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23화 (123/288)

사슬옥좌(2)

·········.

그동안은 기감으로만 느껴지던 마력의 바람.

공기중에 수없이 얽히고설키는 주문의 원천이, 오감을 통해 전달되는 건 상당히 기묘한 감각이었다.

물감을 퍼뜨린 듯 일그러진 색조의 흐름. 아이들의 재잘거림 같이 순환하는 소음들.

피부 위에 느껴지는 신비한 감촉과, 혀끝에서 톡톡 터지는 복잡미묘한 향취.

자극이 좀 과한 듯한 이유는, 감각 능력치 역시 인외의 경계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겠지.

다만 평소의 몇 배는 되는 자극이 뇌리에 때려박힘에도, 마찬가지로 30을 앞둔 지능 능력치는 이를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었다.

“후우.”

불필요한 자극들을 빠르게 넘겨내고, 수천 가지 마력의 흐름을 종류와 성질에 따라 분류해낸다.

몇 번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감각권은 이전과 같이 맑아져 있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이전까지의 오감과 육감 위에, 필터 하나를 덧씌우듯 마력풍에 대한 지각이 또렷하게 덮였다는 것.

다만 그게 다른 감각들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를 잘 연구하면 도움이 될 게 분명한 일.

기량 수치가 경계를 넘어섰을 때 그랬듯, 상승한 마력 역시 응용법이 꽤나 다양할 듯했다.

‘가볼까.’

댈런은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왔던 곳’의 표식을 지나쳐, 나아가는 방향은 이전과는 달랐다.

길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하늘을 뒤덮은 수많은 마력풍의 흐름 속.

이질적이고 위협적인 지옥의 마력 사이에, 비교적 익숙한 마력의 바람이 단 한 갈래 있었으니까.

‘미궁에서만 볼 수 있는 성질의 마력풍이군. 저걸 따라가면 되겠어.’

깊은 동굴에서 흐르는 물을 따라가면 출구가 나오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곳은 칼카스의 권능으로 빚어진 지옥의 그림자.

원래 있던 미궁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미궁의 마력풍을 따라가면 된다.

물론 수없이 얽힌 복잡한 마력풍의 흐름 속에서, 단 한 성질의 마력풍만을 식별해 따라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주문을 깊게 연구한 마법사만이, 섬세한 관찰 끝에야 저 흐름을 파악해낼 수 있겠지.

아니면 댈런처럼 마력 감응력 자체에서 종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도 방법이었고.

절그럭. 절그럭.

어쨌든 댈런은 갈라진 뿌리의 근원을 쫓아가듯 마력풍의 흐름을 역추적해갔다.

이로써 길을 두 번이나 잃을 일은 없어졌다.

다만 이 지옥을 빠져나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아이템을 얻으러 가야지.’

계승자 DLC.

이 야만적이고 위험한 세계에서, 그에게 주어진 두 가지 선물 중 하나.

아무리 수백 회차의 경험이 머릿속에 있더라도, 그걸 활용할 능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뻥튀기된 초반 능력치가, 그의 단기적인 생존을 철저하게 보장해주었다면.

계승자 DLC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서, 그 이상의 것들을 거머쥘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원리를 파악하지 못한 미지의 시스템이기도 했지.’

수백 회차의 실패 끝에, 그야말로 홧김에 지른 DLC.

현질만은 자제하겠다는 신념마저 버릴 정도로 흥분했던 과거의 그였다. 그 와중에 설명을 제대로 읽어봤을 리가 없지.

물론 기본적인 건 쉽게 파악이 가능했다.

근력캐의 시체를 회수하면 근력 수치가 주어지고, 마법사의 시체에서는 주문 스킬이나 관련 능력치가 나온다는 사실 정도.

하지만 수많은 아이템과 스킬들 사이에서, 대체 어떤 기준으로 보상이 산정되는 것일까.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야 어렴풋이 감을 잡은 것 같군.’

댈런이 지금까지 회수한 시체는 두 자리수에 달했다.

