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환 의식(2)
반란군 간부의 상태는 심각했다.
한 차례 부상당한 상처 입은 내장은, 모태의 위액에 담겨지며 지독하게도 부패했다.
걸쭉한 위액에 함유된 마취 성분은 어지간한 초인마저도 마비시키는 강력한 독.
물론 눈앞의 반란군 간부 정도라면 자력으로 탈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부상 없이 원래의 컨디션이었다는 가정하에.
‘상당한 실력자군. 어쩌면 소영역을 이뤘을지도.’
댈런은 감각을 곤두세우고 놈의 심상을 느꼈다.
시체를 회수하며 한 걸음 더 답보한 그의 육감은, 초인이 죽어가며 흘러나오는 심상의 그림자를 흐릿하게나마 읽어낼 수 있었다.
[늪지 원혼이 된 길잡이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감각 +2, 암월의 환상살해자]
“복수···해야······.”
툭.
간부의 고개가 떨어졌다. 한이 가득 서린 눈꺼풀은 끝내 덮이지 못했다.
댈런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죽은 반란군 간부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죽기 전, 놈은 반란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줄줄이 이야기해줬다. 고문도 필요 없었다.
동지들에게 배신당해 죽어가는 이는, 누군가에게 넋두리로나마 자신의 한을 풀고 싶어 했으니까.
‘한 마디로 반란군 안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이거지.’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내분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반란군은 스스로를 ‘일곱 왕관의 수호단’이라 부르는 조직.
실제로 놈들이 내세우는 왕위 계승 후보는 모두 일곱 명이었고, 반란군은 각 후보를 중심으로 한 일곱 파벌의 연합체였다.
그리고 댈런이 오래전 미궁에서 처치한 금패 용병을 제외하고, 남은 왕위 계승 후보는 총 여섯.
실질적인 권력을 잡은 여섯 파벌은 세 파벌씩 두 진영으로 쪼개져, 서로를 몇 년 동안 견제하던 중이었다.
‘이번에 그중 하나가 다른 쪽을 쳤다는 이야기고.’
반란군 간부가 남긴 전말은 이러했다.
악마 소환을 목적으로 보낸 파티 중에, 경쟁 파벌의 원로가 둘이나 있었다는 것.
‘일곱 왕관의 수호단, 그놈들에게 원로라는 직책은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를 의미하지.’
상징성을 가진 왕위 계승자들과 달리, 실질적인 권력과 무력을 모두 거머쥔 노괴들이다.
무슨 수를 썼는지 평범한 전사로 위장해 들어온 원로들은, 미궁 3층에 도달해 정체를 드러내고 반대 진영을 급습했다.
그렇게 죽은 이가 여섯. 이제 남은 반란군은 열 명도 채 안 되었으니, 사실 호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미친 새끼들이 그런 계획을 세우지만 않았다면.’
무려 원로 두 명이 미궁으로 내려오는 위험을 무릅썼다. 놈들이 노리는 바가 보통 일은 아니라는 뜻.
실제로 반란군 간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댈런이 상상하던 최악의 경우에 속했다.
수백 회차 동안에도 열 번이 채 일어나지 않은 사건.
그리고 일어났다 하면 북부의 차르국을 세 달 안에 멸망시킨 희대의 재앙.
‘악마 칼카스의 본체 소환.’
에낙사구스 직속 휘하의 아홉 옥좌.
칼카스는 그 옥좌 중 하나를 차지할 정도로 강력한 악마다.
무한의 사슬과 냉기의 주인. 하나하나가 상급 마물에 필적하는 사냥개 수천 마리를 발밑에 둔 덫사냥꾼.
화신체만으로도 차르국의 국운을 뒤흔들 수 있는 존재가, 직접 본체로 현현한다니.
‘차르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도시연합도 타격을 받을 게 분명해.’
그리고 도시연합이 받는 타격은, 직간접적으로 그 수도인 미궁도시 팔시온에도 영향을 미친다.
