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27화 (127/288)

변화(1)

댈런은 걸음을 서둘렀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곳은 칼카스의 지옥. 놈의 정수에 담긴 권능으로 만들어진 세계였다.

본신이 소멸한 악마는 몇 시간만 지나도 다시 힘을 회복하기 시작할 터.

그 전까지 시체를 모두 회수하고, 놈을 완전하게 소멸시켜야 했다.

투웅―

허공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숲이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높이.

넓어진 시야에 저 멀리 하늘로 솟은 네 개의 기둥이 보였다.

‘사슬탑.’

이 지옥의 동서남북 끝자락에 각각 하나씩 세워진 탑. 그건 이 사슬지옥의 힘을 품은 오벨리스크였다.

‘칼카스의 권속들이 만들어지는 장소지.’

칼카스의 사냥개. 사슬기사. 구속된 원혼. 그밖에도 수많은 종류의 마물들이 저 탑에서 칼카스의 힘에 절여져 권속으로 재탄생했다.

게임에서는 보스전 때 수많은 잡몹들이 쏟아져나오는 게이트 같은 시설이었고, 때문에 원래 칼카스의 정석적인 공략법은 첫 단계가 저 사슬탑을 틀어막는 것이었다.

‘이번 경우는 좀 다르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혼자서 칼카스를 상대하는 것도 벅찼기에, 사슬탑까지 틀어막을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적창이 직접 나선 다음에는, 잡몹이 수천이든 수만이든 손짓 한 방이면 지워져버렸고.

투웅―

도약 스킬을 아낌없이 사용한 끝에, 오래지 않아 남쪽 사슬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시체는 사슬탑 바로 밑에 있었다. 댈런은 손을 뻗어 시체를 회수했다.

[침울한 곡검기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1, 기량 +1, 감각 +1, 귀환석]

‘일단 가장 급한 건 얻었고.’

여섯 가지 빛깔이 뒤섞이며 빛나는 돌.

이건 인류가 종말에 휩쓸려갈 무렵, 대륙의 여섯 대마탑이 힘을 모아 제작한 귀환석이었다.

댈런이 경험한 수백 회차의 끝은 전부 멸망이었지만, 그렇다고 궁지에 몰린 인류가 아무 발악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대륙의 땅덩어리를 한 뼘이라도 더 지키기 위해 분투했고, 때로는 반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그 반격의 일환이 바로 지옥을 향한 원정대.

대륙을 침공하는 악마의 본진을, 수십에서 수백 단위의 초인들을 보내 털어버리는 시도였다.

‘게임에서는 지옥 레이드 느낌의 후반부 컨텐츠였지.’

그렇게 악마의 뒤통수를 친 영웅들이, 무사히 대륙으로 귀환할 수 있게 해주는 게 바로 이 귀환석이었다.

악마와의 전투로 탈진해, 본신의 마력이 고갈되었더라도 생환할 수 있게 해주는 마도구.

귀환석 하나당 열 명이 원래 장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차원 전이 마법의 어마무시한 난이도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악마도 학을 뗄 수준의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비슷한 물건을 구하는 것 자체는 지금도 가능했으나, 미친 듯이 비싼 가격에 비해 안정성은 하나도 보장되지 않으니까.

‘곧 쓸 거니 잘 놔둬라.’

[끄윽, 으으, 옙. 주인님.]

조금 전의 전투에서 한계까지 저주를 먹어치운 악마가, 아공간에서 거북한 배를 쓸며 귀환석을 받았다.

놈은 귀환석을 흥미로운 눈길로 살펴보더니 말했다.

[으흠, 신기한 물건이군요. 기본적인 차원 전이 술식을 바탕으로 하되, 사용자의 과거에 실존했던 시공간 좌표계를 기반으로 삼아 필요한 마력량을 대폭 줄이는 방법이라. 마력풍의 임의값을 계산한 것도 혁신적입니다. 마치 이 시대의 물건이 아닌 것 같군요.]