그리고 그동안 쌓인 데이터를 통해, 그는 꽤 그럴듯한 가설을 도출할 수 있었다.

그건 각 능력치와 스킬, 아이템의 값어치와 잠재력을 종합하는 복잡한 공식이었다.

좀 더 명확하게는 각 항목의 세부 등급과 능력, 입수 난이도, 사용 제한치, 금전적인 가치와 이름값 등을 죄다 뒤섞어 우열을 가리는 공식.

그렇게 캐릭터의 보유 항목들을 전부 동일하게 환산한 뒤, 최소한의 능력치를 포함해 가장 값어치 있는 항목들부터 차례로 지급하는 게 보상 선정의 방식이었다.

아마 이 육신에 깃든 초인적인 지능 수치가 아니었다면 이를 역산할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

‘머리가 지끈거리는군.’

댈런은 도끼자루로 머리를 긁적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쨌든 오랜 시간에 걸쳐 가설을 세웠으니, 이제 실증의 단계로 넘어갈 차례였다.

이 지옥의 그림자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두 구의 시체를 통해서.

***

시체를 찾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공기중에 얽히고설킨 수많은 마력의 바람 사이에서, 문득 그의 발걸음을 잡아끄는 한 가닥 흐름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 ······.

그건 흐리멍텅한 잿빛의 흐름이었다.

폐부를 간질거리는 퀴퀴한 자취방의 냄새이기도 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오토바이의 경적 소리였으며, 동시에 짭짜름한 후라이드 치킨의 기름맛이었다.

“···썩을.”

댈런은 고개를 털어 감상을 끊어냈다. 그리고 미약한 마력풍을 따라간 끝에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악마를 처단하고자 한 성기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진짜 있었군.”

댈런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사실 따라오면서도 확신은 없었다.

그저 이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마력의 흐름인 만큼, 반반 정도의 가능성을 염두에 뒀을 뿐.

‘이건 생각해본 적 없는 다른 문제군.’

댈런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단순히 허상일 뿐이라 여겼던 잿빛 시체.

모니터 너머에서 겪어온 옛 플레이의 흔적이, 미약하나마 새로운 마력의 흐름이 뻗어져나올 줄이야.

‘다른 마법사들은 저 흐름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마법사는 귀한 직종이다. 제대로 된 마력 재능을 가진 이는 백 명 중 두셋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하지만 대륙은 드넓었다. 그렇기에 머릿수만 따지면 수도 없이 널린 게 마법사였다.

개중에는 펠버와 같이 대영역을 이룬 대마법사들도 꽤 많이 존재했고.

속세에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배후에서 정세를 조종하는 노괴들도 드문드문 있었다.

만약 그런 초월자들이 이토록 이질적인 마력풍을 감지할 수 있다면, 시체를 직접 보지 못하더라도 뭔가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겠지.

최대한 많은 시체를 회수해야 하는 댈런의 입장에서는 곤란한 일이었다.

[여기 뭐가 있다는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 마력의 바람에서 뭔가 이질적인 느낌은 없나?’

[지옥의 마력풍 사이에···아주 약간, 미궁의 냄새가 섞여있기는 하군요. 추적은 힘들 것 같습니다. 힘이 그 정도까지 회복되지는 않아서.]

일단 악마는 느끼지 못하는 게 확실하고.

어쩌면 다른 이들이 시체를 볼 수 없듯, 이 희미한 마력풍 역시 그만이 느낄 수 있는 종류일 지도 몰랐다.

물론 대악마나 악신쯤 되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다만 거기까지는 당장 생각할 문제가 아니겠지.

댈런은 이 주제를 머릿속 한 켠에 곱게 접어 넣어두었다. 그리고 시체에 손을 뻗었다.

파스스.

빛의 가루로 변해, 자석에 철가루가 끌리듯 손끝으로 빨려들어오는 잿빛 음영.