최후의 최후까지 지켜내야 할 인류의 보루가, 튜토리얼이 끝난 지 일 년도 지나지 않아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댈런은 도끼를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그는 불사의 악마를 불러내 호숫가의 요원 다섯 명을 지키게 했다.
“으에? 저는 아직 힘이 회복되지 않았···.”
“고기방패로 시간은 끌 수 있잖냐. 그리고 이 근처에 마물은 씨가 말랐을 거다.”
궁시렁거리는 악마를 할만의 사슬로 닥치게 한 뒤, 댈런은 호수로 다시 걸어갔다.
‘악마의 본체를 소환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옥문을 제대로 여는 것만 해도 수십의 제물이 필요하고, 제대로 된 악마를 소환하려면 그 숫자는 열 배로 불어난다.
칼카스 정도 되는 강력한 악마라면, 수천 단위의 인명이 고통 속에서 죽어나가야만 소환할 수 있는 바.
아무리 반란군의 원로쯤 되는 인물이라도, 그런 일에 만반의 준비를 거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의식은 이미 완성에 가까워졌을 거야.’
최상의 시나리오는 소환 의식 자체를 막는 것.
허나 원혼의 핵이라는 마지막 준비물을 가져간 이상, 의식 자체를 막을 방도는 없을 테였다.
그렇다면 그 중간 과정에 개입해, 그 결과물을 비틀어놓는 차선책이 필요했다.
그리고 모든 주문이 그렇듯, 주문의 결과를 비틀기 위해서는 같은 계열의 주문이 제격인 법.
스아아아···.
악마에게서 받아낸 단검을 검집에서 뽑아내며, 댈런은 모태의 위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훅 올라오는 독성 기체. 산 채로 썩어가는 마물들에게서 피어나는 지독한 악취.
모태는 이미 그의 손에 죽었으나, 놈의 위장 속에는 여전히 고통스레 부패해가는 생명체들이 한가득이다.
그리고 고통스런 죽음은 흑마법에서 최상의 연료.
스아아···!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처럼, 단검의 핏빛 날이 스산하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
일행은 즉시 행군에 박차를 가했다. 이제 한시가 급해졌기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칼카스의 소환은 그 자체로만 일주일은 족히 걸리는 대규모 의식.
그러나 반란군 간부의 증언을 들은 사샤는, 그 기간이 대폭 줄었을 거라고 확언했다.
“악마의 본체를 소환한다니. 반란군 중에도 강경파가 아니라면 결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강경파의 원로들은 모두 수준급의 흑마법사죠.”
어중이떠중이 흑마법사 열 명보다, 한 명의 실력 있는 흑마법사가 진행하는 의식이 몇 배는 빠르고 정교하다.
반란군 파티에는 그런 흑마법사가 무려 둘이나 있는 상황.
거기다 의식 장소마저도 악마가 직접 골라준 성소인 만큼, 의식은 일주일은커녕 사흘도 안 걸릴 게 분명했다.
일행은 부상자와 병력 일부를 임시 막사에 대기시켜두고, 요원들 중에서도 컨디션이 최상인 이들만 데려가기로 했다.
근방의 생태계는 늪지 원혼들에 의해 초토화되다시피 했으니, 한동안 마물의 습격은 없을 테였다.
댈런과 시에나, 비요른, 그리고 특무대 요원 스무 명은 그렇게 낮밤을 가리지 않고 달려 하루가 지나기 전에 동굴에 도착했다.
악마 소환 의식을 위한 성소가 있다는, 바로 그 동굴에.
***
동굴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늪지의 썩은 물이 바위틈 사이로 개울처럼 흐르고, 천장의 종유석은 검붉은 색의 이끼로 빈틈없이 감싸져 있었다.
“미궁에서만 자생하는 스테리아 이끼야. 강력한 해독제의 원료로 쓰이지.”
“그렇소?”