‘···주문에도 조예가 있었나?’

[어···일단 저도 악마입니다만. 차원에 관한 마법은 본능에 가깝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조금은 뿌듯한 목소리였다. 마치 자기가 이 정도 능력이 되니, 앞으로 잘 좀 봐달라는 듯한 느낌.

댈런은 낮게 웃으며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흠칫 물러나는 악마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지금처럼 가방 역할을 잘 한다면, 나중에는 좀 다른 역할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주인님!]

악마가 기합이 빡 들어간 목소리로 외쳤다. 댈런은 실소했다. 이래서 세뇌 교육이 무서운 거라니까.

남쪽 사슬탑을 떠난 댈런은 머지않아 서쪽에 도착했다. 지옥답게 땅이며 하늘을 가리지 않고 마물이 넘쳐났지만, 다들 그에게서 도망치기 바빠 보였다.

적창의 힘으로 악마를 두들겨 팼기 때문이겠지. 자기들의 주인도 당해내지 못했는데, 덤벼봐야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 여기는 게 당연했다.

[스타티아 마탑 고위 마법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지능 +3, 마력 +1, 고유 스킬 : 빙정(고유)]

그렇게 회수한 두 번째 시체.

보상은 무려 고유 스킬이었다.

***

대륙의 역사에는 수백 명이 넘는 기인이사가 존재했다.

당장 마탑을 새운 대마법사만 해도 열 명이 넘고, 유명한 기사단의 창단자들 역시 무(武)에 있어서 인외의 경지를 밟은 이들이 대다수.

드워프나 엘프, 수인 등의 이종족에 마녀나 용 같은 초월자까지 더하면 그 수는 셈하기조차 힘들 정도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마탑이나 기사단 같은 덩치 큰 조직들이 아니었다.

초월의 경지에 닿은 심상에서 비롯된 영역. 거기서 비롯된 현실을 비트는 힘이야말로, 초월자들이 이 대륙에 남기고 간 가장 큰 족적이었으니까.

‘그래서 D등급 이상 스킬에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경우가 꽤 있지.’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D등급 이상의 스킬임에도 이름이 붙지 않은 경우도 많았으니까.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며,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경우가 그 중 하나.

마탑의 주문들 중에 이름이 생략된 스킬이 많은 건 그런 이유였다.

‘고유 스킬도 그런 마탑의 개량 과정과 비슷한 맥락이다.’

원래의 창시자가 품었던 심상의 풍경.

그걸 오롯이 담아내는 게 스킬의 숙련도를 올리는 일이라면.

고유 스킬을 얻는다는 건 그 심상을 비틀고 꺾어, 자신만의 힘으로 재창조하는 개념.

게임에서는 후반부에 근접해서야 가능한 히든 컨텐츠였고, 숨겨진 요소답게 획득 자체도 확률에 의존해야 했다.

고유 스킬은 플레이어의 개입과 무관하게, 캐릭터가 스스로의 심상과 영역을 통해 빚어내는 결과물이었으니까.

입수 난이도와 마찬가지로 사용법 역시 어렵기 그지없었다.

얻을 때 알림창이 뜨는 것도 무작위에, 따로 상태창에서 목록을 확인하는 것도 불가능.

캐릭터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여겨보다가, 전투나 수련에서 뭔가 이전과 다른 패턴을 보인다면 그걸 알아서 기억해야 했다.

모니터 너머에서 내가 게임을 하는 건지, 행동과학 연구를 하는 건지 착각마저 들 정도였으니.

‘지금은 내가 캐릭터가 된 상황이라, 그때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군.’

촤아아아···.

손바닥 위 허공에서 꽃피어가는 얼음 결정.

마력과 지능 수치의 보조를 받은 주문은,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의지에 따라 펼쳐져간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기량 수치가 한계를 넘었을 때부터 느껴졌고, 마력과 지능이 뒤이어 30에 다다르며 점점 더 깊어지는 이 해방감.

