들 구석은 무궁무진했다.

스가각!

검신 중간쯤에서 세 놈이 한 번에 걸려든다. 준비동작조차 허용되지 않은 간격이었다.

댈런은 힘을 조금 더 줬다. 그러자 조금 멈칫하던 검이 제 속도를 되찾았다.

“끼히힛!”

“히야, 흐히히!”

세 놈을 토막 내자 이번엔 다섯 놈이 지척이었다. 아예 검을 휘두를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될 건 없었다. 검을 쓰지 못할 간격이면, 쓰지 않으면 될 뿐이니까.

화륵!

찰나의 순간, 양손의 손끝부터 팔꿈치까지 화염의 갑주가 덧씌워지고.

쩌저저저적!

두 팔이 흐릿해짐과 동시에, 달려들던 다섯 원혼이 줄에 매달린 것처럼 뒤로 휙 날아간다.

함몰된 두개골. 꺾인 목줄기.

박살난 갈비뼈가 등가죽을 뚫고 튀어나오며, 내장과 피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첨벙! 첨벙!

한 차례의 공세가 지나갔지만, 잠깐의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방금 놓았던 검을 발끝으로 다시 띄워올린 뒤, 낚아채자마자 발끝을 밀어 찼다.

쉬이익―!

허공에 높이 뜬 채 아래쪽을 향해 고개를 꺾는다.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로 십수 마리의 늪지 원혼들이 밀려드는 게 보였다.

콰직!

“캬학!”

서로가 서로에게 부딪히며 살점을 찢어감에도 불구하고, 공격성을 자제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이는 마물들.

첫 일격으로 백 마리가 증발한 이후, 원혼들이 두려움에 주춤거린 건 잠시뿐이었다.

댈런이 모태를 향해 발걸음을 뗀 순간, 놈들은 다시금 저돌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으니까.

“키힛, 크흐흐!”

“흐히히히!”

정령계로 숨는 것마저 포기하고, 아예 숫자 그 자체를 폭력으로 앞세워 몰아치는 원혼들.

둘을 처치하면 넷이, 넷을 처치하면 여섯이 동족의 시체를 넘어온다.

‘당연한 일이지.’

원혼에게 있어 모태의 안위는 절대적인 1순위였으니까.

그리고 댈런에게 있어서, 그 앞뒤 없는 공세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착―

상념의 끝에,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수면에 다시 착지한다.

발밑에서 퍼져나가는 거대한 동심원.

고유 스킬, ‘답보’의 첫 걸음이 방출된 마력의 상당 부분을 물리적인 힘으로 치환시킨다.

스으으···.

검신에 맺히는 분쇄의 기운.

동시에 넓게 퍼져나간 감각권으로 호수 전체의 상황을 내려다본다.

사방으로 퍼져나가 사냥 중이던 원혼들은, 이제 대부분이 모태가 있는 호수로 복귀한 상태였다.

둘을 베어내고 넷을 으깨버렸음에도, 쓰러뜨린 것 이상의 숫자가 끝없이 몰려들었던 이유였다.

허나 그것도 이제 끝이다.

댈런 하나를 잡기 위해 몰려들면서, 원혼들은 스스로의 안위마저 도외시한 채 밀집된 포위망을 구축해낸 상황.

물샐 틈 없이 단단한 포위망은, 댈런마저도 육탄전 하나만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지경이었으나.

빠져나가기보다 부수는 걸 택한다면, 그야말로 단번에 모든 적을 진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화르르르―

회오리 같은 분쇄의 기운에 밝게 빛나는 성화가 더해지고.

우르르릉···!

심상 속 우렛소리가 검신 전체를 집어삼키며, 어느새 하늘을 채운 먹구름에서부터 동일한 뇌성을 지상을 향해 토해낸다.

용의 피가 혈관에 흐르게 된 이후, 무리 없이 중첩이 가능해진 성화와 라판텔라의 분쇄검.

그 위에 더해진 첫 영역의 힘, 「뇌격」.

발밑에서부터 전신에 가득 휘몰아치는 고유 스킬, 답보의 첫 걸음을 기반으로 삼아.

모든 힘을 단 한 번의 검격에 실어낸다.

뿌드드득!

