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슬옥좌(4)
‘쯧. 악신의 개입이라니.’
뭣 같은 에낙사구스.
휘릭! 차르르륵―
댈런은 몸을 뒤틀어 날아오는 사슬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칼카스의 본체를 처치했을 때 벌어진 일들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맥락을 잡기에 충분한 증거였으니까.
악신의 마력을 쏟아내던 지팡이의 파편. 그건 분명 은밀하게 내장된 에낙사구스의 비술이었다.
발동 조건과 효과 역시 유추하기 쉬웠다. 주문이 효과를 발하는 시점은 칼카스가 죽음을 맞는 순간.
그리고 그 효과는 갓 죽은 악마의 육신을 제물 삼아, 살해자를 지옥으로 소환해버리는 게 분명했으니까.
‘여러 번 꼬아낸 차원 전이 마법이군.’
[으하하하! 언제까지 도망만 칠 거냐!]
콰광! 콰과광!
악마의 광소와 등 뒤를 쫓아오는 굉음을 무시한 채, 다시 한 번 지면을 박차며 숲속을 주파한다.
콰지직! 우직!
이쑤시개처럼 꺾여나가는 굵직한 지옥나무들. 유연한 육신이 그 사이로 빗발치는 사슬의 폭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낸다.
그 순간 섬찟하게 들어오는 육감의 경종.
“쯧.”
가볍게 혀를 차며 몸을 튕기듯이 허공으로 띄워올렸다.
촤르륵···!
시야의 사각으로 날아드는 가시 돋친 사슬을 인지하고,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러내기까지 반의 반 호흡.
쩌어어엉!
손아귀에 전해지는 충격은 묵직하기 그지없었다. 공동에서 상대하던 사슬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곳은 칼카스의 본거지인 사슬옥좌.
악마의 권능으로 빚어진 지옥이니만큼, 모든 환경과 조건이 놈에게 최적화된 싸움터였다.
쩌저저적!
지면에 발이 닿는 아주 잠깐 사이에 냉기가 파고든다. 부츠는 이미 걸레짝이 된 상태였다.
퍼버벅! 촤르르르···.
거기다 느닷없이 땅을 뚫고 용솟음치는가 하면, 허공을 찢고 뱀처럼 달려들기까지 하는 사슬의 파도.
작게는 성인 남성 허벅지 굵기의 사슬부터, 아예 아름드리나무 수준의 거대한 사슬까지 댈런 하나를 잡기 위해 날아들었다.
“······.”
그 모든 걸 신중하게 눈에 새기던 댈런은, 어느 순간 달아나는 걸 멈추고 지면에 내려앉았다.
계산이 끝난 것이다.
‘쉽지 않겠어.’
방금까지 인간과 마녀, 드워프로 구성된 파티한테 처맞느라 응어리가 맺힌 걸까.
악마는 그야말로 뼛조각 하나 안 남길 기세로 그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앞뒤 없는 악마의 공세를 맞이하며, 댈런은 놈에게 남은 힘의 크기를 하나하나 역산해갔다.
쏟아지는 사슬의 숫자와 파괴력. 각각의 사슬이 품고 있는 냉기. 놈이 공간을 여닫는 마력의 흐름. 이 와중에도 끝까지 숨기고 있을 변수들까지.
게임에서도 겪어본 적 없는 4 페이즈.
그것도 칼카스의 본진인 사슬지옥에서의 싸움인 만큼, 충분히 놈의 상태와 능력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승산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불행 중 다행일까.
댈런을 함정에 빠뜨리는 건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악마 역시 만전의 상태는 포기해야만 했다.
3할의 힘을 가지고 소환된 본체가 제물로 바쳐진 탓에, 놈에게 남은 힘은 6할에서 7할 정도.
그 정도라면 지금 본신의 힘으로 부딪혔을 시, 이길 확률은 대충 10 퍼센트 미만이었다.
게임이었다면 승산이 0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며 싸움에 뛰어들었을 터.
허나 댈런은 거기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이 세계는 더이상 모니터 너머의 허구가 아니었고,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으니까.
‘도박수이긴 하지만, 통하기만 한다면 승률은 100 퍼센트.’
습―
짧은 생각을 마치고 한껏 숨을 들이쉰다. 두 발은 지면을 굳게 디뎌 몸을 지탱했다.
양손으로 성검을 잡고 들어올리는 간단한 동작 속에서, 어깨로부터 시작된 회오리가 순식간에 검신까지 내달리고.
꽈광! 쿠르르륵!
온 지면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짓쳐오는 사슬의 파도를 향해, 댈런은 성화가 맺힌 성검을 가볍게 내리그었다.