[악마를 처단하고자 한 성기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2, 십이성창의 네 번째 조각]

뿌드득―

오랜만에 증가한 근력 수치에 바윗덩이 같은 근육들이 꿈틀거리고, 허공에서 아지랑이처럼 나타난 물건이 천천히 내려와 손에 쥐여진다.

스륵.

순백의 면포에 싸인 길쭉한 막대 형태의 물건, 성창의 조각.

이건 게임 중후반부, 마물의 대대적인 침공 때 유용하게 쓰일 아이템 중 하나였다.

‘어쨌든 이걸로 공식이 대충 들어맞는다는 건 확인했군.’

[악마를 처단하고자 한 성기사의 시체]

- 압도적인 완력으로 기사단 내에서 유명하던 성기사의 시체다. 타고난 힘 때문에 갑옷과 무기를 달에 두 번씩 바꾸는 걸로도 유명했다. 악마 칼카스의 차르국 침공 당시 놈을 처치하기 위한 원정군으로 발탁되어 최선봉을 맡았으나, 지상에 강림한 지옥의 시험을 이겨내지 못하고 성물을 지켜내다 사망했다.

방금 회수한 시체는 근력 올인으로 키운 성기사 캐릭터였다.

성기사답게 가지고 있는 스킬도 여럿이었고, 상급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 원정을 보낸 만큼 귀한 아이템들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다만 가설로 정립한 공식에 따르면, 이 시체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보상은 둘뿐이었다.

20대 후반에 달하는 근력 수치.

그리고 수만의 마물을 막아낼 수 있는 강력한 성물.

‘다음 시체를 회수하면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겠지.’

댈런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시체를 찾아낼 수 있었다.

[불운한 곡검의 달인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불운한 곡검의 달인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기량 +1, 낙성의 비약]

이로써 가설로 세운 공식은 두 번이나 검증된 셈이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했을 때, 계승 보상을 예측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다른 무엇보다 값어치 있는 수확.

‘너무 늦기 전에 서둘러야겠군. 지금 상태의 시에나라면 슬슬 한계가 올 시점이니.’

댈런이 아공간에 조심스레 비약을 정리해 넣고서, 출구를 향해 떠나려는 찰나였다.

“댈런?”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낮고 허스키한, 반쯤은 쉰 듯한 음색이었다.

반사적으로 도끼를 던질 뻔한 댈런은, 가까스로 그 지친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채고는 멈출 수 있었다.

“댈런! 자네가 맞구만! 이럴 수가, 정말 다행이네.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나!”

스륵―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온몸에 폭약과 여분 총탄을 둘둘 두른 난쟁이.

그것도 겁에 질리다 못해, 하나뿐인 눈이 시뻘겋게 부은 외눈의 명공이었다.

***

5분.

외눈의 명공이라 불리는 전설적인 장인 중 하나, 비요른 칼라드라쿰이 주저앉아 눈물을 펑펑 쏟은 시간이었다.

“으흐흑, 고맙네. 자네가 있으니 마음이 좀 놓이는구만. 자네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숲과 관련된 끔찍한 기억이 있다네. 차라리 악마의 입에 폭탄을 쑤셔넣었으면 넣었지!”

눈가를 훔치며 수염에 묻은 눈물을 탈탈 털어내는 난쟁이.

들어보니 어릴 적에 숲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개인적인 일이라 자세하게 말해줄 수는 없지만, 지옥의 숲처럼 기괴하게 생긴 나무들로 둘러싸이면 그날의 악몽이 떠오른다고.

‘게임에서도 원체 개인적인 정보를 알아내기 힘든 인물이었지. 그런 과거가 있는 줄은 몰랐군.’

평범한 숲은 괜찮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람이 많으면 참을 만하다고도 했고.

‘그나저나 무슨 겁에 질렸다는 양반이 폭탄 테러라도 불사할 정도로 폭약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녀?’

이미 룬 마법에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오는 가보까지 동원해, 댈런의 감각에조차 걸리지 않을 정도로 은신을 유지한 상태였다.