용의 피로 강화된 육신마저 불길한 신음을 흘려댄다.

원래라면 육체의 한계로 만들어낼 수 없는 이적.

아직 버번에게서 신비의 육신을 얻지 못한 채이기에, 사실 이 정도 힘의 응축은 지금으로서도 꽤 무리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칼카스 정도 되는 악마를 상대하려면, 이 정도 비기는 가지고 있어야 해.’

악신 휘하에서도 두 손 안에 꼽히는 악마다.

그런 악마와의 전투 중간에, 새로운 힘을 탐구해낼 여력은 아마 없을 터.

미리 비장의 수를 한 번쯤 연습해두는 게, 승리를 위한 발판을 다지는 길이었다.

“끼히···?”

상념은 거기까지였다. 내리그어지는 검 끝에서 섬광이 가장 먼저 뻗어나가고.

꽈르르르릉―!

호수의 끈적한 수면이 좌우로 쩍 갈라지면서, 성화의 폭풍이 밀집된 원혼들의 무리를 덮쳐들었다.

피보라는 일지 않았다.

산산이 부서진 원혼들의 육신을, 신성한 불꽃이 남김없이 집어삼키고 불태워 버렸기에.

“키이···?”

호수 일부분이 통째로 증발하며 피어오른 자욱한 안개 사이.

가까스로 살아남은 원혼 몇 마리가 허둥지둥 모태를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

남은 원혼들을 정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댈런의 마지막 일격 이후, 놈들은 더이상 정령계에 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성화에 이런 능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호수의 삼분의 일 가까이를 휩쓴 성화의 폭풍은, 넓은 일대에 걸쳐 신성력의 잔향을 남겼다.

그 결과 정령계를 오갈 수 있는 원혼의 능력은 일시적으로 완전히 봉인되었다.

신성력이 원혼의 이능에 어떻게 간섭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

가능한 한 다방면의 가능성을 손에 넣을 생각인 이상, 신성력과 기적에 대한 연구도 이어가는 게 좋겠지.

‘나중에 꼭 필요해지기도 할 테고.’

닥쳐오는 종말의 어느 시점일까.

그 정확한 시간대까지 파악할 수는 없으나, 댈런은 분명 한 번쯤은 그곳에 발을 들일 거라고 확신했다.

‘지옥에서 신성력만큼 효과적인 공략 수단도 없지.’

지옥.

다섯 악신과 수백 악마들의 본거지.

환상세계의 한쪽 구석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다는, 모든 부정적인 가능성이 현실화된 세상.

모니터 너머에서도 발을 들여본 적은 많지 않은 장소였다. 그만큼 위험하고, 또 방문하기 까다로운 곳이라는 의미였다.

‘당장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댈런은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그는 가슴팍에 구멍 뚫린 원혼의 사체를 대충 던져두었다.

푸확! 패래래랙―

손끝을 까딱이니 늪지 어딘가에서 도끼가 솟아올라 날아왔다.

흐낏한 원반이 되어 날아오는 바람에, 표면에 묻어있던 늪지 깊은 곳의 오물들을 사방으로 튀기면서.

“······.”

검을 검집에 꽂아 넣고, 얼굴에 튄 오물을 대충 닦아낸다.

댈런은 호수 정중앙의 거대한 살덩이에게 다가섰다.

쿵. 쿵.

가까이 다가갈수록 규칙적인 울림이 또렷해진다.

직경 오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무화과 모양 살덩이. 얇은 가죽 아래에서는 파이프 같은 혈관들이 천천히 맥동하고 있었다.

저 높은 곳에 달린 수십 개의 주둥이는, 제각기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저건 지옥에서 배출되어 미궁 속을 떠도는 찌꺼기를 흡수하는 과정.

원혼이라는 마물로 다시 빚어내는 생태의 일부분을 바라보며, 댈런은 도끼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스각!

가볍게 내리긋는다. 질기고 두꺼운 모태의 가죽은 껍데기만 베일 뿐이었다.

댈런은 조금 더 힘을 주어 다시 내리그었다. 안쪽에 가득할 내용물을 생각해서라도 힘 조절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투두두둑···.

어지간한 마물의 가죽보다 몇 배는 질긴 살갗이 뜯겨나가고.

푸화아악!

