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39화 (139/288)

불타는 곡창(2)

낮은 거리, 하수도, 그리고 성기사단 본단 지하의 고대 유적.

이 몸을 입은 이후, 미로 같은 구조물에 발을 들인 경험만 벌써 여러 번이다.

그동안 성장한 댈런의 감각과 지능 수치는, 별다른 도움 없이도 낮은 거리에서 길을 찾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열 번 길 잃을 걸 한두 번으로 줄이는 것과, 처음 가보는 곳임에도 단 한 번도 경로를 이탈하지 않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

전자가 단순히 뛰어난 감각과 지능만으로도 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후자는 미궁이라는 구조물 자체에 대한 깊은 지식과 이해가 필요했다.

‘그리고 숱한 초인들 중에서도 그쪽에 가장 해박하다고 알려진 게, 이 스킬의 창시자인 라키타 아커만이지.’

트레저헌터. 미궁 파훼자. 몽왕의 지하궁전을 약탈놓고, 고대 사막 왕조의 무덤을 열 가까이 파헤친 희대의 도굴꾼.

라키타 아커만은 수많은 업적과 이름을 남긴 초인이었으나, 그 모든 것들은 그가 남긴 마지막 업적에 언제나 가려지곤 했다.

바로 미궁 속의 미궁이라 불리는 미궁 4층, ‘암묵해월령(暗墨奚越嶺)’의 전도를 그려낸 것.

그 정도 되는 인물이 남긴 비의이기에, 전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스킬임에도 C등급이 매겨진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댈런! 백 미터 전방에서 우측 골목! 정면의 오른쪽 문!”

아커만의 작도법은, ‘길’에 대한 댈런의 개념을 뿌리부터 새롭게 바꿔놓고 있었다.

‘천장 너머의 얕고 넓은 공백은 부식의 결과물. 흐르는 물이 지나가면서 누수되었던 흔적이다. 한때 하수도의 주 통로가 이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소리지.’

‘벽과 벽 사이의 공간이 일반적인 하수도라 생각하기에는 비효율적일 정도로 넓다. 높은 확률로 처음부터 사람이 살 걸 염두하고 만든 공간이야.’

‘거대 시궁쥐의 털에서 나는 악취. 놈들이 오랜 시간 둥지를 틀었었군. 거대 시궁쥐는 최소 세 개의 출입로가 확보되어야 살림을 차리지. 밖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겠어.’

“정면에서 오른쪽 문으로···아니, 댈런! 오른쪽 문이라···!”

콰광―!

처음으로 시에나의 안내를 완전히 무시하고, 애꿎은 하수도 벽을 부숴 통로를 열어낸다.

안쪽의 텅빈 공간에서 훅 밀려오는 퀴퀴한 냄새. 댈런은 위쪽으로 뻗은 오래된 쥐굴을 가볍게 뛰어올랐다.

콰과광!

가볍게 주먹을 휘두르자 오래된 내벽이 부서지고, 새로운 통로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뒤따라 올라온 시에나는 빠르게 눈을 굴리더니 말했다.

“···이럴 수가. 이건 지름길을 만들어내는 수준이잖아. 댈런, 너 혹시 하수도 청소부로 일해볼 생각 없어?”

“그럴 일 없소.”

“쯧, 아쉽네.”

가벼운 농담으로 주위를 환기한 시에나가 다시 안내를 시작했다.

댈런은 일행의 선두에서 그 안내를 따라가다가, 중간중간 방향을 틀어 좀 더 빠른 길을 만들어내곤 했다.

주변 일대를 속속들이 인지해내는 오감과 육감.

그리고 하수도와 낮은 거리에 정통한 시에나의 지식.

작도법이라는 새로운 논리구조는 이 두 가지를 잉크 삼아, 현란한 붓솜씨로 머릿속 빈 도화지를 채워나갔다.

그건 단순히 공간의 크기와 구조, 통로들의 이어짐에 대한 관찰을 넘어서는 기예였다.

지도를 해석하고 지름길을 찾아내는 것이 독도(讀圖)의 한계라면.

기존의 길을 비틀어 새로운 지름길을 꾸며내고, 존재하지 않던 길마저 개척해내는 것이야말로 작도(作圖)의 영역.

