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2)
귀환석이 그를 돌려보낸 곳은, 악신의 주문에 휘말렸던 바로 그 장소였다.
부서진 천장으로 빗줄기가 쏟아지고, 바닥에는 부서진 돌조각이 수도 없이 굴러다니는 거대한 공동.
악마와 세 사람의 싸움으로 벽이며 천장이며 성한 곳이 없었음에도, 다행히 공동은 무너지지 않고 버텨주고 있었다.
물론 언제까지 그럴 지는 모르겠지만.
찰박.
“···댈런?”
공동 한쪽에 혼자 서 있던 시에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입술은 손톱으로 뜯은 건지 빨갛게 부어있었다.
“댈런, 정말로 당신 맞아?”
“맞소. 내가 좀 늦은 건가?”
“맙소사. 어떻게···아니, 일단 빠져나가자. 아까부터 동굴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리는 게, 곧 무너지려는 것 같아. 살아남은 특무대 요원들은 비요른이 인솔해서 밖에서 기다리는 중이야.”
쿠르르릉···.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굉음이 들려왔다. 천장에서 돌부스러기도 푸스스 떨어졌다.
이거 조금 더 늦었으면 땅 속에 파묻혀버렸겠는데. 생각보다 정말로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맞춘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서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시에나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 밖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동굴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고, 댈런은 악신의 함정에 휘말려 지옥으로 날아가버렸으니.
사실상 죽었다고 봐도 무방했던 상황. 떠나지 않고 지금껏 기다렸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댈런! 이 사람아! 대체 어떻게 된 건가, 몸은 멀쩡하고? 시에나의 말로는 지옥에 떨어졌을 거라 하던데. 사실이었나?”
[뿌까아! 삡삡!]
···지옥에 떨어졌다니. 그거 어감이 좀 이상한데.
쥐고 있던 산탄총마저 집어던지고 격하게 반기는 비요른과, 그 두꺼운 어깨 위에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새끼용.
그들과 적당히 인사를 나눈 뒤, 댈런은 옹기종기 모여있는 특무대 요원들에게 다가갔다.
추적추적 비가 오는 공터. 특무대 쪽 천막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한 눈에 봐도 거의 반 가까이 줄어든 머릿수 때문이겠지.
부재한 이들은 칼카스의 두 번째 페이즈, 지옥의 그림자에 집어삼켜진 이들일 테였다.
“댈런 님.”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차, 요원들 중 한 남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댈런은 기억을 되짚어봤다. 이름을 아는 얼굴이었다.
“검열관 로만 바르코프.”
“···기억하시는군요.”
“그쪽이 사샤의 직속 부관 아니었소?”
대답이 반 호흡쯤 늦었다. 로만은 어깨를 살짝 떨었다.
“맞습니다. 그리고 집행관님은······.”
“빠져나오지 못했군.”
“···예.”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악마가 강림시킨 지옥의 그림자.
그곳은 평범한 사람들은 물론, 초인이라도 쉽게 감당하기 힘든 시험이었으니까.
로만은 그녀의 마지막을 간추려서 전했다.
댈런과 시에나, 비요른이 공동에서 칼카스의 본신과 싸우는 동안, 집행관 사샤를 포함한 수십 명의 요원들은 자신들의 싸움을 이어갔다.
지옥의 그림자 속에서 어떻게든 부하들을 찾아 규합시킨 사샤는, 끝없는 사냥개의 공세에서 부하들을 지키다 결국 치명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사냥개들 한가운데로 몸을 던지셨습니다.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어볼 테니 어서 가라고 하시면서, 비요른 님께서 만들어주신 슈류탄을 한가득 품에 안으시고······.”
말끝을 흐렸지만, 뒷 내용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로만은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말을 이었다.
“···악마가 소멸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분명 집행관님도 기뻐하실 겁니다.”
“다행이군.”
악마는 소멸했다. 그리고 놈의 지옥은 무너졌다.
그건 이 싸움으로 거둘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결과였고, 두말할 필요 없는 완벽한 승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승리의 이면에 놓인 죽음의 무게까지 가벼워질 수 있는 걸까.
저울에 올려진 건 악마와 직접 싸우던 세 사람의 목숨만이 아니었다.
만약 악마 공략이 조금이라도 더 지체되어, 소환된 악마가 죽고 놈의 힘이 흩어지는 시간이 늦어졌다면.
살아남은 요원들의 머릿수는 지금의 반, 어쩌면 반의 반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현장에 파견된 특무대 요원들의 지휘는, 이 시간부로 집행관님을 대신해 검열관인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로만이 고개를 곧게 세우고 이야기했다. 자신감 있게 머금은 미소. 그러나 여전히 미약하게 떨리는 입꼬리.
