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26화 (126/288)

사슬옥좌(5)

이 대륙에 떨어진 이후, 댈런이 비단 폭력적인 방법으로만 문제를 해결한 건 아니었다.

물론 그쪽이 편하긴 헀다. 그가 입은 육신은 처음부터 부수고 썰어제끼는 일에 완벽하게 특화됐으니까.

다만 가끔은 그의 검이 통하지 않는 상대도 있는 법이고, 나아가 그런 상대에게 도움을 얻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에버론 라크탈라.’

금강궁의 스물여섯 초월자 중 하나에게, 악마의 정수를 넘기고 호의를 얻어냈을 때가 그랬고.

‘카일버르쿠스 아르번.’

누구도 알지 못했던 바텐더의 정체를 까발리면서까지, 육신의 강화를 위한 거래를 성사시킨 일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지금.

[입을 신중하게 놀리는 게 좋을 거다, 인간.]

영역에 자리 잡은 진룡을 상대로 해야 하는 일도 그것들과 같았다.

[지금까지 네 영역 안에 잠잠히 있었던 게, 결코 네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님을 알아두어라.]

난데없는 필멸자의 영역에 자리 잡게 되어, 팔자에도 없는 도구 역할을 하게 된 고룡.

첫 대면 때부터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던 이를 상대로, 어떤 설득이 유효할 것인가.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군.’

댈런은 입꼬리를 슬그머니 끌어올렸다.

‘용신에게 버림받아 갈 곳 없는 신세에, 몸 뉘일 장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 아닌가?’

도발한다.

한낱 필멸자가 불멸의 존재에게 내뱉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단어들.

심지어 그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내용과 어조였다.

[······쯧.]

다만 그 폭언을 들은 고룡 본인은, 그저 짧게 혀를 찰 뿐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하게 정곡을 찔린 탓이겠지. 댈런은 빠르게 다음 말들을 골라냈다.

콰과과과···!

그러는 동안에도 악마는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댈런이 진룡의 힘을 깨워낸 이상, 자신의 승산도 100 퍼센트는 아님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수 미터짜리 검신의 고대 문자가 빛을 뿜으며 저주가 빗발치고, 머리 위의 하늘이 열리면서 사슬의 벼락을 끝도 없이 쏟아낸다.

화륵―!

댈런도 그에 맞서 화염으로 뒤덮인 검을 휘둘렀다. 검붉은 불꽃이 훑고 지나가는 경로마다, 냉기가 소멸하고 사슬이 바스라져 흩날렸다.

허나 통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모든 공격을 받아치는 건 불가능한 법.

흩뿌려진 화염을 피해 날아든 사슬들은, 착실하게 그의 육신과 체력을 갉아먹어가는 중이었다.

‘썩을.’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침묵하는 용을 향해, 댈런이 다시 한 번 의념을 발하려 할 때였다.

‘잘 생각해봐라. 난 네게 재기할 기회를···.’

[너는 초월자가 아니다, 인간.]

심상 너머 용의 전성이, 의념을 자르고 낮게 울려퍼진다.

[네가 권속 삼은 늙은 마법사는 널 회귀자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조차 아니지.]

‘맞아.’

댈런은 곧장 수긍했다. 다른 초월자에게라면 몰라도, 영역 속에 둥지를 튼 진룡에게까지 숨길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설명해보거라. 어떻게 그토록 확신에 차서 나에 대해 이야기했는지. 나의 존재는 인간들의 역사에서 잊힌 지 오래일 터인데.]

한결 차분해진 용의 목소리. 그 안에 담긴 심리는 이제 분노보다는 의문에 가까웠다.

이로써 목표까지 절반은 온 셈이다. 댈런은 급하지 않게 대답을 빚어갔다.

‘역사에서 사라지긴 했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 네 위명 자체는 들어본 적 있다.’

용신의 적창, 이름 없는 용.