그리고 그렇게 나아갈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하수도에 대한 시에나의 지식이 상상 이상으로 깊다는 것이었다.

‘열 번도 넘게 벽이며 천장을 부수고 길을 열었는데, 단 한 번도 현 위치를 혼동한 적이 없어.’

새로운 곳에 도착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경로를 수정해 안내하기 시작한다.

마치 집 앞 동네를 누비듯 하는 익숙함이었으나, 현실적으로 모든 곳에 발을 디뎌본 건 아닐 테다.

오히려 공기의 흐름, 감각에 느껴지는 고도, 냄새와 마력풍 밀도 등의 주변 환경을 보고 순식간에 후보군을 좁혀나가는 것에 가까울 터.

시에나는 환경의 변화에 단지 민감하기만 한 걸 넘어서서, 이를 분석하고 이용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마법사였다.

‘하긴 그 정도가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찾아갈 일 자체가 없었겠지. 괜히 영입 리스트 0순위로 둔 게 아니었으니까.’

어째선지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댈런은 소리내어 웃었다.

반 년도 더 전에 여관방 구석에서 내렸던 판단이, 이토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줄 알았을까.

종말은 끊임없이 그의 예상을 뛰어넘어 손을 뻗어왔지만, 그건 반대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악신의 버림패에 걸려들고, 놈들의 궤계를 막으러 뛰어다니는 게 지금의 현실이지만.

지금의 이 정신없는 종말의 파도가, 놈들의 발악처럼 느껴지는 건 마냥 기분 탓만은 아니겠지.

스릉―

댈런은 사납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는 뽑아든 성검을 양손으로 쥔 채, 가볍게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검끝이 향하는 곳은 낮은 거리의 천장.

지상으로 나갈 시간이었다.

***

콰과과광―!

판석이 깨지고 흙바닥이 역류한다. 치솟았던 토사는 다시 폭포처럼 쏟아졌다.

내려앉는 먼지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네 명의 사람.

성기사의 복장을 갖춘 여기사와 소년, 품 넓은 로브를 걸친 마법사, 그리고 거구의 전사였다.

“···조용하군요.”

성기사, 루시아가 말했다. 그녀의 푸른 눈이 어둠 속에서 신성력의 광채로 번짝였다.

“사특한 마력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오히려 아래쪽에 있을 때보다 더 진하게 느껴져요. 덩굴의 마녀와 흑마법사들은 이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맞아. 마력풍이 불안정해. 대규모 소환이 준비중이거나, 아니면 이미 일어났다는 소리야. 어느 쪽이건 서둘러야겠어.”

시에나가 받았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곤 검을 갈무리했다.

5층 남짓 높이로 솟아오른 탑들 사이, 좁게 난 길가에는 인적 하나 없었다.

뒤집어진 상자와 나무통. 주인 잃고 뒹구는 돈주머니.

농사에 쓰이는 도구들 역시 정리되다 만 채로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여기저기 혼비백산 대피한 흔적은 남아있어도, 직접적인 싸움의 자취는 보이지 않는다.

서부 지구에서 싸움이 벌어진 건 확실하나, 그 여파가 아직 여기까지는 미치지 않았다는 이야기.

“시에나. 대로 방향으로 안내해주시오.”

“놈들이 창고 구역들을 노렸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그렇소. 낮은 거리에서 마주친 숫자를 생각했을 때, 흑마법사의 마약에 중독된 부랑자들은 못해도 수천 단위일 거요. 그 정도 규모면 더이상 마약 밀수 사건이라 부르기도 뭣하지.”

마녀가 개입된 게 확실해진 시점에서, 댈런은 이걸 단순히 필로폰의 의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약 밀수는 그저 중간 단계에 불과한 일이다.

두 악신이 연합한 건, 당연히 그 이상의 목적들 달성하기 위함일 터.

“···그래. 이건 전쟁이라고 봐야겠지.”

시에나는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댈런이 내린 것과 같은 결론을 이야기했다.

전쟁.

아직 악마의 군대가 지상을 침공한 건 아니지만, 이건 미궁도시를 향한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그리고 시작이 어떠했건 현재 일행은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놓인 입장이었고.

잠깐의 재정비를 마친 일행은 곧바로 움직였다. 낮은 거리의 천장을 부수고 도착한 이곳은 청동 구역의 서부 지구였다.