그건 정점에 달한 숙련도의 스킬을, 영역이라는 힘 위에 접목시키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상태창과 숙련도라는 시스템에 아직 한 발 걸치고 있는 감각이었다면.

지금은 그 시작점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어, 오롯이 스스로 쌓아 올린 힘을 다루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

홀린 듯이 손을 앞으로 뻗어낸다. 십수 겹으로 촘촘하게 피어난 꽃봉오리가 허공을 부드럽게 유영했다.

파짓!

마력을 비틀고.

우우웅···.

술식을 변환한다.

스킬이라는 한정된 틀 안에서의 응용을 넘어서서.

그 틀의 경계와 제한 자체를, 직관과 계산에 의지해 자유롭게 주무른다.

「빙정」

정해진 주문은 필요 없었다. 짧은 영창은 스스로의 심상에 확신을 더하는 역할일 뿐.

그리고.

쩌저저저적!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덮어, 그 기능을 멈춰버린 얼음의 기둥을 보며 댈런은 생각했다.

앞으로의 행보는, 이전까지와는 꽤나 달라질 것이라고.

***

댈런은 지옥의 나머지 지역들을 돌며 시체를 회수했다. 높아진 마력 수치는 시간을 절약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캐릭터가 죽었을 장소 근방까지만 가면, 기억을 더듬을 필요 없이 독특한 향취의 마력풍이 시체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줬으니까.

나머지 시체들은 이전의 두 개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영웅들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 지옥까지 도달했으니 비범한 자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사냥개의 비상식량으로 땅에 묻힌 전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1]

[전역 전날 원정대에 끌려온 병정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감각 +1]

[남몰래 마녀를 흠모하던 이단심문관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마력 +1]

[악마와 한 합을 겨루다 죽은 기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기량 +1]

“······.”

뭔가 다른 의미로 비범한 것 같긴 하지만, 알림창은 최대한 무시하기로 했다.

어떻게 죽었느냐가 아니라 뭘 남겼느냐가 중요한 법.

능력치 하나하나의 가치가 얼마인데, 단지 쪽팔리다는 이유로 빼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평소에는 레벨 하나 올리기도 얼마나 버겁던가.

수많은 적과 싸워온 댈런도, 이번에 상급 악마를 처치하고서야 처음으로 아슬아슬하게 레벨 둘을 한 번에 올릴 수 있었다.

‘어찌 됐건 당분간 펠버는 피해 다녀야겠군.’

[푸흐, 권속의 눈치를 보는 주인이라니. 캥키는 점이라도 있는 모양이구나, 인간.]

‘···내 생각은 언제부터 읽을 수 있었지?’

[난 너의 심상에 결부되어 있지 않느냐. 표층 심리 정도는 흐릿하게나마 알아볼 수 있느니라.]

설산 위에 웅크린 용이 나직하게 웃었다. 썩을. 이제 생각도 마음대로 못하겠네.

가진 힘은 나날이 커져만 가는데, 어째 인간관계에서는 이리저리 치이는 일이 더 많아지는 것만 같았다. 예전에 용병일만 할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비범한 자에게는 비범한 관계가 붙는 법이다. 이미 성검과 악마의 주인이자 용의 아비, 그리고 마녀와 성기사의 연인이지 않느냐?]

‘연인은 개뿔. 오래 살더니 머리라도 이상해진 건가?’

[보는 입장에서 이야기할 뿐이란다, 흐흐흐.]

돌아버리겠네, 이거.

댈런은 고개를 절레절레 털고는 옥좌를 향해 다가갔다.

몇 시간 전의 전투로 쑥대밭이 된 숲의 한가운데, 반으로 쪼개진 칼카스의 옥좌는 땅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벌써 힘을 되찾기 시작했군.”

옥좌 위에 일렁이는 불길한 마력. 모조리 끊어졌던 사슬도 벌써 옥좌를 두세 겹씩 감쌀 정도로 자라있었다.