쏴아아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남은 요원들에게 돌아가는 검열관의 등을, 댈런은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초월자들과 영웅들의 화려한 싸움 이면에는, 영웅이 되지 못한 이들의 처절한 사투가 그림자처럼 늘어지는 법이지.]
심상 속, 용이 나지막히 말했다.
[그건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었던 현실이니라.]
“···쯧.”
왠지 입안이 씁쓸했다. 입에 들어와 굴러다니는 빗물 때문인 것 같았다.
***
일행은 오래지 않아 3층을 벗어났다. 2층으로 올라오자 샌드웜 한 마리가 그들을 환영해주었다.
“맙소사. 이 샌드웜, 아무래도 여태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캬악, 캬악.]
“봐봐, 고개를 끄덕이잖아.”
“···정말 그런 것 같군.”
댈런은 살짝 당황했다. 게임에서도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은 없었기 때문.
관련 스킬이 없는 이상, 미궁 내의 이동수단은 1회용으로 취급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힘으로 굴복시킨 마물은 하루이틀 자리를 비우는 즉시 달아나곤 하니까.
지옥에 다녀온 이후 말이 많아진 적창은, 이번에도 적당한 시점에 끼어들어 조곤조곤 설명해주었다.
[용의 피가 가진 힘을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인간. 용은 모든 마물 위에 군림하는 존재니라. 네가 청린용의 권능으로 그 존재감을 감췄다한들, 격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뭔가 굉장히 어렵게 말하는데, 대충 용혈 때문에 굴복시킨 효과가 오래 간다고 보면 될 것 같았다.
어쨌든 이로써 2층을 통과하는 시간은 비약적으로 단축될 테였다. 일행은 익숙하게 샌드웜의 비늘 안쪽에 탑승했다.
늪지를 벗어났으니 장비를 정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비요른에게 비늘 한 칸을 따로 주고, 댈런은 시에나와 같은 칸에 자리잡았다.
쿠르르르르···.
이윽고 사막의 지하를 헤엄치기 시작하는 거대한 마물.
손끝에서 전격의 그물을 뻗어 그 움직임을 감독하는 댈런을 보며, 시에나는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이 남자는···대체 어떤 존재일까.’
공동에서 있었던 악마와의 싸움.
그 마지막 순간에 벌어졌던 일은, 며칠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의 뇌리에 똑똑하게 남아있었다.
지팡이에서 흘러나온 초월적인 격의 마력이 악마의 육신을 소멸시키고, 그 대가로 댈런의 몸은 차원을 건너뛰어 사라졌다.
그녀는 황급히 남아있는 마력을 해석했고, 댈런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칼카스의 지옥, 사슬옥좌.’
무려 지옥이다.
악마의 힘이 최대로 발휘되며, 수만이나 되는 권속들이 득시글거리는 악의 본거지.
아무리 미궁이 지독한 마경이라 한들, 악마가 다스리는 지옥에 비견할 수 있을까.
그것도 에낙사구스가 총애하는 아홉 권속 중 하나인, 상급 악마 칼카스의 지옥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댈런은 그런 곳에서 버젓이 살아 돌아왔을 뿐 아니라, 칼카스와 놈의 지옥을 완전히 소멸시켜버렸다.
‘···설령 금강궁의 초월자들이라 해도, 과연 혼자서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스물여섯 전당의 주인들. 그 초월적인 존재들이 떠오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댈런이 지금껏 세워온 업적과, 그의 지금 모습은 평범한 금패 용병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새끼 진룡을 애완동물처럼 데리고 다니고, 아공간에는 타락한 성물에 의해 악마 하나가 노예로 붙잡혀있다.
성검의 주인이자 초인적인 전사인데다, 비요른의 말을 들어보니 마법도 무슨 마탑의 고위 마법사 수준으로 구사하는 듯했다.
‘···거기다 이번에는 지옥의 문까지 열어젖혔지.’
시에나는 어느새 습관적으로 입술을 뜯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댈런이 입을 열었다.
“괜찮소?”
“어? 어어. 당연하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젓는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뒷골목 정보상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시에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그러시오.”
“당신, 흑마법사였어?”
“푸흡.”
이건 좀 의외인걸. 아까부터 엄청 골똘히 생각하길래 대체 뭘 물어보려는 건가 했는데.
“글쎄.”
“부정하진 않네. 그 단검, 고위 흑마법사들만 사용한다는 핏빛 제례용 단검이지?”
“맞소.”
“악마의 힘을 빌리지도 않고 지옥문을 열었다면, 그만한 제물을 바쳐서 단검에 충전해뒀다는 이야기겠네.”
“늪지 원혼의 모태에서 반쯤 죽은 마물들을 찾았소. 그걸 제물로 단검에 저장해두었지.”
술술 나오는 대답에 시에나는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뭘 기대한 거야?
“그럼 내가 인신공양이라도 하는 흑마법사인 줄 알았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악마에게 사람을 바쳐서 이런 힘을 얻었고?”