게임의 최후반부에 이르러서조차 단 한 번도 직접 등장하지 않은 존재였으나, 그렇다고 완벽하게 베일에 가려진 건 아니었다.

‘용신의 손에서 한 번 휘둘러진 창끝이 바다를 증발시키고, 드높은 산맥을 날려버렸다던가.’

당연한 일이다.

진룡 중에서도 용신과 직접적으로 엮인 권속은 단 열셋뿐.

심지어 전설에 따르면, 적창의 권능은 그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강대했다고 한다.

그런 존재를 어떻게 세상에서 완벽하게 지워내는 게 가능할까.

‘눈여겨봐야 할 점은, 네가 그토록 강대한 용신의 권속이었음에도 이름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지.’

아니, 정확히는 빼앗겼다는 표현이 옳을 터였다.

용에게 진명이란 곧 용의 존재 그 자체. 이름을 잃었다는 건 곧 존재의 상실을 의미하니까.

‘난 네게서 이름을 앗아갈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라 생각했다.’

용신.

모든 용들의 지배자.

역사의 뒤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적창과 용신이 어떤 갈등을 빚었고, 어쩌다가 그 결과가 한 존재를 소멸에 가깝게 몰아갔는지도.

허나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지금은 결과만이 남아있을 뿐.

용신에게 이름을 빼앗겼다는 건, 곧 용족의 명부에서 지워졌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군주에게 버림받은 신하가 품을 생각이야 뻔한 법.

‘용신을 대면하고 싶나?’

[······.]

‘나라면 널 용신 앞에 데려가줄 수 있다.’

침묵하는 진룡의 전성. 댈런은 송곳니를 슬쩍 드러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내 영역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직접 봤을 테니까. 그렇기에 지금껏 내 영역에 자리 잡고 있는 거 아닌가? 원했다면 힘을 폭주시켜 날 죽일 기회는 이미 몇 번이나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

마지막 의념 이후 용은 한동안 침묵했다. 댈런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크하하! 미지근하다, 전사! 좀 더 불을 뿜어봐라!]

악마가 끊임없이 쏟아내는 주문과 권능에 맞서면서도, 심상 속은 최대한 평정을 지켜낸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필멸자 주제에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오만하다는 말은 부족할 정도로.]

슬슬 악마의 공세가 힘겹게 느껴질 즈음, 용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래, 네게 판돈을 걸어보도록 하지. 과연 운명의 저울은 너를 향해 기울 것인가, 아니면 심연의 다섯 신들을 향할 것인가.]

그 의념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건, 숨기지 않은 흥미와 기대감.

깎아지른 설산의 봉우리에서, 용이 자신의 거체를 천천히 일으키는 게 느껴졌다.

그가 말했다.

[저 애송이를 처리해주는 건, 그걸 지켜보기 위한 관람료로 생각하도록.]

화륵!

허공에 불이 일었다.

검고 녹진한 작은 불꽃이었다.

주먹보다 작은 크기로 피어난 화염의 꽃을, 댈런은 손을 뻗어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무슨···.’

그리고 댈런은 당황했다. 방금 전의 그건 자신이 한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팔다리. 허나 이에 당황할 틈은 없었다.

[크하하! 포기했구나, 그럼 죽어라!]

잠깐 내보인 빈틈을 비집고, 칼카스가 전력을 다해 권능을 떨쳐냈고.

촤르르르―!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사슬의 파도가 눈앞을 가득 메운 순간.

[쯧.]

가소롭다는 듯 짧게 혀를 차는 전성이, 댈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불꽃 쥔 손이 앞으로 천천히 뻗어졌다.

피싯━

[···뭐?]

공백이었다.

다가오던 사슬의 파도와 거기 덧씌워진 지옥의 한기, 그 사이사이를 파고들던 악마의 저주까지.

모든 게 한순간에 증발해 사라지고, 촛불 꺼지는 듯한 소리 이후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는 공백뿐.

[무, 무슨, 아니, 어떻게···.]