거기에 저렇게 폭탄까지 달고 다니니, 그야말로 어디 주요 시설을 붕괴시키려는 테러범으로 오해해도 이상하지 않을 모양새.

넌지시 돌려서 물어보자, 비요른은 헛기침을 큼큼 하며 대답했다.

“그야 두려울수록 더 화려한 폭발을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겠나? 갈 때 가더라도 혼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

“화약과 폭발로 끝맺는 생이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그거 어디 중동에서 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테러범들이랑 사고방식까지 비슷한 것 같은데.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걸 살살 문지르며, 댈런은 슬슬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이곳은 어떻게 찾아온 거요?”

사실 비요른 역시 지혜의 시험에 떨어졌을 거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장인의 손재주와 감각에 더불어, 난쟁이의 힘과 체력까지 겸비한 영웅이었으니까.

룬 마법을 쓸 수는 있지만, 보조하는 역할에 가까운 만큼 마력 수치는 그리 높지 않겠지.

다만 예상하지 못한 건, 어떻게 이곳까지 길을 찾아왔냐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출구까지는 대략 걸어서 5분 거리다. 사실 코앞이라 해도 무방해.’

댈런은 방금 회수한 시체, 불운한 곡검의 달인이라는 캐릭터의 결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불사의 악마에게서 온갖 저주를 둘둘 감은 채, 어쩔 수 없이 돌입한 칼카스와의 보스전.

이미 파훼법을 알고 있기에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축적되어온 저주로 인해 출구를 얼마 안 남기고 캐릭터는 사망했다.

사실상 이곳은 출구에서부터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는 이야기.

주문에 대한 지식도 깊지 않을 테고, 거기다 마력 수치도 비교적 낮은 비요른이 이 시간에 닿을 수 없는 위치였다.

“무서운 마음에 잘은 모르겠고, 그냥 감을 따라 움직였네.”

“···그렇군.”

그냥 감이 좋은 건가. 자세한 건 나중에 더 알아봐야 할 듯했다.

어쨌든 시간이 많이 없었다. 댈런은 진정한 비요른을 데리고 바로 움직였다.

5분쯤 걷자 예상대로 출구가 등장했다.

정확히는 출구라기보다, 마지막 시험이라고 봐야 맞겠지만.

츠즈즈즈즈···.

잘게 부서진 공간의 벽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치 깨진 거울처럼, 공간 자체가 일그러진 현상.

장벽의 표면은 끊임없이 부서졌다가 다시 결합되고, 그럴 때마다 각기 다른 수많은 장소들의 상을 맺어내며 변화해나갔다.

“예전에 마탑과의 합동 연구에서 이런 비슷한 주문을 본 적 있네. 물론 십수 명의 마법사들이 붙어서 완성해냈고, 이 정도로 거대하지도 않았네만···. 요지는 이 벽은 주문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걸세.”

평소처럼 이성을 되찾은 어조로 비요른이 말했다. 그가 아쉽다는 듯이 덧붙였다.

“어쩔 수 없군.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할 것 같네.”

“무슨 소리요?”

“자네에게 굉장한 마법 무구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네만, 저 벽은 도구에 의존한 주문에는 큰 타격을 받지 않는다네.”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잘 생각해보니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 싶긴 했다.

레레도나라의 비검이 주문과 내는 시너지가 워낙 좋다보니, 어지간해서는 주문의 힘을 무기에 덧씌워 사용하곤 했으니까.

“어쩌면 다른 길도 있을지 모르네. 일단 왔던 길을 돌아가보는 게···.”

“필요 없소.”

댈런은 난쟁이의 말을 끊고서 가볍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스윽.

손을 들어올리고, 장벽에 시선을 집중한다.

우우웅···.

그 간단한 동작에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스킬에 영향을 주는 기량.

주문의 근간 그 자체인 마력.

두 능력치가 모두 인외의 영역에 다다랐으니, 안 그래도 한 번 시험해봐야 할 참이었다.

지금까지 익혀온 주문이, 영역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어디까지 응용될 수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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