“잘 말리면 작은 상자 하나에 금화 한 개 값으로 거래되곤 해. 곱게 빻은 가루는 귀족들 사이에서 선물용 고급 차로 취급되지.”
“나갈 때 좀 챙겨가야겠군.”
댈런은 낮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땅에 굴러다니는 금화를 줍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뒤를 슬쩍 돌아보니 특무대 요원들은 죄다 표정이 굳어있었다. 일렁이는 횃불 사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들.
“크흠, 탐험가들이 부자인 이유가 있구만. 나도 이 기회에 한몫 잡아야지, 하하하!”
그래도 베테랑이라고 불필요한 긴장을 없애려는지, 하나둘씩 지나가듯 잡담을 늘어놓는 모습이었다.
“나, 나도 한 상자 챙겨가야겠군. 약혼자가 좋아하겠어.”
“그래. 우리 집 어머니께서도 요즘 몸이 안 좋으시니, 직접 우려드려야겠네.”
···플래그를 그렇게 세울 필요까진 없을 것 같은데.
댈런은 고개를 작게 흔들고 앞을 바라봤다. 동굴의 어둠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횃불이 비추는 반경을 조금씩 좀먹어가며, 살아있는 듯 다가오는 암흑.
이건 평범한 어둠이 아닌, 흑마법에서 비롯된 잔여물이었다.
“불길한 바람이 부는군. 쇠 냄새가 나.”
“찬 기운도 느껴집니다. 추위를 안 타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교적 강자인 비요른과 사샤도 이상을 느낀 듯했다. 댈런과 함께 앞서가던 시에나가 그 말을 받았다.
“칼카스의 지옥, 사슬옥좌의 영향이야. 소환 의식 준비가 거의 끝난 게 분명해.”
“그런 것 같군.”
댈런이 멈췄다. 그는 자연스럽게 도끼를 뽑아들었다.
가볍게 휘저어진 손끝.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춘 도끼.
패래래랙― 콰직!
곧이어 단단한 무언가에 도끼가 적중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저편에서 푸른 불꽃이 확 피어올랐다.
“흐흐흐, 칼카스님께서 멜린다의 깃방패를 준비하라 하신 이유가 있었군.”
눈앞에 나타난 건 거대한 폭포였다. 정확히는 소리없이 폭포처럼 떨어지는, 강력한 마력의 장벽.
거대한 공동의 출입구를 가로막은 그 장벽이, 침입자를 막기 위한 결계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이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결계 너머에서 음험하게 웃고 있는 노인의 정체 역시 그 무엇보다 분명했고.
철컥!
곧장 견착과 조준을 마친 사샤가, 미리 장전해뒀던 장총의 방아쇠를 당겨내고.
탕― 타다다당!
그녀의 뒤를 이어 스물에 달하는 총구 역시, 동시에 불을 뿜으며 화망을 만들어낸다.
파지짓!
그러나 총알은 모두 결계를 넘자마자 힘을 잃고 떨어졌다.
어린아이의 손에서 던져진 쇠구슬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흐하하하! 그 따위 장난감으로 내 영역, 진록의 장막을 파훼할 생각을 하다니!”
노인은 웃어젖혔다. 사샤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진록의 장막? 그렇다면 네놈은 원로 바스텐···!”
“그런 의미에서 전사, 자네의 일격은 정말로 인상 깊었네. 미리 준비해둔 유물이 아니었으면 이걸로 내 목숨은 사라졌겠지.”
집행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노인은 지팡이로 보호막에 박힌 도끼를 툭툭 건드렸다.
댈런은 무심한 표정으로 허리띠에 손을 얹었다. 그가 바라보는 건 노인의 어깨 너머였다.
장막의 영향인지 육안으로는 넘어다볼 수 없는 어둠. 그곳을 댈런의 눈이 마력광으로 번뜩였다.
장막 역시 노인의 영역에서 비롯된 힘이기 때문일까.
신비를 꿰뚫어보는 그의 시야마저도 선명한 상을 잡아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흐릿하게 보이는 여덟 명의 인영과, 그들 사이에 자리 잡은 거대한 마법진은 한 가지를 말하고 있었다.