옥좌 위의 악마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그건 방금 손을 내민 당사자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대체 뭔···?’

막아낸 게 아니다. 그렇다고 상쇄하거나 흘려낸 것도 아니었다.

인외의 경지에 오른 기량과 마력 수치도 방금 전의 현상을 해석할 수는 없었다.

아니, 해석은커녕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파악이 불가능한 상황.

‘···진룡의 힘인가.’

허나 직감적으로 느낀다.

쿵. 쿵. 쿵. 쿵.

뻐근하게 요동치는 심장. 혈관을 타고 도는 용혈. 코에서 한 줄기 선혈이 주륵 흐르고, 핏방울은 지면에 닿자마자 땅을 녹여내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라. 몸의 주인인 네가 졸도하면 나도 힘을 쓸 수 없으니까.]

용이 말했다. 댈런은 살짝 흐릿해지려 하는 시야를 부여잡았다.

[용신 앞에 데려다주겠다더니, 이딴 걸 몸뚱이라고 잘도 가지고 다녔군. 돌아가면 수천 년 전 사랑놀음의 굴레를 못 벗어 술이나 따르고 있는 녀석에게 심장부터 만들어 받도록 해라.]

저벅.

가벼운 잔소리와 함께 누군가 그의 곁에 나란히 섰다.

조금 흐릿한 형체의 허상. 동양풍의 검은 도복 같은 옷을 입은 인영이었다.

키는 작았다. 댈런의 가슴팍에도 못 미치는 느낌이었다. 짧게 쳐올린 머리칼은 검은 바탕에 붉은 기가 드문드문 섞인 이채로운 빛깔이었고, 눈동자는 세로로 찢어져 두 가지 색으로 번뜩였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지만 누군지는 명백히 알 수 있었다. 댈런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적창.”

[그래.]

“거래를 받아들인 건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고 지옥에마저 떨어져 본 그에게도, 방금 본 광경은 지독하리만치 현실감이 결여되었기 때문.

인간의 형상을 입은 용은 피식 웃었다. 어째선지 익숙한 웃음이었다.

[당연하지. 대가 없이 귀찮은 일을 도맡을 이유가 있겠느냐?]

그가 농담처럼 말했고.

[그럼 잠시만 몸을 빌리도록 하겠다.]

이어진 전성이 끝맺음과 동시에, 댈런의 신형이 사라졌다.

[크아아아악!]

다시 나타났을 때, 악마는 한쪽 팔을 잃은 채였다.

쿵.

거대한 팔이 땅에 떨어진다. 댈런의 몸을 빌린 용은 뻐근한 어깨를 풀었다.

[이거 주먹질 몇 번 했다가는 몸뚱이가 못 버티겠군.]

잠시 생각하던 그는 등에 메어져 있던 창을 뽑아들었다.

[기왕이면 익숙한 형태가 좋겠지.]

화르르륵!

르베론 아하킴의 창이 불꽃에 휩싸인다. 잘려나간 어깨를 감싸쥔 악마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소리 질렀다.

[···저, 적창! 어찌 그대가 필멸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아무리 형편이 궁지에 몰렸다고 한들, 이런 벌레 같은 존재에게···!]

[시끄럽다.]

전사의 몸을 입은 용이 창을 내리그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땅이 쩍 갈라졌다.

갈라진 건 그 땅 위에 부유하던 옥좌 역시 마찬가지. 수만 갈래의 사슬이 죄다 끊기고, 반토막난 옥좌가 볼품없이 지면으로 추락했다.

쿠웅―

건물이 무너진 것 같은 충격이 일대를 휩쓸었다. 적창은 여유롭게 걸어 그 앞에 섰다.

옥좌와 함께 반토막이 되는 걸 가까스로 피해낸 칼카스는, 대신 나머지 손목과 다리 한쪽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끄으으···이렇···게는······.]

반쯤 남은 팔과 한쪽 다리로 꿈틀거리며, 떨어진 검을 향해 기어가는 사슬옥좌의 주인.