그 깊은 안쪽에서 묽은 액체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콸콸콸···.

미리 예상한 댈런은 몇 걸음 옆으로 물러서서 피해냈다.

반쯤 녹은 뼈와 흐물텅한 살점, 마물의 신체 부위 이곳저곳이 액체와 함께 한참을 쏟아져 나왔다.

어느덧 쏟아지는 액체가 개울물 정도의 유량으로 바뀌었을 무렵, 댈런은 찢어놓은 살덩이의 구멍 안쪽으로 들어섰다.

[···와우.]

악마가 탄성을 지른다. 그 정도로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평소보다 몇 배는 거대하게 부푼 살덩이. 그 안쪽은 모태의 뱃속이었다.

질긴 살덩이와 촉수에 꽁꽁 묶인 채로, 마물들이 반쯤 녹은 입을 뻐끔거리며 팔다리를 허우적거린다.

프로그맨부터 시작해 미궁 3층에 서식하는 가지각색의 괴물들은, 이곳에서 산 채로 잡혀와 천천히 소화되는 중이었다.

악취가 폐부를 찌른다. 단순히 독한 냄새의 문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면 닿는 것만으로 피부에 고름이 찰 정도의 독성 기체였다.

댈런은 눈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위장의 꼭대기, 살덩이의 천장에는 뭔가 들어있었을 법한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원혼의 핵을 빼간 게 맞았군.’

원래라면 저 구멍은 원혼의 핵이 들어있어야 할 부분.

화약의 그을음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텅 빈 구멍은, 반란군이 모종의 방법으로 핵을 빼내갔다는 걸 의미했다.

‘수백 마리의 마물이 산 채로 소화되고 있는 것 역시, 저 구멍을 다시 메꾸기 위한 노력이겠지.’

원혼의 핵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영양분이 필요했다.

원래라면 지옥의 찌꺼기들에 담긴 사념을 뽑아내고, 오랜 시간 따로 정제한 끝에 만들어지는 게 원혼의 핵.

수많은 생명들이 산 채로 썩어 문드러지며 내뱉는 고통 어린 사념이라면, 그 핵의 일부분이나마 재생하는 게 가능하겠지.

원혼들이 사냥감을 죽이기보다 납치했던 건, 이렇게 모태의 위장 안에서 죽어가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착. 착.

댈런은 십수 개의 위장을 넘나들며, 창끝으로 걸쭉한 위액 안쪽을 헤집었다.

걸려드는 건 대부분 마물이었다. 프로그맨 같이 무리 지어 사는 놈들. 혹은 눈알거북이나 필레룬의 장어처럼 독립된 개체로 영역을 지키는 포식자급 마물들.

한참을 찾다 보니 그 사이사이에 사람의 형상 역시 발견할 수 있었다. 요원 다섯 명과 반란군 네 명이었다.

‘숨은 붙어있군.’

요원 다섯은 멀쩡했다. 마취되어 위장에 던져 넣어진 지 얼마 안 됐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며칠간 위장 속에서 썩어갔을 반란군들은, 하나같이 처참한 상태였다.

부식된 갈비뼈 사이로 반쯤 녹은 폐부가 애처롭게 공기를 갈구하고, 흐물거리는 피부는 두개골에서 완전히 벗겨져버린 몰골.

다행히 그중 한 명은 숨이 붙어있었다. 부패해가는 골격과 근육을 보아하니, 그래도 한때 강인한 전사였던 듯했다.

댈런은 놈과 요원 다섯을 모태 밖으로 옮겼다. 그리고 반란군을 깨웠다.

파지지직!

“어어억, 커헉···.”

가벼운 정전기로 깨어난 반란군이 신음을 흘려댄다. 댈런은 놈의 너덜거리는 얼굴 앞에 쭈그려 앉았다.

“배, 배신. 원로 놈들이 배신했···.”

“그래. 꼴을 보니 통수 맞은 건 말 안 해도 알겠군.”

그는 손도끼를 꺼내들었다. 놈에게 남은 수명이 많이 없어 보이니, 심문은 짧고 굵게 가야 했다.

댈런은 몇 개밖에 안 남은 손가락 중 하나에 도끼를 올려두고 물었다.

“반란군 원로들. 놈들이 원혼의 핵으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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