칼카스의 정수는 사실상 옥좌와 하나가 된 상태.

따라서 칼카스를 처치하기 위해서는 옥좌를 부숴야 했다.

문제는 그럴 만한 힘이 당장 없다는 것.

‘아깝지 않은 건 아니지만, 선택지가 없겠지.’

댈런은 짧게 혀를 차며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가 꺼낸 건 하얀 면포에 싸인 길쭉한 막대였다.

‘십이성창의 네 번째 조각.’

원래는 게임 중후반부, 마물의 침공 때 요긴하게 쓰려 했던 아이템이었다.

각기 다른 능력을 가진 성창의 조각들 중에서도, 네 번째 조각은 광범위한 일대를 지켜내는 데 특화된 물건.

물론 그 사용법을 조금 바꾸면, 방어가 아닌 강력한 파마의 수단으로도 이용할 수 있겠지.

원래 강력한 성물이나 마도구일수록 사용자의 손을 많이 타는 법이다.

[흐음···정말로 그걸 쓰려고 하느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용을 뒤로 하고, 순백의 천을 막대에서 벗겨낸다.

부서진 창의 중간쯤 되는 파편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잘린 건지 단면이 이상할 만큼 깔끔한 모양새였다.

[고작 이런 애송이 하나를 소멸시키는 데 쓰기에는, 인간들의 입장에서 꽤 아까운 물건 아니냐.]

‘상관없다.’

어차피 이건 시체를 통해 얻은 물건. 굳이 표현하자면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부산물쯤으로 보는 게 맞을 테였다.

원래 성창의 조각은 대륙 어딘가에 여전히 잠들어 있겠지.

그걸 직접 구하려면 꽤나 힘든 여정이 될 테였으나,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악마 하나 못 죽이고 돌아가는 게 더 웃긴 일이었다.

키이이잉―

망설임 없이 신성력을 불어넣는다. 모든 능력치가 30에 다다랐기에, 힘을 다루는 감각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츠즈즈즈···.

단순한 막대처럼 보이던 성창의 조각이 진동하면서, 양끝에서 수백 갈래의 신성력을 뿌리처럼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일반적인 사용법은 이렇게 뻗어나간 신성력으로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벽을 만들어, 경계 너머의 마물들이 건너오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

허나 힘의 방향을 조금만 틀어낼 수 있다면, 보다 좁은 범위에 집중시키는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니다.

파짓!

양쪽으로 뻗어나가던 신성력의 뿌리가 순간 멈칫하더니, 그 방향을 안쪽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점점 각도를 돌려가며, 이내 커다란 원의 형태로 좁은 지역을 감싸드는 신성력의 뿌리.

마치 태극 무늬를 가운데 점에서부터 그려나가는 듯한 흐름의 중앙에는 두 동강난 칼카스의 사슬 옥좌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댈런은 손을 놓고 그 범위에서 물러나는 순간, 거대한 빛의 기둥이 땅에서부터 솟구쳐올랐다.

쿠웅―

폭발적인 힘의 방출은 아니었다. 다만 느껴지는 무게감은 댈런의 심장을 시큰하게 할 정도.

원래라면 넓게 펼쳐져서 마물과 악을 쫓아내야 할 신성력이, 좁은 공간에 갇힌 채 해방된 결과였다.

마를 차단하는 걸 넘어서서, 범위 안의 악을 죄다 증발시켜버리는 기능을 하게 된 것.

한순간에 옥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신성력에 반발하듯 튕겨나온 악마의 정수를 댈런은 가볍게 낚아채 손에 쥐었다.

쿠구구구···.

주인이 완전히 소멸하자 이내 붕괴하기 시작하는 지옥.

경험치가 들어온 것도 확인했으니, 이제 이곳에서 할 일은 끝났다.

댈런은 악마의 정수를 아공간에 집어넣고, 몇 시간 전에 얻은 귀환석을 대신 꺼내들었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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