“아니, 하, 그런 게 아니라니까. 단지······”
“그렇게 얻은 힘으로 이번에는 악마의 뒤통수를 한 대 세게 갈겼다?”
“······.”
이거 좀 더 놀리다가는 한 대 맞겠군. 댈런은 낮게 웃으며 되물었다.
“알았소. 말 하시오.”
“후우. 단지 당신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어릴 적 기억이 떠올라서 그래.”
한숨과 함께 내뱉은 두서 없는 이야기.
하지만 시에나의 과거를 아는 댈런은, 그 뒤에 숨겨진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날 때부터 금강궁의 일원으로 살아왔었다. 어느 날, 갑작스런 배신을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순탄치 않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마음 깊은 곳에 응어리로 맺혀있을 테였다.
그리고 그 응어리의 일정 부분이, 그녀의 어머니와 가까운 관계음에도 침묵했던 초월자들에게 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쪽도 일이 이렇게 흘러가길 바라지는 않았겠지만, 개입해서 막는 것 역시 어려웠겠지. 미래를 아는 만큼 움직임에 제약이 크다고 하니까.’
물론 죽임 당하고 쫓겨난 이들에게는, 어떤 사정이라도 구차한 변명일 뿐이었다.
홀로 군대를 상대하고도 남을 강대한 힘을 가졌지만, 정작 가장 필요할 때는 등을 돌렸던 존재들.
믿을 수 없는 성장을 거듭해가는 댈런을 보고, 시에나의 머릿속에는 그 초월자들의 모습이 언뜻언뜻 떠올랐겠지.
이번에 흑마법을 사용하는 모습까지 보여줬으니, 복잡한 마음은 더 커졌을 테고.
‘그러고 보면 에버론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천변만화의 얼굴, 에버론 라크탈라.
금강궁의 초월자 중 하나인 그도, 오래 전 댈런을 마주했을 때 자신의 동료들이 떠오른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래. 북방인이건 아니건, 또 흑마법사건 아니건 무슨 상관이겠어. 당장 같은 편이면 된 거지.”
잠시 옛 기억을 되짚는 사이 생각을 정리한 걸까. 시에나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말문을 열었다.
“악마를 죽이는 흑마법사라니. 그게 아군이 아니라는 것도 이상하잖아?”
“아군이라는 표현은 좀 딱딱한데. 저번에 친구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소?”
“···그래, 친구로 하자.”
“훨씬 낫군.”
댈런이 말했다. 그는 이내 다시 전격의 그물을 뻗어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 시에나의 얼굴은, 아까와는 달리 한층 편안해져 있었다.
***
우우우웅―
중력이 역전되며 몸이 붕 떠오르는 감각.
귓속을 울리는 마력의 공명음 끝에, 결계탑 안쪽 전당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드디어 도착했군.’
미궁 1층에 접어든 뒤, 귀환비에 다다르기까지 보름이 더 걸렸다.
1층에서 주로 사용하던 갑각늑대 택시는, 댈런이 저번 미궁 탐험 때 놀 부족을 작살내면서 이용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갑각늑대 외에도 이동수단으로 사용할 만한 게 하나 더 있기는 했으나, 인원이 인원인지라 여의치 않았던 것.
결국 미궁 2, 3층에서의 시간을 합친 것과 1층에서 보낸 시간이 비슷하다는, 다른 탐험가들이 들었으면 혀를 내두를 괴랄한 결과가 나와버렸다.
‘상태창.’
결계탑을 나서는 길. 댈런은 간만에 상태창을 열어봤다. 얻은 소득을 정리해볼 시간이었다.
레벨도 꽤 많이 올랐고, 회수한 시체들에서 계승한 보상도 상당했다.
무엇보다 능력치들이 하나씩 30을 돌파해가며,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힘과 가능성을 손에 넣은 상황.
악신에게 한 방 먹임으로써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한 거나 다름없는 지금,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서도 시간을 들여 연구해볼 필요가 있···.
“정지!”
···었을 것이다.
상태창을 채 읽어내려가기도 전에, 눈앞을 가로막은 검날이 아니었다면.
“···뭐요?”
댈런과 일행을 가로막은 건 한 기사였다. 덩치 좋은 군마 위에서, 번쩍이는 판금갑옷을 걸친 민머리 기사.
“뭐, 뭣? 방금 뭐라고 했나?”
“뭐냐고 물었소. 왜 그딴 걸 빼들고 우리 앞길을 막아선 거요?”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내비치자, 순간 당황하던 기사는 이내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버럭 소리쳤다.
“이, 이 새끼가···! 어디 하층민 주제에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어! 나, 순은 기사단의 하급기사 앙겔 경은 금강궁의 명에 따른 공무를 방해한 죄로 너를 심판하겠노라!”
···뭐야 이 병신은?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