화륵!
시작은 허공에 날린 불티처럼, 백색 불꽃으로 그려진 얇은 호선.
콰아아아―
곧이어 백색의 성화를 머금은 폭풍이, 그 궤적을 기점으로 전방을 향해 부채꼴로 쏟아졌다.
쿠지지직―!
사슬의 파도와 불꽃의 폭풍이 부딪친다.
힘과 힘의 충돌은 일대의 공간을 말 그대로 으깨버렸다.
한 발 늦게 댈런을 쫓아오던 사냥개들이 갈가리 찢겨나가고, 지옥나무의 깊은 뿌리마저 뽑히다 못해 뜯겨서 날아가버렸다.
격돌의 심부에서 떨어져 있었음에도, 댈런의 두 다리가 땅에 깊은 고랑을 만들며 밀려날 정도.
그 파괴의 충돌이 가라앉은 직후.
[크흐흐, 포기한 거냐?]
어느새 다가온 칼카스가 옥좌 위에서 조소를 머금고 안광을 번쩍였다.
[기사왕 라판텔라의 분쇄검, 그리고 성화라. 전사여, 네 영역에서 만들어진 가능성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건 확실하구나. 그래서 그게 네 최선인 건가?]
악마가 물었다. 댈런은 낮게 웃었다.
놈이 아는 성검의 전사라면 이게 최선이 맞겠지.
영역의 힘에 성검의 능력이 결합되어 탄생한 ‘뇌격’.
그리고 라판텔라의 분쇄검에 균열에서 얻어낸 성화를 접목시킨 백색 화염의 폭풍.
지금까지 대부분의 싸움에서, 댈런은 이 두 가지 능력을 사실상의 주력기로 사용해왔으니까.
실제로 이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감당해내는 적은 흔치 않았다. 사실 여기까지도 필요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현재 댈런의 몸뚱이는 치트키를 몇 번이고 친 것 같은 상태.
보통의 싸움은 검 좀 휘두르거나 도끼질 한두 번이면 해결되곤 했다.
물론 상급 악마인 칼카스에게는 좀 더 강한 처방이 필요한 법이다.
[크하하하! 아까의 자신감은 다 어디 간 거냐, 전사!]
숲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비웃는 놈을 무시하고, 시린 냉기로 가득한 공기를 천천히 들이쉰다.
시선을 내려 왼팔을 쳐다봤다. 익숙한 푸른 문신은 사라지고 없었다.
지팡이 파편에 내장되었던 술식은, 살해자 단 한 명만을 전이시키는 주문이었기 때문.
댈런은 성검의 검면을 퉁퉁 두드렸다. 그러자 지금껏 희미하게 진동하고 있던 성검이 떨림을 멈췄다.
[그래. 벌레 같은 필멸자는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어야 하거늘, 어딜 감···히······.]
그리고 그 대신 떨리기 시작한 건, 이변을 눈치챈 악마의 목소리.
댈런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후우.
날숨에 실려나온 깊은 열기가 몸을 둘러싸고 있던 냉기를 확 몰아내고.
화륵!
차디찬 사슬로 뒤덮인 지면과 나무들이, 난데없이 달라붙는 검붉은 화염에 서서히 타들어간다.
댈런은 고개를 들었다. 칼카스의 푸른 안광이 그의 눈과 마주쳤다.
세로로 죽 찢어진 검붉은 동공.
그 눈을 본 악마가 기함했다.
[어, 어찌···용의 힘을 단순히 담아내는 건 몰라도, 필멸자의 육신으로 그 불꽃을 휘두르는 건 불가능할 터인데!]
“지랄.”
쿠웅.
내딛는 걸음에 공기가 훅 밀려난다.
반경 수 미터의 사슬이 죄다 끊어져 떠오르고, 부스러져 날아가는 광경.
경악으로 물든 악마의 눈동자를 마주 보며, 댈런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나도 2 페이즈 있다, 새꺄.
***
촤르르르···!
사슬의 비가 내린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 냉기만으로도 피부가 얼어붙고, 살짝 스치기라도 하면 온몸이 산산조각날 지옥의 사슬들이었다.
수백 단위의 군대라도 단숨에 쓸어버릴 그 폭우에 맞서, 단 한 번 검이 휘둘러졌다.
검끝이 그려내는 검붉은 곡선.
그리고.
쩌━━━
산산조각나 파편으로 변해버린, 지옥의 사슬이었던 것들.
후두둑 떨어지는 쇠쪼가리들 사이에서 댈런은 말없이 검을 늘어뜨렸다.
직후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고는, 가볍게 땅을 밀어찼다.