반란군의 원로라는 노인의 등 뒤에서, 악마를 소환하는 의식은 한창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으며.
놈은 그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떤가? 자네의 가장 중요한 한 수가 사라졌네. 다음 수는 무엇으로 내게 맞설 텐가? 번개 뿜는 성검? 몸에 두르는 화염의 갑주? 아니면···.”
“말 존나 많네.”
패랙―!
보호막에서 뽑혀 나온 도끼가 공동을 가로지른다. 결계의 강력한 저지력에 비틀거리면서도, 손도끼는 댈런의 손에 무사히 돌아와 안착했다.
“또 투척인가? 흐허허, 통하지 않는 걸 눈앞에서 봤음에도 다시 시도한다라. 야만인 전사다운 무식함이군. 하지만 우리 가문의 보물, 멜린다의 깃방패는···.”
쉭―
도끼가 다시 날았다. 이번에는 파공음이 없었다.
공간을 빗겨내며 장막을 뛰어넘은 손도끼.
위협을 감지한 보호막이 펼쳐졌지만, 장막의 힘을 받지 않은 도끼에 버터처럼 갈라질 뿐이었다.
“어억···.”
머리에 도끼 꽂은 흑마법사가 뒤로 넘어간다. 흩어져가는 장막 너머로 댈런은 발을 내디뎠다.
장막의 어둠이 사라지자 거대한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부터 벽, 바닥까지 빼곡하게 검푸른 도형과 기호들로 메워진 공동.
더이상 숨겨지지 않는 마력의 울림이 공동 전체를 가득 채운다. 비릿한 철향과 살을 에는 냉기가 살기의 형태로 피부를 콕콕 찔렀다.
“흠. 이건 예상 못 했는데.”
그 한가운데, 마법진의 중심에 선 노파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늦었다 전사야. 의식은 이미 완성되었고, 나와 내 동료들을 모두 죽인다 해도 소환이 저지될 일은 없어.”
살며시 짓는 미소. 마치 모든 걸 초연한 듯한 표정.
“원혼의 핵은 소환진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이제 차르국의 백성 팔천 명이 원혼에 의해 목숨을 잃고, 그 대가로 칼카스께서 본신을 이끌고 지상에 강림하실 게야.”
어떠한 자신감도 아닌, 그저 정해진 결과라는 듯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댈런은 팔짱 낀 손끝을 자연스레 품에 넣은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환은 피할 수 없겠군.”
“그래. 이미 벌어진 일. 피할 수 없단다.”
“어쩔 수 없지.”
그는 고개를 털고는, 품속 아공간에서 뽑아낸 단검을 내던졌다.
쉭―!
공간을 뛰어넘는다. 이미 손도끼로 수없이 해낸 이적이, 다시 한 번 손끝에서 펼쳐졌다.
스아아···.
그 끝에 어른거리는 붉은 기운은, 수백 마물의 고통스런 죽음을 제물로 축적한 결과물.
“저, 저건!”
“···핏빛 제례용 단검!”
“에낙사― 젤츠!”
그 잔영을 본 흑마법사들이 황급하게 주문을 늘어놓고, 노파의 표정에서도 평정심이 산산이 깨져나간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콰직!
모든 주문을 무시한 채, 공간을 뛰어넘은 새빨간 단검의 날이 마법진 한가운데 정확하게 꽂힌 순간.
파지지지직!
단검에 충만하게 채워진 제물의 힘이 소환 주문에 더해지며, 동굴 벽면을 가득 메우던 마법진이 뒤틀리기 시작하고.
“쎄 글램.”
흑마법사의 가장 기초가 되는 주문이나, 동시에 어떤 악마의 이름도 부르지 않은 영창이 댈런의 입에서 흘러나오며.
쩌저저적!
공동 정중앙에, 거대한 지옥의 문이 공간을 찢고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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