시에나의 말에 따르면, 이 근처는 그중에서도 버섯을 재배하는 54구역.

상자 째로 굴러다니는 버섯들이며, 5층 남짓한 높이의 둥근 탑들이 세워져있는 걸 보니 맞는 이야기였다.

“심문관님, 결례가 아니라면 저 탑들이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문헌에서 본 바에 의하면, 팔시온의 서부 지구는 농경에 특화된 곳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성숙해 보여도 나이대 특유의 호기심은 어디 가지 않는 걸까.

격식어린 부사를 잔뜩 붙인 파른의 물음에, 일행은 너나없이 피식피식 웃고 말았다.

“저건 수직농장이라고 해, 파른.”

“수직농장···? 그러면 저 안에서 작물들이 자라는 겁니까?”

“그렇지. 밀이며 보리며 과일까지. 여기는 버섯 재배지니까 버섯이 자라려나. 나도 직접 본 거는 처음이라.”

“우와······.”

“견학은 나중에 따로 하는 걸로 하고, 우선은 작전에 집중하도록 하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을 스르르 벌리던 파른이, 그 말에 합 하고 다시 군기 잡힌 모습이 되었다.

댈런에게는 그 모습마저 내심 웃겼다. 그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주변의 탑들을 둘러봤다.

‘팔시온의 수직농장. 백금 거리 마도공학의 결정체 중 하나지.’

수직농장.

21세기 지구로 치면 스마트 팜.

수직농장은 미궁도시 팔시온이 인류의 보루이자 방주 역할을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였다.

팔시온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기존 방식의 농업으로 수백만에 달하는 인구를 먹여살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기존의 도시들처럼 외부의 공급만으로 연명하기에는, 이 시대의 교통이 현대만큼 발달하지 않은 게 문제.

그 문제를 천 년도 전에 예견한 설립자들은, 팔시온이 자체적으로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수직농장을 만들어냈다.

마력을 동력원으로 삼아, 최소한의 빛과 물, 토양으로 작물을 재배하는 게 가능해진 것.

‘발전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던가. 이건 그 반대일지도.’

쿠구궁···.

그때 발밑에 희미한 떨림이 전해져왔다. 댈런은 고개를 털어 상념을 흘려보냈다.

루시아의 말이 맞았다. 견문을 넓히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는 일.

당장 서두르지 않으면, 견문을 넓혀야 할 장소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로변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수직농장이 가득하던 단지와는 달리, 대로변은 상점가가 밀집된 장소였다.

먹을거리에 관한 가게들이 두 배쯤 많다는 것만 제외하면, 남부 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정경.

그리고 그 정경은 불타는 중이었다.

“···이미 휩쓸고 간 모양입니다.”

화마가 집어삼킨 건물을 바라보며 루시아가 중얼거렸다.

불 붙은 건물들 주변으로, 수백에 달하는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8할 이상이 부랑자들의 시체였으나, 경비병들의 시체 역시 드문드문 보였다.

산 채로 반쯤 뜯어먹히다 죽음을 맞이했는지, 끝까지 편안하게 감지 못한 눈동자들.

“······.”

댈런은 텅 빈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 불 붙은 건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모든 건물에 불이 붙은 건 아니었다. 대로변의 건물은 대부분 층고가 높았기에, 목재로 지어진 경우가 많지 않은 탓.

애당초 작정하고 불을 지르려 한 게 아닌 것 같기도 했고. 낮은 거리에서 싸웠던 중독자들의 모습을 봤을 때, 횃불을 휘두를 만한 지능이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끄으으···.”

그때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전소되다 말고 반쯤 주저앉은 2층 건물 안쪽이었다.

댈런은 잔해를 대충 넘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1층 저 안쪽까지 잔해를 치워내자, 구석에 부상당한 경비병 하나가 주저앉아 있는 게 보였다.

온몸에 화상을 입고 군데군데 살점이 뜯겨나갔음에도, 끝까지 부러진 검을 놓지 않은 경비병.

루시아가 신성력으로 치유해주자, 경비병은 빠르게 의식을 되찾았다.

초점을 되찾은 눈으로 댈런을 본 그가 말했다.

“마, 막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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