악마 특유의 재생력이 놈의 잘려나간 신체마저도 빠르게 복구시키고 있었으나,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이유는 없었다.

푹―

[끄아아아악!]

멀쩡한 다리에 창을 꽂아 넣자, 거대한 화염 기둥이 솟아오르며 놈의 다리를 말뚝처럼 지면에 박아버렸다.

적창은 천천히 걸어 악마의 머리맡에서 멈춰 섰다. 그는 뒷짐을 진 채 허리를 숙여 놈과 눈을 마주쳤다.

[참으로 벌레 같은 꼴이 됐구나. 사슬옥좌의 주인아.]

[이, 이런다고 예정된 종말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대가 아무리 애써봐야···!]

[기어오르는구나. 기껏해야 천 년 정도 에낙사구스의 옥좌를 차지했다고 목이 꽤 뻣뻣해진 모양이다.]

적창이 웃었다. 악마는 순간 뒷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놈은 가진 마력을 죄다 끌어모으며 외쳤다.

[모, 모두 이놈을 죽여라! 내용물이 무엇이든 간에 겉은 기껏해야 피륙 입은 인간···!]

[굽힐 줄 모르게 되었다면 꺾일 뿐이지.]

슥―

전사의 두 손이 움직였다.

가볍게 털어낸 왼손은, 악마의 마력으로 공간을 뛰어넘으며 끝없이 달려드는 사냥개의 파도를 지워버렸고.

부드럽게 그어진 오른손은,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토해내는 악마의 목을 툭 잘라냈다.

쿵.

악마의 머리가 떨어졌다. 놈의 육신도 축 늘어졌다.

물론 상식을 벗어난 재생력은, 목구멍에서 냉기를 꿀렁이며 떨어진 머리까지도 다시 이어붙이려 했다.

[쯧. 더러워서.]

적창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다리를 꿰뚫었던 화염 기둥이 몸을 불려 악마의 몸 전체를 집어삼켰다.

화륵!

화염 기둥이 사라지고 남은 건, 둥글게 불타버린 지면과 르베론이 만든 창 하나뿐.

파스슥···.

적창이 손을 대자 창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바스라졌다. 전사의 몸을 입은 용은 턱을 긁적였다.

[···창 값은 얼마더냐?]

“나도 모른다.”

[놈의 사냥개도 처리해줬으니, 대충 퉁치도록 하지.]

미안하지만 수중에 금화가 없느니라. 가난한 용이 덧붙였다.

***

[나머지는 알아서 해결하도록 해라. 네 육신은 더이상 내 힘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니.]

칼카스의 본체를 증발시키고, 사냥개들마저 수천 단위로 지워버린 용이 영역 속으로 돌아가며 남긴 말이었다.

댈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목구멍에서 비릿한 향취가 올라왔다.

겉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댈런의 속은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심장 부근이 저릿하게 아려오는 걸 볼 때, 적창이 몇 분만 더 힘을 썼어도 목숨이 위태로웠을지 모르는 상황.

‘이거 몇 달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문득 예전 균열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영역 속에서 끝을 모르고 불어나던 힘을, 필멸의 육체가 견디지 못하고 붕괴할 뻔했었지.

신비의 산물인 용혈을 각성하며 그 문제는 완전히 해소됐으나, 이제 그 용혈의 신비가 다시 부담으로 다가오게 된 셈이었다.

‘버번에게 대가를 받으면 어느 정도 해결될 테니까.’

댈런은 고개를 슬슬 털고 발걸음을 옮겼다. 악마의 본신을 처치했지만, 아직 이 지옥에서 할 일이 몇 가지 남아있었다.

‘일단 시체 먼저.’

그리고 그 첫 순서는 당연하게도 시체를 회수하는 것.

이 차디찬 지옥까지 내려와 사투를 벌였던 용사들의 최후를 마주할 시간이었다.

12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