투웅―
단숨에 수십 미터 상공으로 치솟는 신형. 옥좌 위에 앉은 거인과 동일한 눈높이가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만만하던 악마가, 다급한 표정으로 일어나며 옥좌의 등받이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 길이만 수 미터. 사람이 아니라 건물이라도 썰어야 할 것 같은 크기의 장검.
검신 위에 얼기설기 얽힌 사슬에서 사특한 문자가 빛을 내뿜으며, 일대의 마력을 죄다 끌어모은다.
구우우웅···.
휘둘러지는 것만으로 일대의 대기를 떨게 만드는 검로.
그에 맞서 댈런도 마주 검을 내뻗었다.
짙게 맺힌 흑염으로 인해, 한 자루의 검이라기보다 용의 발톱에 가까워진 성검을.
쩌━
격돌의 순간은 짧았고.
━━━!
찰나의 번쩍임 이후, 밀려난 건 댈런 쪽이었다.
콰르르르르!
강력한 폭탄이라도 터진 듯, 충격파로 일대의 지면이 죄다 쓸려나간다.
댈런은 화염의 날개를 펴 충격파에 휘말려가는 몸을 간신히 바로잡았다.
“크으.”
한 번의 격검으로 백 미터 가깝게 튕겨나갔다. 일대를 휩쓴 힘의 폭발은 댈런의 육신에도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긴 채였다.
반면 칼카스는 여전히 옥좌 위에 서 있었다.
작은 생채기 몇 개는 났으나, 그쯤이야 악마의 재생력으로 금방 회복해내면서.
[크하하하! 역시, 필멸자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악마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놈도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검신을 휘감은 사슬은 삼분의 일이 뜯겨나갔으며, 놈의 권능을 상징하는 사슬옥좌 역시 군데군데 실금이 갔으니까.
[제어조차 수 없는 권능을 그저 마구잡이로 휘두른다니, 어린아이가 진검을 손에 쥔 것과 다를 게 뭐란 말이냐!]
그러나 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검붉은 용의 피.
댈런이 소유한 십수 개의 스킬 중, 가장 높은 A등급의 권능.
용혈은 다른 스킬들과 달리 그가 온전히 통제할 수 없었고, 스스로 의지를 가진 채 그의 영역을 불태우려던 전적까지 있었으니까.
때문에 성검의 힘으로 한참 동안 그 자의식을 억눌렀었고, 버번을 만난 이후에는 새끼 청린용을 통해 그 힘을 봉인해왔다.
따지고 보면 지금 악마와 싸우게 된 것도, 신비의 육신을 얻어내고자 버번과 맺은 거래 때문 아니던가.
언젠가 초월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몸뚱이와 재능만으로 이 힘을 다루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댈런은 스스로의 재능만으로 이 힘을 다룰 생각이 없었다.
‘진룡.’
내면을 향해 말을 건다.
심상 너머, 설산 위에 웅크린 거대한 고룡을 떠올리며.
‘용신의 적창, 이름이 지워진 용.’
듣지 못했다는 듯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그를 향해, 다시 한 번 더 의지를 표했다.
‘내가 죽으면 네 마지막 기회도 사라질 텐데. 정말 그걸 원하나?’
[···모든 걸 다 아는 척 기만하지 마라, 인간. 나는 너의 영역 속에 둥지를 틀었다.]
그러자 낮고 굵은 목소리가 심상 속에서 울려퍼졌다.
[네 알량한 속임이 카일버르쿠스에겐 통했을지라도, 네 심상의 근원을 아는 나는 다르다.]
심중의 전성에 노기가 담긴다. 그리고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휘청 흔들렸다.
“크윽.”
용암 같은 압박감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살갗이 쩍쩍 갈라지며 검은 불길을 토해낸다.
마치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이 육신을 찢어발길 수 있다는 듯한 날카로운 의지의 표명.
우웅···.
성검이 다급하게 그 힘을 억누르려 했지만, 댈런은 검신 위에 가만히 손을 얹어 막았다.
그리고 말했다.
‘내 심상 속에 둥지를 틀었으니 더 잘 알 텐데.’
천천히 숨을 가다듬고, 신중하게 다음 단어들을 골라낸다.
‘나야말로 네 소원을 이뤄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걸.’
[······.]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핑핑 돌던 시야는 한결 차분해졌다.
댈런은 씩 웃었다. 오케이. 일단 미끼를 물었다는 거지.
남은 건 이 연식조차 가늠할 수 없는 초월자를, 적당하게 구워삶아 이쪽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뿐이었다.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 지금까지 몇 번이나 해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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